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15

 

생산에서 부단한 질적개선과 장성속도간의 조화로운 균형을 보장하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을 강치명은 절감하였다. 그가 처음 공장에 왔을 때의 형편은 말그대로 수공업자들이 모인 생산업체나 다름없었다. 낡은 로에서 쇠물을 녹이고 모래로 만든 형타에 부어 주철관을 만들어냈으며 굵기가 각이한 건설용철근을 재래식방법으로 연신해내는것이 생산물의 전부나 같았다. 오늘 공장의 면모는 많이 달라졌다. 한마디로 생산공정의 기술개건이 진행되고있는것이였다. 여러가지 철제일용품들을 생산하기 위한 토대가 새롭게 꾸려지고 현실적으로 은을 내기 시작했다. 법랑개발은 보수적인 기술과 관점에서 진보에로의 걸음을 떼게 하였던것이다. 자기가 제일인듯이 으쓱대며 재간을 뽐내던 어제날의 수공업자들이 고개를 수그리였고 새로운 세대들이 기술혁신의 앞장에 서고있다.

공장이 거두고있는 성과의 원인은 대중의 창조력이 높아진 동시에 일군들이 그에 의거하여 기업관리의 방향타를 옳게 잡고 이끌었기때문이라고 할수 있었다.

강치명은 개별적인 일군의 공로를 내세운다는 말을 듣는 한이 있어도 남계수의 역할을 인정하고 그를 도와주려고 했다. 그런데 부기장을 비롯한 일부 몇몇 사람들이 지배인과 관련하여 부정적인 의견을 제기해서인지 남계수의 고심어린 노력은 응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있다. 강치명은 이것이 안타까왔다.

군중심리란 매 개인들의 리해관계가 모여서 형성되는것이므로 매우 복잡다단하고 일관한것으로 되기가 좀처럼 어려운 법이다. 이런 때일수록 옳은것이 지지를 받도록 이끌어주는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강치명은 당조직과 근로단체조직을 통하여 긍정을 찾고 일반화하기 위한 사업을 실속있게 내밀기 위해 애쓰고있었다.

오늘 려현석이 청년동맹영예등록장에 동소옥을 등록하자는 의견을 제기하여 강치명은 지지해주었다. 그런 뒤 한시간도 못되여 받은 전화는 심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이전에 만난 일이 있는 녀자독신자합숙의 사감이였던 녀성이였다.

《소옥인 잘만 이끌어주면 좋은 일을 많이 할수 있는 처녀랍니다. 몇달만에 만났는데 어떤 고민이 있다는것을 알았어요. 불미스러운 가정환경으로 하여 자기의 전도에 락심하고있다는것만은 알수 있었습니다. …전 당위원장동지를 믿고 이런 말을 합니다. …》

이무렵 동소옥에 대해서는 한시름을 놓고있은 강치명으로서는 일종의 충격이 아닐수 없었다. 공장에 애착을 가지고 일을 잘하는줄로 알았는데 하지 않아도 될 걱정에 빠져 헤매이는것이 아닌가. 부모없는 처녀의 생활에서 제기되는 문제여서 절로 마음을 쓰게 되였다. 놓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는 처녀가 동소옥이라고 여겨졌던것이다. 머리가 총명한데다 감수성이 남달리 예민한것으로 하여 잘 이끌어주면 사회와 집단의 본보기가 될수 있는 반면에 놓치면 길을 헛들기도 쉬운 처녀다.

강치명은 현장을 돌아보려고 방을 나섰다. 주철직장쪽에서 오던 검열성원이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를 했다.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보고 오는 길입니다. 생산에 지장을 줘서는 안되지요.》

《수고가 많습니다.》

강치명은 이 검열성원에게서 무척 침착하고 사람대함이 허심하다는 인상을 느꼈으므로 그의 말을 웃으며 받아주었다.

《지금은 이름없는 공장이지만 앞으로 소문을 내겠습니다.》

《허허, 그렇게 생각해주니 고맙군요.》

《우리 일이 공장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한다는것을 압니다. 그러나 사업에는 도움이 될겁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편향과 오유가 전혀 없다고는 할수 없겠지만 원칙과 공정성이야 어디 가겠습니까. 더구나 일군들의 운명문제가 달려있기에 심중하고 또 심중하는거지요.》

강치명은 머리를 끄덕이고나서 그 일군이 계속하는 말을 주의깊게 들었다. 역시 남계수에 대한 문제였다.

기업관리능력을 갖춘 쉽지 않은 일군이고 책임성이 높다는것은 인정하지만 사업방법과 작풍에서는 고쳐야 할 문제들이 있다, 지배인의 독단쯤을 불가피한것으로 여기는것이 아닌지 모른다, 검열과정에 제기된 문제들을 이야기해주면 듣는지 마는지 일언반구도 없는것이 무슨 불만이 있는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제는 제기된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만났는데 깊이 생각도 하지 않고 모조리 인정하는 바람에 아연해지고말았다. …

한마디로 허심하고 겸손한 태도를 찾아볼수 없고 대중을 무시하는 처사에 유감스럽다는 의견이였다.

《우린 사실과 맞지 않는 검열자료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당위원장동무도 그건 알고있을겁니다.》

강치명은 검열성원과 헤여진 후 한층 무거워진 걸음을 옮겼다. 참으로 리해하기 어려운 사람이 남계수였다. 과거의 경력이 이루어놓은 성격이라 할지라도 오늘의 환경속에 적응할 능력을 갖추어야 하지 않는가. 한개 기업소의 책임일군으로 사업한지도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자기와 함께 일하는지도 두해를 넘겼다. 하건만 여전히 한모양 한본새다. 권고나 충고를 주어도 지어는 비판을 하여도 달라질줄 모르는것을 두고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사람의 그림자란 구부러들기마련이네.》 하는 말을 그가 최근에 와서 자주 한다고 하는데 그 뜻이 무엇이겠는가, 사람이 살아가느라면 무슨 말인들 안 들을텐가, 그러니 일체 비평이나 시비거리들이 꿈만하다는 배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나 의견들이 분분한가. 그것이 한갖 시기라면 좋겠건만 적지 않은 사실들이 부인할수 없는 근거를 가지고있는것이다.

남계수에 대한 문제를 오래동안 생각하면서 강치명은 그에게서 나타나는 결함들의 원인을 찾아보았다.

우리 사회에서 조직생활을 떠난 사람은 필연코 과오를 범하기마련이다. 아무리 실무에 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대중을 이끌수 있는 사업작풍과 도덕풍모를 갖추지 못하면 일군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것은 더 말할 여지도 없다.

이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때면 그의 심중은 착잡해났다. 인간개조에서 나서는 처방은 많지만 남계수와 같은 경우에는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던것이다. 이 문제는 자기로서는 도저히 해결하기 어려울것 같았다.

동소옥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기에는 심리적균형의 파동이 심하기마련이다. 인간의 심리와 행동은 사상의식과 지식의 외적인 표현으로 된다. 비교적 준비된 각오와 의지를 가졌다 할지라도 환경의 영향으로 그 표현이 변화될수 있다. 동소옥과 같은 경우의 청년들속에서는 즉흥적인 행동이 나타나기 쉬운데 그것조차도 심리와 감정의 영향을 받게 되는것이다. 이 처녀에게서 특징적인것으로 찾아보게 되는것은 생활에서 밝고 어두운것이 뚜렷하게 나타나는것이다. 사람은 불만속에 지속적으로 살기를 바라지 않으며 희망을 가지고 랑만적으로 생활하기를 원한다. 더우기 동소옥은 성격자체가 비교적 활달하며 공장대학을 다니기때문에 지식을 소유하기 위해 노력하는 처녀이다. 공장에서는 로력혁신자로 내세워주는데 생활에서 심리적울적이 나타난다는것은 모순되는 현상이며 주목을 돌리고 관찰해야 할 일이 아닐수 없다.

그 누군가가 처녀의 심리를 의식적으로 압박하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동소옥은 자기의 가정주위환경으로 하여 뒤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그를 허천에서 데려온것을 두고 오늘까지 남계수에 대해 그릇된 견해를 세우는 사람들이 있는것을 보면 이 외로운 처녀에게도 어떤 영향이 미칠수 있다. 각성없이 아무 말이나 하는 사람들이 있을수도 있는것이다. 이렇게 놓고보면 동소옥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돌려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것이였다.

 

구역은행에는 조영길이 군침을 삼키면서도 어째보지 못하는 녀자회계원이 있었다. 은행거래업무가 잦은 조영길은 이 녀인과 사귄 후 오늘까지 이런저런 거래를 해오는데 아무리 계산에 밝다는 저로서도 별로 리득이 없어 가슴앓이를 해온다. 오늘은 바로 그 녀자에게서 뜻하지 않은 전화가 와서 가는 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 집에서 만나자고 하지 않는가. 지금껏 살면서 조영길은 오늘같이 마음이 부풀고 기분이 둥둥 떠보기는 처음이다. 백화점에서 화장품 몇가지를 사들고 걸음을 다그쳤다.

녀자의 남편이 장거리차사업소의 운전사라는 생각을 하며 걷던 그는 네거리에 이르러 자동차의 경적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교통안전원(당시)이 신호봉을 쳐들었다.

저건 주의하라는 신호다. 조심해야 한다. 기질적으로 겁이 많은 이 사람은 뜻밖의 정황을 예상하며 신경을 한껏 도사렸다.

젠장, 일을 칠 재목은 못된다니까. 제절로 불만을 터친 그는 어슬렁걸음으로 녀자의 집을 찾아갔다.

봉수대언덕에 이르자 그 녀자가 알려준 단층집이 보였다. 울바자를 대신한 구기자덩굴이 파랗게 생울타리를 둘러 꽤 아담해보인다.

잠시 멎어서서 숨을 크게 들이쉰 조영길은 집마당에 들어서서 주인을 불렀다.

《계십니까?》

《예-》

녀자의 대답소리가 기다린듯 울려나왔다. 이윽고 부엌문이 열리며 그가 바라는 얼굴이 전등빛을 등지고 나타났다.

《아유- 부기장동지, 참 신용도 어지간하시네.》

제 기분에 취해서 온 조영길은 금시 멋적어나 어색하게 인사를 받지만 말은 반대였다.

《신용이야 우리 부기일군의 사업기풍이지요.》

《들어오세요, 어서요.》

벗어놓은 신발을 신발장우에 올려놓는 녀자의 동작조차도 춤추는것처럼 보였다.

크지 않은 단칸방은 정갈했다. 장판바닥에서 윤기가 흐르고 창문쪽에 놓인 작은 경대에서는 녀자의 체취가 상긋하게 풍겨왔다.

화장품이 든 가방을 옆에 놓으며 조영길은 녀인이 내주는 방석에 몸가짐을 바로 못한채 앉았다.

《세대주는 안 들어왔소?》

녀자는 미묘한 웃음을 짓지만 그 뜻을 해석할수 없는 조영길이였다. 그런것쯤은 묻지 않아도 된다는것을 모르니 묵언이야 어떻게 알아듣겠는가.

《오늘은 퇴근 못할수 있다는군요. 편히 앉으세요.》

들어오지 못할수 있단 말이지. 그럼 여차하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아닌가. 만약이라는 가정을 수없이 가지고 인간과 생활을 재단하고 허황한 꿈도 꿔보는 이 부기일군은 제꺽 자기에게 불리할수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운전사라니 보통 세찬 사람이 아닐수 있지 않는가. 좋은 일을 바라다가 어처구니없이 함정에 기여들수 있거던. 이러느라니 마음은 어쩔수없이 긴장되였다.

《부기장동진 술을 마시던가요?》

목이 말라든 조영길은 미처 대답을 못하며 고개를 흔들었는데 의미를 알수 없게 하는 어리석은 동작이였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건 좋은 품성이지요.》

《왜 오라고 했소?…》

자기의 언변을 자랑하며 그것을 무기로 어떤 상대도 꺼꾸러뜨린다는 조영길의 얼빤하기 그지없는 물음에 무릎을 단정히 모으고 다리를 모로 꼬부린채 앉은 녀자는 시종 남자의 안색을 살피며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이런 경우를 난 처음으로 당해보지 않는가. 주인이나 같은 녀자는 저렇게 자연스러운 웃음을 안겨주는데 내 모양은 이게 뭔가. 사내야 사내다와야 하지 않는가. 절로 용기를 북돋아보지만 허사였다.

녀자편에서 앞으로 약간 몸을 숙이며 말했다.

《절 좀 도와주시겠어요?》

《나야 늘 도와주지 않소, 허허.》

역시 바보스러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정말 그래요. 부기장동지 신셀 많이 져요. 이번엔 너무 딱한 일이 생겨서… 꼭 도와주시지요?》

녀자의 간청이 춘풍처럼 가슴에 흘러들자 조영길은 흐리마리해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바라보았다.

얼마나 매혹적인 눈길인가. 간을 녹이거던. 그런데 무슨 도움을 바라는가. 천생 졸부인 부기일군의 본능이 또 살아났다. 분명 돈소리일것이다. 은행에서 돈을 만지는 녀자니 큼직하게 요구한다면… 정신을 차려야지. 공연한 대답을 했다가 무슨 일을 치기라도 하면 어쩔려구, 이런 생각이 미치자 눈앞에 남계수의 엄한 얼굴이 보이는것만 같았다. 부기일군에게는 돈이 돌덩이같이 보여야 한다던 말이 들려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으쓱했다.

녀자는 반쯤 드러난 무릎우에 두손을 얹은채 말했다.

《실은 몇달전에 아는 사람의 부탁을 받고 돈을 얼마간 대부해준 일이 있는데 그 돈이 들어오지 않아서 그래요. 한주일후에 실사를 하는데 그 빈자리를 메꾸지 못하면 변이 날지도 몰라요. 그저 철제일용에서 대부문건을 내주면 돼요. 물론 현금은 늦어야 보름, 더 늦으면 한달이내에 드리겠어요.》

조영길은 남계수가 후생시설건설에 부족되는 자금을 마련하라고 하던 말이 부지중 떠올랐다. 그걸 명분으로 내세우고 은행대부문건을 제출하면 기업소 책임자의 직인을 찍어야 하므로 남계수가 까다롭게 굴 리유가 없다. 그러니 대부자금을 받아 먼저 은행회계원에게 빌려주었다가 후에 다시 받으면 되는것이다. 하지만 좀 힘들다는 소리를 해두는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것 같았다.

《우리 지배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소. 음, 힘드오. 대부리유가 정확해야 하는데…》

《그래서 부기장동지한테 손을 내밀지 않나요?》

조영길은 바라던것을 손에 넣은듯 한 쾌감을 맛보며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것은 녀자의 마음을 조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불리해지지 않을가 하는 타산에 기인된 행동거지였다.

《대부도 액수가 있어야 하지 않소?》

《15만부터 20만사이, 많지도 않아요.》

남계수와 토론이 있은 한도와 일치하기에 조영길은 안도감과 욕망의 엇갈림속에서 녀자의 온몸을 조심히 훑어보았다. 그의 눈치를 짐작한듯 녀자는 무릎우에 놓인 두손을 초조하게 마주 비빈다.

《언제까지면 되겠소?》

《이삼일내루요. 실사는 한주일후엔 어김없이 해요.》

《그렇게 빨리?》

《바빠서 그러는거지요.》

바쁘단 말이지, 나도 바쁘긴 매한가지요. 온몸이 불덩어리같이 달아오른 조영길은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갑잘랐다.

《나도 좀 도와주구려.》라고 말해야겠는데 혀가 말려서 입을 열지 못하고 녀자를 얼친 모양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어떻게 한다? 어떻게 하긴, 머리속에서는 이런 물음과 대답이 다급하게 오가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애당초 궁리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이렇게도 염통이 작다구야. 그는 자기에게 욕을 퍼부으면서도 명석한 두뇌를 지니고 실수란 모른다는 사람답지 않게 대답부터 해치웠다.

《그렇게 해주겠소.》

《고마워요. 이 신셀…》

녀자가 다리를 펴는게 보였다. 언제나 눈길을 자극하던 매츨한 고운 다리다. 그 어떤 만족을 약속하는듯 한 웃음을 짓지 않는가.

조영길이 정욕에 들뜬 눈길로 앞에 앉은 녀자를 바라보는 순간 화물자동차의 경적소리가 우뢰처럼 들려왔다.

그는 소스라쳐 놀라며 고개를 바깥쪽으로 돌렸다. 세대주가 오는게 아닐가. 자동차시동걸개를 틀어쥔 운전사의 거쿨진 형체가 눈앞으로 확 다가들었다. 욕망으로 달구었던 온몸이 금시 얼음장으로 변해버렸다. 여기서 좋은 일을 약속해주고도 얻어맞아 어디가 터진다면 세상에 웃음거리가 될수 있다. 주인없는 집에 지금처럼 들어와 앉은것만 가지고도 입이 열이라도 할 소리가 있는가.

조영길은 재빨리 위기를 수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헤덤벼쳐댔다.

그는 주인이 말릴 사이도 없이 신발을 찾아신고 나와서는 부엌문가에 서있는 녀자를 멀쩡히 바라봤다.

이상했다. 무슨 생각이 있었다면 이렇게 보낼수가 있는가. 이상하긴, 제 꼴을 좀 보라구. 자기딴에도 기가 막혔다. 천생 졸부인 녀석의 일장춘몽이 아니고 뭔가. 내가 이리도 모자라는 축이였는가. 고작해서 눈요기나 하면서 속을 바글바글 끓이다 제발로 도망치듯 나오다니. 이런 놀음도 할줄 알아야 하는짓이지 안되겠구나.

그제야 가방속에 주지 못한 화장품이 있다는것을 알았다. 그것까지 내놓았으면 벌어서 한 바보짓이 아니고 뭔가.

밤길을 저벅저벅 걷는 조영길의 마음은 그지없이 허전했고 모습은 처량하기 이를데없었다. 되새겨볼수록 화가 나서 발을 굴러댔다.

《이 사람, 부기장. 내가 비방을 대달라나?》

귀전에서 이런 소리까지 울려 약을 올린다.

어디서 들은 소린가. 가만, 이게 남계수의 목소리가 아닌가. 들은적은 없는 말인데 그 사람의 목소리로 들리는것도 속에 품고 사는 그에 대한 반감과 이어져있기때문이였다. 남계수에 대한 시기심이 굴뚝처럼 치밀어올랐다.

세상은 불공평하다. 남계수가 해방전엔 얼마나 풍청댔겠는가. 철제일용품공장을 내올 때 2천만원이나 되는 돈을 스스로 내놓았다니 알만 하지 않는가. 그 배심든든한 사람은 못하는 놀음이 없건만 나라는 놈은 차례지는 기회조차 놓치고 속을 허비고있지 않는가.

조영길에게 있어서 제일 미운 사람이 남계수였다. 기업소 부기장으로 임명되여 온지 반년도 못되였을 때 그한테 걸려들어 졸경을 치르었던것이다.

누이동생의 결혼식을 해야겠는데 변변한 친척붙이도 없는 집안인지라 도움을 받을데조차 없었다. 하는수없이 후에 밀어넣기로 하고 기업소의 자금 300원을 꺼냈는데 그게 일을 쳤다.

사람들이 남계수를 가리켜 걸어다니는 장부책이라고 하기에 그저 그런가부다 하고 여겼지만 맞다들고보니 사실이였다. 고정재산중에서도 하찮은 비품칸은 명색이 실사지 분실, 파손, 소모로 처리하는지라 별일없으리라 여기며 손을 댔는데 보름도 되기 전에 들장이 났던것이다.

남계수가 우연히 부기실에 나타나 고정재산장부를 벌컥벌컥 뒤져보더니 비품항목에 눈길을 박고있다가 돈이 빈다고 하기에 깜짝 놀랐다. 자기가 돌려쓰고 메꿔넣자던 액수까지 정확히 밝히는데야 어쩔도리가 없는것이였다. 하는수없이 이실직고했다.

《동무야 부기장이 아닌가. 기업소의 재정을 책임지고 통제해야 할 사람이 재정규률을 위반하면 되는가? 정신을 차려야겠소. 나라의 돈에 손을 대는건 범죄야. 더우기 부기일군이 그런짓을 하는건 엄중하단 말이요. 돈을 다루는 사람은 돈이 돌멩이처럼 보여야 해! 경고하오. 돈을 들여놓고 부기장부를 법규대로 정리해야겠소. 알았소?》

부기실에 다른 사람이 없었기망정이지 개코망신을 당할번 하였다.

그후부터 조영길은 남계수를 앙숙처럼 여기였고 이 사람이 언제든 자기를 그냥 두지 않으리라는 경계심을 품고 사는것이다. 그러느라니 지배인에게서 무슨 허물이든 잡자고 기를 썼고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되니 눈길은 자연히 그의 뒤생활까지 관심하게 되였던것이다.

해안미용원의 미용사가 처음으로 주숙진이라는 녀자에 대해 입김을 불어넣었을 때는 이거야말로 남계수의 얼굴에 먹칠하기 좋은 자료라고 여기며 무던히도 품을 들여 알아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검불을 털어서 낟알을 얻자는 놀음이라는것을 감각한 그는 령리한 머리를 굴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자기보다 더 우둔한 사람들이 있음직하지도 않은 사실을 들고다니며 소란을 피워대는것을 보고 그는 생각했다. 그들은 대다수가 남계수와 인간적으로 반목을 가지고있는 이전의 개인수공업자나 상공업자들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남의 뒤소리를 하는것을 재미로 여기며 살기도 한다. 남계수에 대한 시비거리를 들고다니는 사람들도 그런 족속들인데 저들이 보이지 않는 부추김을 받으며 꼭두각시춤을 춘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조영길은 동기를 알아낼수 없는 남계수의 치정사를 놓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알건대 남계수라는 인간은 자기를 감추고 살줄 모른다. 설사 어떤 도덕적비행을 가지고있다 해도 큰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였다. 그러니 그러루한 문제를 가지고 입방아를 찧는것을 달보고 짖어대는 개소리만큼도 여기지 않을 남계수다. 이런 속타산으로 한걸음 물러서자니 이상하게 여겨지는 인물이 미용사였다.

이 절세가인은 어떤 목적을 추구하기에 남계수의 허물을 물어뜯지 못해 안달이 나 하는가. 녀자의 입바람이지만 알수 없는 지독한 원한이 깔려있다는것을 조영길은 여러번 감수했다.

(혹시 이 녀자가?) 하고 의문을 품어보다가 머리를 저었다.

사내답지 못한 걸음을 한 밤길 한가운데 우두커니 선 조영길은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까지 왔는지도 모를 생각을 이어보며 어깨를 추겨올리였다.

그는 얼마전 해외출장을 갔다온 팔촌을 만났다. 신세도 별로 져보지 못한 그에게서 해외에 사는 어떤 교포가 보내는 편지를 남계수에게 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편지, 그게 흥미있다. 남계수가 외국에 있는 사람과 편지거래를 하고있다. 그 대상은 분명 오랜 지기일것이다. 하다면 해방전부터? 그러니 남계수나 같은 개인기업가였을수도 있지 않은가.

조영길의 사색은 급격히 날개를 치기 시작했다. 해외에 있는 인물과의 서신거래는 누구든 상관할바가 아니지만 류류상종이라고 경력이 모호한 인간들이 주고받는 편지에 색다른 내용이 들어있을수도 있는것이다. 설사 문제될것이 없다 해도 나의 신고는 공민적자각을 가지고 한 행위로 될것이다.

이렇게 조영길은 남계수에게 취할 새로운 공세를 조심스럽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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