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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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업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남계수는 서울로 나가볼가 궁싯거리던 어느날 구일파가 깊은 생각없이 알려주는 이야기에 신경이 팽팽해졌다. 사사끼가 조선아이들의 교육사업에 물질적으로 후원하겠다고 어떤 자리에서 말했다는것이다.

나라를 강탈한 일본오랑캐가 아닌가. 그 섬나라족속이 내보이는 선심이 그로서는 참을수 없는 굴욕감을 느끼게 하였다. 조선사람을 노예로 취급하는것들인데 그속에 어떻게 선량한 인간이 있을수 있는가. 몇푼의 돈을 던져 회유하려 한다면 기만적인 흉심에 속아넘어가는것자체가 몽매이고 수치라고 여겨졌던것이다. 남계수는 사사끼가 어떤 수를 쓰려고 꾀한다는것을 예측하였으나 그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수 없었다. 그자가 자기의 옛 스승이 교사로 있는 보통학교에 찾아가는 걸음이 잦다는 말을 들으면서부터 그는 커다란 불안에 휩싸인채 결심을 바꾸었다.

여기에 남자, 마음에는 없지만 정미업을 차리고 사사끼와 맞서보자. 교활한 놈의 탈바가지를 벗겨내서 망신을 시켜놓고야말테다.

《그게 정말인가? 내 말을 따라서 등탈이 없다니까.》

마음을 돌려먹은 남계수의 진속을 알리 없는 구일파는 그의 손을 잡으며 무척 기뻐했다. 그리고나서 제일처럼 뛰여다니며 흥정하여 정미소를 사들이게 한 다음 기술자도 제가 나서서 물색하였다.

정미소는 마을에서 멀지 않은 야산등성이에 있었다. 올봄까지 쌀을 찧고 쌓아둔 벼짚무지를 치우지 않아 여기저기 널려있고 수리중이여서 뜯어낸 기계의 부속들은 보기에도 낡았다는것이 알렸다.

남계수는 벼짚이 버리기 아까와 가마니를 짜기로 마음먹었다. 손이 남아돌아가는 농가들은 별로 없지만 돈을 준다니 밤에라도 짤수 있어 벼짚을 날라갔다. 이렇게 주변부터 정리한 그는 새로 받은 기술자와 기계수리에 달라붙었다. 정미업이라는것을 해보자면 무엇보다 기계속내부터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던것이다.

마침 같이 일하는 기술자가 사사끼네 정미소에서 일하다 그만둔 사람이여서 남계수는 흥미를 가지고 가까이했다. 나이도 듬직한데다 세상보는 눈과 주견을 어지간히 가지고있음직한 그 사내는 좀해서 속에 있는 말을 하지 않을것 같았다. 그러나 남계수의 남자다운 인격에 인차 마음이 동했는지 묻는 말에 대답을 하기 시작했다.

사사끼는 술수가 뛰여난 일본인이였다. 일본에 있는 그의 처가족속들은 권력과 재계에 줄을 뻗치고있었다. 처남이 미쯔이중공업의 중역이라는 힘을 빌어 지난해에는 신식정미기를 여섯대나 들여왔다고 했다. 거기에 든 돈이 수천원이라니 사사끼의 재력이 보통이 아니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이 일본인은 재경은 물론 어러리벌일대의 정미업을 독점하자는것이 목적이였다. 교제에서 능란한 사사끼는 조선인지주들과의 친분관계를 두터이 하면서 정미업자들의 손발을 자연스럽게 얽어매고 해마다 막대한 리윤을 추구했다.

《정미가격을 사사끼가 정한다는건 무슨 소린가요?》

《해마다 가을철이 오면 사사끼는 제 집에 업자들을 모아놓고 눅거리음식대접을 하면서 그 놀음을 벌리지요. 가격이 동일해야 수입에서 파동이 없거든요. 마음대로 가격을 변동시키지 않게 하여야 사사끼는 자기의 출미률을 높이게 되지요. 리해되는가요?》

《예. … 뻔한것 같으면서 아리숭하기만 하군요.》

《한마디로 사사끼는 기술적으로 앞섰으며 기업을 확대할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야 하는겁니다. 그 조건이란 령세한 조선인정미업자들을 차례로 파산시키는거지요. 조만간에는 그렇게 되고야말겁니다.》

결국 자기도 사사끼의 도살장에 들어선 신세나 다름없다는 소리였다. 간교한 일본놈의 목대를 분질러놓고싶지만 방도가 없어서 남계수는 머리를 쥐여짰다. 적수를 꺼꾸러뜨리려면 약점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여러모로 궁리하였다. 거기서 찾은 첫번째 방도가 정미가격을 사사끼가 마음대로 정하게 하여서는 안된다는것이였다. 그 가격은 기술적으로 앞선 설비에 기준한것이므로 조선인정미업자들은 손해를 보면서까지 사사끼의 정미업에 리윤을 주는 자살행위나 같은 놀음에 휘말려들고있는것이였다.

다음으로 중요한것은 사사끼가 새로 들여온 정미기계들의 조작에서 애를 먹고있다는 사실이였다. 숱한 자금을 투자하면서 생긴 적자를 메꾸기 위해 출미률을 높여야 하는 이때 설비들때문에 골탕을 먹고있는 약점을 틀어쥐고 숨통을 조인다면… 이것은 두말할것없이 좋은 기회가 아닐수 없었다. 하지만 이 일은 혼자의 힘이나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는것이였다.

남계수는 먼저 구일파와 의논하기로 마음먹었다. 식민지기업가의 숙명에 익숙된 사람이여서 에둘러가며 말했더니 속에 들어찬것은 굴뚝같은 불만이였다.

《계수, 그 사사끼놈이 눈물짜는걸 한번 보기라도 하면 난 평생소원을 푸는것이나 같아. 참으로 간특한 작자일세. 하긴 왜인들이란 하나같은 족속들이지만…》

《그럼 한을 풀어보는거지.》

《무슨 방도라도 있나?》

남계수는 자기가 생각한것을 이야기했다.

우선 정미가격을 우리가 변경시키는것이다, 사사끼가 정하는대로 하면 그놈한테 리윤만 준다, 값을 낮추어야만 하는데 이것도 사사끼가 마음놓고있을 때 우리 결심대로 하여야 한다, 어차피 그자가 알게 되면 야단을 칠테지만 그땐 얼마든지 대처할수 있다, 그러자면 정미업자들이 마음을 합쳐 맞서는것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

《좋네. 까짓것, 헌데 동업자들이 가격을 낮추는걸 어떻게 대할지 모르겠거던.》

《그렇다고 사사끼의 배를 한정없이 불려줄수야 없지 않은가?》

두사람은 이렇게 론의를 하고 동업자들을 한두사람씩 만나서 힘든 설복을 하였다. 그런대로 여러명이 의사소통을 하고 금사강가에 모이기로 했다. 비밀이 새여나가면 안되기에 천렵놀이를 하는것으로 모종의 회합을 가지였고 차후에 어떻게 행동한다는것을 구두로 약조하였다.

《계수, 자네 이 일을 하자고 떨어진건 아닌가?》

《사사끼가 학교후원을 진짜 한다던가?》

《걸음이 번질나다네. 유지들과도 만나구. 내 처음 왔을 때 말해주지 않았나. 사사끼의 속심은 녀자한테 가있네. 바로 자네를 가르친 그 선생, 어떤가? 수가 있지 않아? 도덕적환심을 사고 교원들을 내세워 목적을 실현하자는걸세. 까투린 옹노에 걸려들고말거네.》

《흠, 그렇게 쉽게?》

《사방에서 몰이를 하고 사사끼가 함정을 파는데야 별수가 있을라구. 그 녀자도 눈치를 채고있을거네.》

《그럼 도와줘야지.》

《우리가? 돈벌이나 하는 우리 같은건 바로 보지도 않아. 계수학생이면 어떨는지. 하하하.》

남계수는 차돌같은 이마에 주먹을 가져다댄채 듣다가 화를 벌컥 냈다.

《지켜줘야 해! 우리야 사내들이 아닌가.》

《어떻게?》

《내가!》

《무슨 방도가 있는가 말이네.》

《방도는 무슨 방도? 해보는거지.》

《뭘 해본다는건가?》

《내가 머리를 얹어주면 되는거지.》

구일파는 얼이 빠져 머룩머룩 바라보기만 했다. 실성한 사람이 아니구서야 인륜대사를 지금같이 입에 담을수 있는가. 있을수조차 없는 이야기앞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왜 아무 말도 안하나?》

《하- 아무리 녀자라도 배워준 스승인데… 흐흐, 사람의 도리에…》

《젠장, 도리를 지킬 형편이 됐나 말이네. 내 잔치날 사사끼를 청할테니 두고보라구.》

구일파로서는 자기앞에 선 사람의 우직함에 놀라 눈만 크게 뜨고 바라볼뿐이다. 무슨 담보로 이런 말을 식은 죽 먹기로 해대는지 모를 일이였다. 녀자켠에선 듣기만 해도 십리 줄행랑을 놓을지도 모른다.

《내가 뭘 도와달라나?》

《필요없네. 내가 하지 않으리.》

《그럼 잔치준비라도 하라나?》

《좋을대루.》

남계수는 강물에 발을 잠근채 흐르는 물결을 따라 먼곳을 바라볼뿐이였다.

 

재경일대에는 지주들이 여러명 있지만 채씨성을 가진 사람이 제일 큰 지주였다. 나이가 여든살을 바라보는 늙은 지주는 지난해 서울에 나가있던 아들을 불러들인 다음 자기의 령지를 물려주고는 과수원속의 별채에 들어박혀 서른살도 되지 않은 첩을 끼고 여생을 보내는 희귀한 생활을 하여 린근에 소문을 내고있었다.

남계수는 오늘 구일파와 함께 부친의 농토를 물려받은 젊은 지주를 만나기 위해 백악산기슭의 집을 찾았다. 말그대로 고래등같은 기와집은 꽃과 과일향기속에 묻혀있었다. 위풍있는 일각대문안에 들어서니 마루에서 책을 보던 열살은 넘긴듯 한 처녀애가 내다보는데 무척 귀엽게 생겼다. 곱게 치켜뜬 진주알같은 눈동자가 반짝거렸고 왼볼에만 생기는 볼우물이 귀엽게 웃었다.

《어데서 오셨어요?》

구일파는 처녀애의 묻는 소리에 비위살을 부렸다.

《주인마님이 홀로 계시댔군요. 정미소주인 구일파가 문안인사 올리나이다.》

《해해… 내가 무슨 마님이나요. 아버진 온 정신이 승마에 가계세요. 한참 있어야 오실거예요.》

《그렇소이까. 목이 무척 말라서 그러니 물 한대접 줄수 없소이까?》

《그럼 앉아계셔요.》

처녀애는 무척 활달했다. 성큼 일어나 부엌쪽으로 가는데 키꼴이나 갖춘 몸매였다.

《야- 고것 정말 애간장을 녹이는구나. 더두 말구 댓살만 더 먹었어도… 그 흘리는 웃음발이 기가 막히구만.》

《게걸스럽기란!》

남계수가 나무리나 구일파는 떠다주는 물을 마시면서도 처녀애한테서 눈길을 떼지 못하면서 추근추근 물어댔다.

이름이며 나이, 서울에서는 무슨 공부를 했는가 하는 공연한 수작질이고 심심풀이였다. 기다리기에 지쳐 집주인이 말타는 곳을 찾아 일어나면서도 구일파는 처녀애의 볼을 건드려보는것조차 놓치지 않았다.

대문가에 나와서 바래는 처녀애의 모습을 남계수는 무심히 바라보았다.

그날 젊은 지주와의 약조는 어렵지 않았다. 아직 농사물계를 잘 모르는지라 정미가격을 손쉽게 눌러버린것이였다. 이렇게 해야 가을이 오면 지주들의 벼가마니들이 사사끼네 정미소로 새여나가지 않는것이다.

《여보게 계수, 거사는 분명하겠지?》

구일파가 야료 비슷한 소리를 해대자 남계수는 고개를 비틀며 대답했다.

《오늘 밤은 결판을 보려네.》

《내 알건댄 두번 다 헛탕을 쳤다던데 이가 들가?》

《례의를 존중해서였지만 안되는 경우엔 둘쳐업고 절에라도 들어가지 않으리.》

《허, 자네 삭발한 중들의 뭇매를 맞아보고싶은가. 불문의 계률을 어긴 놈이라구…》

《내가 바로 파계승의 후손일세. 계률은 무슨 계률…》

남계수는 빈말을 하는것이 아니였다. 오늘은 끝장을 봐야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처음에 만나서 속을 털어놓았을 땐 졸도하는가 했다. 녀자로서는 청천벽력이나 같았던것이다.

내가 누군가요? 하고 되묻기만 했다. 너무도 억이 막혀 그 말밖에는 못하는것이였다. 그 다음번엔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돌아가세요. 그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밀려다니는 친구들을 보라는 말이 있어요. 청개구리소동땐 철이 없었다쳐도 지금의 행동은 무슨 목적을 가졌는지 알수 없군요. 남자들은 이런 소문엔 무심하겠지만 녀자는 달라요. 그걸 아는가요?》

《잘 압니다. 나도 들은 소리가 있는데 만일 사사끼 그자가…》

《그만해요! 자기 걱정이나 하세요.》

남계수는 녀자의 얼굴에 비끼는 그 어떤 고뇌의 그림자를 보았다.

신유정, 바로 어제날 그의 스승이였던 녀자의 이름이다. 그 이름을 외우며 남계수는 그가 하숙하고있는 집을 찾아가고있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골목길에 나섰던 개들이 여기저기에서 컹컹 짖어대며 부산을 피웠다. 성냥따위나 파는 자그마한 가게집인데 마당에 들어서니 모기쑥을 피우던 주인내외가 안절부절하며 그를 맞아주었다. 부들부채를 든 로파가 하는 말이 제 손자녀석이 앓아서 녀선생이 고개를 넘어 의원집에 갔다는것이였다.

《어이구- 령감도, 자기가 가지는 못할망정 그 먼델 처녀선생을 보내다니, 원.》

《너무도 극성이니 낸들 어쩌겠소. 체기나 받은걸 가지고 일없다는데두…》

백악산너머에 용한 의원이 있다는 말은 남계수도 이미 들었었다. 여기는 벌방이나 같아서 산들이래야 그닥 험하지 않은데다 짐승들도 많지 않다. 고작해야 메돼지들이 이 계절에 출몰하고 삵이 마을에 내려와 작은 집짐승들을 물어간다. 그렇긴 하지만 녀자 혼자서 밤길을 걷기에는 무서울것은 당연했다.

초롱등을 빌려든 남계수는 마을에서 곧추 넘는 골안의 길을 찾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서해쪽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이 소리를 치며 숲속을 휘저어댔다. 사방에서 밤벌레들이 스르륵거리고 반디불이 줄지어 흐른다. 잎새들이 우슬렁거리는 속에서 작은 짐승들이 찍찍, 짹짹거려대는 소리도 한여름밤의 정서를 더해주었다.

흔들거리는 초롱등을 앞세우고 언덕길을 오르며 남계수는 생각했다. 과연 자기가 지각을 가진 행동을 하는가 하는 물음이 새겨질 때면 달리는 할수 없다고 변명같은 대답을 한다.

사랑이란 인연이 맺어지는 동기가 있어야 하겠는데 자기라는 사람은 결과만을 바라고 벼락치듯 걷고있지 않는가. 상대가 아연해하는것도 리해하고 남음이 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남들이 말하는 그 달콤한 련애를 맛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기는 신유정이라는 녀자를 쟁취해야만 한다고 마음먹었다. 한것은 기대를 가지게 하는 녀자였기때문이다. 오로지 신유정이라는 녀자만이 굴레벗은 말같은 자기에게 고삐를 메우고 옳은 길로 이끌어갈수 있다는 일종의 믿음과 기대까지 품게 되는것이였다. 그것이 오래전에 인식된 자아라는것을 지금에야 깨닫고있는듯싶었다. 더구나 자기가 더이상 체면때문에 주저하거나 망설인다면 그 녀자는 일본인에게 짓밟히는 운명이 되고만다. 사랑만이 아니라 조선남자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물러설수 없는것이다.

멀지 않은 웃쪽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작은 돌이 굴러내리는 소리가 났다. 남계수가 초롱등을 쳐들어올렸다.

《할아버지 아니세요?》

겁에 질린 녀자의 목소리가 구원을 바라듯 울려왔다.

어떻게 대답한다? 젠장,

《할아버지가 옳지요?》

《남계숩니다.》

《에구머니…》

놀란 소리가 외마디로 울린 뒤 정적이 깃들었다. 넘어지기라도 하지 않았는가 걱정되여 걸음을 다그쳐오르던 남계수가 멎어섰다.

참나무에 기댄 녀자의 눈길이 어둠속에서조차 원망으로 차있다는것을 감촉할수 있었다.

《그러니 일부러 외나무다리를 마련했는가요?》

《건네주자고 왔습니다. 뭐 겁나하지 말구요. 감히 선생님에게 무례한 행동을 할 제자는 아니니까요.》

밤의 대기를 들이킨 신유정은 등불이 밝히는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걸었다. 한손에는 산길을 다니기 불편하여 벗어든 구두를, 다른 손에는 약봉투를 들었다. 불안과 위구심을 가신 녀자가 침착하려고 애쓰는것이 알렸다.

《신발이 애를 먹였어요. 바꿔신었어야 하는건데 바쁘다보니…》

《예. 그건 길을 나설 때 생각해야 했습니다. 선생님도 그런 실수를 하는가요?》

《선생도 사람이예요.》

《그렇다면 리해는 됩니다. 나보구 길을 바로 찾고 걷는 버릇을 붙이라고 하셨는데 선생님은 어떤 길로 가시려는지요?》

《그 말이 무척 거슬렸던가요. 난 거기서 이 고장에 나타났다는걸 알고있었어요. 다니는 음식점들, 저녁마다 술을 마시는 나쁜 버릇… 게다가 일파씨가 어떤분인가요? 한번 만나서 단단히 말해주리라 벼르댔는데 마주쳤어요. … 아이, 아파라. 말시키는통에 돌을 차지 않았나요.》

《이런 변이라구야. 어디 봅시다. 뭐, 터지지는 않았습니다. 참아야지요. 내가 업고 갈수는 있겠지만 선생님의 자존심이 그걸 허용할수 있겠습니까.》

《그만 놀려요. 계수학생, 호호호. 이제말이예요. 조건부가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가는것이 어때요?》

신유정은 림기응변할줄 아는 처녀였다. 지금과 같은 환경을 자기에게 유리한것으로 만들려는 지혜가 있었다. 그것이 남계수에게는 매우 인상깊게 마음속에 안겨오는것이였다.

《난 오늘도 내 이름을 산골물에 비기며 한 타이름을 잊지 않고있습니다. 바다를 기어이 찾아가야 할 남계숩니다. 그러니 끝까지 데려다줘야지요. 스승의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도 말입니다.》

《내가 말한건 학문의 바다예요. 거기서 찾는건 인생의 바다거든요. 이 둘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하나가 산골물이라면 다른 하나는 옹달샘에 불과해요. 그러니 바다를 찾아줄수는 없지 않아요, 그렇지요?》

신유정은 처음으로 남계수를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애쓰는것 같았다.

《이 남계수는 신유정이라는 옹달샘에서 떠난 물줄기가 되겠소. 우리 함께 바다를 꼭 찾아갑시다. 그리구 난 선생… 아니, 유정씨에게 사사끼 같은 인간의 그림자가 비끼는것을 참을수 없습니다. 이건… 모욕으로 생각지 마십시오. …하지만 오만방자한 그놈은 반드시 일을 저지르려 할겁니다. … 우린 조선사람이 아닙니까.》

신유정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몸의 균형을 잃으며 비칠거렸다. 남계수가 붙잡았지만 뿌리치지 않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봐요, 진정 저를 걱정하는가요?》

《걱정이라니요. 난 걱정이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칼을 들고 사사끼와 맞설 심정입니다. 만일 그놈이 나의 선생에게 어떤 치욕을 안기려든다면 죽여버릴텝니다!》

《선생이 아니라… 유정이지요. 나이를 잔뜩 먹은… 생긴것도 별로 없는… 그래서 날 청개구리소동때처럼 또 한번 놀려보자는거지요, 예?》

《아니요. 난 오늘에 와서야 유정씨가 오래전부터 내 마음속에 간직되여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였소. 거기서만 계수라는 사내를 품어서 인간으로 만들어줄수 있다고 믿소. 이건 솔직한 나의 심중이고 고백이요.》

신유정은 지친듯 몸을 휘청이며 말했다.

《어쩌면… 왜 이럴가요?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는것만 같아요. … 가만, 좀 서있다가 갈가요?… 방금 우리가 무슨 말을 어디까지 했던가요? 이자 고백이라고 했지요?》

남계수는 가까이로 다가드는 이성의 숨결에 취한채 신유정의 어깨를 꼭 껴안으며 대답했다.

《그렇소. 사나이의…》

 

남계수는 얼마후 제 성미처럼 벼락치듯이 신유정을 데리고 평양에 올라가 성례를 치렀다.

그의 누이는 신유정의 손을 잡고 말했다.

《이젠 마음을 놓게 됐네. 사납기 그지없는 말한테 자갈을 물려놨으니. 게서 편자를 신기라구.》

재경으로 다시 돌아온 남계수는 구일파와 약속한대로 친구들과 유지들 그리고 사사끼도 청하여 자기의 혼례를 법도대로 알리였다. 사사끼의 태도는 흔연하였으며 부어주는 술잔도 기꺼이 받았다. …

가을이 왔다. 이해엔 전에 없는 흉작이였지만 벼달구지들은 꾸역꾸역 정미소로 밀려들었다. 묵은 벼짚으로 짜놓은 가마니가 은을 냈다. 정미한 쌀을 받아갈 용기마련이 없었던 사람들은 가마니를 요긴하게 여겼고 그때문에 호기심을 가지고 더 찾아들었다.

《역시 계수가 판을 벌릴줄 알거던. 가마니를 마련할 궁리를 다 한걸 보니 말이네.》

구일파는 남계수의 정미소가 흥성거리는것을 보고 혀를 차기까지 했다.

사사끼 사다오는 례년처럼 정미업자들을 자기의 집에 초청하였으며 정미가격을 정한것으로 마음을 놓고있었다. 그때까지도 꾀바른 이 일본인정미업자는 자기 주위에서 벌어질 일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했던것이다.

그러다가 자기네 정미소로 찾아오는 달구지들의 대수가 놀랄만큼 줄어들기를 며칠째 거듭하자 영문을 알아보았는데 조선인정미업자들이 약속된 가격을 지키지 않고있었던것이다.

그제야 어수룩한 《조센징》들에게 속았다는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경찰에 고소할수도 없는 일이였다. 기업주들의 가격제정은 치안유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것을 그는 알고있었다. 설비구입에서 채무가 상당한데다 기계들이 말썽을 일으켜 손해를 약차하게 보고있는 형편에서 정미수량까지 다른 업자들에게 떼우는 날엔 적자더미에 올라앉게 될 판이였다.

서둘러 사사끼는 조선인정미업자들을 찾아다니며 회유를 해보았지만 이가 들지 않았다. 패배감을 안은 그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자기의 처신이 그들의 불만을 자아낸것이 확실했다. 조선사람들을 깔보다가 빚어진 일이였던것이다. 《반도인》들이 기업물계에선 백치나 한가지라고 업신여기다가 제가 만든 자만의 함정에 빠진것이나 다름없었다.

하다면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순간 그의 뇌리에 불쑥 떠오르는 인물은 남계수였다.

아직은 뚜렷한 증거가 없지만 남계수를 만나보았을 때의 인상과 태도, 기질을 봐서는 그가 한짓이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자기가 눈독을 들여온 녀자를 보라는듯이 가로채지 않았는가. 그것도 참을수 없는데 이젠 사사끼라는 일본사람의 정미업까지 망하게 하려들지 않는가. 사사끼는 이를 갈면서도 조선인정미업자들을 자기 집에 초청하여 동정을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마당에서 맥주나 한병씩 먹이고 보내던 관례를 되풀이해서는 안되겠기에 돈을 좀 들여 연회상을 마련했다.

그렇게 기다렸건만 찾아온 정미업자들이란 고작해서 남계수 하나라는 사실앞에 사사끼는 또 한번 입을 딱 벌렸다.

《사사끼상, 바쁜 철에 찾으시니 무슨 일입니까?》

남계수의 인사를 받자 사사끼는 두손을 펴보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 대표자격으로 오시는가요? 다들 한자리에 앉자고 준비를 했는데요.》

남계수는 천연스럽게 대답했다.

《페를 끼칠가봐서지요. 그리구 요새 일감이 좀 많습니까.》

《하이,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사사끼는 연회실로 안내할수 없어서 미닫이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남계수를 이끌었다. 다다미바닥에 일본초물방석을 놓아준 사사끼의 하녀가 뒤걸음으로 물러갔다.

《불편해하지 말고 앉으십시오.》

사사끼는 시종 친절한 미소를 지은채 자리를 권했다.

《부르신 용건을 말씀하십시오.》

남계수가 직판 묻자 사사끼는 한손을 살레살레 저으며 딴전을 피우려 했다.

《우린 약속된 정미가격을 지킬수 없었습니다.》

남계수는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며 본론에 돌입했다.

《기업가가 신용을 지키지 않는건 도덕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일입니다.》

《신용이 제기되니 말합시다. 우리 정미업자들은 사사끼상의 수놀음에 숱한 적자를 내며 살았습니다. 정미기계구입은 제쳐놓고도 각종 부당한 방법까지 써서 우린 정미대상들을 잃는데 그 손해액은 실로 큽니다. 사실상 그것은 은페된 신용위반이지요.》

사사끼는 자기의 술책이 드러나는 판이라 딸꾹질까지 해댔다.

《사사끼상, 생각해보십시오. 당신의 정미기는 한시간에 얼마를 찧습니까? 우리가 가진 설비는 보잘것없습니다. 가격까지 당신이 정해놓으니 수요의 절반나마를 잃습니다. 이걸 모를 당신이 아니지요?》

《그것이 바로 기업경쟁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경쟁에 나선것입니다. 우린 지금의 가격을 더 낮출수도 있습니다.》

《당신들 그러면 안됩니다.》

사사끼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정미업자들이 한동아리가 되여 자기를 의식적으로 공격했다는것을 깨닫고 당황해났던것이다. 경찰에 고소를 했댔자 바보취급을 당할건 자기라는 판단을 내리고나서 속으로 칼을 벼렸다.

《남상, 우리 한잔 마신 후 격검을 겨루어보지 않겠습니까?》

남계수는 사사끼가 어떤 음모를 획책하고있다는것을 간파했다.

《손에 칼을 들자는겁니까?》

《나로선 그 방법밖엔 없습니다.》

《우린 정당방위를 했을뿐입니다.》

사사끼의 눈빛이 살기어린 미소로 변했다.

《타협방도는 있습니다.》

《뭐요?》

사사끼가 저가락을 상우에 꾹 박으며 요구했다.

《남상, 떠나시오, 여기서!… 이것이 나의 자제력이고 호의라는것을 알아두시오.》

남계수는 조용히 웃었다.

《그럽시다. 나 역시 정미업은 하려던 일이 아니요.》

사나이의 가슴속에서는 수치감이 꿈틀거리지만 참을수밖에 없었다. 남계수는 그것이 식민지민족이 당하는 굴욕임을 절감하였다. …

과거는 오늘을 비쳐보는 거울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과거에서 교훈을 찾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를 새기며 남계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때는 왔다. 사람은 자기가 필요되는것만큼 살아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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