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시여
전 문 섭
항일무장투쟁의 승리적행정을 회상할 때마다 우리는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완강한 혁명적전개력과 탁월한 전략전술에 대하여 생각하게 된다. 장구한 항일무장투쟁의 모든 행정이 다 그러하였지만 1939년 5월 무산지구전투와 1940년초에 다시금 조국으로 진군하던 때도 바로 그이의 비상한 혁명적전개력과 탁월한 전략전술의 빛나는 승리를 온 천하에 시위하였다. 1939년 5월 위대한 수령님의 령활한 지휘에 의하여 승리적으로 진행된 무산지구전투는 중국본토침략전쟁에 혈안이 되여 날뛰던 일제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조선인민에게 승리의 신심을 북돋아주고 그들을 반일투쟁에로 힘있게 고무추동하였다. 무산지구로 진공한 후 우리 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는 백두산동부지대인 화룡일대에 진출하여 활동을 계속 하였다. 백두산동부지대에로 활동의 중심지를 이동한것이야말로 위대한 수령님의 령도의 현명성과 령활한 지략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실례로 되는것이다. 일제는 조국광복회를 비롯한 지하혁명조직에 대한 대검거선풍을 일으킨 후 계속 백두산서남부일대에 삼엄한 경계망을 펼쳐놓았다. 이와 같은 당시의 정세를 가장 정확히 포착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의 주목이 아직 덜 돌려지고있던 백두산동부지대(1930년대초부터 혁명적으로 단련된 군중적지반이 있었을뿐만아니라 국내와 지리적으로 련결된 지대)로 활동의 중심을 이동하는 현명한 조치를 취하시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화룡에 진출하시자 곧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시여 지방조직들과 련계를 맺고 조국광복회, 반일회 망을 조직하게 함으로써 혁명의 군중적지반을 튼튼히 다지게 하시는 한편 다시금 적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할 준비사업을 조직지도하시였다. 1939년 여름 우리 부대가 올기강부근에서 활동하고있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령부성원들을 친솔하시고 국경지대인 두만강연안 옥돌골에 나가시여 몸소 지방인민들과의 련계를 취하시는 한편 김준동지(리동걸동지의 별명)에게 이 지대에서 정치공작을 진행하여 군중을 혁명조직에 묶어세우며 무산지구와의 련계를 취할 임무를 주시였다. 그이께서는 장백지구에서의 정치공작경험을 살려 정치공작원들이 무장을 갖춘 소부대인원으로 이동해다니면서 활동하라고 가르치시였다. 그리하여 김준동지는 무장한 몇동무를 데리고 그곳에 남게 되였다. 우리 부대에서는 이와 아울러 겨울나이준비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우리 부대가 올기강류역에서 종적을 감추자 적들은 《토벌》력량을 집중하여 여름내 산발을 뒤지며 날뛰였으나 종시 우리가 간곳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그러자 적들은 길림에다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관동군》,《지나파견군》, 위만군, 헌병, 경찰, 자위단 등 일체 무장력량을 지구별로 장기주둔시키고 삼엄한 경계망을 펼쳐놓았다. 뿐만아니라 놈들은 《토벌사령부》내에 소위 《길림위원회》라는것을 두고 군대, 사법, 경찰, 행정, 정탐기관의 두목들과 소위 《공산군토벌전문가》들을 모아놓고 《토벌방침》을 세우는 등 갖은발악을 다하였다. 이리하여 1939년 하반년에 화룡일대의 골짜기마다에는 적《토벌대》의 대병력이 장기주둔하고 심산오지를 샅샅이 뒤지였다. 이런 형편에서 주도권을 계속 틀어쥐고 적을 공격한다는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바로 이럴 때일수록 적극적이고도 대담하게 활동할것을 강조하시였고 적의 약점을 포착하여 련속적으로 타격을 가하는 령활한 작전을 세우시였다. 1939년 12월 하순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부대를 친솔하시고 화룡ㅡ안도현경을 출발하여 돈화현쪽으로 진격하시였다. 돈화오지에 진출한 우리 부대는 륙과송목재소를 치고 뒤이어 쟈신즈목재소를 습격하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지휘하에 륙과송, 쟈신즈목재소를 습격한것은 화룡, 안도지대에 집중되여 우리부대를 미친듯이 추격하던 적《토벌대》력량을 분산시키는 동시에 이 전투를 통하여 목재소로동자들을 새로 유격대에 받아들여 우리의 대오를 확대강화하려는 목적에서였다. 화룡지대에서 빠져나와 전격적으로 돈화의 큰 목재소들을 습격한 이 령활한 작전은 적들로 하여금 완전히 넋을 잃게 하였다. 놈들은 아무리 승천입지하는 재주를 가진 《공산군》일지라도 자기들의 경계망속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리라 타산하였고 더우기 우리 부대가 그렇게 북으로 뻗어 전진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였던것이다. 적들은 륙과송, 쟈신즈전투에서 제놈들이 녹아났다는 급보를 받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돈화오지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때는 벌써 우리 부대가 많은 전리품을 로획하고 적지 않은 신입대원들까지 받아들여가지고 안도ㅡ무송현경에 와있을 때였다. 쟈신즈전투가 끝난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로획품을 지고온 수백명의 로동자들앞에서 몸소 정치사업을 하시였다. 그때 목재소로동자들앞에서 하신 그이의 연설은 지금도 나의 기억에 생생히 떠오른다. 조중 두 나라 인민은 일본제국주의침략으로 말미암아 혹심한 억압과 착취속에서 신음하고있습니다. 우리는 나라를 빼앗기고 온갖 권리를 박탈당한 망국노의 쓰라린 운명에 처하여있습니다. 우리 나라 속담에 《나라없는 사람은 상가집 개만도 못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망국노ㅡ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말입니까. 당신들은 인민의 진정한 아들들이며 자기 조국과 인민의 운명을 량어깨에 걸머지고 나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찌 사랑하는 부모형제자매들이 일본강도놈들의 흉악한 발밑에 짓밟히는것을 보고만 있을수 있겠습니까! 우리 유격대는 바로 일제침략자들을 물리치고 조국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싸우는 인민의 군대입니다. 만약 당신들이 사랑하는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원하고 망국노의 수치스러운 생활에서 벗어나려거든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반대하여 용감히 싸워야 할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총을 들고 원쑤를 칠 각오를 가진 동무들은 유격대에 참군하여야 합니다! 그이의 말씀이 끝나자 한 청년로동자가 손을 쳐들며 《나도 싸우겠습니다!》하며 일어섰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서로 앞을 다투어 수많은 로동자들이 입대를 탄원해나섰다. 이리하여 륙과송에서 새로 들어온 동무들까지 합쳐서 200여명의 신입대원들이 편입되여 우리 부대의 력량은 더욱 확대강화되였다. 기세충천한 우리 부대 전체 성원들은 안도ㅡ무송현경으로 행군해나갔다. 우리 부대가 무송현 백석탄부근에 이르렀을 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직 날이 저물지 않았는데 숙영준비를 할것과 가설무대를 만들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시였다. 우리들은 기쁨에 넘치여 백양나무를 베여 큼직한 가설무대를 만들었다. 천막을 이어서 풍을 치고 공연종목도 써붙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히 공연을 지도하시였다. 호각이 울리며 막이 열리자 합창, 독창, 무용 등 다채로운 공연이 련속되였고 나중에는 유격대의 활동을 보여주는 연극까지 상연되였다. 모든 대원들이 기쁨에 휩싸였다. 특히 신입대원들은 순식간에 밀림속에 큰 무대가 생기고 다채로운 연예공연이 벌어지는것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해하였다. 몇몇 신입대원들은 자진하여 악기를 가지고 무대에 뛰여올라 노래를 불렀다. 적들의 대군이 우리를 찾아 2중3중의 포위망을 늘이면서 돈화오지로 쏠리고있던 바로 그때에도 우리는 이처럼 혁명적락천성으로 충만된 생활을 하면서 승리에 대한 신심을 더 굳게 하였다. 그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송화강류역 백석탄밀영에서 군정학습을 조직지도하시였다. 그 어려운 시기에 장기간 한곳에 머물러있으면서 군정학습을 대규모적으로 진행한다는것은 어려운 일이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적들의 동태로 보아 얼마동안은 우리가 있는 곳을 알아내지 못하리라는것을 판단하시고 대담하게 신입대원들을 집중적으로 훈련시킬 전투적인 계획을 짜시였던것이다. 이것은 앞으로의 보다 큰 작전을 위하여 취하여진 현명한 조치였다. 그이께서는 군정학습을 2기로 나누어 조직하시였다. 우선 제1기에는 필요한 학습을 끝내고 제2기에는 그것을 더욱 심화시키는 방향에서 계획을 세우시였다. 이것은 만약 정세가 급변하여 제2기를 계속 못하고 제1기만 마치는 경우에도 능히 적을 타승할수 있을 정도로 군사정치훈련을 받을수 있도록 예견성있게 작성한 전투적인 계획이였다. 학습방법도 전투적이였다. 우선 중대간, 개인간에 경쟁적으로 군정훈련을 진행하고 성적에 따라 1, 2, 3등으로 나누어 상을 주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첫날부터 맹렬한 군정훈련이 진행되였다. 정치학습은 중대별로 진행하였는데 정치지도원들이 담당하고 강의를 하였다. 새로 입대한 동무들중에는 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있었기때문에 구대원들이 한두사람씩 개별담당하여 가르쳐주게 하였다. 글자를 모르는 동무들에게는 하루에 몇자씩 가르쳐주었으며 또한 구호 한절이나 문장 몇줄씩을 따로외워쓰도록 하였다. 또한 그들에게는 《조국광복회10대강령가》를 배워주어 노래를 부르면서 그 내용을 파악하게 하는 방법도 적용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몸소 구상하신 이 다양한 학습방법에 의하여 불과 한달어간에 신입대원들이 모두 글을 읽고 쓰게 되였으며 정치의식이 훨씬 높아지게 되였다. 특히 그이께서는 정치학습조직과 함께 군사훈련에도 정력을 기울이시였다. 그곳에서 우리는 유격전술뿐만아니라 정규군의 전술까지도 습득하였다. 그이께서는 지휘관들과 사령부성원들에게 정규군의 훈련규범도 가르쳐주시였고 언제나 친히 전술훈련, 사격훈련을 지도하시였다. 지금도 나는 그이께서 어떤 무기든지 능숙하게 분해결합하시며 가르쳐주시던 일과 몸소 사격에서 시범동작을 보여주시던 일을 잊을수 없다. 당시 우리는 적의 무기를 빼앗아 사용하던것만큼 무기종류도 여러가지였고 다루는 법도 각이하여 웬만해가지고는 모든 무기를 다 능숙하게 다루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어떤 종류의 기관총이나 보총, 권총 할것없이 모두 능숙하게 분해결합하시였고 백발백중의 사격술로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주시였다. 우리들은 바로 사령관동지처럼 전술에 능하고 무기에 정통하며 사격에서는 백발백중하는 그이의 훌륭한 전사가 되리라는 결심으로 군사훈련에 더욱 열성적으로 참가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1기군정학습이 끝났을 때 우리는 자신들이 정치군사적으로 훨씬 튼튼히 단련된것을 느낄 정도로 되였다. 제1기훈련이 끝나던 날 그이께서는 군정훈련에서의 경쟁들을 총화하시고 1등에 시계, 2, 3등에 각각 만년필을 시상하시였다. 그날밤 우리들은 모두 기쁨속에서 포근하게 잠들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예견치 않았던 비상소집명령이 내리였다. 전체 대원들은 재빠른 동작으로 무장과 장구, 천막과 식사도구까지 정리하여가지고 순식간에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경위중대장과 련대장동지들이 위대한 수령님께 비상동원상태를 보고하였다. 그이께서는 대렬을 일일이 검열하시고 천막자리까지 다 돌아보시였다. 모두가 무기와 일체 장구들은 물론 조그마한 종이쪼각 하나 버리지 않고 나왔다. 그이께서는 비상소집결과에 대하여 매우 만족해하시였다. 비상소집을 총화하시면서 그이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불과 한달동안에 신입대원들이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훈련되였다는것은 대단한 성과입니다. 이만하면 지금이라도 조국으로 진군할수 있습니다. 그후 제2기군정학습이 시작된지 10여일이 지난 1940년초 어느날이였다. 우리는 제2기학습을 끝마치지 못한채 그곳을 뜨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것은 우리의 밀영을 알아낸 적들이 대병력으로 달려들기 시작하였기때문이였다. 우리 부대의 행방을 알아차리자 적들은 《공산군을 전멸시키겠다.》고 하면서 전체《토벌》력량을 집중하여 공격하여왔다. 놈들은 집요하게 우리를 추격하는 한편 산릉선, 골짜기들에 미리 진을 치고 무선기까지 설치하여 호상 련락하는 등 미쳐날뛰였다. 적들은 이외에도 주구들로 구성된 《협화회》, 《신선대》 등을 내세워 우리를 귀순시켜보려고 갖은 악선전과 모략을 다하였다. 산과 골짜기마다에 《이제 남은것은 너희들뿐이다. 무모하게 대항하지 말고 귀순하라.》는 삐라를 무수히 뿌리거나 변절자들을 귀순공작에 동원하면서 독약을 뿌린 과자와 음식물을 각처의 산전막에 갖다두는 등 온갖 악랄한 방법을 다 썼다. 적들의 이러한 공세에 부닥치자 극히 일부 비겁한자들은 변절하여 투항하였다. 변절자들이 나타나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그런자들은 부대에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혁명가요에도 《비겁한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기를 지키리라》고 씌여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끝까지 조선혁명의 기발을 지켜낼것입니다. 이처럼 그이께서는 간고한 속에서도 조선혁명을 앙양발전시킬 적극적이고도 주동적인 작전계획을 짜시였고 적들이 없는 곳으로 피해다닌것이 아니라 적들이 집중되여있는 국경지대, 무산지구에로 다시금 진군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원 1명을 파견하시여 무산군 창평일대에 대한 자세한 정황을 장악하시고 다시금 국내에로 진군하여 일제에게 치명적타격을 주며 생지옥속에서 신음하는 조선인민에게 다시금 조국광복의 신심과 민족재생의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하시였다. 이리하여 그이께서는 령활한 전술로 적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부대를 국경지대로 진출시키시였다. 당시 식량사정으로 우리 부대앞에는 커다란 난관이 조성되였다. 목재소에서 해결했던 약간의 대두박도 부대가 화라즈를 넘어 대마록구골안에 이르렀을 때 완전히 떨어졌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대마록구목재소를 습격하고 식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정찰조를 파견하시였다. 이렇게 하여 우리 부대는 대마록구진공전투를 진행하고 밀가루 수백포대를 비롯한 많은 전리품을 로획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전투후에 부대를 화룡ㅡ안도현경 화라즈밀림속에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게 하시였다. 적들은 대마록구로 몰려와서 우리의 발자국을 따라 달려들었으나 위대한 수령님의 지략에 의하여 결국은 다시 대마록구로 되돌아가 《또 공산군에게 속았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놈들은 화김에 다시 력량을 수습하여가지고 대마록구오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놈들을 기묘하게 따돌린 우리 부대는 그때 벌써 화라즈근방에 와서 숙영하고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벌써 놈들이 언제쯤이면 우리 있는데까지 달려들리라는 시간까지도 타산하시고 적을 칠 계획을 수립하고계시였다. 그이께서 예측하신대로 그날밤 적의 정찰병들이 우리 보초선에까지 기여들었다. 그러나 놈들은 우리 부대의 반격에 질겁하여 도망치면서 군용지도를 버리고갔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 군용지도를 보시고 오백룡련대장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시였다. 《놈들은 가까이 따라왔소. 이놈들을 가만두면 자꾸 따라올것이요. 동무가 오늘밤중으로 몇동무를 데리고가서 놈들을 족쳐놓고 오시오.》 오백룡련대장이 숙영지에서 떠난지 얼마 안되여 아래켠 골짜기에서 골안이 떠나갈듯 한 요란한 총성이 울리였다. 얼마후에 오백룡련대장이 돌아와서 위대한 수령님께 보고하였다. 놈들은 여러곳에 우등불을 피워놓고 농민들을 동원하여 나무를 찍느라고 고아대면서 우리의 소부대가 코밑까지 들어가도 모르더라는것이였다. 그래서 오백룡동지는 적들을 실컷 답새겨놓고 옆으로 빠져나오는데 계속 저희들끼리 싸우고있더라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보고를 들으시고 웃으며 말씀하시였다. 《이제는 놈들이 따라오지 못할것이요.》 과연 다음날부터는 적이 따라오지 못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놈들은 그날밤 자기들끼리 총질을 하여 60여명이나 죽고 부상자는 그보다 더 많이 났기때문에 부상자와 시체를 거두어가지고 황황히 달아나버리고말았던것이다. 우리 부대는 그길로 화라즈등판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수일간 휴식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적들이 우리의 종적을 찾아 헤매다가 기진맥진하여 도로 제소굴로 돌아갔을무렵에 다시 부대를 창평방향으로 진출시키시였다. 그것은 1940년 3월 하순이였다. 우리 부대는 눈녹은 양지쪽 릉선을 따라 대마록구로 넘어가는 높은 령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얼마쯤 행군하다가 적의 군수물자운반에 강제로 동원되였던 농민들을 만나게 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적들의 대부대가 아군을 뒤따르고있다는것이였다. 이때 우리 부대내에서는 환자들이 나기 시작하였다. 환자들을 담가에 눕히고 가느라니 행군속도가 더디게 되였다. 그런데 그이께서는 새벽녘에 행군을 멈추게 하시더니 아무리 위급한 정황속이라 해도 환자들에게 물이라도 끓여먹여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미음을 쑤어 환자들에게 먹이게 하신 다음 몇몇 대원들을 선발하여 식량을 가지고 옆으로 빠져들어가서 밀영을 짓고 환자들을 간호하라고 지시하시였다. 언제나 그러하였지만 우리는 그때에도 대원들에 대한 그이의 지극한 사랑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환자들을 후송하고 다시 행군을 시작하자 그이께서는 지금까지 창평으로 향하여 나가던 행군방향을 동남쪽으로 돌리라고 지시하시였다. 그리하여 우리 부대는 국경으로 나가던 방향을 돌리여 대마록구목재소가 있는 곬을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이께서는 행군하시면서도 계속 주위의 지형을 살피시다가는 지도를 펴보군 하시였다. 그날 사령관동지께서는 웬일인지 대마록구 바로 코앞에서 일찌기 숙영할것을 명령하시였다. 적이 가까이 따르는 정황에서 이것은 좀체로 보기드문 전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아직 날이 채 밝기전인 새벽에 련대장들에게 앞으로의 부대활동방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였다. 《오늘은 뒤따르는 놈들을 족쳐놓아야 하겠소. 놈들을 뒤에 달고 무산으로 가다가는 창평을 치기 어려울뿐만아니라 친다고 하여도 빠져나오기가 힘들것이요. 무산지구에 대한 진공을 미루더라도 우선 추격하는 놈들부터 잡아치워야겠소.》 그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다음 전투명령을 하달하시였다. 이리하여 마에다부대를 순식간에 전멸시킨 그 유명한 홍기하전투가 벌어졌던것이다. 이 타격이 얼마나 적들을 전률시켰던지 뒤따르던 봉천부대(위만군의 대병력)는 전투가 끝날 때까지 오지도 못하고 멀리서 헛총질만 하였다. 국경을 넘어서 달려온 삼장주둔 수비대놈들도 덤벼들지 못하고 헛총질만 하였다. 《저놈들을 보오. 무서워서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있소. 저 먼총질을 하는것은 길을 좀 내달라는것이요. 기관총으로 놈들을 한바탕 혼내주도록 하오.》 사령관동지께서는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방금 로획한 6정의 기관총을 걸어놓고 집중사격을 하였다. 그때에는 적들이 먼총질도 못하고 달아나버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홍기하전투에서 겁을 먹은 놈들이 국경연안을 뒤지며 대소동을 일으킬것이고 우리 부대의 뒤를 결사적으로 쫓아오리라는것을 미리 타산하시고 부대를 거느리시고 유유히 다시 화라즈방향으로 철수하시였다. 며칠이 지나 국경연안과 화룡, 안도일대에 《토벌대》놈들이 집중되였다. 그야말로 백두산동부오지에서는 발걸음을 옮기기 어려운 형편이 조성되였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님의 완강한 혁명적전개력, 어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하고 적의 약점을 리용하여 련속적으로 적을 때려부시는 투쟁정신 그리고 그이의 림기응변의 령활한 전술에 의하여 우리 부대는 이 난관을 뚫고 계속 전진했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어려운 속에서도 정치공작원들을 안도현 장인촌, 류수촌 등지에 파견하시여 조국광복회, 반일회에 군중을 묶어세워 혁명의 지반을 튼튼히 다지는 사업을 계속하시였으며 적들에게 련속적으로 패배를 주는 진공작전을 조직하시였다. 우리 부대가 적의 포위망을 빠져 안도현 3도구에 이르렀을 때 그이께서는 놈들이 갈피를 못잡도록 3개 부락을 동시에 진공할 대담한 작전을 계획하시였다. 이리하여 7련대, 8련대, 경위중대가 각각 한개 부락씩을 담당하고 각이한 방향의 부락을 동시에 치는 전투가 진행되였다. 적들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을 맞은격으로 대혼란에 빠졌다. 자기들이 철석같이 믿고있던 큰 부락들을 동시에 얻어맞은 놈들은 《이것은 대부대라도 이만저만한 대부대가 아니다.》라고 겁에 질려 벌벌 떨기만 하였다. 혼비백산한 놈들은 얼마후 부근의 《토벌대》를 부랴부랴 주어모아가지고 우리 부대를 미친듯이 따라왔다. 그러나 우리 부대는 눈녹은 양지쪽을 리용하여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놈들은 밤새워 뒤따라왔으나 우리 부대의 종적을 끝내 찾지 못하고 되돌아가는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간고한 항일무장투쟁의 전행정에서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항일유격대는 혁명의 기치를 끝까지 고수하여 가는곳마다에서 혁명적지반을 튼튼히 축성하며 유격대의 대오를 장성강화하면서 령활한 전략전술로써 백전백승하였다. 바로 그러하였기에 우리 조선혁명은 자기 명맥을 끝까지 줄기차게 이어나갈수 있었고 조선인민은 숨막히던 그 생지옥속에서도 신심을 잃지 않고 조국광복의 대사변을 준비있게 맞이할수 있었던것이다. 여기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나는 조선혁명에 바치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후의 공헌에 대하여 다시금 가슴뜨거이 느끼게 되며 그이의 가르치심을 따라 조국의 번영과 륭성발전에 헌신할 결의를 더욱 굳게 다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