제 1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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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수난의 검은구름이 가시고 민족재생의 환희가 터져오를 때 일부 계층의 심리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있었다. 어찌하여 조선반도의 38도선이북에는 쏘련군대가 진주하고 그 반대켠에는 미국군대가 들어오는것인가. 사상과 제도가 서로 다른 두 나라의 군대가 서로 마주 대치되게 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과 남에 판이하게 대치되여가는 두 생존공간을 마주하게 된 이들의 생각은 저마다 각이했다. 38도선이북지역에서 살던 자산계급출신의 지식인들과 해방전에 개인기업을 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는 일체 사적소유를 인정하지 않으며 페절을 선언했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정치가 두려웠던것이다. 그가 지식인이든 수공업자나 상공업자이든 무산계급의 진영에 들어설수 없다는것은 자명한 리치라고 여겼다. 검지 않으면 흰것이여야 한다는 단순한 흑백론리에 빠져버린 어떤 사람들은 남으로 가야 자기들이 살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있었다.

평양역홈에 선 두사람의 모습은 증기기관차가 뿜어대는 김발로 안개속에 선것처럼 보였다.

《계수, 내 말을 새겨듣기를 바라네. 우리들의 운명에 무엇이 강요되겠는가는 불보듯 뻔한거네.》

《그게 뭔가?》

《청산과 숙청!》

《남으로 나가면 기업의 뜻을 이룰수 있다는건가?》

《장담할수는 없지만 소유관계를 론하지 않는다면…》

《좋네. 자네는 남에서, 나는 여기서 당해보세나.》

《고집부리지 말게.》

《아니, 잘 가라구.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

남행렬차로 떠나는 친구의 어깨를 두드려준 사나이가 더이상 바래우기가 고통스러운지 무거운 걸음을 돌려세운다. 작별의 괴로움을 하소하듯 기적소리가 무겁게 울려퍼졌다. 1945년 9월초였다. …

가버린 세월의 먼곳에서 울려오는 기적소리를 다시 들으며 남계수는 감았던 눈을 뜨고 차창밖을 내다봤다. 얼마나 시련에 찼던 간고한 나날들이 흘러갔는가.

평화적인 민주건설시기, 준엄했던 조국해방전쟁과 전후복구건설… 어느덧 1960년대의 세번째 해다.

렬차가 역홈에 들어서고있었다. 날이 밝기 시작하여 역구내의 모든것을 가려볼수 있었다. 어데서 나타났는지 함지와 광주리 같은것에 보자기를 씌워 인 녀인들이 렬차바구니마다로 달려왔다.

수산사업소의 부업반 녀인들이 려객들의 편리를 위해 봉사활동에 나선것이다.

《털게 사세요. - 털게요.》

말이 빠르기로 소문난데다 걸음 또한 뒤지지 않는 홍원녀자들이 소리를 쳐대고 차창을 두드리자 자던 손님들까지 깨여나 고개를 내밀었다. 이 고장에 오면 보게 되는 풍경이여서 남계수도 차창을 열었다. 후각과 위를 자극하는 털게의 구수한 냄새가 참을수 없이 유혹하는데다 어느새 보자기를 벗긴 함지가 눈앞에 척 나타났다. 쪄낸 털게 한마리, 한마리를 얼마나 손질했는지 거품찌끼가 하나도 없어 이 고장 녀인들의 투박하나 정갈하고 맛스러운 손이 눈앞에 놓인것만 같다.

《얼마요?》

《옆에서 파는 소리를 들으시면서…》

《아주머니 게가 더 커보이니 손해볼가봐 그럽니다.》

《얼른 고르기나 하세요.》

남계수가 두손을 내밀어 게를 들었다놨다 하자 쳐들고있느라고 팔이 아픈지 녀인이 물었다.

《아주버닌 어느 공장 부기원인 모양이군요.》

《그걸 어떻게 알아맞히시우?》

《흠, 돈 다루는 사람 신셀 몸살나게 져요. 수산협동 부기원, 박힌 털 뽑아대는 계산에 오른 살 내립니다.》

《녀자들은 밖에 나서면 모두 아주머니처럼 주인 흉을 보나요?》

《에구머니! 그걸 어떻게 아시나요? 수산협동이라고 했지 우리 쥔이라고는 안했는데.》

《다 살테니 잠간만 기다리시우.》

남계수는 배낭을 가져다놓고 게를 연방 집어넣었다.

《내가 잘못 봤구나.》

가벼워난 함지를 내리우며 녀인이 혼자 중얼거리자 남계수가 무랍없이 응수했다.

《내가 수판알을 튕기는 사람이 옳수다.》

《에이구, 내가 모를줄 알아요. 돈계산 밝은 남자 사내구실하는걸 못 봤어요.》

《돈을 받으시우. 스물다섯마리, 12원 50전이요. 맞지요?》

《예, 다 사셨으니까…》

《가격투쟁을 했어야 하는건데 내가 너무 인심쓴다, 허-》

《무슨 소린지요? 처음 듣는 말이 돼서. 흥정이라는 소리같기도 한데…》

머리를 기우뚱거리는 녀인의 모습을 밀어내며 렬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출장길에서 잠간 만난 녀인이 안겨준 류다른 인상으로 남계수는 상념의 실머리를 잡고 살아온 인생의 오솔길에 들어섰다.

남자가 돈계산에 밝으면 제구실을 못한단 말이지, 허- 무심히 스쳐서 듣게는 안되는걸. 나도 그 계산에서는 짝진다면 노여워할 사람이 아닌가.

남계수는 두손가락으로 만든 갈구리로 볼을 긁으며 시무룩이 웃었다. 남다른 인생을 남달리 살아오는 자기였다. 그의 누이는 오늘까지도 만나면 걸직한 욕사발을 안긴다.

《이전에는 돈을 번다면서 발이 닳도록 뛰여다니고 지금은 지배인이랍시구 바쁘다고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세대주라면 가정일도 좀 돌봐야 하지 않냐? 집안꼴을 좀 봐라. 그래두 자식만드는 솜씨는 있어서 자그만치 몇이니? 뭘 먹고 입으며 어떻게 자라는지 알기나 하는지, 원.》

남계수는 그러니 나 같은 남자는 어떤 구실을 한다고 해야 하는가 묻고는 저도 모르게 허거픈 웃음을 흘리고나서 차돌처럼 단단한 이마빡을 쥐여박았다. 집안살림살이에는 무관심한것이 이젠 고치지 못할 습관으로 굳어진 모양이다. 그저 집사람이 있는데야가 위안이고 가정사쯤은 안해의 몫으로 여겨온다.

이날까지 살면서 바가지긁는 안해를 모르니 이것도 복일테지. 이제 이 털게를 가지고 가서 처앞에 내놓으면 해가 서쪽에서 뜬것처럼 놀랄테지. 남편구실, 아버지노릇을 한번 해보는가부다.

남계수는 이상할만큼 더워나는 가슴속에서 숨을 불어냈다.

추억의 동산에서 쟁강쟁강 종소리가 들려온다. 사물거리는 푸른 산 아지랑이와 봄달래향기에 실려오는 잔물결이였다.

 

남계수는 사립학교랍시고 다니기는 했지만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고 장난질에서는 짝이 없을만큼 세차서 여섯살이나 우인 누이한테 하루에도 두세번은 이마빡을 쥐여박히웠고 소름끼치는 찬물에 발을 담근채 엄동에도 글을 외워야 했다.

사내나이 열다섯이면 대장부라고 우쭐거리지만 남계수는 그 나이에 고작해서 사립학교의 5학년생이였으며 자기보다 세살네살아래인 학급친구들을 휘동해가지고 굴레벗은 망아지처럼 어느 하루도 곱지 못한 소리를 듣지 않고는 보내지 못했다. 진저리를 치게 하던 누이마저 출가하여 곁에서 고삐를 당겨줄 사람이 없었던것이다. 한뉘 농사로 늙은 어머니는 남편을 잃은 후 아들이라구 하나 남아있는것이 대견하지만 자라는 모양에 마음을 놓을수 없어 한숨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무렵 교단에는 참으로 이채롭다고 해야 할 광경이 펼쳐졌는데 아릿다운 쌍태머리 처녀교원이 나타난것이다. 맡은 과목은 력사와 지리지만 교원이 빌 때면 산수도 가르쳤다.

유난히 정기가 도는 눈을 가진 녀선생이 교과서의 내용을 한자도 틀리지 않게 조용조용 외우며 오갈 때면 교실안에는 치마자락이 사르륵거리는 소리만 들리였다. 심술사납고 장난세찬 남계수는 까닭없이 녀선생이 미웠고 배워주는 내용을 일부러 듣지 않으려고 눈을 감은채 졸음을 청하군 하였다. 녀선생은 졸지 말라고 몇번 타일렀지만 들을리 만무하였다. 그러다 마침내 졸경을 치렀다.

녀선생의 벌주는 방법이 류달랐다. 숙제를 안해오거나 수업시간에 졸면 세워놓고 공부를 시켰다. 그것도 학급의 아이들이 다 보도록 교실의 흑판쪽에 내세우고 한시간이 다 지나갈 때까지 처벌을 해제하지 않았다. 그런 모욕적인 벌을 당한 남계수의 못된 밸통은 드디여 요동치기 시작했다. 녀선생을 깜짝 놀래워 버릇을 가르치리라 마음먹은것이였다.

며칠후 시간표대로 녀선생이 력사과목을 가르치기 위해 교실에 나타났다. 출석부를 꺼내놓지 않은 교탁앞에 이른 쌍태머리는 무심히 빼람을 열다가 소스라치며 비명을 질렀다. 빼람속에 잠복했던 청개구리들이 기세를 올리며 일제히 높이뛰기를 해대는것이였다. 록색비단옷을 입은 미물들은 녀선생 같은것은 안중에도 없이 머리우에까지 올라앉아 온갖 재주를 다 부려댔다.

이 《청개구리소동》으로 녀선생은 그날 수업을 하지 못했다. 그날 하루동안 학급은 집체적으로 벌을 섰으며 장본인을 색출할 때까지 한명씩 교장선생에게 불리워가 초달을 당했다. 장딴지에 피가 나도록 회초리를 맞으면서도 남계수가 무서워 입을 여는 아이들은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열흘이 넘도록 녀선생은 교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나 놀랐으면 앓는다는 말까지 돌았다. 《청개구리소동》의 주동분자인 남계수는 제가 저지른 일로 하여 이상할만큼 마음이 울적해났다. 알랑거리는 아이들이 춰올리는 말을 했지만 귀에 들리지도 않았다. 처녀선생이나 놀래워 재미를 느끼자는 제모습이 사내답지 못하다는것을 느꼈던것이다.

그렇게 보름이 지나서 녀선생이 다시 교실에 들어서자 남계수는 고개를 들고 바라볼수가 없었다. 교탁앞에 다가가던 녀선생이 조심스러워진 눈길로 잠시 둘러보다 남계수를 찾았다. 나와서 출석부를 꺼내라는것이였다. 이전같은 일을 당하지 않기 위한 방비책을 쓰는것으로 여기고 아이들은 고개를 처박으며 키들거리지만 남계수는 자기의 행위가 들장났다는것을 깨달으며 선생이 시키는대로 하였다.

《계수학생, 학생은 자기가 학문의 바다를 찾아가고있는 작은 산골물이라는것을 알아야 해요.》

남계수는 녀선생이 자기 이름의 뜻풀이를 산골물에 비기는것이 불만스럽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배운것중에서 제일 귀중한 말을 처녀선생에게서 듣고있다는 생각까지 하였는데 그것은 자기로서도 놀라운것이였다. …

그 작은 실개천이 오늘도 바다를 찾아가고있는것이 아닌가. 길을 잃으면 중도에서 말라버리고말것이다. 그렇게 흐른 물이 얼마나 많은가. 자연의 리치는 인간생활에도 보편적으로 적용되는것인지 모른다.

해방되던 해 10월에 마침내 찾았다고 환희를 터치고 그 바다와 언약을 했건만 자기라는 인간은 여전히 실개천으로 남아있다는 허전함을 지울수 없는 남계수였다. 그것은 확실히 현실속에 존재하는 한 인간의 모순된 심리이지만 원인을 알수 없었다.

때없이 찾아드는 이 의혹은 정신적인 동요이기도 했다.

《털게를 사십시오. 털겝니다.》

졸음을 가시지 못한 녀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남계수는 쭈빗이 고개를 돌리였다. 렬차매대차가 비좁은 복도를 따라 천천히 다가오고있었다.

남계수는 저도 모르게 미간주름을 모으며 고개를 저었다. 느닷없이 자기네 철제일용품공장의 생산물인 투박한 주철가마와 쇠절구가 어느 공업품상점의 매대밑에 되는대로 놓여있는 모양이 눈앞에 얼른거렸던것이다. 인민들의 호평을 받든말든 상관없이 계획된 품종의 제품을 계획된 수량만큼 만들어 상업기관에 넘겼으니 책임을 다했다는것이 자기와 공장의 일본새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러고도 자기는 지배인이랍시고 머리를 들고다니고있는것이 민망스럽기도 했다.

《지배인동지, 이런 부름을 받으니 마음이 무척 유쾌하시지요?》

불쑥 누군가의 비웃는듯 한 속삭임소리가 머리속으로 울려오자 남계수는 팔짱을 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렬차의 고르로운 진동에 몸을 맡겨버렸다. 1958년 새해를 맞던 설맞이모임의 오색령롱한 불빛이 금시 눈앞으로 다가왔다.

 

항구도시의 밤하늘가에서는 함박눈이 내렸다. 동조선만에서 마치 축복이라도 보내듯 파도가 장엄한 교향곡을 연주했다. 전쟁의 상처는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남아있지만 복구와 변혁의 한해를 보낸 환희로 도시는 잠들지 못하였다.

사회생활의 령역에서 경리형태의 사회주의적인 개조라는 열풍이 불어친 1957년이 저물어가고있었다. 준엄했던 3년간의 전쟁으로 극도로 령락된 개인수공업자들과 상공업자들은 국가적인 조치에 따라 경리형태를 개조하는 사업에 자원적으로 참가하였다.

개인이 출자금과 설비를 협동단체에 들여놓고 출자한 몫의 크기와 함께 로동의 질과 량에 따라 분배를 받는 반사회주의적인 형태가 있는가 하면 완전한 사회주의적인 경리형태도 있었다.

이때 남계수는 자신이 가지고있던 2천만원의 돈과 각종 주물 및 가공설비들을 기꺼이 나라에 바쳤다. 그의 소행은 긍정적인 파문을 일으켰으며 그는 새로 생긴 그리 크지 않은 흥성철제일용품공장의 지배인사업을 맡게 되였다. 어제까지는 개인기업가에 불과했던 그가 하루아침새에 사회주의기업관리를 책임지게 된것이였다. 그의 인생에 서 놀라운 변화였다. 남계수의 기업관리능력과 수완은 오래전부터 알려진것이지만 해방전은 물론 전쟁직후까지도 개인기업가였던 그를 주시하는 눈길들은 각이하였다. 놀라움에 찬 선망과 반신반의하는 의혹의 시선들도 있는가 하면 증오심으로 이를 갈며 파멸을 바라는 인간들도 있을수 있다는것을 그는 알수 없었다.

남계수는 자기가 선택한 운명의 길을 간다고 확신했으나 앞으로 어떤 시련이 앞을 막아나설지 또 자신이 그 어떤 정신적동요와 고충을 겪게 되겠는지는 상상조차 못하며 섣달그믐날 저녁 시인민위원회 문화부가 조직한 설맞이모임장소인 새로 건설한 문화회관으로 갔었다.

회관은 초대받은 사람들로 흥성거렸다. 곳곳에 축등을 높이 걸어놓아 환한 불빛아래서 주고받는 인사말과 웃음소리가 넘쳐나고 회관안에서는 벌써 자리를 잡았는지 악단의 각종 악기들이 조음을 하는 소리가 울려나왔다.

남계수는 이런 자리는 처음이지만 패기있는 걸음으로 알만 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며 자기 자리로 갔다. 축하연을 겸한 모임이라 풍성한 연회탁도 이미 마련되여있었다. 그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시간이 되였는지 주최자가 간단한 축사를 하자 밝은 불빛아래서 잔들이 쳐들리였다. 1957년 한해사업에서 이룩한 성과를 축하하고 새해에 보다 큰 성공을 안아올 신심에 넘쳐 잔들을 비우자 악대가 음악을 울렸다. 신년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희망을 안고 신심에 넘쳐 노래를 합창하였다.

남계수는 음악을 즐겨하는 사람이다. 다듬어지지 않은 소리지만 흥이 날 때면 혼자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군 한다. 달빛밝은 밤에 안해와 함께 마루에 나앉아 옛시절의 노래를 부르는 때도 있었다.

노래가 끝나자 이내 무도회가 펼쳐졌다. 벌써 자리를 털고 일어난 사람들이 짝을 뭇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흥겨운 률동이 선률과 함께 멎을 때면 손들을 높이 쳐들고 박수를 쳐대는데 모두들 열에 떴다.

흥분과 도취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는 남계수의 곁에서 자극적인 향수냄새를 풍기며 어떤 녀성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지배인동지, 춤도 추지 않으니 적적하시겠는데 제가 말동무라도 해드릴가요?》

설마 자기에게 물으랴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니 참으로 매혹적인 녀자의 눈빛이 반짝이고있었다. 남계수는 좀 멋적어하는 기색을 지어보이고는 동의한다는듯이 머리를 끄덕이였다.

야회의 즐거운 분위기와 관련한 몇마디 말들이 두서없이 오간 후 녀자가 불쑥 이렇게 물었다.

《지배인동지, 이런 부름을 받으니 마음이 무척 유쾌하시지요?》

밝은 불빛아래 드러난 녀자의 눈빛은 참으로 아름다왔다. 그 어떤 감정도 찾아볼수 없는 표정속에서 엷은 안개가 낀듯 한 한쌍의 눈동자가 애수 같은것을 머금고 쳐다보고있었다.

이 녀자는 누굴가, 나를 어떻게 아는가.

기업관리에 온 정신을 팔고 살아오는지라 녀성들과의 교제는 거의나 없었다. 집사람을 내놓고 아는 녀자란 열손가락에 꼽자고 해도 모자란다. 물론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녀성들은 제외하고 말이다.

《동문 누구요? 어데서 무슨 일을 하오?》

녀자의 눈동자는 까딱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이름모르는 한 녀성이라고 생각해두세요.》

《아, 내가 실례하는가. …》

《전 지배인동지를 잘 알아요. 흥미를 가지고 지켜보는 녀자거든요.》

남계수는 이상하게 가슴이 높뛰는것을 느꼈다. 그것은 흥분이 아닌 서늘한 충동이였다. 녀자들의 세계를 요지경이라고 생각한지 오랜 그다. 해방전 혈기가 넘치던 시절에는 여기저기서 별의별 녀자들을 다 보아왔던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제가 맞혀볼가요?》

《허허, 아마 그것만은 불가능할거요. 나라는 사람은 기업병에 걸린지 오랬으니 말이요.》

녀자의 눈시울이 약간 좁혀들었다.

《절 보시면서 내뒤의 어데선가 미지의 녀자를 찾으시지요?》

《엉터리지만 재미는 있구만.》

《그건 부인이 아닌 녀성일거예요. 그렇지요?》

자세를 조금도 헝클어뜨리지 않는 녀자가 자기의 어떤 목적을 위해 집요할만큼 물었지만 남계수는 젊은 녀자들이 이런 자리에서 흔히 하게 되는 말이거니 여겼다.

《마치 어떤 비밀을 알아내려는것 같구만.》

《세상엔 비밀이란 없어요. 더구나 밀회의 비밀은 엄청난 흔적을 남기기마련이니까요.》

녀자의 눈빛이 한층 다가드는 착각이 들었다. 그러자 의식의 균형이 기울어지는감을 느꼈다.

이 녀자는 누군가, 나에게서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지 않는가, 아니! 뭔가 들여다보면서 대답을 들으려고 한다, 어떤 시기심을 안고 그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것은 아닐가, 아니야, 그러기에는 어울리지 않을만큼 젊었고 아름답다, 나라는 사람은 어데 볼데가 있는가, 경력도 직업도 성격도…

《난 원체 녀자들을 가까이하는 재기가 모자라는 사람이요.》

《그렇다고 독실한 부인숭배자는 아닐텐데요. 부인이 아실가봐 겁이 나시는가 보지요?》

《우리 집사람은 나를 너무 믿어서 탈이요.》

《그렇군요. 이렇게 초면의 녀성인 저와 이야기를 나누는데두요?》

《아, 오늘이야 섣달그믐날이 아니요. 나와 함께 사는 녀자는 구습에 매인 인간이 아니요. 나보다 일찌기 개명한 녀성이여서 얼마든지 리해하오.》

《리해한다는 말씀이지요? 전 이미 말한대로 지배인동지를 주시해온 녀자이지만 리해할수가 없어요. … 없단 말이예요.》

녀자는 자기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는듯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머리를 저었다.

즐거운 무도곡의 선률이 계속 흐르는 속에 그 녀자는 남계수에게 속삭여댔다.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해방전 재경에서 지주들과 손을 잡고 정미업을 하였으며 여기 항구도시에 정착하여 철공소를 꾸려놓고 일본기업가들과 거래를 하면서 비록 크지 않은 기업이라지만 개인기업가로서 부유하게 살았다, 어찌 보면 당신은 남다른 운수를 가졌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8. 15해방후에는 애국적인 기업가로 모습을 바꾸고 오늘까지 살고있기때문이다, 혹시 인생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고 해야 하겠는지… 하지만 그 기회나 운수가 언제까지나 담보된다고 보는가, 그렇게 믿는다면 놀랍기도 하고 다행스럽게도 여겨진다. …

녀자는 속삭이는 도중에도 머리를 살래살래 저으며 남계수를 올려다보는데 눈빛에는 차거운 빛이 감돌았다.

《혹시 나를 나보다도 더 잘 아는게 아니요?》

《사람의 운명이란 예측하기 어려운거랍니다.》

《그 말은 옳소. 하지만 나로 말하면 남자요. 마음먹은대로 살뿐이지 후회로 한숨을 쉬는 사람이 아니요.》

《그건 마음에 들어요. 그러나 사람은 리용당하기 쉬운 존재라는것도 알아두실 필요는 있답니다.》

《충고를 주어 고맙소. 동문 누구요?》

녀자는 입귀를 약간 일그러뜨리며 미소를 지었다.

《지배인동지를 걱정하는 녀자일뿐이예요. … 그러면 지배인동지, 새해를 축하합니다.》

《나 역시 축하하오. 새해를!》

《언젠가는 제가 지배인동지에게 선물을 드리겠어요.》

《?》…

뜻밖의 자리에서 만난 이름모를 녀성에 대한 야릇한 추억은 지금도 머리속에 생생했다. 이때 기적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남계수는 머리를 저으며 상념에서 깨여났다. 렬차는 항구도시의 역구내로 들어서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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