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반 촌 밀 영 에 서 전 순 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신 항일무장투쟁시기에 있은 일이다. 우리 녀성유격대원들은 헤아릴수 없는 애로와 난관속에서 부상당한 혁명동지들을 간호할 때가 많았다. 깊고 음침한 밀림속에 시간을 다투는 중상자를 눕혀놓았을 때 그들앞에는 아무런 의료시설도 약품도 없었다. 다만 자기앞에 맡겨진 혁명임무에 대한 충직성, 혁명전우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 그로부터 나오는 정성ㅡ이것 하나로 혁명동지를 죽음으로부터 소생시켰으며 그들을 전부 대오로 다시 돌아갈수 있게 하였다. 1937년 나는 부대에서 멀리 떨어진 다반촌밀영에 혼자 남아서 소나허전투에서 부상당한 오응룡, 한종환, 김종협동지들을 간호할 임무를 받게 되였다. 우리에게는 군의도 없었고 아무런 의료기구도 없었다. 약이라고는 내가 부대를 떠날 때 가지고간 옥도정기 한병이 있었을뿐이였다. 한사람도 아닌 중상자들을 의료기구도 약품도 경험도 없이 어떻게 치료해낼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근심이 되여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혁명이 나에게 맡겨준 전투임무, 이것을 실행 못한다면 혁명전사로서 자격이 없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감당해내야 한다고 우선 자신을 채찍질했고 자신부터 확고한 신심을 가지기에 노력했다. 나는 동지들을 간호하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서 동지들의 상처를 소금물로 씻어내고 약을 바른 다음 붕대를 갈아대며 얼마 안되는 통강냉이를 조금씩 매돌에 갈아서 죽을 쑤어 식사를 보장하는 일 그리고 나무를 해다가 병실에 불을 지피는 일, 이러한것이 나의 중요한 일과였다. 그러나 혼자서 이 일을 담당했던것만큼 이른새벽부터 밤이 늦도록 거의 앉아보지 못하고 분주히 돌아가야 하였다. 키를 넘는 매돌을 혼자서 세차례씩 돌리고 신음하는 중상자를 간호하여 밤을 꼬박 새고나면 일어설 맥조차 없어지는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러나 신음하는 동지들을 생각할 때 자신의 피곤은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생각되였고 잠시도 쉴수가 없었다. 동지들은 그들대로 나에게 괴로움을 덜 끼치기 위해 고통을 참아가면서 누워서라도 무엇인가 나를 도와주지 못해 안타까와했다. 오응룡동무는 아픔이 좀 가라앉을 때면 글을 배워야 한다고 일깨워주면서 나를 곁에 앉히고 한자한자 가르쳐주었다. 나는 얼마나 고마운지 몰랐다. 그럴 때면 나의 눈앞에는 어린시절에 당한 쓰라린 추억이 한꺼번에 떠올라 목이 메였다. 원쑤놈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살길을 찾아 산설고 물설은 이국땅을 헤매는 우리 일가에는 그 어디를 가나 빈궁과 학대, 멸시만이 기다리고있었다. 식솔을 거느리고 정처없이 방황하던 아버지는 내가 7살 때 요하현 소재하 동촌이란 곳에서 다시 소작살이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여기라고 나을리는 없었다. 일본 관헌들과 지주놈들의 2중3중의 착취로 빚은 해마다 늘어만갔다. 가을걷이를 끝낸 다음날부터 돌피이삭을 훑어다 죽을 쑤어먹는 형편이였으니 학교에 갈 생각은 엄두도 낼수 없었다. 나는 손이 북두갈구리같이 되도록 김을 매야 했고 험한 고개를 넘어 지주놈이 경영하는 약담배밭으로 품팔이를 다녀야 하였다. 내가 열세살나던 해에 아버지가 병에 걸려 신음하다가 약 한첩 못써본채 돌아가고나니 그런 생활이나마 지탱해나갈수가 없었다. 빚쟁이들은 한꺼번에 달려들어 가장집물을 털어가고 나중에는 오막살이초가마저 헐어갔다. 설한풍이 휘몰아치는 길바닥에 나앉은 우리 일가에는 더욱 무서운 운명이 다가오고있었다. 우리 집에서 더는 털어갈것이 없다는것을 안 빚쟁이는 나를 민며느리로 끌어가려고 덤벼들었다. 내가 기를 쓰며 반대해나서자 그놈은 어머니의 눈앞에서 나를 기둥에 꽁꽁 동여매놓고 칼을 휘두르며 위협하였다. 그날밤 어머니는 나의 포승을 풀어주고 어서 피하라고 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어머니곁을 떠나는것이 몹시 괴로왔으나 떠나지 않을수도 없어 정처없이 집을 떠났다. 이리하여 하루밤사이에 우리 일가는 산산이 흩어지고말았다. 이 고통, 이 불행, 이것이 어찌 우리 일가에만 한한 일이였으랴. 살래야 더는 살수 없고 죽을래야 누울 곳조차 없는것이 바로 조국을 빼앗겼던 지난날 우리 인민들의 처지였다. 사랑하는 어머니와 헤여진 후 나는 부자집으로 돌아다니며 아이보개노릇을 하였다. 그러나 말이 아이보개지 실은 종살이나 다름없었다. 변변히 얻어먹지도 못한채 하루 세끼의 밥을 짓고 아이를 보고 심부름을 들고 또 밭일을 하는 등 잠시도 앉아볼 틈이 없었다. 그러다가도 얼핏하면 머리칼을 뜯기우며 죽도록 매를 맞았다. 언제한번 마음놓고 발편잠을 자보지 못하였다. 지난날 이렇게 살아온 나에게 바로 유격대원들은 동지라 불러주고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해주고 글을 가르쳐주지 않는가. 이렇게 생각할 때 나는 가슴이 후더워지고 무거운 책임감을 느낄뿐이였다. (나는 혁명이 맡긴 임무에 충실하여야 한다. 내가 겪은 그런 불행과 고통을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 저주로운 일제와 지주, 자본가들의 세상을 때려엎고 조국을 광복하기 위해서 끝까지 싸워야 한다. 우선 내가 맡고있는 이 동지들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여 그들을 하루바삐 전투대오로 떠나보내야 한다.) 나는 동지들의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다 해내고싶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추위를 참아가며 매돌을 돌렸고 동지들을 곁에서 밤새워 간호했다. 너무 피곤하여 깜박졸다가 날이 새는줄만 알고 야밤중에 아침식사를 해놓고 기다린 일도 있었다. 이렇게 하루이틀이 지나감에 따라 한종환동무와 김종협동무의 상처는 차츰 나아갔다. 그러나 웬일인지 오응룡동무의 상처는 점점 악화되였다. 다리의 상처가 뚱뚱 부어오르면서 일어서기는 고사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것을 볼 때면 금방 가슴이 미여지는것만 같았다. 어느날 오응룡동무가 혼자말로 《김치를 먹어보았으면…》하였다. 나는 그 순간 그만 얼굴에 모닥불을 뒤집어쓴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배추를 구해다가 김치를 담그어 오응룡동무에게 주리라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설한풍 휘몰아치는 수림속에서 배추를 어디서 구할것인가. 생각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마을로 달려가고싶었으나 경솔하게 행동할수는 없는 일이였다. 원쑤놈들에게 밀영이 발각될 우려가 있는것이다. 나는 이리저리 궁리하다가 가을에 배추를 심었던 터밭의 눈을 치기 시작했다. 온몸이 얼어들고 맥이 빠졌으나 동지의 소원을 풀어줄수 있다는 한가지 념원으로 마음은 오히려 후덥기만 하였다. 온종일 눈과 씨름을 하고났을 때 거기에는 정말 몇포기의 언배추가 있었다. 배추를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지 모른다. 나는 이것으로 김치를 담그어두고 오응룡동무에게 조금씩 권하였다. 며칠동안 모진 고통에 신음하던 오응룡동무는 하루아침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순희동무, 내 상처가 안으로 깊이 곪는것이 틀림없으니 쇠꼬치를 달구어 찔러서 고름을 짜내주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한참동안이나 말이 나가지 않았다. 이런 때 과연 무엇이라 대답해야 좋을지 나는 오래동안 망설이기만 하였다. 그러나 꼼꼼히 생각해보아도 이런 원시적방법에 의한 수술외에는 별다른 도리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주저앉을수는 없는 일이였다. 그런데 어차피 이 일을 해야 할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부엌으로 나가서 모진 마음을 먹으면서 쇠꼬치를 불에 넣었다. (오응룡동무의 상처가 악화된것은 바로 나의 책임이다. 나의 정성이 부족했던탓이다. 바로 그러한 내가 이제 응룡동무에게 참을수 없는 고통을 주려 하는구나.)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다. 오응룡동무의 말대로 달군 쇠꼬치로 그의 상처를 찌를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나는 쇠꼬치를 집어내여 문밖으로 힘껏 내던졌다. (그러나 어찌하랴. 지금 나에게는 아무런 의료기구도 약도 없다. 오직 한가지 나의 정성으로 천만가지의 의료기구나 훌륭한 의약을 대신해야 한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금 쇠꼬치를 집어다 불에 넣었다. 한종환동무와 김종협동무에게 오응룡동무의 다리를 꽉 누르게 한 다음 나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꼬치를 가지고 오응룡동무앞으로 갔다. 손이 떨리고 이마에서는 구슬같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입술을 깨물고 손에 힘을 주어 상처를 찔렀다. 순간 오응룡동무가 《응!》하고 모질게 힘을 쓰면서 벌떡 일어나는 바람에 나와 동무들은 뒤로 벌렁 자빠지고말았다. 상처에서는 피고름이 흘러내리였다. 나는 두손으로 사정없이 상처를 꾹꾹 눌러 고름을 짜내였다. 상처를 소금물로 씻어내고 붕대를 감고나니 오응룡동무는 창백한 얼굴로 이를 맞쪼으며 덜덜 떨고있었다. 나는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여 밖으로 뛰여나오고말았다. 오응룡동무는 하루낮 하루밤을 오한에 떨었다. 나는 련일 밤을 새워가며 부엌에 불을 지펴 방을 덥혔다. 사흘째 되던 날부터 부풀어올랐던 오응룡동무의 종처는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였고 상처에서는 빨간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수술》을 한지 꼭 한주일이 되던 날 이른새벽, 《순희…순희동무!》하고 부르는 소리에 일어난 나는 오응룡동무가 벽을 의지하고 엉거주춤이 일어서있는것을 보자 와락 달려가 그를 껴들었다. 그렇게도 근심하던 오응룡동무가 드디여 일어선것이다. 다리의 상처때문에 그 저주로운 원쑤놈들을 쳐부시는 전투대오로 돌아가지 못하는것이라고 얼마나 애타하던 오응룡동무였던가. 그러던 그가 인제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는 모두들 기뻐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우리들은 오래간만에 마음껏 웃고 떠들면서 어디선가 원쑤놈들에게 불벼락을 안기고있을 동지들에 대하여, 조국을 해방하고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갈 그날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후 며칠 지나지 않아서 오응룡동무는 완쾌되였다. 련일 기승을 부리던 눈보라도 멎고 북만의 겨울 날씨로서는 보기 드물게 따스한 어느날 아침 우리는 부대를 향하여 떠나기로 하였다. 코노래도 부르고 롱담도 주고받으며 출발준비에 신바람이 난 동무들을 볼 때 나는 3달동안의 가지가지 일들이 회상되여 감개무량하였다. 우리들이 방금 배낭을 메고 문밖을 나서려는 때였다. 앞장에 서서 마당에 나섰던 오응룡동무가 《동무들! 〈토벌대〉놈들이요.》하고 다급히 웨쳤다. 벌써 수십명의 적들이 집을 삼면으로 포위하고 《생포하라!》고 웨치면서 조여들고있었다. 우리는 맞은편 수림을 향하여 내달렸다. 《놈들에게 잡혀서는 안되오.》 오응룡동무의 웅글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목소리에 기운을 얻으며 힘껏 뛰였다. 내가 방금 수림속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원쑤놈들이 풀어놓은 군견이 동복바지를 덥석 물고 늘어졌다. 나는 개와 함께 눈속에 나딩굴면서 오응룡동무를 불렀다. 순간 오응룡동무가 재빨리 돌아서면서 연거퍼 권총을 쐈다. 개와 함께 우리의 뒤를 바싹 따라오던 원쑤 몇놈이 단번에 거꾸러졌다. 그 순간에 나는 벌떡 일어나서 산마루를 향하여 치달아올랐다. 뒤에서는 원쑤놈들을 향하여 발사하는 오응룡동무의 총소리가 연거퍼 들려왔다. 이렇게 되자 생포하기를 단념한듯 원쑤놈들은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총알이 핑핑 날아와 나무에 박혔다. 나는 정신없이 뛰고 또 뛰였다. 산마루에 올라서서야 나는 오응룡동무가 어떻게 되였을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추격에 실패한 원쑤놈들은 우리가 들어있던 집에 불을 질러놓고 물러가고있었다. 나는 원쑤놈들이 사라지자 오응룡동무가 원쑤놈들을 쏘아눕히던 자리를 향하여 내리달렸다. 그러나 그자리에는 나보다 먼저 달려온 한종환동무와 김종협동무가 서있었을뿐 오응룡동무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셋이서 그 일대를 어둠이 깃들 때까지 샅샅이 찾아헤매였다. 《응룡동무! 응룡동무!》 부르고 또 불러도 내 목소리는 산울림이 되여 되돌아올뿐이였다. 나는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고말았다. (오응룡동무가 혹시 잘못되지나 않았을가? 그때 왜 내가 불러세웠던가. 앓고나서 몸도 완전히 추서지 못한 동무를 그 위급한 순간에 불러세우다니. 만약 그가 잘못 되였다면…) 여기까지 생각한 나는 앞이 캄캄하여지면서 다시 일어설 기운을 잃고말았다. (아니다. 결코 그럴수는 없다. 그는 꼭 살아있을것이다. 나는 기어이 오응룡동무와 더불어 대오로 돌아가리라.) 이렇게 새로운 결심을 다지며 동무들과 함께 제2집합장소로 내달렸다. 거기에서 생사를 몰라 애타던 오응룡동무를 보았을 때 나는 《응룡동무!》하고 한마디 부르짖고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는 살아있다. 우리는 대오로 돌아가 원쑤놈들에게 백배, 천배의 복수를 하리라!) 우리는 이렇게 다짐하면서 부대를 향하여 다시금 걸음을 다그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