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혁명의 만년재보를 마련해주시여
백두산은 성스러운 우리 혁명의 시원이 열린 곳이며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동서남북의 광활한 지대에는 백두산3대장군의 불멸의 투쟁자취가 어려있는 혁명전적지들과 혁명사적지, 밀영들이 곳곳에 자리잡고있다. 더우기 백두산은 천출명장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백두광명성으로 솟아오르신 유서깊은 백두산밀영고향집이 있는것으로 하여 우리 인민과 청년들의 마음의 고향, 혁명의 성지로 찬란히 빛나고있다. 혁명의 성산 백두산과 유서깊은 백두산밀영고향집, 정녕 그 신성하고 소중한 이름을 조용히 불러볼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천만년 길이 전할 혁명의 만년재보를 마련하시여 우리 인민과 후대들에게 안겨주신 어버이수령님에 대한 다함없는 고마움의 정으로 마냥 세차게 달아오른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지금으로부터 15년전 80고령의 년로하신 몸으로 또다시 항일의 전구를 찾으시여 혁명의 성지를 더없이 귀중한 만년재보로 잘 꾸려 주체혁명위업의 명맥을 꿋꿋이 이어가도록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우리의 마음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8월의 뙤약볕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백두산지구를 찾으시여 뜻깊은 말씀을 하시던 못잊을 력사의 그날에로 줄달음치고있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참으로 수령님의 위대한 혁명력사가 깃들어있는 혁명의 성산, 백두산은 조선혁명의 뿌리가 내리고 조선의 창창한 미래가 밝아온 혁명의 성지이며 조선의 혁명적기상과 불멸의 혁명정신을 한품에 안고있는 유서깊은 산입니다.》 잊을수 없는 주체81(1992)년 8월 13일, 백두산지구는 크나큰 감격과 기쁨으로 설레였다. 만고절세의 애국자이시며 불세출의 위인이신 어버이수령님께서 몸소 이곳을 찾아주시였던것이다. 이날 우리 혁명의 깊고도 억센 뿌리가 내린 혁명의 성산 백두산에 오르시여 련련히 뻗은 산발들과 넓은 광야를 굽어보시며 피어린 항일혁명투쟁로정을 감회깊이 회고하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어 유서깊은 백두산밀영을 찾으시였다. 백두산밀영은 우리 수령님에게 있어서 깊은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정다운 곳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1930년대 후반기 혁명을 일대 앙양에로 불러일으킬 중심적령도거점으로 꾸리시고 전반적조선혁명을 령도하시였으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탄생하시여 어린 시절을 보내시고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동지의 혁명활동사적이 새겨진 혁명의 성지, 바로 백두산밀영은 위대한 수령님에 의하여 비로소 발굴되여 혁명전통교양의 거점으로 훌륭히 원상복구될수 있었다. 조국이 해방된 후에도 언제나 인민의 행복한 나라를 세우시기 위하여 불철주야 로고를 바쳐가시면서도 어느 한시도 백두산밀영을 잊지 않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오래전부터 밀영을 찾기 위하여 깊이 마음써오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해방직후에 백두산밀영을 찾으려고 하시였지만 그때에는 건당, 건군, 건국사업을 하시느라고 시간이 없으시였고 그후에는 미제를 반대하는 조국해방전쟁과 전후복구건설, 사회주의건설을 령도하시느라 좀처럼 짬을 내지 못하시였다. 그토록 시간이 긴장하시여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항일혁명투사들을 자주 백두산지구에 파견하시였다. 하지만 그들은 청봉, 베개봉, 무포숙영지자리를 비롯한 여러곳들은 찾아내였지만 백두산밀영자리는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도 그럴것이 백두산밀영이 산세가 험한 천고의 원시림속에 자리잡고있은데다가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비밀이 철저히 보장되여있었기때문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80년대 중엽 주체혁명위업을 계승완성해나가는 문제가 새로운 높은 단계에서 제기되고있던 당시의 조건에서 백두산밀영을 발굴하는것을 더는 미룰수 없는 력사적과제로 보시고 이 일은 꼭 자신께서 하셔야 할 일로 스스로 맡아안으시였다. 그러던 주체75(1986)년 8월 어느날 백두산지구의 곰산등판에 오르시였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소백수다리를 건느시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시였다. 추억을 더듬으시며 안쪽골짜기를 유심히 살펴보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골안이 어쩐지 낯이 익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백두산밀영을 꾸렸던 곳같으니 한번 조사해보라고 이르시였다. 그러시고는 겉으로 보기에는 골짜기가 첫 어구에서 끝나는것 같지만 모퉁이를 에돌아가면 더 깊은 골짜기가 나질것이라고 하시면서 그 주변을 살펴보면 반드시 밀영자리가 있을것이라고 일일이 가르쳐주시였다. 그후 소백수골에 대한 전반적인 발굴조사사업이 진행되고 그 과정에 구호나무와 집자리흔적, 탄피와 군용밥통 등 많은 유적유물들을 발굴할수 있었다. 발굴사업을 통하여 이곳 밀영이 바로 조선혁명의 사령부가 자리잡고있던 백두산밀영이라는것이 확증되게 되였다. 사람들에게 더욱 크나큰 기쁨과 감격을 안겨준것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탄생하신 귀틀집자리를 찾아낸것이였다. 밀영발굴정형에 대한 보고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더없이 만족해하시며 백두산밀영을 원상대로 복구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들에 대하여 구체적인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그후 주체77(1988)년 8월 원상복구된 백두산밀영을 돌아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일군들에게 백두산밀영을 찾아내지 못하여 걱정이 많았는데 오늘 노루발쪽손잡이가 달린 옛 모습그대로 원상복구된 백두산밀영을 보니 무겁던 어깨가 가벼워진것 같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참으로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심혈과 세심한 보살피심에 의하여 백두산밀영은 천만군민을 항일의 빛나는 혁명전통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며 주체혁명위업을 계승완성해나가기 위한 위력한 거점으로, 온 세상사람들이 흠모하여 마지 않는 마음의 고향으로 훌륭히 꾸려질수 있었던것이다. 하기에 15년전 이날 백두산밀영을 또다시 찾으신 어버이수령님께서는 만면에 환한 미소를 담으시고 백두산천지에 시원을 두고 쉬임없이 흘러내리는 소백수의 정다운 물소리며 푸르청청하게 자란 나무들을 둘러보시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시다가 문득 낯익은 새초밭앞에서 걸음을 멈추시였다. 한동안 깊은 회억에 잠겨계시던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 새초밭은 항일무장투쟁시기 김정숙동무가 백두산밀영에 와있을 때 부루와 쑥갓을 심던 곳인데 부루와 쑥갓이 아주 잘되군 하였다고 하시며 그때 부루쌈을 싸서 드시던 일이 생각난다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이윽고 고향집앞 샘물터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맑고 정갈한 샘물을 손수 뜨시여 맛을 보시고나서 자신께서는 이 샘물을 항일무장투쟁시기에 먹어보고는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하였다고, 샘물이 얼음같이 차고 쩡하다고 하시면서 동무들도 샘물을 먹어보는것이 좋겠다고 다정하게 말씀하시였다. 이어 항일전의 나날 백두산밀영을 건설할 때의 일이며 항일의 옛 성지들을 좀 더 일찌기 찾았으면 아주 좋았을것이라는데 대해 말씀하시며 고향집마당에 이르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활짝 열려진 귀틀집출입문에 다가가시여 낯익은 살림도구들을 정답게 살펴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볼수록 유정하고 검소한 살림도구들을 이윽토록 바라보시며 항일의 총성이 천지를 뒤흔드는 여기 전장에서 백두산의 아들로 탄생하시여 성장하신 경애하는 장군님의 어린시절을 감회깊이 회고하시였다. 그러시고나서 생가를 영구보존할데 대해서와 주변일대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상해서는 안된다고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이듬해 8월 또다시 백두산밀영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친필송시비앞에서 강사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고 하시면서 내가 동무들과 같이 기념사진을 찍는것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령도를 잘 받들라는 의미에서이다, 이것이 나의 부탁이라고 간곡한 당부의 말씀을 하시였다. 진정 천연원시림속에 묻혀있던 백두산밀영을 찾아주시고 이곳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도 귀중히 여기시며 우리 혁명의 억년드놀지 않는 만년재보를 마련해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불멸의 력사적공적은 세월과 더불어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것이다. 우리의 모든 청년들은 백두산지구를 돌아보시면서 하시던 어버이수령님의 유훈을 심장깊이 새기고 백두산천지의 맑은 물과도 같이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으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선군정치를 앞장에서 높이 받들어나감으로써 백두에서 시작된 주체혁명위업의 종국적승리를 기어이 이룩하여야 할것이다.
본사기자 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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