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11(2022)년 제2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이 꽃다발을 받아주세요
주흥건
(제 3 회)
18시 25분. 류순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결국 그때 말한 견해일치를 오늘 보게 된단 말인가?
《실장동문 왜 대답을 못하오?》
지배인의 찌르는듯한 시선앞에서 굳어진듯 서있는 류순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대답하고있었다.
《지배인동지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공장앞에 끼친 피해를.》
이때 별안간 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무겁게 들어섰다.
《아, 저기 왔습니다. 지배인동지.》
기사장의 말에 모두가 눈길을 들어보았다.
문가에 서있는것은 어깨가 축처진 함정철이였다.
《어서 이리루 나와앉소.》
지배인이 함정철에게 빈자리를 손짓해보였다.
여기저기서 술렁이는 소리를 들으며 정철은 앞으로 나갔다.
지배인은 다소 도기를 담은 눈으로 그를 지켜보았다.
《난 아까 동무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모든걸 참고 기다렸소.》
류순은 그제서야 전화를 건 사람이 함정철이라는것을 알았다.
장내가 다시 웅성웅성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배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욕이 두려워 오지 않으면 절대로 용서치 않겠다고 생각했소. 그런데 제발로 오는걸 보니 역시 배짱군이라는 생각이 드누만.》
《아닙니다. 저는 한쪼각의 자존심도 없는 놈입니다.》
고개를 떨구고 서있는 함정철을 통 모를 일이라는듯 민망스럽게 바라보던 류만현이 항소라도 하듯 지배인에게 물었다.
《저…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역과장동무야 월초에 전착물시험을 위한 자기봉을 구해왔구 또 이번에는 공장의 생산을 위해…》
《응당 그래야지요. 아까 전화로는 자기봉수입계약이 얼음판에 박밀듯 아주 손쉽게 맺어진거라고 하더군요.》
《그건 무슨?…》
구태여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은 지배인은 함정철이에게 눈길을 주었다.
《안그렇소, 무역과장동무? 사실 나도 전말은 다 모르오.》
《그렇습니다. 자기봉수입계약은 저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그 어떤 요인에 의해 너무도 손쉽게 이루어졌습니다.》
함정철은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
지배인으로부터 국산화연구실의 전착물시험에 쓸 자기봉을 시급히 보장하라는 과업에 이어 기사장한테서 재삼 부탁까지 받고 떠난 함정철은 줄곧 근심에 잠겨있었다. 봉형전극은 손꼽히는 첨단기술이여서 반제품이나 다름없는 자기봉을 주겠는지 하는 심산에서였다. 어쨌든 범을 잡자면 범의 굴에 가야만 하는 법이라 함정철은 목적지에 도착하는 즉시로 대방회사의 무역대표를 찾아갔다.
《저… 사실은 선생을 믿고 한가지… 부탁하려고 하는데…》
언제나 청산류수와 같던 정철이 자꾸만 떠듬거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세요? 함선생도 이럴 때가 다 있다니…》
오히려 엽니나쪽에서 활달하게 나왔다.
《무슨 일인가 하면…》
그는 무작정 자기봉이 필요하다는 말로 서두를 뗐다가 자연히 공장에서 자체로 만든 전착물을 시험해보려고 한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자기봉만 구입해가면 영낙없이 성공할것이라는 말까지 하였다. 그러면서 공장에서 전착물시험이 성공하면 앞으로는 자기봉만 사다쓰려 한다는것과 연구사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였다.
진지한 표정으로 듣고있던 엽니나가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시했다.
《그 연구사처녀가 여간내기가 아니군요. 설마 함선생의 애인은 아니겠지요?》
정철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엽니나는 제법 심중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봉만 가져가겠다는건 사실 회사가 그어놓은 붉은 금지선을 넘겠다는거나 같아요. 하지만 어떻게든 노력해보자요. 참, 앞으로 자기봉만 사가자면 계약도 새로 맺어야겠지요?》
《아무래도…》
정철은 일이 너무 쉽게 번져지는것같아 말끝을 맺지 못했으나 바라던것이여서 은근히 기뻤다. 하지만 함정철은 이것이 무서운 함정인줄은 몰랐다. …
《물론 과장동문 거기에 무서운 모략이 있다는걸 알수 없었을거요.》
함정철의 이야기를 멈춰세운 지배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하긴 나도 몰랐구. 그러나 그걸 내다본 사람이 있었소.》
류순은 가득찬 의문을 안고 지배인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지배인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책갈피에서 한장의 편지를 꺼내들었다.
《기사장동무, 이 편지를 다 듣도록 읽는게 어떻습니까? 모두가 알도록 말입니다.》
류만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큰 목소리로 편지를 읽어나갔다.
《지배인동지! 국산화실동무들과 진행한 전착물시험이 실패로 끝난것을 두고 제가 생각 한바를 적습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전착물을 자기
류순은 더 들을수가 없었다. 기사장 역시 흥분했는지 편지를 더 읽지 못하고있었다.
한 평범한 공정기사가 그렇듯 절절히 봉형전극의 국산화를 열망하면서 뛰고있을 때 기사장인 자기는 무엇을 하고있었던가 돌이켜졌으리라.
지배인이 기사장더러 이만 앉으라고 자리를 권했다.
《무역과장동무, 할 말이 없소?》
듣기에 부드러운 물음이였지만 함정철은 고개를 떨군채 중얼거렸다.
《부끄럽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함정철은 얼굴에 질벅히 내밴 땀을 손으로 대충 훔치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
시험이 실패한 후 봉형전극때문에 다시 대방회사의 무역대표를 찾아간 정철은 무작정 마음속근심을 꺼내보였다.
《엽니나선생, 야단났소.》
《아니, 어떻게 또 왔어요? 무슨 일이라도 생겼는가요?》
정철은 모르쇠하는 그가 대뜸 낯설어보였다.
정철은 속이 부글거렸지만 애써 누르며 예고없이 찾아온 사연을 간단히 얘기하고 이전처럼 봉형전극을 달라고 부탁했다.
엽니나는 잠시 눈을 감은채 가슴에 십자가를 그으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눈귀가 웃는것만은 감추지 못했다.
《귀 공장에서 시험이 실패했다니 참 안됐군요. 헌데 이걸 어쩌나? 가격이 전같지 않아놔서… 그새 두배나 뛰여올랐어요.》
《아니, 이거 무슨 황당한 소리요? 계약에 체결된 가격대로 해야…》
《계약이요?! 그거야 이미 취소되구 자기봉을 사겠다는 새 계약이 체결되지 않았나요? 그걸 파기하구 원래대로 봉형전극을 사겠다면 두배값을 물란 말이예요.》
《이건 너무하지 않소.》
엽니나는 큰소리로 웨치다싶이하는 정철을 조롱하듯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꼭꼭 씹어 말했다.
《귀 공장에서 했다는 전착물시험의 실패원인은 바로 당신에게 있어요. 당신은 정말 어리석어요.》
《그럼 당신들이?! 아, 내가 무슨 일을…》
정철은 두손으로 머리를 움켜쥐였다.
어느결에 자리에서 일어선 엽니나가 오락가락하며 뇌까렸다.
《그러니 함선생, 어서 결심하세요.》
정철의 머리속에서 불꽃이 펑끗 일었다.
류순이와 함께 연구를 계속해왔더라면 이미 전착물을 완성하고 지금은 모름지기 자기봉까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남을 바라보다가…
함정철은 거연히 머리를 쳐들었다.
《우린 결심했다! 머지않아 우리 공장에서 만든 봉형전극을 보여줄테니 계약은 필요없다!》…
그러니… 류순은 일순간 맥이 쫙 풀리면서 온몸이 바닥으로 찾아버리는것만 같았다. 앞에 앉아있는 아버지의 사색이 된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지배인의 안색도 흐려있었다.
《그런즉 전착물시험의 실패가 수입자기봉때문이라는것이 확실하단 소린데…》
갈려든 목소리로 하는 지배인의 말이였다.
함정철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저를 다시 전극직장에 보내주십시오. 너절하게 비라리해서 얻어오던 봉형전극을 이제 국산화실동무들이 개발해내면 이 손으로 꽝꽝 생산해내고싶습니다. 저에겐 무역과장일이 맞지 않습니다.》
《음, 그렇다?!》
지배인이 심각해서 혼자소리처럼 뇌이는 말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