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9(2010)년 제10호에 실린 글

 

수 기

나의 첫걸음

김 병 훈

영광스러운 우리 당, 조선로동당창건 65돐을 맞고보니 자연히 생각은 깊어진다.

무릇 이 땅에서 나서자란 사람이라면 우리 당의 사랑과 믿음을 떠나서 인생을 론할수 없듯이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 일군으로 성장한 나의 인생 역시 어머니당의 사랑과 믿음속에 빛내여온 복받은 인생이였다. 복받은 나의 인생을 놓고 생각에 잠길 때면 나의 처녀작인 단편소설 《아버지의 노래》가 《청년문학》잡지의 지면에 발표되던 인생의 첫 기슭에로 추억의 노를 저어가군 한다.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문학을 대중화하는것은 문학건설과 문학운동에서 나서는 중요한 요구이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속에 주체45(1956)년 3월에 창간된 《청년문학》잡지는 문학의 대중화를 실현하고 작가후비들을 육성하는데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어언 50여년의 세월이 지나갔으니 아마도 우리 나라 작가들치고 《청년문학》잡지에 뿌리내리지 않은 사람은 없을것이다.

내가 알기에 《청년문학》잡지와 같은 신인문학잡지가 있는 나라는 이 세상 어디에 가도 찾아볼수 없을것이다. 1950년대에 이전 쏘련작가동맹에서 《새 세대》라는 제명으로 신인잡지를 발행하였는데 3년을 못 가고 페간되였다. 그러나 우리의 《청년문학》잡지는 50여년세월 비옥한 토양처럼 작가후비를 키워냈으니 그 수를 어찌 헤아릴수 있겠는가.

나는 《청년문학》잡지가 창간되던 해인 주체45(1956)년 7월호에 첫 단편소설을 발표하였으니 아마도 《청년문학》잡지출신의 1기생이라고 할수도 있을것이다.

나는 단편소설 《아버지의 노래》를 주체44(1955)년 여름에 써서 작가동맹에 투고하였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시험삼아 쓴 습작품이라 발표는 고사하고 혹시 의견이라도 받아보았으면 좋겠다는 심산으로 투고한것인데 뜻밖에도 한달 남짓하여 작가동맹 소설분과위원회의 이름있는 소설가 3명의 련명으로 된 의견서와 함께 원고가 돌아왔다. 의견서는 사무용지 앞뒤면으로 씌여있었는데 앞면 절반까지는 긍정의견이고 그 나머지는 결함이였다. 구성으로부터 인물형상, 문장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견이였다. 추고하여 보내라는 당부까지 있었으나 나는 의견대로 고쳐낼수 있겠는지 난감하였다. 오랜 소설가이고 나의 지도교원이였던 강좌장선생님이 의견이 이만하면 대단한 평가다, 나도 작가동맹에 투고하여 이만한 의견을 받아본적이 없다, 어서 고쳐서 보내라고 부추기면서 좋은 원고지까지 주는것이였다. 여기에 힘을 얻어 추고작업을 하여 다시 작가동맹에 보냈다. 후에 《청년문학》편집부에서 단편소설 《아버지의 노래》를 채택하였다는것과 문장표현 몇군데를 고쳤는데 의견이 있으면 편지하라는 한장의 엽서를 보내왔다. 이어 7월초에는 편집부에서 나의 처녀작이 실린 《청년문학》잡지 7월호를 보내주었다.

《아버지의 노래》라는 제목과 나의 이름이 큰 활자로 또박또박 적혀있는 싱그러운 인쇄잉크냄새가 풍기는 잡지를 펼쳐본 나는 꿈을 꾸는것 같았다. 나에게 문학창작의 큰 대문이 이렇게 쉽게 열릴줄은 꿈에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며칠후에는 작가동맹중앙위원회에서 단편소설 《아버지의 노래》가 년간 문학작품현상모집에 당선되였으니 시상식에 참가하라는 통지서가 왔다.

나는 평양에 올라가 전국에서 모여온 많은 현상모집 당선자들과 함께 행사에 참가하여 《청년문학》편집부 기자들과 선배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야 나의 행운이 하늘에서 떨어진것이 아님을 알게 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조국해방전쟁 말기와 전후복구건설의 그 간고한 환경속에서도 작가후비육성사업을 강화하기 위한 가지가지 대책을 몸소 세워주시였다. 해마다 전국문학작품현상모집을 진행하여 군중문학창작운동을 더 활발히 벌릴데 대한 문제, 작가학원(당시)을 내오고 전도유망한 신인들을 선발하여 공부시켜 작가로 키우는 문제 그리고 문학통신원들의 활무대로서 《청년문학》잡지를 발행하도록 하여주시였다. 이처럼 국가적인 정연한 작가후비육성체계가 선 나라는 세상에 없을것이다.

바로 어버이수령님 열어주신 큰길이 있었기에 미숙한 저의 첫 작품도 세상에 태여날수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아직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석윤기동무의 단편소설 《두번째 대답》과 나의 단편소설 《아버지의 노래》를 보시고 말씀이 계셨다는것을 알지 못했다. 세월이 퍽 지난 어느해 나는 이 사실을 알게 되였다.

《청년문학》잡지의 창간호부터 달마다 나오는 잡지를 다 읽어보신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주체45(1956)년 12월 22일 단편소설 《두번째 대답》과 《아버지의 노래》는 깊은 인상을 남기는 좋은 작품이다, 단편소설 《아버지의 노래》는 조선혁명은 오직 경애하는 수령님에 의해서만 승리할수 있으며 혁명은 대를 이어 꿋꿋이 계승된다는것을 설득력있게 보여준 혁명전통주제의 작품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후 주체47(1958)년 2월 7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청년문학》잡지 1956년 7월호에 실린 단편소설 《아버지의 노래》를 독보하고 그에 대한 감상발표모임을 조직하여야 하겠다고, 몇해전에 나온 이 소설은 혁명전통주제의 작품으로서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고, 작품은 조국광복회 회원인 아버지의 형상과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은 아들의 형상을 통하여 혁명은 대를 이어 계속되여야 한다는것을 잘 보여주고있다고, 일제의 탄압과 압박속에서 벗어나자면 오직 김일성장군님만을 믿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아버지의 확고한 신념, 일제경관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두만강을 넘나들며 유격대원들과 련계를 취하는 부자간의 모습, 특히 유격근거지에 가져가야 할 화약을 배에 싣고가던 도중 적과 맞다들어 싸우다 희생되는 아버지의 장렬한 최후장면은 참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있다고, 중편소설로 될만 한 이야기를 짧은 단편소설에 재치있게 담은 좋은 작품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너무도 뜻깊은 말씀이여서 어떻게 나의 작은 가슴에 새겨안을지 아득하기만 하였다. 이 단편소설이 발표되였을 때 문단에서는 초학도 신인이 보기드문 주제를 가지고 괜찮게 썼다는 정도의 평가를 하였을뿐이고 필자인 나자신도 그이상 더 생각해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저의 작품을 이처럼 높이 평가하시였다니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내가 어떻게 이 소설을 쓰게 됐던가고 새삼스럽게 돌이켜보았다. 나는 주체44(1955)년에 평양사범대학(당시) 어문학부를 졸업하였다. 동창들은 배치되여 떠나가고 나 혼자 대학연구원생으로 남게 되였다. 대학은 아직 전쟁시기에 소개한 평안북도 피현군 충렬리라는, 철도역에서도 30리가량 떨어진 농촌에 전개되여있었다. 여름방학이여서 재학생들도 모두 집에 돌아가버린 대학에 혼자 남은 나의 심정은 착잡하였다. 10대소년시절부터 작가가 되여보려는 야심을 품고 모대겨온 내가 전쟁이 한창이던 주체41(1952)년에 군복을 벗고 당의 은정으로 갈망하던 대학공부까지 하였는데 이제 나는 어느 길로 가야 하느냐? 나이도 26살, 3년 공부를 더 하고 학위론문을 쓰는것은 학자, 교원이 되는 길인데 과연 작가수업을 단념해야 한단 말인가. 며칠간 번민끝에 결심한것은 소설을 써보자는것이였다. 학자냐, 작가냐, 운명의 갈림길이다. 나는 습작으로 시험쳐보고 길을 선택하자는 소년같이 단순한 결심을 하게 되였다.

무엇을 쓸것인가. 그날부터 나는 운명을 건 습작의 종자탐색으로 밤을 지새웠다. 길지 않은 생의 체험을 더듬으며, 해방후 간간히 써놓았던 몇권의 일기책 갈피들도 뒤져보며…

세멘트공장에서 생산증산전투를 벌리던 일, 평양에서 민청과 조국보위후원회 지도원(당시)으로 주야분투하며 뛰여다니던 나날들, 총잡고 2년간 전선길을 달리던 추억… 나이에 비해 비교적 체험이 많았던 추억속에는 소설이 될만 할 이야기거리들이 없지 않았으나 어쩐지 그 모든것을 누르고 떠오르는 충동이 있었으니 그것은 두만강에 대한 이야기였다. 두만강은 나에게 있어서 잊을수 없는 운명의 강이였다. 나는 8살때 아버지를 여의였다. 어머니는 형과 나 그리고 젖먹이동생을 데리고 살길을 찾아 세번이나 기차를 갈아타면서 두만강을 건너 2천리 가까운 간도땅으로 갔다.

황해도를 떠날 때는 아직 따뜻한 마가을이여서 동네아낙네들이 빨간 감을 따 베천쪼박에 싸서 내손에 쥐여주며 바랬었는데 두만강다리를 건늘 때는 사나운 눈보라가 얼어붙은 두만강을 휩쓸고있어 어린 마음에도 어쩐지 쓸쓸하고 두려운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간도땅에 가서 도문과 남양, 왕청과 묘령, 룡정 등 두망강연안을 가까이 끼고 살면서 김일성장군님과 김일성장군님부대의 전설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다. 학교에서는 날마다 학우들한테서 가랑잎을 띄워타고 두만강을 넘나든다는것과 같은 전설같은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고 집에서 삯바느질하는 어머니를 찾아오는 동네아낙네들에게서 별세상 같은 유격근거지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중국어를 가르치는 중국인교원은 왜놈군대 《토벌》대에 통역으로 끌려갔었는데 한개 중대의 왜놈 《토벌》대가 5대의 자동차를 타고 기동하다가 유격대의 매복에 걸려 전멸하고 자기를 포함한 몇명이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도망친 사연을 45분 수업시간 꼬바기 채워 이야기하고나서 김일성빨찌산의 총알에는 눈이 있다고 감탄하는 소리도 들었다. 한번은 룡정에서 수백명의 왜놈《토벌》대가 《이기고 돌아오리 용감스럽게…》 소리높이 군가를 부르며 떠나가더니 얼마후에 떠날 때의 절반도 되나마나한 놈들이 가슴에 저마다 백골단지 한두개씩 안고 《바다에 가면 물에 절인 시체가 되고…》하는 구슬픈 장송곡을 따라 질질발을 끌며 돌아오는 꼴도 보았다. 그리고 조국이 해방되던 주체34(1945)년 8월에는 바로 두만강연안의 큰길로 최후결전장에서 만신창이 된 왜놈패잔병들이 허겁지겁 도망쳐가는 광경― 다리부러진 놈, 팔 떨어진 놈, 벌거벗은 몸에 피얼룩진 붕대를 감은 놈, 붕대조차 상처에 감지 못한 놈…

부락사람들이 밀려나와 세차게 흐르는 두만강건너편 조국땅을 향하여 만세를 불렀었다.

《조선독립만세―》

김일성장군 만세―》

나도 목소리를 합쳤다. 세상에 태여나 16년만에 처음으로 불러보는 눈물겨운 만세소리였다.…

이것이 운명의 강, 두만강에 대한 잊을수도 지울수도 없는 나의 추억이였다. 나는 이것을 내용으로 소설을 쓰리라 결심하였다. 하지만 철부지소년시절의 추억이라 아무리 더듬어도 거기서 소설의 실머리가 될만 한 이야기거리는 찾을수가 없었다. 우선 항일혁명투쟁사를 알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대학도서관을 샅샅이 뒤졌으나 사료로 될만 한 력사책은 없고 겨우 조기천의 장편서사시 《백두산》과 한설야의 단편소설 몇편을 찾아냈을뿐이였다. 천만다행이라고 할가 력사학부 자료실에서 김일성장군략전》을 찾아낼수 있었다. 하얀 표지로 된 소책자였으나 위대한 수령님께서 탄생하신 때로부터 조국개선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수령님의 항일혁명투쟁 전로정이 뚜렷이 수록되여있었다.

김일성장군략전》을 연구하는 과정에 작품구상의 실머리가 풀리기 시작하였다. 항일혁명투쟁은 주로 압록강, 두만강연안에서 진행되였기때문에 작품의 무대를 두만강으로 정하고 등장인물은 나루배 사공으로 하는것이 좋지 않을가 하는 생각에까지 가닿았다. 사공들은 대개 타령군, 이야기군들인데 나는 가끔 나루배를 타고 두만강을 건너다니면서 사공과 배손님들이 김일성장군님부대 전설을 비롯하여 세상만사 돌아가는 이야기를 구수하게 나누는것을 많이 보아왔다. 그러나 배사공은 좋은데 그를 항일유격대와 어떻게 련결시킬지 방도가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김일성장군략전》을 다시금 조목조목 탐독하는 과정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조국광복회를 창립하시고 그 조직을 국내에까지 널리 확장하신 사실을 알게 되면서 무릎을 쳤다. 사공아바이를 조국광복회 회원으로 하면 될것 같았다. 조국광복회회원인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정하고 아들까지 함께 등장시키고보니 작품의 구성이 순순히 풀려나갔다. 그리하여 나는 펜을 들고 일사천리로 써나갈수 있었던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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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종종 책상에서 나의 단편소설집을 꺼내여 첫 순서에 있는 단편소설 《아버지의 노래》를 펼치군 한다.

그럴 때면 혁명군을 찾아가는 청년과 원호물자를 싣고 아들과 함께 노를 젓는 사공아바이가 흥겹게 부른 《청진포 배노래》가 울려오는것만 같다.

 

두만강 푸른 물에 혁명군이 배 띄웠다

가슴에 불길을 올려라 어루화 싸움터 가잔다

둥그대 당실…

 

내가 그려낸 인물이고 가사를 덧붙인 민요이지만 그런 생각은 없고 그립던 아바이의 숨결처럼 가슴 찡하게 울려온다. 주관이기는 하지만 나는 그만큼 사공아바이부자를 뜨겁게 사랑하였다. 나는 홀연 깨닫게 되는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재간만 가지고는 작품을 쓸수 없다는것이였다.

세월이 흐른 뒤에 읽어보는 단편소설 《아버지의 노래》에서 나는 사공아바이의 모습은 살아있다고 생각된다. 재간은 없어도 말그대로 사공아바이를 심혈을 바쳐 형상하였다.

주체문학예술창작의 제일보는 탁상문학이 아니라 진실하고 생동하고 절절한 체험문학이 되여야 한다.

이것이 경애하는 장군님의 과분한 평가의 말씀속에 깊이 깔려있는 가르치심이라고 확신하였다.

이것은 나뿐이 아니라 작가, 창작가들이 한생 견지해야 할 창작의 기본립장이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강성대국을 건설하는 현장에서 일하면서 창작수업을 하는 신인, 문학통신원들의 경우에는 직업적인 작가들과는 달리 탁상문학과 현실체험이 량립될수 없다. 그대신 문학통신원들은 자기가 발을 붙이고있는 현실에서가 아니라 다른 생활을 넘겨다보며 이야기를 꾸며내려는 경향이 나타나고있다 . 때문에 문학통신원은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불후의 고전적로작 《주체문학론》에서 가르쳐주신대로 종자를 바로잡고 현실생활을 깊이있고 풍부하게 그려내기 위해 힘써야 할것이다.

나는 문학통신원들이 조선로동당창건 65돐을 높은 정치적열의와 빛나는 로력적성과로 빛내인 승리자의 기세드높이 강성대국건설의 최후돌격전에 떨쳐나선 천만군민을 힘있게 고무추동하는 힘있고 전투적인 문학작품들을 더 많이 창작하리라는것을 확신한다. 아울러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은 정치적신임과 믿음에 자신의 모든 지혜와 열정을 깡그리 다 바쳐 보답하겠다는것을 결의하면서 펜을 놓으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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