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11(2022)년 제2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이 꽃다발을 받아주세요

주흥건 

(제 1 회)

 

자력갱생의 선구자들은 긴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공장자체의 힘으로 국내원료에 의거하여 첨단제품을 개발하고 공업화에 성공함으로써 나라의 기초화학공업에 또 하나의 자립의 주추를 마련한 어느한 화학공장에서 받은 느낌이다.

나는 그들에 대한 이야기에서 어느 여름날 저녁 하나의 꽃다발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을 사람들에게 전하기로 마음먹었다.

 

18시. 류순은 꼭 모아붙인 무릎우에 꽃다발을 든 두손을 가벼이 놓은채 지배인실의 맨뒤에 나부시 앉아있었다. 흰색의 산뜻한 샤쯔에 연회색치마를 조화가 되게 맞추어 입어서인지 오늘따라 별로 훤해진 자기를 두고 다들 별나게 생각하지 않을가 하는 공연한 위구감이 다 들었다.

앞에서는 갓 마흔의 패기있는 지배인이 월총화에 모여온 부서책임자들과 직장장들을 둘러보며 서두삼아 몇마디 하고있었다.

《지배인으로 온지 한달밖에 안되기에 저는 여기 모인 일군들을 자상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정확한것은 매달 이 자리를 빌어 두사람씩은 충분히 기억할수 있다는겁니다. 제일 앞선 일군과 뒤꽁무니를 차지한 일군!》

부드럽게 들리는 그의 말에 박혀있는 가시같은 의미를 누구보다도 먼저 느낀 류순은 제편에서 흠칫하며 눈길을 떨구었다. 시선이 자연히 무릎우에 놓인 꽃다발에 가닿았다. 아름다운 꽃송이들, 그윽한 향기…

《실장동무, 그 꽃다발을 누구한테 준다구요?》

따지는듯한 누군가의 목소리, 그것은 귀전이 아니라 뇌리에서 울렸다. 류순은 한숨과 함께 두눈을 스르시 감았다. …

성의없는 문기척을 대충하고는 응답을 기다릴새도 없이 문을 활 열어제끼며 한 청년이 들어섰다. 휴계실안에서 거울을 마주한채 옷을 갈아입고있던 류순은 어마나 소리도 못지른채 굳어져버렸다. 깜짝 놀라서가 아니라 여직껏 목소리 한번 높여본적 없는 사람이 몹시 흥분하여 이렇듯 무작정 뛰여들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아서였다.

청년의 눈길은 자기를 쏴보는 처녀의 시선을 피해선지 책상우에 나란히 놓여있는 류순의 사업수첩과 꽃다발에 박혀있었다. 이윽고 한숨과 함께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물론 이제 와서까지 내가 감 놔라, 배 놔라 할 체면은 없습니다.》

허락도 없이 성큼 문턱을 넘어서던 기상은 한숨속에 잦아버렸는지 강삼명은 자기의 순박성을 되찾은듯했다. 하긴 지나치다할 정도로 용한 사람인데다 요즘은 죄책감때문에 더더욱 국산화연구실(공장에서는 자체실정에 맞게 국산화연구실을 내왔다.)의 일에 간섭할 명분이 없는것이다.

전극직장 공정기사가 제일도 아닌 일에 오지랖 넓게 나서가지고 전착물(전극의 겉면에 전기분해방법으로 붙이는 물질)시험이 꼭 성공할거라고 류순을 극구 부추겨(물론 자기도 그 시험에 뛰여들었다.) 월계획에 반영하게 했고 종당에는 시험이 완전실패하는 바람에 국산화연구실이 월총화에서 맨 뒤자리를 차지하게 만든 장본인인것이다.

류순은 그가 미안한 감정을 터놓으러 왔으리라 믿고싶었다. 그런데…

《난 사실… 실패는 했지만 꽃다발은 실장동무가 받게 될줄 알았단 말입니다.》

삼명은 처음처럼 다시 격해져 언성을 높였다.

류순은 마치 생면부지의 사람과 마주선듯이 느껴졌다. 그가 알고있는 강삼명은 체소한 몸집에 정비례되게 가느다란 목소리와 검스레한 얼굴, 전극직장의 기술사업을 돌보는 여가에 짬짬이 실험실을 찾아와 봉형전극(도자기재료로 봉모양으로 만든것을 자기봉이라 하고 거기에 전착물을 입힌것이 봉형전극임)개발을 돕던 사심없는 마음… 한마디로 참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 아니였던가.

《그런데 이번 총화에서 무역과장동무에게 특별히 꽃다발을 준다니… 어떻게 그럴수 있습니까? 결국은 국산화를 해보겠다고 나선 사람이 자기봉을 수입해온 사람에게 꽃다발을 주니 이거야 어디…》

삼명은 억이 막힌듯 말을 맺지 못하고 씩씩 댔다.

류순은 그의 심정이 리해됐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녀자치고는 어지간히 큰키에 어울리게 몸매도 보기 좋은 류순은 앞에 선 가무잡잡한 삼명을 한동안 바라보다 위로하는듯한 어조로 말을 했다.

《어찌겠어요, 우리때문에 무역과에서 외국대방과의 힘든 거래를 위해 떠났다는걸 동무도 알지 않나요? 욕망만 앞세우면서 일을 그르친 내가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는 무역과장동무에게 꽃다발을 안겨준다면 좋은 일이 아닐가요?》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무역과장동무만은 안됩니다.》

류순은 자기와 무역과장 함정철이 한때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을 념두에 두고 강삼명이 이런 말을 하는것이라고 단정했다.

《연구사업외에는 동무가 나를 관심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데요.》

《이건 공장의 운명과 직결된 문제입니다. 아마 기사장동진 지금쯤…》

《그만해요! 이젠 우리 아버지까지 꺼드는군요.》

류순의 참을성이 한계점에 이르렀다. 전착물시험이 국산화연구실의 월계획으로 일정에 올랐을 때 누구보다도 지지했고 필요되는 자기봉을 함정철에게 시켜 해결해준것도 류순의 아버지인 류만현기사장이였다.

《지금같이 행동하는 기사동무를 보게 되는것이 참말 유감스럽군요.》

류순은 차마 나가라는 말은 못하고 눈길을 문가로 돌렸다. 그러나 삼명은 고집스럽게 꽃다발만 보고있었다. 쉬이 물러설 기미가 아니였다.

다시금 옷차림을 다잡고난 류순은 사업수첩에 꽃다발을 덧놓아든채 말없이 방을 나섰다. …

 

《자자, 웃을 일이 아니요.》

지배인이 술렁거리는 장내를 정돈시키려고 반음정도 목소리를 높이자 생각에서 깨여난 류순은 눈을 뜨고 앞을 보았다.

《월총화에서 뒤꼬리를 차지한 단위의 일군이 앞선 단위의 일군에게 꽃다발을 안겨준다는것을 다들 잊지 않았을거요.》

류순은 모두의 눈길이 혹시 자기한테로 쏠리고있지 않을가 근심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지배인의 목소리가 계속 울렸다.

《다들 알아둬야 할것은 이것이 그 어느 일군의 위신을 떨어뜨리자는것이 아니라 자극을 주고 분발시키자는데 목적이 있는겁니다. 물론 제일 앞선 단위의 일군에겐 축하를 주자는것이고.》

또다시 강삼명의 얼굴과 함께 몇분전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

 

《자, 받아라.》하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이어 실의 하루사업을 총화짓고난 류순이앞에 난데없이 큼직한 꽃다발이 놓였다.

이 꽃다발은 뭘가?

류순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꽃다발에 가닿으려는 순간 아버지가 코김을 흥 내불었다.

《네가 뭐 자격이나 있게? 하긴 이자 웬 녀석이 이 꽃다발은 네가 받아야 한다고 했다마는…》

아버지의 말이 옳았다. 월총화에서 꽃다발을 받으려던 꿈은 전착물의 성공가능성이 완전배제된 지금에 와서 산산이 깨진것이 분명했다.

《연구사업이 쉽지 않다는걸 알면서도 봉형전극수입에 드는 자금을 줄일수 있다는 생각에… 그렇게 됐다고 봐야지.》

류만현이 전착물시험에서 성공한다고 장담하는 바람에 함정철은 대방회사와의 봉형전극수입계약을 자기봉수입계약으로 바꾸었던것이다. 그런데 전착물시험이 실패하자 봉형전극이 없어 생산이 멎을판이였다. 하여 류만현은 함정철에게 계약은 차차 바꾸기로 하고 당장은 생산에 필요한 봉형전극부터 구입하라고 단단히 과업을 주었던것이다.

류만현이 꽃다발을 공연히 손으로 다듬으며 속깊은 소리로 말했다.

《정철일 고맙게 생각해라. 그가 아니면 누가 이 일을 하겠니? 그전처럼 그의 도움을 응당하다구 여겨선 안돼. 참, 너희들은 갈라졌더라?》

《아버지두 참, 언젠 뭐 붙어다녔게요?》

류순은 밉지 않게 눈을 할기면서도 함정철과 서로 배우고 배워주며 가까이 지내던 일들이 떠올라 얼굴을 붉혔다.

《됐다. 됐다. 그땐 그때구… 네 자존심에 먼저 찾아가 낮추붙긴 싫을테니 지금이 얼마나 좋은 계기냐. 꽃다발을 척 안겨주면 서로의 마음이 통할수 있거던.》

《아이, 아버진 무슨 말씀을…》

딸이 막 야단을 쳤지만 류만현은 그냥 능글능글 웃었다.

《오늘은 옷맵시를 좀 봐라. 실험복차림으로 삼명이녀석하구 마주서있을 때와는 달라. 정철인 이를테면 멋쟁이거던. 하여튼 진심으로 고맙다고 해라.》

류만현은 깜빡 잊었노라며 들고온 책을 뒤적이더니 큼직한 사진 한장을 척 꺼내놓았다. …

 

몇분전에 그렇게 류순의 손에 쥐여진 사진이 지금도 사업수첩갈피에 끼여있다. 류순은 조심조심 사진을 끄집어냈다.

사진은 함정철이 해외출장중에 찍은것이였다.

화려하게 꾸려진 면담실에서 동양인인지 유럽인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 한 녀성과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였다. 사진의 질이 좋아서인지 녀자의 눈이며 코, 입술은 물론 가슴에 달려있는 명찰표에 《마코스타전기화학합영회사 무역대표 엽니나》라는 딱히 어느 나라라고 찍지 못할 범벅식의 회사명칭과 이름이 씌여진것도 또렷이 보였다.

류순은 다시 사진을 보았다.

사교적인 웃음을 한껏 띠고있는 이런 장사의 능수들과 능란한 거래전을 벌려 이미 전착물시험에 쓸 자기봉을 구해보내고 이번에 또 걸음을 하여 절박하게 제기되는 봉형전극을 구입해오려 한다니 류순은 그저 탄복될뿐이였다.

류순의 뇌리에는 함정철과 전극연구를 위해 고심어린 날들을 바쳐가던 대학시절이 어제런듯 떠올랐다.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 부모의 슬하를 떠났던 류순이 첫 방학을 왔을 때 집에는 알지 못할 청년이 하나 와있었다. 그가 함정철이였다.

그때 정철은 전극직장장으로 있던 류순의 아버지밑에서 공정기사로 갓 일을 시작했을 때인데 쭉 빠진 체격에 인물 잘나고 총명한 그가 합숙생활을 하기에 류만현이 아버지된 심정으로 돌봐주고있었다. 정철이쪽에서도 직장장네 집에 스스럼없이 드나들면서 어느새 아들맞잡이가 되였다.

아직은 다 자랐다고 볼수 없는 딸이여서 류만현은 오빠가 하나 생긴셈치라고 귀뜀하였다.

정철은 당연히 오빠가 되여 류순의 방학숙제를 도와주었다. 물론 그것도 류순이 대학을 다니는 동안만이고 박사원에 가서부터는 도리여 함정철이 새형의 전극이라는것을 연구하느라 머리를 싸매고있는 상태여서 류순의 방조를 받았다.

박사원졸업반때 론문을 완성하느라 공장에 왔을 때 정철은 공장에서 수년간 익힌 경험과 습득한 지식으로 류순의 론문완성에 사심없는 기여를 하였다.

론문을 완성하고 공장을 떠나던 날 정철은 류순에게 이렇게 물었다.

《순인 이제 졸업하면 어떻게 하겠소?》

류순은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더니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난 이미 결심했어요. 공장으로 오는건 아버지의 뜻이기도 해요.》

《아, 그렇지. 아버지의 뜻을 어기면 안되지.》…

《그럼 월총화를 시작합시다. 기사장동무.》

지배인이 자리에 앉으며 언권을 넘겨주자 류만현이 일어섰다.

《가만, 무역과에서 왔습니까?》

류만현이 큰소리로 물었으나 장내에는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장내가 웅성웅성하자 지배인이 기사장에게 물었다.

《무역과장동무가 참가하지 않았습니까?》

《이젠 도착했겠는데… 아마 인차 올겁니다.》

《그렇다면 계속하십시오.》

그제서야 류순은 함정철이 아직 참가하지 못했다는것을 알아차렸다.

이때 지배인이 앉아있는 책상우에서 전화종소리가 울렸다.

《여보시오. 예, 제가 지배인입니다.》

지배인은 기사장에게 계속하라고 손짓하고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끝낸 지배인은 송수화기를 놓으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음! 문제가 있구만.》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다는걸가?

그러는사이에 월총화는 바야흐로 끝나가고있었다.

마감으로 《국산화연구실!》 하고 불렀을 때 류순은 손에 든 꽃다발을 얼른 등뒤로 가져가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 여기 있습니다.》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