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3 회)

제 4 장

43

 

항구도시의 바다가 송림지대는 로동자들의 문화생활휴식터로 변모되여갔다. 소나무숲속에는 휴양소건물들이 자리를 잡았고 여기저기에 일떠선 정각들과 많은 식당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바다에서 보면 솔숲에 흰두루미떼가 내려앉은듯 한 아름다운 정경이다. 해수욕장은 온종일 휴양생들과 이곳 사람들로 흥성거렸다.

저녁이 오면 하루일을 마친 젊은이들이 짝을 뭇고 송림속을 사랑의 미소로 수놓는다.

휘파람소리, 랑랑한 웃음소리, 즐거운 노래가락… 청춘의 열정이 연소되는 행복한 모습들을 여기저기서 볼수 있었다.

맥주집에서 나온 한 젊은이가 등산모를 삐뚜름히 쓰고 안주로 삼았던 마른명태를 질근질근 씹어대며 송림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어둠속 여기저기서 놀란 밤새들이 깃을 치며 나무아지들을 스쳐날으는 소리가 들린다. 접동새가 울기 시작하자 부엉이도 굼뜬 제 소리를 자랑해댄다.

길을 잃은 사람처럼 숲속의 여기저기를 헤매는듯 하던 젊은이가 멎어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잠시 귀를 기울이다가 제김에 불만스러워 투덜거리며 공원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깨를 잔뜩 추겨세운채 휘파람을 불어대자 유령처럼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손을 내밀더니 입을 막았다. 놀라기는커녕 젊은것은 코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댔다.

《죽여주는구려. 그 향기가…》

어둠속에서 나타난 녀자는 모가 선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됐지?》

젊은 꼭두각시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걱정마시라구요. 누님의 선물은 정확히 본인에게 전달됐으니까요. 꽃은 꺾지 못했지만 이번엔 장담해요. 어떻게 소포를 보내올 생각을 다했나요. 아까운걸, 그걸 공짜로 안겨주다니요?》

뱀처럼 스르르 움직여 옆자리에 앉은 녀인의 손이 젊은것의 볼을 정이 들게 찰싹 때려준다.

《왜 마시고싶어?》

《그 처녀를 삼키지 못한게 한이웨다.》

《그쯤한 인물을 놓고 뭘 그래, 차는?》

녀자의 어조는 여전히 긴장되여있었다.

《다 준비돼있어요. 누님이 분부하는 곳에 가져다놓지요.》

어렵지 않게 대답하자 녀자는 한숨을 쉬며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너를 헛키우지 않았구나.》

맥주에 취기가 오른 젊은이가 녀자를 금시 그러안을듯 두팔을 벌리며 입김을 내불었다.

《내가 누구요?… 누님을 일찍부터 섬겨온 태감이 아닌가요. 흐흐.》

점점 다가드는 남자의 얼굴을 한손으로 돌려놓으며 녀자는 날카로와진 음성으로 말했다.

《난 이젠 떠나련다. …》

《어디로요?》

《어디? 어딘가구? 누가 내 몸을 받아줄소냐, 하건만 가야만 하는 나로구나. …》

젊은것이 놀라는척 하면서 이죽거려댄다.

《원, 그런 슬픈 소리를 하시다니요. 그럼 난요?》

녀인이 두손을 내밀어 남자의 볼을 싸쥐고는 이윽히 지켜보다가 속삭이듯 말했다.

《말을 잘 들으면 데리고 갈수도 있지.》

《헤헤. 어데루요? 천당이요, 지옥이요?》

자리에서 발딱 일어선 녀자가 불이 일게 젊은것의 귀통을 후려갈겼다.

《이거 아프웨다. 아무리 녀자손이라도…》

어둠속에 도사리고 선 녀자의 눈에서 린광 같은것이 뿜어나오자 기가 눌린 녀석은 자라목을 하고 바라보기만 했다. 어서 분부만 하십시오 하는듯 한 공손해진 녀석의 모양을 바라보며 녀자는 이를 갈아대는 소리를 냈다.

《이번이 마지막기회다! 고목이라지만 꺾어버리지 못하면 조상들의 령전에 나설 자격이 없는 나야. 빼앗긴 땅은 못 찾는대도 불효자식은 되지 말아야지. 안 그래?》

녀자의 변덕에 얼이 빠진 젊은것이 생각없이 주절댔다.

《아무렴요.》

《차를 알려주는 장소에 정확히 가져다 세워야 해. 그럼 가봐.》

녀자유령이 뱀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지자 으시시 몸을 떨어댄 젊은것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자기를 돌이켜보는 눈을 가지고 사는것이 수양이라고 할수 있다. 이것을 절감하고있는 남계수에게 있어서 영원히 용서를 빌며 살아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안해라고 해야 할것이였다. 개인기업가시절에 기업병에 미쳤을 때엔 그대로 안해를 돌아보지 않았고 기업소를 책임지고 일하면서부터는 공장일에 묻혀사는것이 생활로 되여버렸기때문이였다. 그저 너그러운 녀자와 사니 별일없다는 무정이 빚어놓은 부부관계라고 해야 할것이였다. 인생의 도리를 배우고 보니 죄스럽고 안해에게 못다 준 사랑을 늦게나마 안겨주어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되였다.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공장으로 돌아온 그해 여름 어느날 저녁 그는 안해와 함께 조용한 식당을 찾았다. 전혀 뜻밖의 일이라 신유정은 식탁에 마주앉아서도 당황하여 몸둘바를 몰라했다.

《어떻게 된 일이예요? 이건…》

안해의 이마에 그려진 의혹짙은 주름을 보며 남계수는 손을 잡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요?》

《예? …오늘은 7월 12일…》

《그렇소. 당신은 기억하고있겠지? 백악산령길을…》

남편의 상상도 못한 행동과 눈앞에 펼쳐진 현실로 잠시 의아해서 바라보던 신유정이 속삭이듯 물었다.

《그날이 7월 12일이였던가요?》

《그렇소.》

조용히 눈을 감는 안해의 얼굴에 세월의 갈피를 헤치며 야릇하게 맛보는 감회의 미소가 어리였다.

7월의 여름밤을 밝히던 초롱등, 깊은 밤 령길에서 만난 스승과 제자, 사랑의 고백… 운명의 밤이였다.

《그런데 이건 뭔가요? 두벌자식을 가진 오늘에 와서…》

신유정은 놀라움을 누르며 눈길을 쳐들었다.

《당신은 내 운명의 영원한 길동무요. 나도 배워서 알게 되였소.》

《그래서요?》

《오늘은 말하오. 남계수라는 인간속에서 어제날의 사내라는 괴물은 사라졌소. 내 당신한테 무한히 솔직하고 허심할테니 믿어주오.》

신유정은 조용히 웃어보였다.

《오늘의 의미만을 이야기해요.》

《이제부터 우리가 일생을 약속한 그날을 해마다 우리 지금처럼 둘이서 보내는것이 어떻소?》

《꼭 아이가 된것 같군요. 정말이예요?》

《약속하자니까. 어떻소?》

신유정은 정색한 남편의 얼굴을 이윽토록 지켜보다 너그러운 웃음을 담고 말했다.

《그럼, 우리도 젊어보자요.》

이렇게 되여 이들부부는 해마다 이날이면 잊지 않고 각이한 장소에서 꼭꼭 만나는것이다. 공원, 극장, 강가, 달밝은 밤길…

언제인가는 남계수가 일에 몰려 경황없던 나머지 이날을 잊은적이 있었다. 그런데 저녁퇴근시간쯤에 공장접수실에서 안해가 찾아왔다는 전화가 와서 의아하여 정문에 나가보니 정말 신유정이 그를 기다리고있었다.

《왜 놀라세요? 제가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허- 나를 말이요? 갑자기 무슨 일이 생겼소?》

《오늘이 무슨 날이지요?》

남계수는 안해의 얼굴을 의아해서 지켜보다 발을 굴러댔다.

《그렇지! 하하하, 내가 그걸 생각 못하다니. 우리 함께 백악산령길을 넘던 그밤처럼 걸어봅시다.》

신유정이 슬그머니 곁에 다가와서 남편의 팔을 끼자 그들부부는 다정히 걸음을 옮겼다. …

올해라고 하여 관례화된 일정을 미룰수는 없었다. 남계수는 점심시간이 되여오자 기사장에게 잠간 나갔다가 오겠으니 그리 알라고 일렀다.

《너무 부러워 시샘이 날 지경이웨다.》

정시홍이 짐짓 심술궂은 표정을 짓고 이죽거리자 남계수는 눈을 흘겨댔다.

《우리 나이엔 눈귀가 좀 어두운게 좋다구 한건 자네가 아닌가.》

《그래도 이 사람쯤은 방자로 데리고 갈수도 있겠는데요.》

《안돼!》

남계수는 손을 내젓고나서 자리를 떴다. 오늘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점심시간에라도 만나자고 안해에게 전화를 했더니 오후 첫 시간에 물려놓은 시범교수가 늦어질수 있다며 반대하는것이 아닌가.

잠간이면 된다고 어성을 높인 그는 만날 장소를 알려주고는 전화를 끊었다.

항구도시의 바다기슭에 새로 일떠세운 동해각은 출항을 앞둔 한척의 함선마냥 웅장한가 하면 우아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합각지붕이 나래를 펼치고 창공으로 솟구쳐오르는 대붕의 기상을 느끼게 하는 조선식건물이였다.

《여보, 나도 여긴 처음 와보는군요.》

신유정이 놀란 얼굴로 식당을 바라보자 남계수는 어깨를 높였다.

《더 늙기 전에 멋을 좀 부려보자는거요. 그래서 예약은 이미 해놓았댔지. 이만하면 우리도 수준이 있지 뭘 그러오?》

《그래요. 몇해전까지만 해도 어죽놀이나 하던 우리였는데… 호호호.》

남계수는 신유정의 팔까지 끼며 말했다.

《들어가기요.》

《이렇게 시간을 낼수 있던가요?》

《사람은 시간을 장악하고 살아야지.》

《그 기세가 마음을 놓게 하는군요.》

《소옥이가 설계를 완성했소.》

《그래요?》

《허허, 용커던. 얼마나 눈치가 빠른지 오늘을 잊지 않고 선물까지 마련해서 주는게 아니겠소.》

신유정이 시종 미소를 거두지 못하며 말했다.

《오늘이 무슨 명절이라고 선물까지…》

두사람은 접대원의 안내를 받으며 바다쪽 창가옆 식탁에 마주앉았다. 유람선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정말 좋군요.》

산뜻한 옷차림을 한 접대원처녀가 그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나서 료리접시들을 놓아주었다.

《이 정신을 좀 보오. 깜빡 잊을번 했구만.》 하며 남계수가 들고온 가방에서 술병을 꺼냈다.

《그게 소옥이가 마련했다는 선물인가요?》

신유정은 식탁우에 팔굽을 세우고 두손을 맞잡으며 웃어보였다.

《여보, 시간을 봐가다가 짬이 생기면 우리 함께 백악산골짜기를 찾아봅시다. 초롱등을 하나 마련해가지고 말이요.》

《랑만주의자가 되려는게 아니예요?》

《그래서 나쁠거야 없지 않소. 우리네 젊은 시절에야 언제 랑만이라는 감정을 가져나봤소.》

신유정이 수정잔에 술을 부으며 말했다.

《젊어질수 있다면 좋은 일이지요.》

《아니, 당신 잔에야 내가 부어야지.》

《저두요? 고마와요.》

《이거야말로 남계수학생이 선생님에게 드리는거요.》

《호호호… 기막혀라. … 제자가 스승도 몰라봤으니…》

남계수는 능청스럽게 웃었다.

《대담하게 제때에 행동했지. 당신이 없었더라면 나의 오늘은 달라졌을지도 모르오.》

《어떻게요? 더 좋아졌을수도 있지 않은가요?》

《그럴수 없소. 거칠고 우직스러웠던 내가 당신의 다듬질을 당했으니 오늘만큼 된거요.》

그들의 모습을 주시하는 눈길이 가까이에 있었다. 식당안의 중간쯤에 놓여있는 소철나무잎새사이로 연한 밤색안경을 낀 녀자가 입가에 오묘한 미소를 지은채 바라본다. 자기의 얼굴은 가리울수 있는 위치를 차지한것이다.

남계수와 신유정이 잔을 가볍게 찧고나서 한모금 마시자 녀자는 움켜쥔 주먹을 가슴에 가져다대더니 톡톡 두드려댔다. 매우 초조해하는것이 알렸다. 그 어떤 변화를 기다리던 주먹이 스르르 식탁우에 떨어져내렸다. 다정히 이야기를 나누는 두사람의 모습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자 놀란 소리를 짤막하게 내고는 서둘러 일어섰다.

《앉으시지요. 부인! 흥분하지 말고…》

흠칠 놀란 녀자의 색안경속의 눈빛이 재빨리 난데없이 곁에 나타난 사나이를 식별하려고 했다. 수수한 여름옷차림이지만 남자의 눈길은 자못 엄했다. 무언의 요구에 응할수밖에 없는 녀자는 침착한 자세를 되찾으며 앉았다.

《알겠어요. …》

이때 남계수가 우연히 고개를 돌리다가 낯익은 안전원의 얼굴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의 눈길이 이내 굳어졌다.

안전원이 가방에서 술병을 꺼내여 앞에 앉은 낯모를 녀자에게 내보이지 않는가. 놀라운것은 그 술병이 자기네가 가져온 술병과 꼭 같은것이였다.

한편 안전원은 예리한 눈길로 녀자를 쏘아보며 물었다.

《알겠다는건 이걸 념두에 둔거겠지요?》

다짐이나 받듯 묻는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을 일별한 녀자의 입귀가 약간 일그러졌다.

《초면인것 같은데 무례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가요?》

《너무 바빠하지는 마시오. 주차장에 차까지 대기시켜놓지 않았소. 차번호도 알려달라오?》

녀자가 팔짱을 끼며 노려보았다.

《승자는 거만해지기마련인걸요.》

《다름이 아니라 당신에게 술을 한잔 권하는 성의를 보이자는거요. 어떻소? 이 술병이 낯이 익지요?》

녀자의 얼굴은 서서히 침통한 빛을 띠기 시작했다. 창백해진 턱이 떨리고 쳐들어올린 손가락이 입귀를 지그시 눌렀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침착했다.

《초면이지만 성의이니 거절하지 않겠어요. 부으세요.》

《그래야지. 이제 구면이 될거요.》

잔을 채우는 액체를 바라보는 녀자의 속눈섭이 안경속에서 파들파들 떨고있는것이 보였다. 입술을 옥물며 술잔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자 안전원이 슬쩍 옆으로 옮겨놓으며 말했다.

《아, 성급해하지 마오. 최후의 잔을 어떻게 여기서 들겠소. 판결도 받아야 할텐데…》

《닥쳐! 그래 내가 그냥 순종할줄 아는가?》

별안간 입에서 사나운 악청이 터져나오는것과 동시에 그 녀자가 벌떡 몸을 일으키는 순간 주변의 식탁에 앉았던 젊은 남녀가 바람처럼 달려들어 제지시켰다.

남계수와 신유정이 놀라움이 한껏 비낀 얼굴로 다가왔다.

《아니?…》

신유정이 눈을 크게 뜨고 녀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교장선생, 날 알아보겠는가요?》

발작적인 소리를 낸 녀자가 색안경을 벗어들더니 얼굴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제서야 그를 알아본 신유정이 머리를 끄덕였다.

《지배인나리는요?》

남계수는 그제야 녀자가 누구인가를 가려보았다. 1958년 신년야회가 떠올랐던것이다.

《그랬구만.》

남계수는 이제야 비로소 짐작이 간다는듯 표정이 근엄해졌다.

석상처럼 굳어진 녀자를 노려보던 안전원이 저쪽식탁에 서있는 처녀접대원에게 손신호를 했다. 그러자 그 접대원이 그들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물이 담긴 그릇이 들려있는데 그릇속에서 한마리의 관상용붕어가 꼬리를 치고있었다. 안전원이 잔에 든 술을 쏟기 바쁘게 작은 물고기는 흰 배를 드러내며 떠올랐다.

채련은 오늘 자기의 사냥목표가 다름아닌 자기였음을 깨닫자 더이상 뻗대지 못하고 죽은 사람처럼 서있었다.

《두분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해서 미안합니다.》

안전원이 미소를 짓고 남계수와 신유정에게 량해를 구했다.

그들일행이 사라지자 남계수는 아직도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있는 안해의 팔을 끼고 식당을 나서며 말했다.

《여보, 우린 아마도 모르고 사는것이 많은가보오.》

남편에게 의지한 신유정은 방금전에 사라진 낯익은 녀자의 얼굴을 그려보며 조심히 걸었다. 바로 저 녀자였다. 아마도 재경에서 살았을것이다. 제입으로 남계수지배인을 잘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는 아직도 몹시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제하지 못한채 남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남편인데도 이 시각만은 자못 무거운 표정으로 말없이 걷는다.

한편 남계수의 심중에서는 인생의 지나간 사연들이 두서없이 엉켜돌고있었다.

덕산고개에서 맞다들렸던 죽음의 위기, 전선원호와 군기기금헌납에 앞장선다고 수없이 당한 협박, 주숙진의 참혹한 최후, 그 녀자와 이어진 조작된 추문들… 그 모든 일들이 지금처럼 심각하게 되새겨진적은 일찌기 없었다.

구역안전부장을 만나고 온 강치명에게서 주숙진만이 아니라 자기를 구원해준 내무원까지도 반동놈들에게 피살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세찬 격정이 그의 심중에서 회오리쳤다.

가지가지의 사건들과 무수한 사연들을 돌이켜볼수록 기나긴 인생길의 굽이마다에서 알게 모르게 자신을 말없이 지켜준 구원의 손길이 있었다는것을 이렇게 뒤늦게야 깨닫게 되는것이였다.

《여보, 그렇게 혼자 묵새기지만 말고 무슨 말이든 좀 하세요.》

신유정이 종시 먼저 말을 뗐다.

걸음을 멈춘 남계수는 긴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당신도 느꼈겠지만 이 남계수가 뭐겠소. 난 자기의 인생길을 돌이켜보오. 아마 내 혼자서였다면 벌써 쓰러져 세월속의 락엽으로 사라져버린지도 오랬을거요.》

신유정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의 먼길을 남다르게 살아온 자기들이라는것을 다시금 느껴보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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