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의 길을 찾아서 김명준
1930년대 초만 해도 내가 살던 통화지방에는 독립군이 많았다. 나는 독립군이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는 군대라는것을 마을사람들을 통해서 들었으며 나자신도 또한 그렇게 믿었기때문에 철이 들면서부터 독립군에 입대할것을 몹시 희망하였다. 16살나던 해 여름에 나는 이웃마을에 독립군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입대하려고 찾아가기까지 했었다. 그러다가 일제놈의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아 그들에게 따귀를 맞고 며칠간 감금당했다가 아버지가 불리워와서야 겨우 석방되여나왔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1934년 여름 나는 다시금 내 친구 한 동무와 짜고 남모르게 집을 떠나 연사흘을 걸어서 홍경현 연통산부근에 있는 독립군을 찾아갔다. 우리는 거기서 다시금 입대를 거부당했다. 장이나 두어독 더 먹고오라는것이였다. 그러고보니 집에 다시 되돌아갈수도 없어 이왕 나선바에야 끝까지 자기 결심을 관철하려고 그 부대의 뒤를 먼발치에서 그냥 따라갔다. 부대가 휴식할 때는 달려가서 그들의 잔시중을 열심히 들어주기도 하였다. 이렇게 한 보름을 계속했더니 그 부대의 중대장이 비로소 우리를 련락병으로 입대시켜주었다. 그러나 정작 입대하여 생활하는 과정에 나는 자기가 여직껏 생각해오던 독립군과는 너무도 판이한데 대하여 실망하지 않을수 없었다. 물론 독립군이 조선독립을 위하여 일제를 반대해 싸워오고있는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들은 한때 일제를 무찌르는 싸움에서 용감했으며 적지 않은 전투에서 승리도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인민의 군대가 아니였으며 앞으로 조선을 어떻게 독립시키겠다는 정치적강령조차 없었을뿐만아니라 이미 이 시기에는 일제를 타승하리라는 신심마저 잃고있었다. 실지 이 시기 독립군이란 어지간한 부락하나도 진공할 능력이 없어서 불가피한 방어전외에는 전투도 피해버렸다. 그러다나니 자연 총은 낡은 《로국대》그대로였고 탄알도 구할 길이 막혀버렸었다. 기껏 한다는것이 압록강 물목을 지키다가 흘러가는 떼목이나 잡아세워놓고 거기서 량식을 얻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복하고 조선인부락에 내려가서 징수한 군자금으로 나날을 보내는 형편이였다. 초기에는 그렇게도 열성적으로 방조해주던 인민들도 이제와서는 독립군을 두려운 존재로 여기고 외면하게 되였다. 거기에 일제군경들의 《토벌》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서 바야흐로 독립군은 걷잡지 못할 붕괴의 구렁텅이에 직면하고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부대가 온 동북땅에서 혁명의 불길을 일으키며 일본제국주의자들을 섬멸하고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일부 부대는 이미 독립군의 활동구역이던 흥경, 통화, 관전, 집안, 환인, 본계호에까지 진출하고있었다. 더우기 위대한 수령님께서 축지법을 쓰시여 일제의 대부대를 몰살시켰다는 소문에 우리는 조선에 장수가 났다고 경탄할뿐이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이 어떤 군대인지, 무엇을 위해 싸우는 군대인지조차 알지 못하였다. 뿐만아니라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이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하여 갖은 비방중상을 퍼부었기때문에 우리들은 조선인민혁명군이 조선독립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것으로 속아오고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까지나 그들의 비방중상에 속고있지는 않았다. 1936년 정초인 날씨가 몹시 추운 어느날이였다. 우리들은 집안현의 한 산간부락에서 우연히 조선인민혁명군의 일부 소부대와 만났다. 그들은 우리가 뒤늦게 그 부락에 도착했기때문에 집에 들지 못하는것을 보자 자진해서 자기들이 들었던 집을 성큼 내주었으며 또 우리가 량식이 떨어진것을 알자 얼마안되는 자기들의 식량까지 갈라주었다. 한밤중에 내가 잠에서 깨여나 밖에 나갔을 때였다. 문득 마당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등불이 꺼져가는 둘레에 웬 사람들이 강낭짚을 깔고 서로 껴안고서 자고있었다. 더 자세히 살펴보던 나는 그들이 바로 우리에게 군말없이 집을 내준 조선인민혁명군 동무들이라는것을 알자 그만 놀라서 어쩔줄을 몰랐다. 나는 방안에 얼른 들어가 동무들을 깨웠다. 동무들은 나의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나중에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고야 그들도 눈을 휘둥글게 떴다. 우리는 자리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설한풍이 윙윙 소리치며 악을 쓸 때마다 나의 마음은 미안한 생각에 차서 마치 바늘방석에라도 누워있는것만 같았다. 나는 세상에 태여나 이런 사람들을 처음보았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 군대가 어떠한 군대이라는것을 우리들은 체험을 통해서 알기 시작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그들은 어느새 일어났는지 벌써 밖에서 주인집마당을 쓴다, 물을 길어다준다 하며 그 집 주인내외의 일들을 도와주기에 법석들 하였다. 집주인은 이사람저사람 붙잡고는 당신들이야말로 진짜 우리 군대라고 하면서 어쩔줄을 몰라하고있었다. 우리는 그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자신들을 뉘우쳤다. 우리 자신들이 가난한 집안 자식들이면서도 여직껏 인민들에게 이렇게 대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큰일이나 하는것처럼 그들을 괄세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니 인민들로부터 고립될것은 뻔한 리치였다. 나는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는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있기가 몹시 면구스러웠다. 나는 조선인민혁명군에 대해서 많은것을 알고싶었다. 그러나 우리는 곧 그들과 갈라져 떠나지 않으면 안되였다. 집안현 산간부락에서 만났던 조선인민혁명군이 우리에게 준 큰 영향은 나로 하여금 잊지못할 충격으로 가슴에 인박아놓았다. 그리고 나의 머리 한구석에서는 언제나 그 인상이 소용돌이쳤다. 이해 봄 어느날이였다. 독립군내에는 지휘부에서 들은 이야기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하여졌다. …조선인민혁명군의 한 부대가 환인지방에서 일제의 련락수송차를 습격하고 그 수색과정에 일제놈들의 중요한 비밀문건을 발견하였다. 그 비밀문건의 내용은 독립군으로 하여금 조선인민혁명군을 의심하게 하고 반목, 알륵을 일으키게끔 조작한것이였다. 악랄한 일제의 흉계를 사전에 알게 된 조선인민혁명군부대에서는 앞으로 이런 일이 없도록 독립군지휘부에 놈들의 위조문건이며 위조편지들을 보내왔고 그와 함께 원쑤일제를 반대하여 같이 손잡고싸우자는 친선의 편지도 전해왔다는것이였다.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우리들은 새삼스럽게 일제의 간책에 격분하였고 동시에 조선인민혁명군이야말로 진실로 우리의 벗이라는것을 더욱 똑똑히 알게 되였다. 이리하여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을 더욱 동경하게 되였으며 자주 전해오는 그들의 활동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나의 마음은 그리로 달려갔다. 이러한 생각은 비단 나혼자뿐만이 아니라 부대내 많은 동무들의 공통된 념원이였다. 우리들은 보초를 설 때나 혹은 잠자리에 같이 누워잘 때나 뜻이 맞는 동무들끼리 모이기만 하면 우리가 조선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넘어가야 한다고 자기들의 심정을 털어놓군 하였다. 개중에는 부대에서 도주할 계획을 짜는 동무들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혼자나 둘이서 대렬을 떠난다는것은 모험이였다. 그것은 어디 있는지 딱히 알지도 못하고 조선인민혁명군을 찾아서 무턱대고 산속을 헤매다가는 언제 어디에서 적《토벌대》와 맞다들지도 모를 일이기때문이였다. 그해 여름 어느날이였다. 통화현 어느 강옆을 따라 남으로 이동중에 있던 우리는 강건너에 적대부대가 나타났다는 긴급련락을 받고 당황망조하였다. 그래서 모두 몸을 은페하느라고 야단했고 일부 겁쟁이들은 명령도 없이 뛰여달아나기까지 했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적》을 주시했다. 정말 한 대부대가 위풍당당하게 강기슭을 따라 올라오고있었다. 그런데 이 부대는 적부대가 아니라 바로 조선인민혁명군이라는것을 대화를 통하여 알게 되였을 때 우리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쉴수 있었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나는 그 씩씩한 대오의 활기있는 행군을 보면서 높뛰는 가슴을 억제할수 없었다. 그 부대에는 기관총도 많았고 복장도 훌륭했으며 사람들도 모두 끌끌해보였다. 나는 혹 대렬선두에 선 지휘관이 김일성장군님이 아닌신가 하여 눈을 비비고 유심히 바라보기도 하였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강을 건너 그 대오에 따라서고싶었다. 그러나 당시 상관의 통솔하에 있다는 사정도 있지만 나에게는 아직 그러한 대담성과 결단성도 없었다. 다만 나는 불같이 일어서는 마음의 충동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그들이 다 사라질 그때까지 우두커니 그 뒤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우리도 다시 행군을 시작하였다. 나는 그들과 반대방향으로 스적스적 걸어가는것이 못내 안타까왔다. 걸으면 걸을수록 그들과의 사이가 점점 더 멀어져가는것이 서운했고 다시는 만나지 못할것만 같은 영원한 작별처럼 쓸쓸했다. 많은 동무들이 역시 이러한 생각에 잠겨서 음울하게 걷고있었다. 나는 이렇게 속다짐하였다.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가자. 여기에 더 머물러있으면 있을수록 우리앞에는 전도가 없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계시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거기에서만이 우리의 념원인 조선의 독립도 성취할수 있기때문이다. 내 멀지 않아 그대들의 뒤를 따라갈것이다.) 이러한 지향은 내가 속한 독립군 상층내부에서도 생겨나고있었다. 특히 최윤구사령은 독립군이 조선인민혁명군에 련합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내세우고있었다. 그는 한때 백두산일대에서 활동한바 있어서 동만사정을 잘알고있었으며 특히 위대한 수령님에 대하여 경모의 정을 품고있었다. 그는 빈농출신이였고 병사로부터 발전하여 방면군사령관(당시 독립군에는 총사령부밑에 3개의 방면군으로 부대가 편성되여있었다.)의 직위에까지 오른 사람으로서 병사들은 그를 몹시 존경하고 따랐었다. 그도 또한 우리들과 차별없이 접근해서 여러가지 세상형편을 이야기해주었고 때로는 우리가 묻는대로 위대한 수령님의 탁월한 지략과 풍모에 대하여 알려주군 하였다. 그와의 담화를 통하여 우리는 조선인민혁명군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 군대인지를 초보적이나마 알게 되였다. 이러한 과정에 우리앞에는 실로 운명을 좌우하는 획기적인 사변이 일어났다. 그것은 1937년 8월경에 조선인민혁명군대표가 독립군대표를 만나 조국광복회조직에 망라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회담을 진행한것이였다. 이 회담을 통하여 우리는 비로소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조선혁명에 대한 로선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였으며 그이께서 조직하신 조국광복회에 참가함으로써 우리도 참다운 조선인민이 나아가는 길을 따라설수 있다는 신심을 굳게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회담에서는 또한 독립군에서 조선인민혁명군에 들어올것을 제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받아주겠다는것도 제의되였다. 이것은 다름아닌 그이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따뜻한 구원의 손길이였으며 날이 갈수록 암담하며 붕괴의 구렁텅이에서 허덕이고있는 우리를 휘황한 광명의 길에로 인도해주시는 크나큰 배려였다. 회담이 있은 이후 우리는 의식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지휘부내에서도 최사령을 비롯한 많은 량심적인 간부들이 조국광복회 10대강령을 적극 찬성하였으며 독립군이 조선인민혁명군에 편입되여야 한다고 주장하여나섰다. 그러나 당시 총사령이던 문가는 이것을 완고하게 반대하였다. 이해 겨울에 접어들면서 일제는 가장 혹독한 《토벌》을 독립군에게도 들이대였다. 우리는 자주 놈들의 포위에 들었으며 계속 추격을 받게 하였다. 총탄이 떨어져 사령이 지팽이로 전투지휘를 하게 되였다. 겨울을 날 일도 막연하였다. 지휘부에서는 이러한 정황에 부딪치자 완전히 사기를 잃고 그해 겨울은 적《토벌》을 피해 관전현 운지거우치기에 가있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두곳으로 갈라져서 각기 등성이를 하나 사이두고 밀영을 짓고 량식도 마련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독립군부대는 겨울을 보낼수 없었다. 설을 쇠기 위해 공작나갔던 몇사람이 소를 끌고 밀영으로 들어오면서 발자국을 제대로 메우지 못한것이 적에게 발각되여 놈들이 불시로 달려들자 우리는 또다시 산속을 방황하게 되였다. 먹을것도 의지할곳도 없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오직 투항의 길이냐, 그렇지 않으면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넘어가느냐 하는 두갈래의 길이 앞에 가로놓여있을뿐이였다. 부대내에서는 도주자, 변절자들이 생겨났다. 눈이 녹기 시작하고 산에서 눈사태가 골안을 울리는 그 이듬해인 1938년 3월초의 어느날이였다. 지휘부의 명령으로 독립군 전체 성원들이 정렬되였다. 겨우 100명 남짓한 인원이였다. 지휘부성원들이 심중한 낯색들을 하고 우리들앞에 나타났다. 최사령이 우리를 뜻있게 바라보며 미소를 담고있었다. 우리들은 그 어떤 예감에 사로잡혀 숨을 죽이고 무엇인가를 기다리였다. 총사령 문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현재 독립군이 처한 실정을 뜨직뜨직 설명하였다. 그럴 때 그의 볼편은 떨리고 말이 자주 중단되였다. 우리도 사실 가슴이 아팠다. 가까스로 말을 마친 문가는 잠시 숨을 가다듬고나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중에서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갈 의향이 있는자는 앞으로 나서라.》 그것은 너무도 뜻밖에 내린 명령이여서 우리는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알수 없었다. 그가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넘어가겠다는 사람들을 군률에 적용시켜 《본때》를 보이려는 심산일지도 모를 일이였다. 일순간 폭풍직전과 같은 무서운 침묵이 무겁게 흘렀다. (드디여 왔구나.)하는 생각이 번뜩 나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나는 결정적인 시각에 자기가 섰다는것을 의식하고 극도로 긴장하였다. 《아무도 없느냐?》 엎어누르듯 재차 다그치는 문가의 호령이였다. 최사령의 격려하는듯한 시선이 우리를 쭉 훑었다. 나는 아무 주저도 없이 성큼 한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비록 목이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 길에서 물러설수 없다는 굳은 결심이 나를 추동했던것이다. 그러자 나의 뒤를 이어 좌우에서 다른 동무들이 쑥쑥 따라나섰다. 내가 슬며시 곁눈질로 보니 평소에 조선독립을 진정으로 바라며 전투마다에서 가장 용감하던 동무들이 거의다 나서고있었다. 개중에는 이미 나이가 50살을 더 넘긴 로병사들까지 나섰다. 그 수는 부대성원의 반수가 더 되여보였다. 나는 기뻤다. 지휘부에서 어떤 의도밑에서 우리를 불러낸지는 모르나 어쨌든 우리가 그처럼 그리던 위대한 수령님의 품으로 가는 길을 택하여 용감히 나섰다는 오직 그 한가지 생각만으로도 가슴은 부풀어올랐다. 나는 나와 같이 나선 그 동무들이 더없이 미더웠고 그들과 같이 가면 어떤 적들과 맞다들더라도 무서울것이 없으며 어떤 난관이 막아서더라도 자신있게 뚫고 조선인민혁명군 부대로 갈수 있다는 기운이 용솟음치는것이였다. 지휘부성원들은 자기들끼리 한참 무엇인가를 토의하고있었다. 이윽고 문가가 다시 우리앞에 나와 입을 열었다. 《여기 앞에 나온 사람들은 오늘부터 최사령의 인솔하에 조선인민혁명군으로 가서 싸우게 된다. 그것은 현재 독립군이 처한 처지가 곤난하기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도 뒤미처 분산된 소부대들을 모아가지고 뒤따라가게 될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최사령의 인솔하에 희망찬 앞길을 향해 떠났다. 그후 얼마안가서 문가가 인솔한 부대는 봉황성부근에서 일제《토벌대》의 매복포위에 들어 전원이 투항해버렸다. 내가 걸어온 이제까지의 길은 암담하였다. 부모를 따라 국경을 넘어 살길을 찾던 방황의 길, 독립군에 입대하여 붕괴의 구렁텅이에서 속절없이 헤매던 길에서 나는 광명의 길, 행복이 약속된 길에 처음으로 들어섰다. 먹지 못해 배가 고파도 위대한 수령님의 품에 안기러간다는 그 희망으로하여 우리의 심장만은 그냥 높게 고동쳤다. 그이의 품을 찾아가는 길에 있는 험산준령도 굶주림도 우리의 속도를 늦추지 못했다. (어서 그이께서 계시는곳으로 가자, 그래서 우리가 지나보낸 헛된 나날을 메꾸며 힘껏 싸우자.) 우리의 행군은 며칠을 두고 계속되였다. 먼저 떠나보낸 련락원이 약속된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장소에는 적《토벌대》가 나타났다. 사흘을 굶고난데다 또 눈길속의 강행군으로 몸은 더없이 지쳤으나 우리는 놈들과 싸우면서 그이께서 계시는곳을 향해 전진했다. (우리들이 가는곳, 그곳에는 무기도 총탄도 량식도 그리고 따뜻한 솜옷도 우리들을 기다리고있다.) 이렇게 우리는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걷고 또 걸었다. 며칠후에 우리는 집안과 관전경계지점인 어느 골짜기에서 마중나온 유격대동무들과 만났다. 이리하여 나는 1938년 3월에 조선인민혁명군에 입대하여 위대한 수령님의 전사가 되였다.(최윤구동지는 사령부 참모의 직위에서 사업하다가 1938년 12월 화전현 지방전투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그후 나는 남패자에서 오매에도 그리고 흠모하여오던 위대한 수령님을 드디여 만나뵙게 되였다. 그때 나는 그저 그이의 품에 안겨울고만싶은 그러한 격동된 충격에 자기를 억제하지 못하였다. 그이의 은정이 넘쳐흐르는 미소와 자애가 깃든 격려의 말씀은 나의 온몸에 파고들었다. 나의 손을 잡아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손길에서 나는 나만이 아니라 우리모두와 그리고 조선인민을 이끌어주시고 포옹해주시는 그이의 위대한 힘을 느꼈다. 그 순간 나에게는 그이의 명령이라면 목숨을 바쳐도 두려울것이 없다고 생각되였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냐. 이제는 누구도 나를 김일성장군님곁에서 떼여놓을수 없다. 그이께서 부르시고 이끌어주시는 그곳으로 나아가는 길만이 우리모두의 진정한 행복의 길이니 어찌 그 길에서 내가 물러서며 어떻게 그 품을 떠나서 살수 있을것인가. 나는 영원히 장군님과 같이 가겠다. 그리고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생사를 걸고 싸우고 또 싸우겠다.) 나는 이렇게 위대한 수령님앞에서 엄숙한 맹세를 마음속깊이 다지고 또 다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