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길감옥에서의 공작

 

 

연길감옥에서의 공작
 

                                                      최   현                       

 

1926년 나는 고향인 훈춘현 훌루투거우에서 《동만청총》의 한 성원으로 경제모연공작, 삐라공작 등을 하다가 백가장놈의 고발로 체포되여 무기징역언도를 받고 연길감옥에 감금되였다. 당시 20살이던 나는 일생을 철창생활을 하게 된것이 원통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도 더 원쑤들과 싸우지 못하게 된것으로 하여 가슴이 터지는것만 같았다.

(인제는 정말 더 싸우지 못한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속으로 부르짖으며 가슴을 쳤다.

(아니, 그럴수 없다. 철창도 죽음도 우리의 투쟁을 꺾을수는 없다. 우리는 철창속에서도 싸워야 한다.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싸워야 한다.)

나는 이렇게 단단히 결심을 다지였다.

물론 아직 조직생활에 충분히 단련되지 못하였고 본격적인 투쟁의 세례를 받아보지 못한 철부지였던 나에게 있어서 투쟁방향이 뚜렷이 서있을리는 없었다.

 

 

철 창 속 에 서

 

1926년 1월 연길감옥은 그때 새로 지은 직후여서 벽에는 성에가 손두께만큼이나 돋았고 수감자들도 많지 못하였다.

독립군사건으로 들어온 10여명의 조선사람을 제외하고는 정치범이란 없었고 모두가 잡범들이였다.

그 잡범들중에서도 《깡툴》이라는 주먹이 센 놈이 있어 같은 감방의 잡범들을 손아귀에 넣고 사정없이 구타하거나 차입하는 물건을 강탈하며 행패를 부리여 잡범들은 기를 못펴고 지내였다.

나는 감방에 들어가자 이 《깡툴》을 후려잡아 눌러놓고 모든 잡범들이 기를 펴게 한 다음 그들에게 일제의 침략정책을 폭로하며 반일사상을 주입시키는 등 혁명적영향을 주기에 힘썼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변소에서 독립군 대장 임병국을 만나게 되였다. 그는 홍범도의 전우로서 우리 아버지와도 늘 련계를 가지고 활동했던것만큼 내가 어릴 때에 우리 집에도 여러번 왔었고 또 아버지의 련락을 가지고 내가 그에게 여러번 찾아간 일도 있었다.

그는 나를 얼른 알아보지는 못하였다.

내가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하여서야 비로소 나를 알아보았다.

《너도 감옥에 갇히고말았구나. 청년들은 시대를 따라야 한다. 참 장하다.》

그는 감개무량한듯 나에게 이런 말을 하면서 《우리가 이 안에서 거저 썩어서는 안된다. 강냉이가 자라 무성하기만 하면 손을 써서 여기서 빠져나가 싸워야 한다.》고 하였다.

나는 임병국, 윤창범과 함께 탈출계획을 세웠다. 우리들은 적당한 시기에 앓는체 하여 감옥병원으로 간 다음 그곳에서 탈옥하기로 하였다. 그것은 병원안은 감방보다 감시가 좀 덜하고 또 병원뒤의 담벽을 넘기 편하기때문이였다.

그때 감옥안에는 《죄수》에게 일을 시키기 위하여 철공장, 인쇄공장, 목공장, 피복공장, 신발공장 등이 차려져있었다. 나는 신발공장에서 일을 했다. 나는 짬짬이 여기서 삼을 훔쳐내다가 삼바를 만들었다.

강냉이가 사람의 키를 넘게 자랐을무렵에 우리 셋은 일제히 꾀병을 하며 누워있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임병국, 윤창범은 병원에 보내면서 나는 병원에 보내주지 않았다. 나는 빨리 병원으로 가기 위하여 죽는 시늉까지 해가며 되게 앓는체 하였다.

그런데 일이 안되느라고 내가 병원에 가기 전에 임병국과 윤창범을 퇴원시키려고 하였다. 더는 주저할수 없게 되였다. 이렇게 되자 그들은 자기들끼리만이라도 탈옥하기로 작정하고 이불을 찢어서 노끈을 꼰 다음 간수가 조는 틈을 타서 빠져나가려 했다.

윤창범은 임병국을 떠받들어 먼저 담을 넘긴 다음 자기는 이불로 꼰 노끈에 매달려 담을 넘으려 하였다. 그러나 담벽 절반쯤 올라가다가 노끈이 끊어져서 그가 땅에 도로 떨어지면서 《쿵》하는 소리가 났다. 이 바람에 윤창범은 순찰돌던 간수에게 잡히우고 비상경보가 나며 소동이 일어났다.

이렇게 되여 임병국만 탈옥에 성공하고 윤창범은 오히려 단단히 쇠줄로 얽은 특별감방에서 세근짜리 족쇄까지 차고 고생하게 되였다.

우리들은 놈들의 경계가 좀 떠지는것을 기다리여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석판인쇄공장에서 일하였는데 그곳의 간수와 경리원을 끼고 종이, 먹, 인쇄잉크 등을 내다 팔아서 공작에 필요한 자금을 만들어썼다.

그 돈으로 앓는 동무들의 약과 입에 맞는 음식물도 사들여왔고 간수들과 간수부장에게도 먹이면서 그들과 친근해졌다. 당시는 아직 일제놈들의 손이 여기까지 미치기전이여서 감옥은 좀 어수룩한데가 있었고 간수들과 간수부장들도 속으로는 우리 정치범들을 존경하고있었다. 나는 이런 조건을 리용하여 그들과 더욱 친근해지면서 혁명적영향을 주기에 노력했다. 이들가운데 평가 성을 가진 간수부장과 리간수부장은 나중에 유격대에까지 입대하여 용감히 싸우다 전사했다.

바로 이런 때에 만주군벌 장작림이 《륙군대독》이 되면서 대사령을 내리여 잡범은 다 석방되고 우리들은 《관속》6년으로 감형되였다.

《관속죄수》란 놈들이 소위 국가적으로 우대하는것인데 고랑과 족쇄도 채우지 않고 면회도 언제나 시키고 변소에도 마음대로 다니게 하였다.

우리는 이런 유리한 조건을 리용하여 감옥내《죄수》들에게 더욱 광범히 반일사상을 전파하면서 악질적인 감옥직원들과 투쟁하였다.

당시 나는 인쇄공장에서 일하기를 그만두고 피복공장으로 옮겨갔다.

원래 공장장이나 소위 기술자들은 《죄수》들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짜내려고 여간 심하게 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이 피복공장 기사놈은 어찌나 《죄수》들을 못살게 구는지 견딜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좋은 모직양복을 할 때면 우정 담배불로 구멍을 뚫거나 단추구멍을 못쓰게 만들면서 태업하였다. 그것은 기사놈에게 은근히 타격을 주는 동시에 그 고급양복을 입을 부자나 관리놈들을 골려주자는것이였다.

그런데 하루는 내가 단추구멍을 못쓰게 만든것이 기사놈에게 발견되였다.

담배불로 구멍낸것은 풀로 감쪽같이 때였는데 단추구멍은 눈가림을 잘하지 못하였던것이다.

이때문에 나는 기사놈에게서 눈에서 불이 나도록 따귀를 얻어맞았다.

어찌나 분통이 터지는지 참을수가 없었다. 나는 옆에 놓인 숯다리미를 불채로 들어 단매에 그놈을 꺼꾸러뜨린 다음 단단히 혼쌀을 냈다. 그놈은 쭉 늘어져서 간수들이 들어내가게 되였다.

기사놈은 나를 재판에 걸었다.

당시《죄수》들에 대한 재판은 감옥안에 있는 별동건물에서 하였다.

《왜 사람을 때렸느냐?》

판사란놈이 이렇게 나에게 심문을 시작했다.

《〈관속죄수〉를 평민이 때리는 법이 어데 있는가? 그 사람이 리유없이 나를 때리기때문에 나는 정당방위를 위하여 때렸다.》

나는 《관속죄수》를 때린것과 먼저 손을 댄것이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된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규정상 《관속죄수》는 간수나 간수부장도 때리지 못하게 되여있었다. 하물며 평민인 공장기사가 때릴수는 없는것이다.

판사는 내 말에 말문이 막혔다. 그때 현장에 있었던 《죄수》들과 간수들에 대한 증인심문이 시작되였다.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도 모두 내편을 들었다. 그들은 모두 기사가 리유없이 먼저 때렸다는것을 증언했다.

나는 이런식으로 밉게 구는 감옥직원 여러놈을 혼쌀내주었다.

이리하여 두번이나 재판을 받았고 신발공장, 인쇄공장, 피복공장, 목공장으로 직종을 자주 바꾸게 되였다.

마지막에는 감옥내 어느 공장들에서도 나를 받아주지 않게 되였다. 그래서 나는 감방에서 놀게 되였다.

하루는 감옥장이 순시하다가 나에게 물었다.

《오, 왜 어린 사람이 일하러 안나가는가? 어디 아픈가?》

나는 사정이야기를 하였다. 그러자 그는 무슨 기술이 있는가고 물었다. 나는 고향에 있을 때 동무들의 머리를 깎아주던것이 생각나서 리발일을 시켜달라고 하였다. 그것은 이 직업이 보다 자유로운 활동을 할수 있으리라고 믿었기때문이였다.

감옥장은 《좋아좋아》하며 돌아가더니 다음날부터 리발일을 하러 나오라고 하였다. 그후 나는 출옥할 때까지 3년간 계속 리발을 하였다. 예측한대로 리발은 그후에 조직이 나에게 위임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더없이 좋은 직업으로 되였다.

 

 

조직의 위임을 받고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만에서 혁명운동이 앙양됨에 따라 감옥에는 정치범, 특히 공산주의자들이 많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전에는 감옥에서 공산주의자라고는 윤창범과 나뿐이였는데 이제는 거의 매 감방에 우리 동무들이 들어오게 되였다. 그들은 들어오자 즉시로 나와 윤창범을 찾았다.

하루는 변소에 가는데 한 동무가 나에게 눈짓을 하였다. 슬그머니 따라가니까 종이쪽지를 남몰래 주고갔다.

《우리들은 혁명을 하다가 잡혀들어왔다. 당의 지시로 감옥내에 혁명대렬을 조직한다. 동무도 참가하라. ○○○동무를 만나보라.》

이런 내용을 읽었을 때 나는 기쁨에 넘쳐 어쩔바를 몰랐다. 수년간을 조직과 떨어져 얼마나 안타까왔던가. 단독으로 싸우려니 얼마나 외롭고 답답하였고 얼마나 갈피를 잡을수 없었던가. 그러나 이제는 우리를 옳바른 투쟁의 길로 인도하는 조직의 손길이 우리에게 닿은것이다.

나는 벅찬 가슴을 안고 쪽지에 지적된 동무를 감방에서 불러내여 리발실로 데리고갔다. 그때 나는 머리가 자란 《죄수》들을 보면 언제나 불러내여 머리를 깎아줄수 있었다. 나는 남이 안보는 리발실에 들어서자 그 동무를 얼싸안았으나 목이 메여 말을 못하였다. 나는 문을 막아서서 그의 머리를 깎으며 그동안에 조직과 련계가 끊어진채 애쓰던 일, 감옥안에서 그간 해온 일 그리고 당시 감옥내 형편을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다가도 옆으로 간수들이 지나가면 왕청같은 딴말을 하군 하였다.

그 동무는 감옥내에 《반제동맹》지부와 《적위대》를 조직할 문제, 《죄수》들에게 반일사상을 더욱 고취시킬 문제들을 이야기하였다. 이렇게 감옥내에는 혁명조직이 생기게 되였다. 나에게는 감옥내부와 외부와의 련락임무가 맡겨졌다. 나는 감옥안의 매개 감방에 조직의 결정지시를 알려주었다. 감옥외부와의 련계는 김옥자라는 동무를 통하여 취하게 되였다.

나는 우선 김옥자동무와 련계를 취할 방법을 골똘히 생각하였다. 가장 쉽고 안전한 방법은 친한 간수들을 리용하는것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그들에게 련락내용을 알릴수는 없었다.

하루는 제일 친한 간수의 머리를 깎아주며 내가 과거에 어떤 녀자와 련애를 하였는데 감옥에 온 후로는 소식을 몰라 궁금하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그러자 그 간수는 무척 나를 동정하는 눈치였다.

《그 녀자에게 편지를 좀 전해줄수 없겠는가?》

내가 이렇게 청을 대자 그는 대뜸 좋다고 승낙하였다.

당시 김옥자동무는 연길시내 기름공장 녀성로동자들의 합숙에서 그곳 조직의 보호밑에 감옥내 동무들과의 사업을 전문적으로 하고있었다.

간수는 나의 편지를 련애편지로만 알았던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것을 김옥자동무에게 전해주었다. 그러자 김옥자동무는 그를 친절히 대하며 그에게 선물로 손수건까지 주었다. 이렇게 되여 그 간수는 그후 우리의 련락편지를 계속 배달해주었다.

김옥자동무와 직접 만나게 된것은 그 다음 면회날이였다.

면회올 때 김옥자동무는 애인을 만나러 오는것처럼 가장하고 전병, 송편 같은 떡을 한함지 해이고왔었다. 미리 편지를 받고 알고있던 나는 리발실에서 간수의 머리를 깎으며 면회오는 사람을 살피고있다가 그가 나타나자 얼른 나가서 떡함지를 받아들고 리발실로 들어오며 간수에게 말했다.

《애인이 면회하러 왔는데 여기서 좀 만나게 해줄수 없는가?》

간수는 내가 가지고 들어간 음식에 호기심이 나서 고개를 길게 빼고 넘겨다보며 그게 뭐냐고 물었다.

《이거요, 어서 좀 자셔보시오.》

나는 이렇게 말하며 떡을 척척 집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간수는 좋아라고 그것을 받아가지고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하여 나는 김옥자동무와 마음놓고 말할수 있는 조건을 가지였다.

나는 김동무에게 앞으로의 련락방법과 암호에 대하여, 감옥내 혁명조직의 사업형편에 대하여 이야기하여주었다. 이러느라고 시간이 퍼그나 오래 지났으나 간수들은 우리의 관계를 련애관계로만 알았기때문에 면회가 끝나고 내가 부를 때까지 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후 자주 면회를 리용하여 련락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럴 필요까지 없는 간단한 련락은 간수를 리용하여 편지로도 전하고 음식차입을 리용하기도 하였다.

차입하는 음식물을 리용할 때에는 음식물을 만들기전에 먹이나 연필로 쓴 쪽지(잉크로 쓰면 피여서 볼수 없게 된다.)를 떡이나 전병안에 넣어 빚은 다음 구워서 들여보내주군 하였다.

외부와의 련락에는 감옥장, 간수부장, 간수들과 그 가족들도 여러번 리용하였다. 그때 나는 감옥직원 가족들의 리발도 도맡아하였는데 이런 기회를 리용하여 그들과 《친숙》하여졌다. 처음엔 감옥안에서 리발을 하였으나 나중에는 직접 그들의 사택에까지 찾아가서 하게 되였다.

그 당시 감옥직원의 가족들까지도 정치범들을 은연중 존경하였고 만나면 깍듯이 인사까지 하였다. 그것은 감옥장의 처남이 준 정치적영향과 관련된것이다.

감옥장의 처남은 우리편 사람이였던지 그가 감옥장의 집에 와서 얼마간 묵는 동안에 감옥직원들과 그 가족들은 전에 없이 많이 달라졌었다. 그들은 우리 정치범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우리에게 여러가지 문제를 물어서 배우려고까지 하였다. 나는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들과 더욱 친해지고 점차 혁명적영향을 주기에 노력하였다.

감옥장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룡정영신녀자중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놀고있었다. 누구보다도 이 처녀가 우리 정치범들에 대하여 호기심을 가지고있었다.

한번은 그 녀자가 머리를 깎으려 와서 나보고 중국사람인가고 묻더니 조선사람이란 말을 듣자 놀라는 표정을 하며 말하였다.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우리 혁명가들에게는 모든것이 환히 알리는 법이다.》라고 나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그 녀자는 매우 경탄하는듯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녀자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여주었다. 그 녀자는 온 정신을 가다듬고 나의 말을 듣느라고 리발이 끝났는데도 가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하여달라고 청하였다.

그후부터 그 녀자는 머리가 자라기도전에 자주 찾아왔고 자기 집으로 청하기도 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나는 그의 어머니, 아버지와도 친숙해져서 웬만한 내 청은 다 들어주게 되였다.

내가 가장 곤난해하였던 외부와의 련계문제는 이렇게 풀리였다.

감옥내에서의 임무수행은 큰 문제가 없었다. 나는 리발한다는 핑게로 필요한 사람을 불러내여다가 얼마든지 련락을 할수 있었다.

단 한가지 맑스ㅡ레닌주의서적을 감옥안에서 보는것이 좀 곤난하였다.

당시 책은 심판장 박통역이란 놈이 검열을 하고 도장을 찍어주어야 읽을수 있었는데 그놈은 아주 악질적인 놈이여서 어쩌는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하던 끝에 그놈이 없는 틈을 타서 검열도장을 가만히 내다가 필요한 책에 찍어서 감방들에 들여보내주군 하였다.

이렇게 조직체계와 련락체계가 선 후에 우리는 본격적인 투쟁을 전개하게 되였다.

 

 

단결의 위력

 

1931년, 감옥내 《반제동맹》지부에서는 우리 동지들이 모두 탈옥할데 대하여 결정하였다. 봄부터 준비사업을 하였다가 곡식이 무성한 여름에 탈옥을 단행하기로 하였다.

감옥내에서 쇠고랑, 족쇄 등을 파괴할 도구, 담을 넘을 사다리와 바줄 같은것을 준비하는 사업과 상부와 련계를 취하여 감옥밖에서 피신할수 있는 모든 준비를 갖추도록 하는 책임을 내가 담당하게 되였다.

나는 그 즉시로 《반제동맹》지부의 결정을 김옥자동무에게 전달하는 한편 철공장, 목공장, 피복공장들로 다니며 줄칼, 쇠붙이, 가위 등 파괴도구를 가져다가 간수들 몰래 매개 감방들에 넣어주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감방의 구들고래를 넓히는 일을 하였다. 그것은 구들고래를 뜯고나가는것이 제일 안전했으며 그러자면 사람이 빠져나갈수 있을만큼 고래가 넓어야 했기때문이였다.

나는 온돌공사를 책임진 잡범령감에게 춥지 않게 구들고래를 배쯤 넓히게 하였다.

한번은 감옥장이 와서 고래를 어째 그렇게 넓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잡범령감은 내가 일러준대로 《금년에도 작년처럼 추우면 〈죄수〉들이 가만히 안있을것》이라고 말하였다.

감옥장은 정치범들이 많이 들어와서 그렇지 않아도 다소 켕기던 판인데 이 말을 듣고는 가슴이 뜨끔했던지 《좋아좋아》하며 고래를 더 넓혀 뜨뜻하게 만들라고 하였다.

구들고래까지 고치고나니까 감옥안의 준비는 다 되였다. 주변의 곡식도 무성하여 탈출하기 좋은 시기가 되였다.

나는 《반제동맹》지부의 지시대로 김옥자동무에게 탈옥준비가 되였다는것과 바깥준비가 끝나는대로 날자, 시간, 장소와 행동방향을 알려달라는 련락을 하였다.

김옥자동무는 모든 준비를 갖추어놓고 이불에다 그날 밤에 탈옥하라는 련락쪽지를 넣어서 들여보내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따라 차입품을 내주는 간수부장이 어디 놀러갔다가 저녁늦게야 돌아와서 이불을 내주었다.

쪽지를 받아보고 나는 당황하였다. 바로 그때 몇번째 개구장우에 사다리가 놓이고 바줄이 넘어가 있을것이라는 내용이였는데 이미 때가 늦었기때문이였다. 당장 취침신호가 날 시간이 되였는데 취침신호가 난 다음에는 일체통행이 금지되느니만큼 련락을 할수가 없었다.

나는 황급히 쪽지를 《반제동맹》지부책임자에게 전달하였다.

《하는수 없지. 우리 감방만이라도 탈출을 해야겠소. 동무는 후에 기회를 보아 남은 동무들을 다 데리고 함께 나오시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물론 나는 다른 의견이 없었다. 사실 나혼자나 탈출하려면 언제든지 탈출할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조직이 나에게 위임한 과업을 집행하기 위하여서는 계속 감옥에 남아있어야 하였다. 나는 한감방이라도 더 내보내고싶었다. 그러나 바로 책임자의 감방을 나설 때 취침신호가 울렸다. 나는 분하고 원통하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게 공을 들여 준비한 대사가 이렇게 뜻하지 않은 일때문에 틀어지고말았으니 참으로 분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밤새 이렇게 타는 가슴을 쥐여뜯으며 이때나 저때나 하고 탈옥한 동무들에 대한 무슨 반응이 있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밤새 아무 기척도 없었다. 해가 둥그렇게 뜬 다음에야 비로소 야단법석이였다.

일은 다음과 같이 되였었다.

그 감방에는 원래 좋지 않은 한 잡범이 있었다. 우리는 그자에게 술을 먹여놓고 빠지려고 미리 독한 술을 구해두었다. 그날 그 감방 동무들은 이 술 한병을 그자에게 다 먹였던것이다. 독한 술을 좋다고 들여마신 그자는 이내 발길로 차도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이것을 보자 동무들은 안심하고 구들바닥을 뜯고 고래로 빠져나간다음 김옥자동무가 넘겨놓은 줄사다리를 타고 탈옥했던것이다. 그 감방 간수조차도 이것을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줄사다리를 걷지 않고 갔기때문에 아침에 순찰돌던 간수가 그것을 발견하게 되였다.

그때까지 그 감방의 잡범은 세상 모르고 자다가 간수들의 구두발길에 채우고야 깨여났었다.

버리고 간 줄사다리와 술병때문에 생야단이 났다. 모든 탈출경로가 드러나고말았던것이다. 감방을 뒤져보니 파괴도구들이 나졌고 매개《죄수》들의 고랑은 언제든지 벗겨질수 있게 되여있었다.

담장밖에까지 촘촘히 보초가 서고 모두 새 고랑을 갈아차게 되였다.

그러나 놈들은 우리 조직의 비밀을 알아내지는 못하였다. 다만 나에게 술을 사다준 간수만은 나를 의심하였지만 그는 도리여 자기 죄가 드러날가 무서워서 나보고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며 절대비밀에 붙이였다.

감옥측에서는 나보고 술을 사다주지 않았느냐고 다그었으나 나는 끝끝내 아니라고 뻗치였다.

감옥측의 감시는 심하여졌다. 우리의 활동은 퍽 불리하게 되였다.

《반제동맹》지부에서는 단식투쟁을 전개하여 놈들의 기승을 꺾고 감옥내 생활조건을 우리 투쟁에 편리하게 개선할것을 결정하였다.

우리는 탈옥투쟁에서 얻은 교훈을 살리여 더욱 주도세밀한 준비밑에 투쟁에 들어서기로 하였다. 우선 단식기간에 먹을 미시가루, 약품 등을 구입해야 하였는데 나는 전보다 이모저모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나는 생각하던 끝에 술을 사다준 간수를 리용하기로 하였다. 그는 약점이 있는만큼 거절하지 못하였다.

나는 그를 통하여 미시가루를 포대로 사들여 은밀히 감방마다 나누어주었다.

약품은 감옥장 딸에게 부탁하였다.

만단의 준비를 갖춘 후에 우리는 《죄수》들을 함부로 구타하지 말것, 일주일에 한번씩 목욕을 시킬것, 껍질있는 수수, 잎이 핀 콩나물을 공급하지 말것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단식투쟁에 들어섰다.

감옥측에서는 처음에 위협공갈을 했으나 며칠이 지나자부터는 안달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 뻗치였다. 밤에는 몰래 미시가루를 먹으면서 계속 감옥식사를 거절하였다. 이렇게 5일간을 버티자 감옥측에서는 하는수 없이 우리가 제기한 모든 요구를 무조건 승인하고야말았다. 우리는 이렇게 승리하였다.

집단적인 탈옥, 수백명《죄수》들의 일치한 단식과 같은 조직적인 투쟁에 누구보다도 질겁한것은 일제놈들이였다.

놈들은 감옥내 조직을 알아내려고 눈이 뒤집혀 날뛰였다. 감방마다에 일제놈들이 박아넣은 밀정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밀정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치우군 했다. 변소간에서, 담장밑에서 처단된 밀정들의 시체가 아침마다 나지군 하였다.

나중에는 감옥측에서까지도 일제놈의 밀정을 열병보다도 더 싫어하였다.

이렇게 되자 일제놈들은 다른 방법으로 복수하기 시작하였다. 놈들은 정치범들이 감옥에서 석방되면 감옥문을 나서는 길로 테로단을 붙이여 아무도 모르게 암살해치우군 하였다. 숱한 혁명가들이 이렇게 희생되였다.

바로 이런 때 1932년 7월, 윤창범, 방정준동무들과 같이 나는 만기출옥하게 되였다.

나는 감옥문을 나서면서 새로운 투쟁결의를 다지고 이름도 최득권을 최현으로 고쳤다.

우리들은 일제놈들의 테로단을 피하여 감옥앞의 작은 상점에 은신해있으면서 조직의 지시를 기다렸다.

며칠후에 연길현 태양모구위에서 유격대에 보내기로 결정하였으니 오라는 련락이 왔다. 태양모까지 가려면 일제놈들의 경계가 심하여 《죄수》복을 입고가는것은 위험하였다.

우리는 간수로 가장하고 가기로 하였다. 감옥장의 딸에게 부탁하여 우리는 몸에 맞는 간수복 두벌과 간수부장복 한벌을 구했다.

두 동무는 간수복을, 나는 간수부장복을 갈아입고 길을 떠났다.

금줄이 시누런 복장을 갖추고나선 우리는 어느모로보나 당당한 《간수》였다.

우리들은 죄인을 잡으려가는것처럼 하고 버젓이 연길역에서 조양천으로 가는 기차를 탔다.

차내에는 일본헌병, 군대, 경찰들이 가득했지만 우리를 조금도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우리는 조양천에서 내려서 태양모까지 걸아갔다. 태양모어귀에 이르렀을 때였다.

《누구야, 섯!》하고 그리운 조선말로 웨치는 소리와 함께 10여명의 적위대원들이 달려나왔다.

우리들은 비로소 자기 대오로 돌아온것이였다. 그후 우리들은 적위대를 거쳐 그해 8월에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령도하시는 항일유격대에 입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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