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7(2008)년 제1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붉은 고추
박 성 진
《태양의 빛이 있어 고추는 붉어졌단다.》 항일무장투쟁연고자인 나의 할머니는 소일거리로 크지 않은 고추밭을 가꾸며 늘 이렇게 외우군 하였다. 이 세상 만물의 다양한 색소가 해빛에 기초하고있다는것은 너무도 자명한 리치이다. 그러나 나라없던 수난의 그 세월 험악한 세상과 맞서 《고추》가 되려 했던 나의 할머니가 숙연한 어조로 외우군 하던 이 말의 참의미를 나는 철이 들어서야 알게 되였다.
1
나의 할머니(차순매)가 나라잃은 망국의 설음을 안고 부모를 따라 낯선 이국땅으로 흘러갔을 때는 한창 꽃피는 시절이라는 처녀때였다. 거기에서 나는 고추들은 대개가 재래종이였다. 고추꼬투리는 엄지손가락처럼 굵직하면서도 짧았는데 휘여든 끝이 몽톡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 고추꼬투리는 순매에게 한갖 흔히 보는 토산물에 불과했다. 만주의 황량한 들에 울짱을 박은지 두해째 되던 어느날 순매는 부모들이 진 빚돈때문에 어느 부자집의 민며느리로 끌려갔다. 칠보단장도 없이 눈물을 짜며 얼굴이 부얼부얼한 시아버지를 따라갔는데 사내라는건 열살밖에 안되는 몽유병환자였다. 순매가 《시집》온지 얼마 안되여 《9. 18사변》이 터지며 산골오지에 살던 부모동생들이 모두 왜놈들에게 잘못되였다는 기막힌 소식이 날아들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저주하며 순매는 반년남짓하게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신랑》이 덜컥 죽고말았다. 그러자 그를 보는 《시부모》의 눈길이 서로 달라졌다. 《시어머니》는 더욱 앙탈을 부리며 다몰아대였고 《시아버지》는 더욱 사근사근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행랑살이하던 할멈이 조용히 찾아와 귀띔했다. 《시어머니》가 왜놈료정같은 곳에 순매를 팔아먹을 꿍꿍이를 하고있다는것이였다. 《시어머니》가 그런 흉심을 품게 된것은 순매를 보는 제 서방의 눈길이 매우 부드러워졌기때문이였다. (운명의 희롱을 앉아서 기다릴수야 없지 않는가.) 기회를 보던 순매는 드디여 《시집》을 탈가하였다. 그리고는 40여리 떨어진 고모의 집에 얹혀살며 한동안 바깥동정에 귀를 강구었다. 고모(차씨)는 만주로 먼저 들어온 남편을 찾아왔다가 주저앉은 녀인인데 《왕드살》이라고 할만치 성미가 괄괄하고 영악스러웠다. 이 고모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제가 하던 고추장사짐을 선뜻 순매에게 지워주었다. 아마도 차씨는 마음여린 조카를 세파속에 내던져 맵짜게 《도》를 닦게 할 심산이였던것 같다. 그러나 노죽이 없고 수선떨줄 모르는 순매로서는 부대기 뚜지는것만도 못한 내키지 않는 일이였다. 더우기 꿈속에서도 얼른거리는 《시아버지》가 어디서 불쑥 나타날지 모르는 판에 붐비는 장거리로 나간다는건 풍랑만난 쪽배우에 오른것처럼 불안한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차씨의 어조는 강경했다. 《집안에 들어박혀선 아무일도 못친다. 쫓겨다니지 말고 한시바삐 그 빚돈을 장만해놔야 한다. 그러면 그 〈시애비〉가 나타나도 너를 어쩌지 못해!》 그러면서 시름겨운 어조로 덧붙였다. 《운명이 하두 사나와 이렇게 쫓겨는 왔다만 왜 빚진 종까지야 되겠냐.》 순매는 그때부터 이를 악물고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성정이 온순한 순매는 본전도 못 찾을 때가 많았다. 50전에 지레늙어 풍상에 그을린 로송처럼 된 차씨는 순매를 못미더워하며 훈시하군 하였다. 《넌 아직 설익은 풋당추야. 작아도 고추라는 말도 있지 않느냐. 맵짠 〈고추〉가 아니고서는 이 험악한 세상살이를 못한다!》 푼전 한잎을 놓고 야박한 흥정이 오고가는 생존경쟁의 치렬한 마당에서 순매도 차츰 매서운 표정을 짓게 되였다. 때로는 가시돋힌 상욕도 내뱉았고 제 웃음아닌 어설픈 미소로 사람들을 제 보짐앞에 끌어앉히기도 하였다. 돌아오는 길에는 바다의 섬처럼 드문드문 박혀있는 부락들을 훑으며 더부룩한 초가집 추녀아래서 만주바람에 흔들거리는 고추타래들을 사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썰렁한 부엌바닥에 쪼그리고앉아 베수건으로 코와 입을 둘러감고 밤새도록 절구질을 했다. 빚진 종이라는 속박감에서 한시바삐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여 순매의 절구질소리는 듣는 사람도 숨가쁠 정도로 다급히 울리군 하였다. 그러나 실에 꿰인 그 고추타래가 자신의 운명과 보다 심각하게 극적으로 엮어지게 되리라고는 그때 미처 알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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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럴수 있어요?》 순매는 야속한 얼굴로 순박하게 생긴 한 녀인을 다몰아대였다. 어제 저녁까지도 순매가 오늘 받아가기로 약속이 되여있던 다섯근이 넘는 고추타래를 어떤 처녀가 금방 몽땅 사갔다는것이다. 《글쎄… 값을 2전씩 더 올려주겠다니… 참, 아재도 올둥말둥싶고…》 삽짝문을 잡고선 녀인이 미안스런 표정을 지었다. 순매는 한동안 처연하게 서있다가 애달픈 어조로 물었다. 《이 마을에 고추 건사한 집들이 더 없을가요?》 《글쎄… 방금 왔던 아재도 짐이 작다면서 집집마다 훑던데… 가만! 저 아잰가?》 돌아보니 얼마간 떨어진 동구길의 등굽은 소나무밑에서 자색목도리를 두른 녀인이 마대를 꽁져매고있었다. 석양의 잔광속에 하얀 버선발이 유표했다. 순매는 시들한 얼굴로 외면하다가 그 어떤 적의를 느끼며 다시 돌아섰다. 자신의 《활동무대》를 뻐젓이 가로탄 그 녀인에게 가시돋힌 소리라도 한마디 던져주고싶었다. 로송밑의 무덕무덕 쌓아놓은 조짚무지우에 마대를 올려놓고 등을 돌려대던 녀인은 앞을 막아선 순매를 의아해 올려다보았다. 깔끔한 눈길로 그를 훑어보던 순매는 그만 눈이 굳어져버렸다. 복성스런 얼굴에 몸가짐이 단정한 처녀… 그래, 장거리에서 맹랑한 일로 마주섰던 기억이 났다. …그날 이고나온 고추가루를 다 없앤 순매는 싸구려소리가 귀에 솔은 장거리에서 장사치들이 펴놓은 물품들을 이것저것 살피며 걸어오고있었다. 이때 등뒤에서 자기를 찾는 청아한 목소리가 울리였다. 돌아보니 동생벌이 돼보이는 처녀가 당돌한 얼굴로 자기를 유심히 마주보고있다. 《방금전 고추가루를 팔았지요?》 그랬다. 어떤 수더분해보이는 녀인에게 남아있던 고추가루를 그대로 넘겨주었다. 그때 이 처녀가 그옆에 함께 서있던 기억이 났다. 《왜 그러니?》 《고추 사놓고 받은 거스름돈을 보니 값셈을 잘못한것 같아서요.》 의아해 서있던 순매가 대뜸 몸을 도사렸다. 등치고 간빼먹는 협잡군들이 욱시글한 판에 녀자라고 허투로 보았다간 큰 랑패를 본다. 순매는 가시돋힌 어조로 매섭게 내쏘았다. 《누굴 풋당추로 아는거니?》 비록 학교물은 못 먹어봤어도 아버지의 회초리속에 산가치셈법만은 익혀둔 순매였다. 《저리 비켜!》 《?…》 순매는 아연해 서있는 그 처녀에게 차거운 눈길을 던지며 씽 그 자리를 떴다. 그런데 일도 참!… 집에 와서 값셈을 다시 해보니 고추 판 돈이 분명 5전이 비여있었다. 그러면 그 돈을 돌려주자고?… 그럴수가 있을가?… 그 처녀를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그 처년 그때 일을 감감 잊은듯 말끄러미 올려다본다. 《왜 그러나요?》 순매는 대뜸 나가려던 모난 소리와는 달리 서글프게 입을 열었다. 《됐다, 잘 팔아라.》 순매가 허청이며 돌아서는데 처녀가 《언니!》하며 나직히 불러세웠다. 우뚝 서서 벙어리처럼 반응이 없던 순매는 한참만에 푸념조로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약속했던 고추였는데 네가 한발 앞섰구나. 그런데 값은 왜 2전씩 더 올리며 극성이냐?》 처녀는 자색목도리밑에서 머루알같은 두눈을 깜박이였다. 어둠의 장막이 서서히 내리덮힌다. 순매가 활기없이 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발자국소리가 자박자박 들려왔다. 문득 차디찬 대기를 휘저으며 그 처녀의 목소리가 다심하게 울려왔다. 《저, 언니! 얼마나 사려고 했어요?》 순매가 침울해서 돌아서자 온화한 눈길이 마주보고있다. 《그건 왜?》 처녀가 순매옆에 나란히 따라섰다. 《그런데… 그렇게 받아선 얼마씩이나 벌어요?》 《몇푼 벌지도 못해. 그나마 이렇게 허탕칠 때가 많아.》 한동안 말없이 발부리만 보며 걷던 처녀가 불현듯 타협조로 입을 열었다. 《언니가 이 고추를 몽땅 받을수 있어요?》 순매는 우뚝 섰다. 《내가 네가 산걸?》 《네.》 《얼마에?》 《언니는 23전에 받기로 했다면서요?》 순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넌 25전에 받았다면서 나한테 23전에 준단 말이냐?》 그 처녀가 쌍까풀진 눈을 간잔지런하게 뜨며 미소지었다. 《예.》 순매는 홀린듯 한 눈길로 처녀를 바라보았다. 귀가 솔깃했지만 뭔가 석연치 않다. 장사는 결코 도락이 아닌것이다. 그 처녀가 정색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요.》 《?!…》 《가루를 봏아서는 그대로 저에게 넘겨주세요. 물론 시장값으로 받겠어요.》 그렇게만 해준다면 얼마나 고맙겠는가.… 하지만 순매는 의심이 버쩍 들었다. 장마당안에서 무안을 당한 일을 가지고 나를 조롱하려드는게 아니야? 《난 모르겠어. 네가 어떻게 친절하게 그런 인정을 쓰는지?…》 처녀가 진지한 얼굴로 순매를 지켜봤다. 《언니! 우린 다 같은 처지예요. 이국땅에 쫓겨온 류랑민, 망국노…》 《망국노?》 순매는 한순간 흠칫했다. 지금껏 부모잃은 고아의 설음을 두고 눈물지으면서도 또 빚진 종의 신세를 두고 한탄하면서도 망국노의 처지를 두고 생각해보지 못하였다. 내가 망국노가 아니였다면 이처럼 이역땅에서 쫓겨다니는 신세를 면할수도 있지 않았을가. 순매는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그러나 어쨌든 민족이 당하는 망국노의 설음보다 빚진 종이 되여 숨어다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더 가긍하게 생각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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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밤, 차순매네 집 부엌바닥에선 날이 새도록 절구질소리가 쿵쿵 드세차게 울리였다. 순매와 함께 온 처녀는 절구공이를 도맡아쥐다싶이 하였다. 쉬염쉬염하라고 간청하던 차씨가 혀를 찼다. 《왜놈들에게 나라를 빼앗겼어도 서로간에 인정이 마르지 않은건 정말 다행한 일이야.》 눈물을 쥐여짜면서도 암팡지게 절구질을 해대던 처녀가 놋숟가락에 고추가루를 떠서 가물거리는 등잔불빛에 비쳐보았다. 그러더니 충혈진 눈에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고추가루가 참 붉지요?》 《붉지.… 전에는 그 색갈에 대해 범상하게 생각했네만 피눈물속에 고추장사를 시작하고보니 우리의 피가 방울방울 슴밴것처럼 생각되누만!》 눈에 물기를 머금고 한동안 말이 없던 처녀가 은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나라잃은 우리들에겐 눈에 비끼는 그 모든것이 다 슬픔을 자아낸답니다. 하늘중천에 높이 뜬 보름달을 보아도 그렇구 길가에 외로이 핀 들꽃을 보아도 그렇구요. 하지만 눈물이나 흘리고 한탄이나 해서는 자기 운명을 지켜낼수 없다고 전 생각해요.》 《?…》 순매와 차씨가 얼없는 눈길로 마주보았다. 처녀는 은은한 눈길을 던지며 확신에 찬 어조로 입을 열었다. 《우리들의 운명은 결코 타고난것이 아니예요.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왜놈들과 결판을 짓자고 일어섰어요.》 차씨의 눈이 대뜸 화등잔처럼 커졌다. 《왜놈들과 결판을 져? 어휴…》 만주대륙을 광풍처럼 휩쓸어버린 《무적황군》의 위세앞에 많은 《운동자》들이 매를 본 까투리처럼 머리를 꾸겨박고있을 때였다. 《아재는 장사군이 옳긴 옳은가?》 처녀는 천진란만한 미소를 지으며 누런 베수건으로 얼굴을 감고 다시금 절구질을 시작했다. 《쿵, 쿵, 쿵…》 그 절구질소리가 미지의 세계에서 울려오는 진동처럼 순매의 심장을 야릇하게 울려주었다. 다음날 새벽, 처녀는 고추가루배낭을 지고나서며 재삼 부탁하였다. 《인츰 또 오겠어요. 할수 있는껏 해줬으면 해요.》 그리고는 깜장치마자락을 눈바람에 흩날리며 총총히 떠나갔다. 순매는 고추값으로 푼푼히 쥐여준 돈을 두손에 꼭 모아쥐고 오래도록 동구밖에 서있었다. (이렇게 고마울데라구야.) 하지만 그 처녀가 어떤 녀자인지 그 고추가 어디로 가는지 거기까지는 아직 관심밖이였다. 다만 장거리에서 마주섰던 자기를 망각해버린것같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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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저녁, 순매는 받아온 고추 절구질에 여념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차씨가 늘 부르던 민요 《절구질소리》가 순매의 입에서 유순한 어조로, 그러면서도 투실투실한 어깨의 률동에 맞추어 박력있게 흘러나왔다. 밖에서 삽짝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처녀가 왔나?… 반색하며 그을음서린 부엌문을 여니 뜻밖에도 키가 꺽두룩한 촌장과 개털모자를 눌러쓴 가무잡잡한 사나이가 못마땅해 서있다. 퍼런 공단조끼에 갖저고리를 받쳐입은 촌장이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수선을 떨었다. 《경찰서에서 일을 보시는분이요. 뭘 좀 알아볼게 있어서 왔소!》 순매는 금시 가슴이 활랑거렸다. 혹시 뛰쳐나온 《시집》에서 자기를 찾기 위해 손을 뻗친게 아닌가 하는 위구심이 갈마들었다. 따라나온 차씨도 불안한 얼굴로 굳어져있다. 《개털모자》가 랭랭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뭐 다른게 아니구, 누가 고추장사 하는가요?》 《저… 이 애가… 내 조카딸이라우.》 《개털모자》가 순매를 치훑었다. 《잘 팔리는가?》 《그저 진종일 두근도 팔고 세근도 팔고…》 《순매라고 했지, 앞으로 우리 일을 좀 도와야겠소. 뭐 힘든건 없소. 고추가루를 한근이상 사가는 사람들을 좀 은근히 알아봐주시오. 누구인지, 어디서 사는지, 혹시 집으로 오는자가 있으면 이 촌장어른께 알려도 좋소. 장에 나가겠지?》 《네…》 《나도 며칠 좀 나가보겠는데 협력을 부탁하오. 사례금은 후하게 지불될테니까.…》 그놈들이 횡설수설하다가 돌아간 다음 순매와 차씨는 한동안 얼떠름해 서있었다. 경찰서에서 고추가루에 신경을 곤두세운다는것이 좀처럼 리해되지 않았다. 당시 의병이나 독립군계렬이 아닌 새로운 혁명군대가 출현하여 만주의 산악지대들에 《적색구역》을 꾸리고 왜놈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적색구역》으로 피복, 소금, 식량 같은 필수물자들의 류입을 막기 위해 놈들은 최대로 신경을 곤두세우고있었다. 그런데 고추가루에도?!… 《할 지랄이 없는게로군.》 차씨가 시쁘둥한 얼굴로 선웃음쳤지만 어쨌든 로적가리옆에 날아온 불찌를 보는것처럼 불안스러운 일이 아닐수 없었다. 《우리가 돈 몇푼 편안히 벌자고 그 아재에게 넘겨주면 안될것 같다. 그래도 우리에게 인정을 써준 녀잔데 후환이 있게 해서야 안되지.》 차씨의 심중한 말에 순매는 도리를 저었다. 《고모! 우리가 무슨 죄가 있어 고추도 맘대로 못 판단 말이예요?》 차씨가 버럭 화를 냈다. 《이년아! 그놈들이 무슨 죄가 있어 조선사람들을 파리잡듯 하는줄 아냐?》 한때 차씨는 의병들의 군량미도 등짐에 져보고 독립군의 군자금에 푼돈이나마 보태주던 녀자다. 허나 그들은 기치창검을 꺾고 이국의 황야에 서리맞은 풀대처럼 주저앉아버리였다. 《적색바람》으로 간도땅을 휩쓴 재만조선인들의 폭동과 쟁의도 선혈만 뿌렸을뿐이다. 차씨는 모든 독립운동을 암담하게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같은 《무적황군》앞에 약소민족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일제놈들이나 반동관료들에게 허리굽히며 살고싶지 않았다. 그래서 호구지책으로 택한것이 고추장사였다. 그 장사길에서 차씨는 험악한 세상과 홀로 맞서 살아가자면 맵짠 《고추》가 되여야 한다는 자기식의 인생관을 정립하였다. 풋당추는 누구나 쉽게 삼키지만 맵짠 고추는 눈물과 함께 삼켜야 한다. 그 자극성으로 하여 고추는 인체에 고통을 주기도 하고 약재로 리용되기도 하는것이다. 차씨는 그 《지론》을 험악한 세상과 홀로 맞서야 하는 순매에게도 《실전》을 통해 체득시켜주고싶었다. 《우리가 설사 〈운동자〉들을 외면한다고 해서 왜놈들 손발이 될수는 없다. 부지깽이도 종당엔 아궁속에 처넣기마련이야.》 다음날 새벽 자색목도리에 흰서리를 허옇게 불리우고 그 처녀가 나타났다. 차씨는 강심을 먹고 매정하게 잘라버리였다. 《아재! 안됐네. 글쎄 값이 맞질 않아 고추를 못받아왔구만…》 그 처녀의 호수같은 눈동자앞에서 차씨와 순매는 속이 졸아들었지만 어떤 눈초리가 어디서 지켜보는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 문전에서 바래주던 차씨는 할말은 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허정허정 따라섰다. 《아재! 어디 가서나 고추받으러 다닌다는 말은 절대 하지 말게. 왜서인지 그걸 눈여겨 살피는 사람들이 있구만.》 락심천만해 돌아서던 처녀가 흠칫 굳어졌다. 《그게 누군가요?》 《글쎄, 그쯤 알아두게.》 차씨의 당혹해하는듯 한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그 처녀가 다가왔다. 《어머니의 마음을 알겠어요. 이제부턴 왜놈들이 고추가루에 신경을 쓸거예요.》 《그건 왜서인가?》 처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듯 하더니 나직히 말하였다. 《어머니, 안됐어요. 그저 그렇게 알아두세요.》 《아재도 〈운동〉하는 녀잔가?》 처녀가 정색해서 입을 열었다. 《난 일제놈들에게 짓밟혀 살기를 원치 않는 이 나라 수많은 아들딸중의 한사람이랍니다.》 《?!…》 《다시 들리겠어요. 고추를 구하게 되면 잘 간수해주세요.》 새뽀얀 눈가루가 처녀의 목도리를 말아올리였다. 처녀는 마치 기폭처럼 그 목도리를 날리며 총총히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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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매는 넘겨주지 못한 고추가루를 이고 부득불 현에 있는 장거리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였다. 장거리에 앉아서도 생각이 번거로왔다. 왜 이놈의 세상은 고추장사도 맘대로 못하게 할가. 새초롬히 앉아있던 순매의 눈살이 꼿꼿해졌다. 《개털모자》가 두리번거리며 다가온다. 그놈은 능글맞게 웃으며 곁에 다가와 《나오셨군.》하며 의미있게 눈을 끔벅였다. 순매가 외면하자 그놈이 돈을 끄집어냈다. 《선금으로 먼저 주겠소.》 순매가 황황히 그 손을 밀막았다. 《필요없어요!》 그놈이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돈을 광주리우에 놓으며 마뜩지 않은 눈길을 던졌다. 《그럼 이만한 값의 고추가루를 주오.》 고추가루봉지를 보자기에 받아든 그놈이 저쯤 떨어져 틀고앉았다. 눈동자에 서리였던 살기가 사라지고 금시 허줄그레한 장사군으로 변하였다. 장거리에 나앉을 때면 순매는 늘 그 《시아버지》가 나타나지 않을가 속을 바재였지만 지금 이 시각엔 그 처녀가 나타날가봐 불안스러웠다. 어느덧 정오가 돼올무렵 순매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듯 했다. 더듬더듬 사람들을 헤치며 이쪽으로 오는 자색 목도리를 발견한것이다. 먼저 입고있던 옥당목차림새와는 달리 거무틱틱한 베치마에 무명토스레적삼을 받쳐입었다. 그 처녀가 고추엔 관심이 없는듯 지나쳐 사라지더니 잠시후 다시 나타났다. 순매는 무언으로라도 그 무엇인가 암시해주고싶었다. 그런데 생판초면인듯 순매에게 얼핏 눈길을 던지고는 그대로 지나가버린다. (나를 못 알아볼수가 없는데…) 《개털모자》가 다시 나타난 처녀를 보며 누글누글 달라붙었다. 여부없는 장사군의 모습이다. 《아가씨! 좀 사주시우. 낮춰서 올리지요.》 그 처녀가 주춤 서며 가루봉지를 일별했다. 《몇봉지 안되는군요.》 《개털모자》가 제꺽 반응했다. 《근으로 가져가겠수? 고추는 내 딸년한테 얼마든지 있수다! 얘야!》 (제 딸?!) 순매는 아연했다. 그 순간 이쪽을 보던 처녀의 얼굴이 긴장됐다. 순매의 집안일을 처녀는 알고있는것이다. 그놈이 고추보자기를 모아쥐며 움쭉 일어섰다. 순매는 간이 졸아드는듯 했다. (어떻게 한담? 내가 이 자릴 피해?) 그 순간 엎어진데 덮친다고 뜻밖의 일이 생겼다. 순매가 탈가한 《시집》의 희여멀쑥한 《시아버지》가 불쑥 나타난것이다. 졸지에 당한 일에 순매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이년아! 네년을 찾아 동북땅을 다 싸다녔다. 가자!》 《놔요!》 《이년, 빚지고도 내 손에서 빠질상싶어?》 순매가 붙잡힌 손목을 나꿔채는데 갑자기 눈에서 번개불이 일었다. 《아!》 순매는 얼굴을 싸쥐였다. 빚돈도 장만 못했는데 이렇게 걸려들다니… 순매의 눈물젖은 눈동자가 광채를 띠였다. 《이보세요! 물겠어요! 한달안으로 그 돈을 물겠어요!》 《이년! 그 돈이 얼마나 새끼쳤는지 알기나 해?!》 장사치들이 《가정싸움》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개털모자》가 표표해서 허겁지겁 다가왔다. 《왜 이러슈?》 《넌 웬놈이야?》 《시아버지》가 《개털모자》의 동가슴을 쳤다. 순간 《개털모자》의 눈이 매서워지더니 상대의 손을 잡고 번개같이 돌리며 둘러메쳤다. 《개털모자》가 유도깨나 하는 놈 같았다. 순간에 장마당이 소란해졌다. (이럴 땐?…) 뒤걸음치던 순매가 다른걸 생각할 여유도 없이 내뛰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골목으로 내달리던 순매는 자기가 어망결에 고추가루배낭을 놓고 왔다는걸 깨달았다. 순매는 어처구니없어 멈춰섰다가 그대로 잰 발걸음을 다급히 옮기였다. 장거리에서 한걸음이라도 더 멀어지고싶었다. (아! 어쩌면?… 배낭을 놓고오면 어떻게 해?)
6
《어휴, 기가 차다! 기차!…》 차씨는 벌써 몇번째 혀를 되게 차며 푸념을 터치였다. 누데기이불을 뒤집어쓴 순매는 몸을 옹송그리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였다. 정말 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고달프담. 이리떼에게 쫓기는 토끼마냥 이젠 어느 구석에 얼굴 내밀고 맘편히 산단 말인가. 장거리에 나타났던 그 처녀는 어떻게 됐을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밤이 깊어가는데 밖에서 문득 조심스런 인기척소리가 울리였다. 《계시나요?》 《뉘시우?》 차씨가 더듬더듬 일어서서 등불을 켰다. 《저예요! 요전번에 고추를 가져간…》 차씨가 황황히 방문을 열자 복성스런 그 얼굴이 문가에 나타났다. 《옳구만. 어서 들어오게! 얘! 순매야!》 순매도 급히 이불을 한구석으로 밀어놓았다. 《앉으라구. 에구, 손이 다 얼었구만.》 《예, 추웠어요.》 처녀도 스스럼없이 아래목에 손을 댔다. 그러면서도 미안스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어머니랑 곤한 잠을 설치게 하는군요.》 《잠이 다 뭔가. 어휴, 헌데 어떻게?》 처녀가 천연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장사〉를 하지 않나요. 궂은날, 마른날 가리고 밤낮을 가려서야 〈장사〉가 되나요?!》 《그럼 고추때문에?》 《네.》 차씨의 얼굴이 울적해졌다. 《말도 말게, 아재에게 넘겨줘야 하는건데. 서로가 후환이 없게 하자니 별수가 있어야지. 그 벌을 받았지. 몽땅 하늘로 올려보냈네, 어휴…》 처녀가 그윽한 눈길로 흐느끼는 순매를 보았다. 《언니! 눈물을 닦아요. 그 고추값을 가져왔어요.》 차씨의 눈이 더 커졌다. 《엉? 무슨 고추값?》 《장거리에서 언니가 놓고간 고추배낭을 제가 건사했어요.》 《그 복새통에서 말인가?》 《용서해요. 그대로 가져다드리고싶었지만 사처에 심상치 않은 눈들이 있어 돈으로 가져왔어요.》 처녀가 언손을 호 녹이더니 품속에서 돈을 꺼내들었다. 《세여보세요. 제 값이 맞는지…》 차씨가 순매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귀인이야. 아재는 분명 귀인이야.》 《제가 무슨 귀인이겠나요. 전 그저 한푼두푼 겨우 번 돈으로 살아가는 어머니와 언니를 돕고싶은 마음뿐이예요.》 차씨의 얼굴이 서글퍼졌다. 《글쎄… 세상은 왜 이렇게 갈수록 험산인지…》 추연한 얼굴로 앉아있던 처녀는 확신에 넘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마음을 굳게 먹고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해요. 우리에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을 한몸에 안으시고 10대의 나이에 벌써 왜놈들을 전률케 하며 내 나라의 새별로 솟아오르신 영명하신 지도자가 계십니다. 바로 그분은 우리 온 겨레가 우러러 받드는 김일성장군님이십니다. 그분의 뜻을 받들고 우리 인민은 왜놈들을 치는 싸움에 떨쳐나섰어요. 우리 녀인들은 빨래방치와 고추가루폭탄으로 왜놈들의 총도 빼앗아내고있어요.》 《그러니 그 고추가루로 폭탄을 만든다는건가?》 《그래요.》 차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니 대포에 고추로 맞서다니? 그게 어디 승산있는 싸움인가?》 처녀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어리였다. 《어머니, 왜놈들이 오늘은 비록 강한것 같지만 우리 인민모두가 힘을 합쳐 싸운다면 반드시 이기게 된답니다. 이제 어머닌 멀지 않아 왜놈들이 멸망하고 우리 인민모두가 잘살게 될 그날을 꼭 보게 될거예요.》 처녀는 가리마가 곧게 뻗은 머리우에 자색목도리를 두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전 그만 가봐야겠어요.》 차씨가 덴겁을 했다. 《이밤중에 어딜 가려나?》 처녀가 드팀없는 어조로 조용히 뇌이였다. 《가야 해요. 적들의 경계가 심해서 날밝기 전에 돌아서야 한답니다.》 차씨가 당연한 얼굴로 굳어져있다가 순매를 돌아보았다. 《얘, 순매야! 이 일을 어쩌니?》 순매가 시름겹게 입을 열었다. 《어찌겠나요. 왜놈들이 감시하는 집이니…》 순매가 잠시 주저했다. 《고모! 고모도 그전에 독립군에 군자금을 바쳤다지요? 오늘 나도 그렇게 하면 안될가요?》 고모가 뜻밖인듯 순매를 눈여겨보다가 한숨을 내쉬였다. 《헌데 그 시애빈지 불쑥 나타나지 않겠냐?》 순매의 눈이 매서워졌다. 《까짓거, 왜놈들이 제 손발이 되라는 판인데 시집종살이가 낫지 않을가요?》 고모가 대뜸 혀를 찼다. 《어휴, 저런 풋당추라구야. 같은 나무의 당추도 익고 설고 한다고 운동자는 따로 있어. 하지만 오늘 이 아재의 밤동무라도 해주고 오려무나.》 처녀가 황황히 밀막았다. 《이러지 마세요, 어머니. 언니! 전 이런 밤길에 외로워본적이 없답니다.》 순매가 야속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러지 마! 넌 날 보고 언니라고 하면서 그래 동생을 험한 밤길에 홀로 보내는 언니가 어디 있어?》 《?!…》 《그 밤길을 나도 한번 같이 가보자꾸나.》 처녀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반짝이였다. 《고마워요, 언니! 그럼 함께 가요! 내 이름은 봉옥이예요, 김봉옥!》 《봉옥아!》 《언니!》 그들은 두손을 뜨겁게 마주잡았다.
7
다음날 순매는 정오가 훨씬 지나서야 홀로 집으로 향하였다. 새벽녘에 고추짐을 다 채운 봉옥이는 인차 떠나갔다. 그를 바래고난 순매는 봉옥이가 이 먼곳까지 다리품을 팔지 않게 제가 사서 가루도 봏아놓을 결심이였다. 순매는 봉옥이와 밤길을 함께 걸으며 혁명하는 대오속에 자신의 모습도 막연하게나마 세워볼수 있게 되였다. 저녁녘에 집에 당도한 순매는 상서롭지 못한 예감에 사로잡히였다. 지난밤의 세찬 바람에 추녀끝이 더부룩하니 처져내렸는데 그아래 토방에 보이지 않던 신짝들이 뒤집히고 덧놓여있다. 방안에서 웅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급히 사랑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을녀인들 한가운데 눈물이 고인 고모가 천정을 보며 누워있다. 《어찌된 일이예요? 고모!》 한 아낙네가 혀를 찼다. 《글쎄… 경찰서에서 형님을 불러가더니만…》 차씨가 시름겨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걱정말고 다 가주시우. 내 이 애에게 할 말이 좀 있어요.…》 마을사람들이 돌아간 후 차씨가 베수건으로 눈물코물을 훔치고나서 석쉼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오늘 아침 촌장이 왔더구나. 경찰서에서 너를 찾는다면서… 없다고 했더니 대신 나라도 갔다 오라는게다. 그래서 갔댔다. 거기 가니 글쎄 그 〈개털모자〉가 대뜸 소래기를 지르더구나. 〈치안유지〉에 협력 안하고 네가 달아나는통에 분명 위험분자로 추측되는 한 계집을 놓쳤다는게다. 한동안 목에 피대줄을 세우더니 곰상스러워지더구나. 팔자를 고칠수 있으니 저희들 말만 잘 들으라는거지. 난 듣다못해 그런 더러운 개노릇은 못 시킨다고 버럭 소리를 질렀구나. 그랬더니 그놈은 나를 다짜고짜 고문실로 처넣더구나. 우직스럽게 생긴 놈들이 내 머리를 마루바닥에 짓눌러놓고 글쎄…》 차씨가 한동안 말없이 지적지적한 눈굽을 닦았다. 《주전자꼭지를 내 코안에 쑤셔박더구나. 난 정신이 아찔해지며 지옥에 왔는가 했다. 깨여나보니 마루바닥엔 고추가루물이 질펀하더구나. 난 그때 생각했구나. 이놈들은 우리 나라를 타고앉은 첫날부터 이런 악착한 고문으로 우리들을 질식시키자고 악을 쓰는데 난 왜 고추폭탄으로 왜놈치겠다는 그 처녀를 돕지 못했을가. 정신이 몽롱해있는데 그놈이 또 고아대더구나. 지금 번번이 고추폭탄사건이 일어나며 우리 현에서만도 여러 자루의 총이 유격대에 넘어갔다는게다. 그러면서 쫓겨간 동북군보다 쪼꼬만 그 계집이 더 무섭다는게다. 비행기, 대포를 쥔 놈이 고추가루 쥔 녀인을 더 무서워한다니 처음엔 믿어지질 않았지만 문득 그 아재가 하던 말이 생각되더구나. 영명하신 지도자가 우리 민족을 이끄신다고, 그분을 따르는 길에 살길이 있다고 절절히 이야기하던 그 아재의 말이…》 순매는 눈물젖은 얼굴로 생각깊이 앉아있었다.
8
쿵, 쿵, 쿵… 초저녁부터 순매의 절구질소리가 드세차게 부엌바닥을 들었다놓았다. 자극성있는 알싸한 고추냄새가 베수건도 감지 않은 순매의 눈과 코를 자극한다. 충혈진 그의 두눈이 뿌잇해지며 축축히 젖어들더니 눈물이 방울져내린다. 순매는 두눈을 꼭 감고 세차게 머리를 흔들며 방울진 눈물을 좌우로 줴뿌린다. 그리고 더 세괃게 절구질을 해댄다. 쿵, 쿵, 쿵… 이제는 눈이 쓰려 더는 뜰수 없다. 고추냄새가 슴밴 눈물이 걷잡을새 없이 흘러내린다. 그래도 좋아! 이 고추냄새가 나의 온몸에, 나의 넋속에 흠뻑 슴배여다오. 생존을 위해 나는 매운 《고추》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진정 인간답게 살려거든 누구에게 어떻게 매워야 한다는걸 몰랐다. 이때 《어험.》하는 헛기침소리가 울리며 부엌문이 바시시 열리였다. 순매가 새빨간 눈을 애써 지릅떠보니 꺽두룩한 촌장의 얼굴이 휘뿌옇게 안겨왔다. 《너 순매로구나.》 《?!…》 《헌데 뭘 하자구?》 순매가 성가스러운 어조로 내쏘았다. 《보면 모르겠어요. 촌장님이 나에게 고추장사를 하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그래그래, 옳다. 형사님도 너를 다시 만나겠다는데 좌우간 뭐든지 좀 알아봐라. 참, 시애빈지 뭔지 하는 놈이 빚채근을 못하게 경찰서에서도 오금을 박았을게다.》 (개소리말아!) 순매는 야멸찬 얼굴로 쿵, 쿵 절구질을 다시 시작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난 빚진 종의 신세를 두고 한탄하면서도 민족앞에 더 큰 빚을 질번 했어! 그 빚은 내가 네놈들에게 받아내야 할 빚이였어!) 이틀후 새벽 순매는 고추짐을 지고 나섰다. 차씨가 눈물젖은 얼굴로 따라섰다. 《순매야, 우린 이 세상 악과 맞서 〈고추〉가 되자 하면서도 원쑤들앞엔 〈풋당추〉로 살았구나.》 순매는 차씨와 헤여져 숯막골로 갔다. 넘겨줄 고추가 있으면 거기서 봉옥이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여있었다. 잠풍한 날이다. 흰눈을 무겁게 떠이고서도 푸른 기개를 잃지 않는 소나무들이 새로운 길에 들어선 순매를 지켜보는듯 하였다. 문득 등뒤에서 《언니!》하는 귀에 익은 목소리가 새벽의 신선한 대기를 휘젓는다. 돌아보니 자색목도리가 온통 흰서리로 불리운 봉옥이가 정찬 미소를 짓고있다. 《왔군요!》 봉옥이가 빠드득 빠드득 눈을 밟으며 다가와 고추배낭을 내려준다. 순매가 짐짓 흔연한 얼굴로 응대했다. 《오지 않으면? 이런 길에서 주저해서야 〈장사〉를 하니?》 봉옥이가 새물거리다가 맞장구쳤다. 《옳아요. 언니, 우리 〈장사〉는 정말 특이하지요. 안 받겠다는걸 억지로 줘야 하고 안 주겠다는걸 억지로 받아내야 하니 말이예요.》 순매가 그 말을 음미하다가 까르르 웃어댔다. 언제한번 시름놓고 이렇게 웃어봤던가. 봉옥이가 서둘러 저고리에서 돈을 꺼냈다. 《언니, 이걸 받아요.》 《웬 돈이야? 이렇게 많이?…》 《어서요!》 순매가 금시 새초롬해지며 토라진 말투로 툭 내쏘았다. 《난 언제까지 〈풋당추〉로 있어야 하니?》 《예?》 《나라 찾겠다는분들에게 푼돈 한번 바쳐본적 없는데 이렇게 하면 난 뭐가 되냐 말이야?》 봉옥이가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언니, 그러지 마세요. 좋은 날을 보기 위해 이악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자고 해도 돈이 있어야 해요. 그러니 어서 받아주세요.》 순매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스르시 머리를 떨구며 봉옥이를 외면했다. 《안 받겠어! 한푼도.》 《?!…》 《난 이제부터 너와 한길을 가련다.》 봉옥이가 정색해서 순매를 바라보았다. 《언니를 속단하는건 아니지만… 이건 목숨을 내걸고 하는 일이예요.》 순매가 획 돌아섰다. 《그러나 사람답게 사는 길이지!》 급기야 봉옥이의 눈가에 맑은 눈물이 고여올랐다. 사려깊은 그 눈빛이 비탄의 세계에서 방황하던 순매의 멍든 가슴을 따뜻이 어루쓸고있다. 《그럼 함께 가요. 이 길이 진정 언니를 위한 길이기에 난 막지 않을래. 내 언니야!》 《봉옥아, 내 동생아!》 그들은 어쩔수 없는 충동에 와락 그러안았다. 그리고 서로의 어깨자락을 눈물로 적시였다.
9
순매는 다시는 놓치지 않을듯 봉옥이의 손을 꼭잡고 길을 떠났다. 시름만 엉켜돌던 큰 눈엔 고요히 눈속에 묻힌 산야의 신비한 세계가 맑게 비껴있다. 불안과 근심에 젖어 불안에 떨며 가던 그 길로 오늘은 봉옥이와 어깨나란히 희망안고 간다. 그러나 순매는 지금 헤치는 이 숫눈길의 의미가 얼마나 비상한가를 다는 모르고있었다. 그 누구나 결코 쉽게는 갈수 없는 나라찾는 그 길에 대하여… 순매가 문득 홍조띤 얼굴로 입을 열었다. 《봉옥아, 넌 언젠가 잘못 간 거스름돈을 되돌려주자고 장거리에서 찾았던 한 녀인이 생각나니?》 봉옥이가 의미있게 미소지었다. 《난 그 언니를 다신 안 찾는답니다.》 《왜?》 《자기를 〈풋당추〉로 아느냐고 내쏘던 언니인데. 그 돈을 다시 받게 되면… 그 언닌 정말로 자신을 〈풋당추〉로 여긴다고 하지 않을가요?》 《?!…》 《그대신 원쑤와 맞서 〈고추〉가 된 그런 언니를 찾고싶었어요.》 순매의 가슴이 서서히 달아올랐다. 봉옥이! 그래서 넌 그때의 일을 부디 꼬집지 않았구나. 인간이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수 있을가. 부모잃은 자신을 감싸안고 키워준것이 혁명이라고 유정한 어조로 뇌이던 봉옥이의 이야기가 새삼스레 되새겨졌다. 나란히 걸어가던 그들앞에 불쑥 주인없던 숯구이막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순매는 뜻밖의 정황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봉옥이가 마음을 다잡으라는듯 자기의 손목을 꼭 잡았다놓는다. 《침착해요, 언니.》 사냥군차림을 한 《개털모자》와 경찰 한놈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이년아! 저년이 우리 〈손님〉이 맞겠지?》 순매가 눈앞이 아뜩해지는데 봉옥이가 침착하게 대꾸했다. 《어떻게 우릴 관심하는가요?》 그놈이 권총을 뽑아들었다. 《그건 경찰서에 가서 알려주지. 고추장사군아씨!》 오연히 서있던 봉옥이가 등에 졌던 배낭을 벗었다. 《흥, 여기 있는게 고추라는거예요?》 그놈이 비양어린 얼굴로 다가와 눈가루가 게발린 구두발로 베천배낭을 툭툭 쳤다. 《고추가 아니란 말이지? 풀어봐!》 봉옥이가 끓어앉아 배낭끈을 풀기 시작했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서 얼마간 꿍져넣은 밀가루가 배낭웃쪽에 놓여있었다. 《자, 봐요!》 새하얀 밀가루가 나타나자 《개털모자》가 권총을 주머니에 쑤셔놓더니 제 손으로 배낭속을 헤집기 시작했다. 경관도 다가와 기웃이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봉옥이의 손에서 불시에 새빨간 꽃가루같은것이 그놈들의 면상을 향해 확- 퍼져날았다. 《개털모자》와 경관이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며 튀여나더니 두눈을 싸쥐였다. 봉옥이가 새매처럼 《개털모자》를 향해 날아들어갔다. 설맞은 이리처럼 윽윽거리던 그놈이 눈물을 줄줄이 흘리면서도 봉옥이를 왁살스럽게 걸머잡고 태를 쳤다. 봉옥이가 저만큼 눈무지우에 허양 나뒹굴었다. 《봉옥아!》 순매가 급히 달려가는데 봉옥이가 《눈사람》이 되여 비청비청 일어섰다. 그의 손엔 어느새 빼앗아낸 권총이 꽉 쥐여져있었다. 서둘러 격발기가 당겨진다. 《절커덕!》 우뢰처럼 울리는 그 소리에 그놈이 와뜰 놀라 황황히 자기 허리춤을 만져보았다. 《소경》이 된 얼굴이 무섭게 이지러지며 반사적으로 허리를 낮추고 이를 으드득 간다. 《이년! 여기서 총소리를 냈다간 네년도 끝장이야!》 장총을 꼬나든 경관도 소래기를 내지르며 《소경》이 되여 허겁지겁 맴돌았다. 봉옥이가 재빨리 경관등뒤로 다가서며 권총을 발사했다. 경관이 새된 비명을 지르며 너부러지자 《개털모자》의 두다리가 경풍만난듯 떨기 시작했다. 《어찌된 일이야? 누가 쐈어? 이년! 쏘지 말라. 아무렴 고추가루로 〈황군〉을 당해. 쏘지 마시오, 아가씨!》 봉옥이가 싸늘한 눈길로 그놈을 노려보며 빠드득빠드득 눈을 밟으며 다가갔다. 《〈황군〉이 뭐 어째? 똑똑히 새겨듣고 가거라. 오늘의 우리 민족은 더는 네놈들의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 일떠선 민족이야. 이제 네놈들이 망할 날은 반드시 올거다.》 《땅!》 차디찬 대기를 째며 총성이 울렸다. 그놈은 고추가루밴 눈도 떠보지 못한채 입을 하- 벌리고 말뚝처럼 버티다가 《어-허》하며 주저앉아버리였다. 뜻하지 않던 싸움을 치르고 어깨를 할싹이던 봉옥이가 경관의 장총까지 걷어메고 굳어져있는 순매에게 급히 다가왔다. 《언니, 빨리요!》 그들이 산마루에 올라섰을 때 밑에서 어지러운 총성이 울려왔다. 봉옥이가 주춤 서며 불안한 얼굴로 수림속을 내려다보았다. 순매가 당황히 재촉했다. 《봉옥아, 빨리!》 봉옥이가 한동안 말이 없다가 영채도는 눈길로 순매를 바라보았다. 《언니! 내 말을 들어요. 이제 고개를 두개 넘어 골짜기로 빠지면 물방아간이 있어요. 거기 가서 그 주인에게 이 고추는 〈붉은 고추〉라고 하세요. 그러면 언니를 근거지로 안내해줄거예요.》 순매의 눈이 금시 커졌다. 《그럼? 나 혼자?》 《놈들이 따라와요!》 순매가 도리를 저으며 목메여 부르짖었다. 《함께 가! 봉옥이! 나 혼잔 싫어. 난 무서워!》 봉옥이가 야속한 얼굴로 순매를 바라보다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언니, 마음을 굳게 먹으세요. 힘들다고 물러서고 무섭다고 물러서면 언닌 영원히 〈풋당추〉로 남아요.》 《봉옥아…》 순매는 눈앞이 뿌잇해지며 어깨를 떨었다. 봉옥이가 순매의 어깨우에 빼앗은 장총까지 덧메워주며 곡진하게 말을 이었다. 《언니! 고추는 태양의 빛을 받아 붉게 물든답니다. 난 언니도 우리 장군님의 해빛을 받아 붉어지는 〈고추〉가 되길 바래요. 난 언니를 믿어요!》 봉옥이가 순매의 손을 꼭 잡았다놓고는 급히 솔가지를 꺾어들었다. 《언니, 어서 떠나요!》 그리고는 눈우에 찍혀진 두사람의 발자국을 지우며 뒤걸음으로 멀어져갔다. 순매가 오도가도 못하고 굳어져 《봉옥아!》하고 목메여 부르짖었다. 봉옥이가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며 눈물속에 미소지었다. 미구하여 산너머에서 총성이 터져올랐다. 그 총성이 순매로 하여금 자신의 의무를 자각하게 하였다. 봉옥이가 결연히 달려간 그 길을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순매는 눈물을 머금고 발걸음을 떼기 시작하였다. 봉옥이의 넋이 스민 붉은 고추가루를 지고 그 고추가루로 빼앗아낸 한자루의 총대를 소중히 안고 순매는 혁명의 품으로 가고있었다. 문득 동녘 산마루에 선홍색노을이 피여나더니 이글거리는 태양이 불쑥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놓았다. 순매는 억만가닥의 빛을 발산하는 태양을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그 해발이 순매의 연약한 몸도 불새처럼 물들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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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할머니는 그후 공청원이였던 김봉옥을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고 한다. 김봉옥은 중상을 당하고 피신해있던중 후날 다른 공작지로 소환되여갔다. 근거지에 들어와 혁명조직에 관계하였던 나의 할머니는 지하공작원칙상 김봉옥의 행처를 알아볼수 없었다. 다만 반제청년동맹원으로 가맹하던 당시 보증인이 김봉옥이라는것만 알았을뿐이다. 나의 할머니는 그후 광산 《함바》집의 식모로 파견되여갔다. 당시 고추폭탄보다 더 위력한 폭탄이 근거지 병기창들에서 제작되여 많은 공작원들이 광산에서 폭약을 뽑아내고있었다. 그러던 나의 할머니는 그후 시련을 겪게 되였다. 련락원의 희생으로 조직선이 끊어진데다가 근거지가 다 해산되였다는 적들의 악청이 고막을 멍멍하게 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비관하지 않았다. 《두번다시 우리 인민은 생명과도 같은 총대를 황야에 버리지 않아! 좀스러운 놈들, 이제 두고봐라!》 할머니의 확신은 헛되지 않았다. 민족재생의 총성은 백두산에서부터 더욱더 장엄한 메아리로 울려오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결코 투쟁을 중도반단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적극적인 영향을 받은 많은 지하조직원들이 후날 동북땅에서 조국해방을 위한 성전에 적극 참가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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