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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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로한 육체가 급격한 긴장의 풀림으로 금시 허물어지며 의식은 어데론가 훨훨 날아가기 시작했다. 지칠대로 지친 녀자의 작은 몸이 달콤한 단잠의 숲속으로 날듯이 빨려들어가는것이다.

푸르른 강물이 노래를 부르며 흐른다. 남계수와 신유정이 정성들여 만들어 띄워주는 종이배를 타고 노를 젓는다. 남계수의 대견해하는 웃음, 신유정이 손저어주다 허공에 글을 써보이는데 선명하게 새겨져 읽을수 있었다.

《소옥아, 바다가 너를 기다렸단다.》

푸른 물결우로 흰 돛배들이 꼬리를 물고 흐른다. 그속에 섞여든 동소옥은 환희에 넘쳐 노래를 불렀다. …

《소옥동무! 소옥이…》

단잠을 깨치는 목소리가 먼곳에서 들려오자 눈앞의 환영은 사라졌다. 아쉽다. 내가 어데로 갔담… 꿈에서 이어진 생각을 동강내며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정신을 차리라니까. 소옥동무!》

동소옥은 그제야 자기를 깨운 사람이 려현석이라는것을 알고는 일부러 짜증섞인 소리를 냈다.

《좀 놔두지요. 남의 꿀잠을 깨우면서…》

려현석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웃었다. 자기가 들어섰을 때 동소옥은 실신한듯 엎드려있었다. 얼마나 놀랐던가.

《난 큰 변이 났는가 했소.》

《변이 났다면요?》

려현석은 자기가 들고 온 작은 보퉁이를 상우에 올려놓았다.

《그건 뭐예요?》

《동무가 입맛이 너무 없어한다니 어머니가 이걸 만들어주었소. 언젠가 집에 와서 맛있게 먹는걸 봤다면서…》

동소옥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이어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야, 정말 배고프네.》

《록두묵, 청포요.》

《어마나!》

손벽을 친 동소옥은 제손으로 보자기를 풀고 사기그릇의 뚜껑을 열고는 그지없이 아름다운 웃음을 활짝 피우며 속삭였다.

《아이, 먹음직해라. 어머님이 보내셨나요?》

《어서 맛을 보오.》

《이걸 제가 다 먹어도 되지요?》

미안한 목소리로 물으면서도 동소옥은 갈증에 시달린 사람이 물을 마시듯이 덤벼대면서 먹었다. 저가락이 말을 잘 듣지 않으니 숟가락으로 떠서 정신없이 입에 넣다가 목에 걸려 가슴을 두드려대기까지 했다. 그 모양을 보고 려현석이 웃자 동소옥은 눈을 곱게 흘겨보이며 마지막 한개까지 다 먹었다.

《정말 맛있네. 속에 거렁뱅이가 들어앉았댔나. 호호.》

《입맛이 돌아섰으니 됐소.》

《이건 둬두세요. 제가 어머니한테 가져다드리며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지요.》

보자기로 싼 그릇을 장안에 넣고나서 동소옥은 려현석의 옆에 앉았다.

《바쁜데 난 가겠소.》

《좀 앉아있어요. 바쁘긴 뭐가 바빠요. 일 다하고 죽은 사람 없다는데…》

노상 시간에 쫓기며 사는 동소옥의 입에서 이런 늘어빠진 소리가 나오기에 려현석은 의아해서 바라보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마음의 긴장을 푼게 아니요?》

《지금이 몇시예요?》

려현석은 대답대신 벽시계를 가리켰다. 벌써 10시가 가까와오고있었다.

《밤인가 낮인가 말이예요?》

어느땐지조차 모르는 소리에 려현석은 측은한 눈길을 보내며 나직이 대답했다.

《창밖을 보오. 보름달이 떴소.》

동소옥은 두손을 꼭 잡으며 탄성을 올렸다.

《정말 밝은 달이군요. … 어떤 사람 달을 보고 서러워한다…》

알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말을 하고는 노래가락까지 뽑는 동소옥을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며 려현석이 물었다.

《오늘은 왜 그러오?》

고개를 살며시 수그리며 생각에 잠기던 동소옥이 눈길을 쳐들어올리며 물었다.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줄테니 들어보시겠어요?》

《허-》

마음과 감정을 이어놓을수 없어 남자는 허거픈 웃음을 웃지만 상대인 녀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으며 얼굴에 야릇한 미소를 그리면서 자기의 이야기만 펼쳐갔다.

《오래된 일도 아니지만 어덴가 목가적인데가 있는 구슬픈 노래예요. 하지만 들어주세요. 어느 마을에 한 처녀가 살았어요. 생긴것도 없고 철딱서니도 없어서 건너마을 한 총각에게 욕을 무던히 먹으며 지냈던거예요. 욕먹어 좋다할 사람은 없지만 이 류다른 처녀는 그 욕에서 첫사랑의 햇순을 터쳤다나요. 총각이 나타나면 잔뜩 겁이 나서 머리도 못 들면서 마음속으로는 알아주지도 않는 애틋한 사랑의 꿈을 자래웠으니 얼마나 가엾나요. 하지만 이 어리석고 우둔한 처녀는 그 사랑이 언제든 자기에게로 다가오리라고 믿으며 총각을 마음속에 간직한거예요.

하지만 세상엔 무정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를 너무도 몰랐어요. 어느날 처녀는 총각이 장가를 든다는 말을 듣고 너무 놀라서, 너무도 믿을수 없어서 막 잔치집으로 달려갔어요. 눈앞에는 큰상을 받은 신랑신부가 앉았는데 그 총각이였던거예요. … 처녀는 배나무에 기대여 울었어요. 그렇게도 바라온 사랑이건만 자기것으로 될수 없다는것을 알았거든요. 어찌나 슬프게 울었던지 배꽃이 눈이 되여 처녀의 어깨우로 하염없이 떨어졌어요. …》

자기 말처럼 그야말로 목가적이라 해야 할 사랑의 선률을 외우는 동소옥의 눈에서는 이슬 같은것이 반짝거렸다. 무엇을 깊이 생각하는지 정가로운 한쌍의 눈동자를 옆으로 기울인채 미소를 머금었다.

어데선가 본것 같기도 하고 들은것 같기도 하여 려현석의 마음조차 이상할만큼 향수에 젖어들었다. 무엇인가 알것 같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수 없었다. 재미있게 듣기만 해야 할 기담이 아니라는것만은 느낄수 있었다.

《어때요? 재미있어요?》

동소옥이 차분히 젖은 눈시울을 조용히 감아보였다.

《있을수 없는 일이요.》

《실지 있었다면요?》

녀자의 눈빛이 무슨 모욕이나 받은듯이 도전적인 빛을 띠자 려현석은 도리머리만 저었다. 가슴이 이상할만큼 높뛰는것이였다.

그도 그제서야 무엇인가 깨달아지는것이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대답하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심중이 착잡해난것이다.

이 처녀의 모습이 마음속에 찾아들어 덧없는 번민을 몰아올 때면 잊자고 얼마나 애썼던가. 하지만 생활은 오늘에로 데려다주고야말았다. 그러나 자식을 가진 남자가 이날까지 자기 하나만을 사랑해왔을 처녀에게 무엇을 고백한다는것은 너무도 분수없는 일일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동소옥은 자기앞에 앉은 사내의 고집스럽고 솔직한 마음속을 들여다보았는지 갑자기 소리를 내여 웃었다.

《호호호. 정말 난 미련둥이야. 저만 아는 소리를 하고있으니… 호호.》

어덴가 그 웃음속에 처녀의 괴로움이 실려있는것을 느끼며 려현석은 자신없는 소리로 중얼거리였다.

《혹시 내가 알았을수도 있지 않소.》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동소옥이 항거나 하듯 말했다.

《알고있었어요!》

《?》

동소옥은 그 모습이 재미있어 놀리듯이 말했다.

소옥이, 너 치마바람 일구며 다니겠어?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녀자의 마음이 변하는거야 어쩔수 없지만 사상이 변한단 말이야!, 이렇게 천둥같이 소리치던것이야 생각나겠지요? 난 그때에야 철이 든가봐요. … 고마웠어요.》

《그게 언제적 일이요?》

그 말에 정신이 든듯 동소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여줄게 있어요.》 하며 설계대앞에 이른 그가 가리우고있던 큰 종이말이를 벗기였다. 완성된 《흥성-1》호의 도면이 나타났다.

《이 부분이 애를 먹였어요. 조종장치… 로보트의 반복위치정밀도는 10미리범위안이예요. 앞으로는 더 좁힐수 있을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세운 목표에 도달했다는게 아니요?》

《아마 그런가봐요.》

려현석은 어쩔 사이가 없이 동소옥을 껴안았다. 녀자의 뜨거운 숨결이 얼굴에 확 끼얹혀지는것을 느끼면서 격정을 터뜨렸다.

《정말 수고했소! 기어코… 동무가…》

《놓으세요. … 누가 들어오기라도 하면…》

《뭐라오. 다들 리해할텐데…》

바라고바라던 남자의 품에 안긴채 작은 새처럼 숨결을 가누던 동소옥은 속삭였다.

《무정한 사람…》

《용서하오. 사실 난 동무를 믿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로는 걱정이 참 많았소. 그런데 끝내 이렇게 성공의 돌파구를 열어제꼈으니…》

《아니예요. 그 눈으로 저울질을 했던거예요. … 제가 구실을 옳바로 해낼가 하고 말이예요. …하지만 제가 갈대가 아니라는것만은 알아주겠지요?… 나도 언니처럼 살려고 해요. 이 마음만은 믿어주세요. 그러지요?》

려현석의 떨리는 손길이 동소옥의 물결같은 머리채를 쓸어내리였다. 어차피 오고야말 사랑은 종시 찾아든것이다.

참으로 리해하기 어려웠던 처녀였다. 그러나 거창한 창조와 변혁의 나날에 놀라울만큼 대견스럽게 성장한 이 녀자에게서 그는 새로운 고상한 인격을 찾아보게 되였다. 경망스럽다고 여겨오던 지난날은 사라지고 대할수록 어렵기도 하고 의지도 되는 위력한 존재로 안겨오는것이였다. 하지만 이렇게 품에 안고보니 역시 녀자였다.

《소옥인 나한테 행복을 찾아주었소. …》

《제가 힘껏 가꿔보지요. 언니가 마음을 놓을수 있게 말이예요.》

려현석은 동소옥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동문 지배인동지가 지금도 아주머니와 함께 첫사랑을 약속한 날을 류다르게 보낸다는 소릴 들어봤소?》

《왜요, 부러워요? 아니면 그렇게 해보고싶은가요?》

《바란다면…》

눈을 크게 뜬 동소옥은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7월 12일이예요. 호호, 큰아버지한테 그런 정서가 있다는건 리해하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사실이거든요. 그래서 놀라운거지요. 아마 그렇게 용서를 바라는건 아닐가요?》

《용서라니?》

동소옥은 고개를 갸웃하고 기묘한 웃음을 지은채 생각에 잠겼다.

얼마전 평양에서 정다운 옛 사감이 소포를 보내왔다. 난생 소포라는것을 받아본 일이 없어 무슨 큰 보물이나 만난듯 풀어보았다. 놀랐다. 멋진 양복천인데 신랑의 옷감으로 쓰이기를 바란다는 뜻이 안겨와 가슴이 뭉클해났다. 그와 함께 강계포도술공장에서 만든 백로술 한병이 나왔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리 풀이를 해보려고 하여도 답을 찾을수 없어 합숙호실에 간수하고있는데 오늘 생각하니 큰아버지한테 드리면 선물로 될것 같았다. 이제 며칠후면 젊은 사람들도 부러워할 자리를 마련하지 않겠는가. 그 자리엔 어느 자식도 참가시키지 않는다. 오직 두사람만을 위한 특이한 자리인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오?》

《언젠가 큰아버지가 언약에 대해서 뜻깊은 말을 한적이 있는데 그걸 생각했어요.》

이렇게 대답한 동소옥은 려현석을 정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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