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사상에 고무되여

김성국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친솔밑에 항일유격대가 처음으로 장백으로 나오던 해이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여나 일찌기 어머니까지 여읜 나는 어려서부터 지주놈의 머슴살이를 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리하여 그해에도 나는 장백현 가재수부락의 어떤 지주놈의 집에서 아침일찍부터 저녁늦게까지 등뼈가 휘도록 일을 했다.

그때 나의 아버지는 팔도구강변에 있는 중국인지주의 고용농으로 외따로 떨어진 농막에서 살며 일했다. 그러다나니 우리는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도 만나보기조차 힘들었다. 일을 죽게 해도 살림은 쪼들리기만 했다.

이러한 어느날이였다.

나는 그날도 역시 마을에서 좀 떨어진곳에 있는 밭에 나갔다. 그런데 내가 한창 일을 하고있는데 밭머리에서 키가 후리후리한 농민복차림의 한 청년이 불쑥 나타나 나에게로 가까이왔다. 나는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마치 오랜 구면친구나 만난듯 정다운 얼굴에 벙글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담배나 한대 붙일가. 더운데 좀 쉬여서 하는게 어떤가?》하고 나에게 말을 걸며 밭머리의 돌우에 걸터앉았다.

청년은 어딘지모르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그러한 사람이였다. 그래 나는 땀도 들일겸 하여 인차 밭머리로 나갔다.

청년은 내가 몇살 났으며 부모들은 무엇을 하는가 하는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부락내의 형편을 물어보는것이였다.

그리고나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조선사람들이 왜 제나라에서 살지못하고 여기까지 쫓겨와서도 헐벗고 배를 곯으며 이 고생을 해야 되는지 아오? 그게 다 왜놈들때문이요. 우리는 왜놈들을 내쫓아야 하오. 그리고 우리처럼 가난한 사람이 잘 살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단말이요.》

이렇게 말하는 청년의 두눈은 유난히 빛나는것이였다. 일제놈들과 지주들을 미워한 나는 그의 말에 점점 끌려들어가 시간이 가는줄 몰랐다.

그때 청년은 알기쉬운 말로 지금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우리 나라를 착취가 없고 모든 사람이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로동자, 농민이 나라를 다스리며 누구나 일을 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잘사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일제놈들과 싸우고있다는것을 말하였다.

이러한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가 보통 농촌에 있는 청년과는 다르다는것을 느끼였다. 그래서 그에게 어디서 왔는가를 캐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는 빙그레 웃음을 띠운채 나를 똑바로 보며 《김일성장군님께서 이끄시는 조선인민혁명군에서 왔소.》하는것이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때 장백일대에서는 위대한 수령님께서 령도하시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용감한 투쟁에 대한 소문이 쫙 퍼진 때였다. 사람들은 서로 만나기만 하면 일제놈들을 감쪽같이 소탕해치우는 유격대의 이야기를 신이 나서 하며 그들이 하루속히 장백현지방으로 나오기를 고대하였던것이다.

유격대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벌써 여러번 들은바가 있는터라 기쁨에 울렁거리는 가슴으로 그에게 바싹 다가붙어 알고싶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더 물어보았다.

그리고 나는 이날밤 12시경에 그와 이미 약속한 지점에서 다시만나 그를 아버지가 계시는 농막으로 안내했다. 그 청년은 유격대에서 파견한 정치공작원이였는데 조국광복회 조직망을 조직하기 위해 이곳으로 나왔던것이다.

나는 그날밤을 뜬눈으로 새웠다. 정치공작원의 말이 가슴속에 뜨거운 불씨를 안겨주었기때문이였다.

그후 나는 이곳에서 얼마 멀지 않은 독산이라는곳에서 그와 여러번 만나게 되였고 그해(1936년) 가을 유격대가 장백으로 나오자 곧 입대하게 되였던것이다.

유격대에 들어간후에 나는 우리가 무엇때문에 혁명을 하며 또 반드시 혁명을 해야 하는가를 더욱 똑똑히 깨닫게 되였으며 혁명가란 어떠한 품성을 가져야 하는가를 알게 되였다.

나는 당시 위대한 수령님께서 친솔하신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에서 복무하게 되였으므로 이런 문제에 대하여 직접 그이에게서 여러번 이야기를 들은적이 있다.

어느때엔가 한번은 하루종일 행군을 한후 숙영지에 도착하였을 때다. 며칠째 끼니도 변변히 잇지 못한 대원들은 이날도 눈이 허리를 치는 험한 산을 몇개나 넘었는지 몰랐다. 허나 모두들 숙영지에 도착하자 우등불을 피운다, 눈을 녹인 물을 끓인다 하며 서둘고있었다. 그렇게 곤난한 조건에서도 대원들의 높은 사기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이것을 보시고 매우 만족해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저녁 우등불가에 있는 우리들과 자리를 같이 하시고 혁명가들이란 곤난을 극복할줄 알아야 하며 언제 어떤 어려운 처지에 놓이더라도 혁명적절개를 굽히지 말고 투쟁해야 합니다라고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혁명이란 결코 쉬운것이 아닙니다. 더우기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무장한 흉악무도한 일제침략군을 반대하여싸우는 우리에게는 앞으로도 곤난이 많을것입니다. 그러나 그 곤난은 모두다 극복할수 있는것들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사상적으로 어떻게 준비되였고 어떻게 싸우는가에 달려있습니다.

때문에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깊은 산중에 있거나 먼바다속의 섬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언제어디서나 혁명사업을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한마디한마디에 깊은 뜻이 담겨진 그이의 말씀은 우리들의 가슴속에 새로운 결의를 굳게 간직하게 했다.

이렇게 우리는 그이에게서 직접 말씀하시는것을 듣는외에도 《위대한 사회주의10월혁명의 의의》, 《제국주의란 무엇인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새것은 승리하고 낡은것은 멸망한다》등 여러가지 제목으로 정치토론회를 활발히 진행하는 과정을 통하여 조국이 반드시 광복될 날이 온다는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되였다. 매일과 같이 전투가 계속되고 행군이 계속되는 어려운 조건에서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혁명의 매 시기와 계단마다에 창조적으로 빛나게 적용하는 전략전술을 수립하시여 우리를 승리에로 인도하시였다.

뿐만아니라 그이께서는 대원들에게 인민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그들의 힘에 의거해 사업하는 바로 거기에 혁명가로서의 고상한 품성의 특징이 있다는것을 가르치시면서 우리들이 인민을 사랑하고 존경할줄 알아야 하며 원쑤를 미워할줄 알아야 한다고 교양하시였다.

이런 말씀을 하실 때면 그이께서는 의례히 고기는 물을 더나서 살수 없는것과 같이 유격대는 인민을 떠나서는 살수없다는것을 이야기하시고는 우리들에게 항상 인민대중을 믿고 그들의 힘에 의거하여 사업할줄 알아야 하며 대중을 교양하고 대중에게서 배우는것, 이것이 바로 혁명가들이 일하는 방법의 첫째가는 특성이라는것을 간곡히 가르치시였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의 바로 이 사상으로 살고 이 사상으로 싸웠기에 인민들의 그렇듯 지극한 지지와 성원을 받을수 있었던것이다.

그리고 그이께서 말씀하신것처럼 강의한 투지로 난관에 부닥치면 부닥칠수록 오히려 더 분발하여 싸워야만 곤난을 반드시 극복할수 있다는것을 생활을 통하여 체험했던것이다.

지금도 나에게는 잊혀지지 않는 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소부대공작을 하던 1943년 여름이다. 당시 나는 훈춘현 두황자와 왕청현 허스포부근에서 소부대활동을 하다가 적들에게 발견되였다.

나는 불의에 사격을 받았으나 놈들을 즉석에서 여러놈 쏴넘겼다.

허나 그때 불행히도 왼팔에 다섯군데와 오른팔에 한군데를 부상당한데다가 왼발목에 골절상까지 입었다.

나는 동지들하고도 멀리 떨어졌으므로 부득불 산중에 혼자남게 되였다. 출혈이 심한데다가 한쪽 발목뼈까지 상한 나는 풀섶에 털썩 쓰러진 다음에는 아예 온몸을 꼼짝하지 못했다.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입에는 아무것도 대보지 못했다. 그렇게 되자 정신이 더욱 아찔해지며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귀전에서는 그냥 윙윙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서 적들이 있는곳은 멀지 않았다. 그러므로 만약 놈들이 내가 있는곳을 아는 날이면 큰일이였다.

이런것을 생각한 나는 놈들에게 붙잡히기보다는 차라리 제손으로 제목숨을 끊는것이 나으리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다음순간 나의 머리에는 문득 언젠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공산주의자는 어떤 깊은 산중이거나 바다속의 섬에 있어도 혁명을 위하여 실망을 모르고 살아나가야 하며 싸워나가야 합니다라고 하시던 말씀이 번개같이 스치였다.

(그렇다. 살아야 한다. 혁명을 위해서는 살아서 싸워야 한다. 이만한 곤난을 이기지 못하다니…)

이렇게 결심한 나는 온몸의 힘을 모아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배밀이로 기여다니며 생풀을 뜯어먹었다.

(동무들이 꼭 올것이다. 그들이 찾아올 때까지 두달이고 석달이고 아니 1년도 좋고 2년도 좋다. 기다리자.)

이리하여 나는 그 산중에서 혼자 27일간이나 낟알이라고는 한알도 구경못한채 풀과 나무껍질로 살아나가다가 마침내 임철동지를 비롯한 15명의 소조원들을 만나 다시 본부대로 갈수 있었던것이다.

물론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이러한 일을 겪은것은 결코 나만이 아닌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백절불굴의 투지로 그러한 곤난을 물리치며 살아나갔고 싸워나갔다.

이 불굴의 투지가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은 바로 우리 혁명이 반드시 승리하고 조국이 광복된다는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위대한 혁명사상을 확고히 믿었기때문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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