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7(2008)년 제2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나무잎 설레이는 소리
로미향
산천의 이른저녁이였다. 방금 막차를 떠나보낸 텅 빈 뻐스정류소에는 날씬한 키에 진회색봄가을외투를 가뜬하게 차려입은 한 처녀가 나무모가 든 배낭을 앞에 놓고 서성거리고있었다. 나무모를 구하러 읍에 사는 삼촌을 찾아왔던 성계중학교 교원 오영금이다. 이른봄의 쌀쌀한 바람이 땀에 젖어 차분히 이마를 덮었던 머리카락들을 흩날려댔지만 처녀의 눈길은 멀리 사라져가는 뻐스에서 떨어질줄 몰랐다. 《내가 뭐랬니?! 뻐스시간이 늦어진다고 그만큼 말했는데도 듣지 않더니... 쯧쯧.》 뒤미처 달려온 삼촌이 숨을 헐썩거리며 하는 말이였다. 나이 쉰줄이 벗어나기 바쁘게 급기야 몸이 나면서 이마가 벗어지기 시작한 삼촌은 땀발이 내돋은 번들이마를 훔치며 제잡담 나무가 담긴 배낭부터 집어들었다. 《이왕 늦은바 하군 우리 집에서 자구 래일 새벽차로 떠나거라.》 삼촌은 이미 약속이라도 된듯 발길을 돌렸다. 《삼촌, 난 오늘중으로 꼭 가야 해요.》 《네가 어떻게 이 무거운 배낭을 지구 50리 산골길을 간단 말이야. 안된다. 안돼.》 삼촌은 막무가내였다. 《야! 삼촌, 삼촌두 내가 왜 오늘 밤중으로 가야 하는지 알지 않나요.》 《안다, 알아. 하지만 고집두 부릴걸 부려야지 그 차림으로 얼마나 걸을것 같아 아이들처럼 옹고집을 부리느냐, 엉?》 삼촌은 막 역증까지 냈다. 내리내리 아들만 낳아 그런지 조카인 영금이를 끔찍이도 귀해하는 삼촌이였다. 영금은 자기의 차림새를 얼핏 훑어보았다. 가쯘하게 드리운 진회색외투밑의 굽높은 구두목도리를 레스처럼 살짝 감쳐두른 눈처럼 하얀 토끼털이 오늘따라 유표하게 안겨왔다. 삼촌말마따나 이런 사치한 구두를 신고는 어림도 없을 산골길이였다. 한낮이면 눈석이물에 질쩍해졌던 길이 해떨어지기 바쁘게 꾸둑꾸둑해지며 군데군데 얼음버캐가 끼기 시작하군 했다. 꼭 감쳐문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영금은 이런 경우를 미리 예견했었는지 구두를 벗더니 배낭속에서 운동화 한컬레를 꺼내들었다. 《너 정신있니?! 어쩌자고 그러니?》 삼촌은 눈을 흡뜨며 영금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나무는 오늘중으로 꼭 심어야 해요.》 영금은 부득부득 신을 갈아신었다. 《내가 손 들었다, 들었어. 무슨 놈의 고집이 그리 센지...》 삼촌은 어쩔 도리가 없다는듯 손을 홱 내리긋더니 배낭을 둘러메고 큰길에 나섰다. 《삼촌! 어쩌자고 그래요?》 이번에는 영금이가 다급히 배낭끈을 부여잡았다. 《어찌겠니. 네가 정 고집을 부리니 나라도 따라 나설수밖에... 하긴 고집으로만 볼 일도 아니지.》 아직도 잔설이 희끗희끗 남아있는 먼 산을 바라보며 삼촌은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 《호호호...》 영금은 갑자기 웃음보를 터뜨렸다. 삼촌은 의아쩍은 눈길로 영금을 치떠보았다. 《삼촌! 그 옷 좀 봐요.》 삼촌의 옷은 나무를 뜨느라 온통 흙에 게발려 말이 아니였다. 바지가랭이에는 진흙덩이들이 여기저기 게발려있었다. 《호호호... 그 차림으로 어델 간다고 그러세요?》 영금은 눈을 곱게 흘기며 생글생글 웃었다. 나이가 많은 삼촌이 따라서는 바람에 속이 덜컹 했던 영금이였다. 《헛참! 그 깍쟁이령감만 아니래두 이 고생을 안하는건데...》 삼촌은 스스로도 옷주제가 한심한지 입만 쩝쩝 다시며 귀먼 욕을 해댔다. 그럴만 한 일이 있었던것이다. 얼마전에 영금은 군농촌건설대에서 기사장으로 일하는 삼촌에게 목수국 한그루를 구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영금이의 부탁이라면 무엇이건 다 들어주군 하던 삼촌이 이번에는 웬일인지 시간을 끌었다. 이 고장에서는 보기 힘든 꽃나무이다나니 면이 넓은 삼촌도 어쩔수 없는것 같았다. 그러던차에 어제 저녁 꽃나무를 구할수 있다는 기별이 와 오늘 만사를 제쳐놓고 읍에 나왔던 영금이였다. 그런데 진작 목수국이 있다는 집을 찾아가니 일이 난처하게 번져졌다. 사람들이 꽃나무집이라고 부르는 그 집주인로인이 딱 잘라매는것이였다. 나무를 구하려면 제 땀을 바쳐 구해야지 남이 심어놓은 꽃나무를 가져가겠다는게 웬말이냐며 노여움을 쓰는 바람에 영금은 아연해지고말았다. 뜰에 심어놓은 목수국나무를 둘러보던 삼촌이 농촌건설대가 이 꽃나무집을 지어준 고망년적 일까지 거들어가며 푸접좋게 구슬려댔지만 로인은 대척도 안했다. 그러던 로인은 울가망이 된 영금의 얼굴을 보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토방에 놓였던 삽과 곡괭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 목수국나무를 구하겠으면 나를 따라오게.》 로인은 영금이네는 마을 앞산너머 자그마한 야산 몇개를 더 넘어야 있는 늪가로 데리고가는것이였다. 신기하게도 지난해의 묵은 잡관목이 우거진 늪기슭에 목수국 한그루가 자라고있었다. 《꽃나무집령감이 다르긴 달라. 어느새 이런 꽃나무까지 다 봐뒀을가?》 삼촌이 혼자소리처럼 감탄하며 하는 말이였다. 《이 나무를 뜨게. 어차피 올봄에는 논을 풀 자리니까...》 로인은 묵은 새초덤불우에 올방자를 틀고앉았다. 그 목수국나무를 뜨느라 삼촌이 고생했다. 뿌리가 상할라, 제땅의 흙이 뿌리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라 하면서 로인이 연방 잔소리를 해대는 통에 구변좋은 삼촌도 뻐꾹소리 한마디 못하고 줄땀을 뽑았다. 그래서 삼촌이 아직까지 그 푸념을 하는것이다. 꽃나무집로인이 집에 있는 목수국은 안 주고 먼곳까지 끌고다니는 바람에 뻐스를 놓쳐 골이 났던것이였다. 《뻐스를 놓쳤나?》 영금이 한창 삼촌을 만류하고 제잡담 길을 떠나려는데 문득 등뒤에서 석쉼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범이 제 소리하면 온다더니 삼촌이 귀먼 욕을 해대던 꽃나무집로인이 짐칸이 달린 삼륜자전거를 타고 불쑥 나타났던것이다. 《놓쳤쉐다.》 삼촌은 짐짓 퉁명스레 대답하며 짐칸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짐칸 한켠에는 이름모를 꽃나무모들이 실려있었다. 《운총리 영화기술원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회관에 심겠다고 어찌나 졸라대는지... 뭐 래일까지는 심어야 한다는지. 그래서 이렇게... 보아하니 그쪽으로 가는것 같은데 실으라구. 내 운총리까지라도 실어다주지.》 《고맙수다.》 좀전에 귀먼 욕을 해댔던 참이라 삼촌은 게면쩍은 웃음을 지었지만 영금은 우선 안도의 숨이 나갔다. 좀 돌아가는 길이긴 하지만 어쨌든 운총리까지만 가면 30리길을 먹어놓은셈이다. 산골사람들은 그쯤한 길쯤은 우습게 여긴다. 영금은 나이든 로인에게 짐이 될것 같아 미안스러웠지만 그런 체면을 가릴 경황이 못되였다. 오늘중으로 꼭 가지고 가야 할 목수국나무였던것이다. 《그럼 삼촌은 돌아가세요. 꽃나무집할아버지와 함께 가니 이젠 나혼자서라도 갈수 있어요.》 《그렇다면 난 이젠 돌아가겠다. 아무래도 내가 빨리 돌아가서 전화로 너의 학교교장선생에게 알려주어 마중이라도 나오게 하는게 너를 돕는것일것 같구나. 그럼 로인님, 수골 좀 해주시오.》 《걱정말고 어서 가보게.》 삼촌은 로인의 손을 잡아주고나서 읍쪽을 향해 걸음을 떼였다. 삼촌을 떠나보낸 영금은 삼륜자전거뒤를 따라 걸으면서 지난해 가을 학급학생들을 데리고 교정에 나무를 심던 때를 생각했다. 졸업을 앞두고 하는 나무심기였다. 이제 겨울만 지나면 영금이 담임한 학생들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의 각 초소로 제가끔 흩어져 떠나게 된다. 그러면 모교에 심어놓은 나무들만이 그들의 마음을 안고 설레며 자랄것이다. 그래서인지 학생들은 졸업을 앞두고 하는 나무심기에 각별한 의의를 부여했다. 영금은 해마다 그러했듯이 학교정원에 키높이 자란 한그루의 수삼나무아래서 나무심기조직사업을 했다. 깊은 사연을 안고있는 수삼나무였던것이다. 그 사연을 너무도 잘 알고있기에 학생들은 식수를 약속한 날 산림경영소에서 가져가라는 나무모도 마다하고 저마다 진귀한 나무모들을 정성껏 구해왔다. 그런데 학급반장인 강태림학생만이 나타나지 않았다. 알아보니 엊저녁에 백여리나 되는 정산역에 도원림사업소에서 일하는 형님에게 부탁했던 나무모를 받으러 갔다는것이였다. 아마 화물로 보내기로 약속이 있었던것 같았다. 정산역에서 들어오는 뻐스는 오후에 있었다. 별수없이 영금이 막 나무심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선생니-임-》하는 소리와 함께 한 학생이 숨이 턱에 닿아 뛰다싶이 교정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태림이였다. 그의 손에는 목수국 한그루가 들려있었다. 이른봄에 연풀색꽃을 피웠다가 그것을 다시 눈같이 흰색으로 물들이는 목수국은 이 고장에서는 보기 힘든 진귀한 꽃나무였다. 《태림학생!》 영금은 저도 모르게 달려가 무너지듯 주저앉아 터진 운동화 앞코숭이로 삐죽하게 내민 태림의 피멍진 발가락을 두손으로 꼭 감싸안았다. 고향땅에 진귀한 나무 한그루라도 더 심으려고 그 먼길을 땀투성이가 되여 갔다온 그를 보니 눈앞이 뽀얗게 흐려들었다. 흐려진 망막을 누비며 태림이와 얽혀진 지난날 생활이 정지된 하면처럼 토막토막 흘러갔다. 먼저 떠오르는것은 교원으로 임명되여 진행하던 첫 수업시간이였다. 이날 교장선생까지 교수참관을 들어와 영금은 여간만 긴장하지 않았다. 혹시 자그마한 실수라도 하지 않을가 하는 근심이 갈마들어서였다. 영금이의 그 마음을 알아라도 주듯 수업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였다. 그런데 수업이 거의 끝나가던무렵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창밖에서 울려오는 매미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갑자기 태림이의 가방속에서 매미울음소리가 《맴- 맴-》하고 울려나왔던것이다. 교실이 하도 조용하니 가방속에 움츠려있던 매미도 갑갑해났던 모양인지... 목을 길게 빼들고 두리번거리는 아이, 아예 벌떡 일어나 태림이쪽으로 다가가려는 아이... 교실은 삽시에 소란스러워졌다. 늘 매미며 메뚜기 같은것을 잡아가지고 아이들을 깜짝 놀래워주기 좋아한다던 태림이도 이번엔 당황해났는지 얼른 가방을 뒤져 매미를 치운다는것이 그만 놓쳐버리고말았다. 그 바람에 튀여나온 매미 한마리가 온 교실이 좁다하게 날아다녔다. 교실은 일시 혼잡을 이루었었다.... 무던히도 속을 태우던 태림이였다. 언제인가는 비삼을 구한다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높은 나무에 올라갔다 떨어져 담임교원이 며칠동안이나 침상머리를 지키게 한적도 있었다. 그러던 태림이가 이제는 고향을 위하여 무엇인가 하나라도 보태고싶어하는 마음을 지닌 학생으로 어엿이 자랐으니... 그런데도 태림은 자기가 늦어진것이 죄스러운지 머리를 푹 떨구고 서있었다. 그 모습이 영금의 가슴을 더 뜨겁게 해주었다. 이렇게 심은 나무가 지난 겨울에 그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아직은 이른봄이라 겨울잠을 깨지 못해 얼핏 보면 나무들이 어슷비슷해보였지만 생물교원인 영금의 눈에는 그 모든 징후들이 자기의 손금처럼 똑똑히 분별되였다. 그런것도 모르고 태림은 북을 돋군다, 받침목을 해준다 하며 극성을 부렸다. 그랬던 태림이가 동무들과 함께 래일이면 조국보위초소로 떠나게 된다. 이제 조국보위초소에 서서도 그는 모교를 생각할 때마다 제가 심고 떠난 목수국나무를 그려볼것이다. 나무는 고향뿐아니라 그의 마음속에도 벌써 뿌리를 내렸을것이다. 그 뿌리를 이어주어야 했다. 그래서 영금은 사방에 수소문해보다가 별수없이 삼촌에게 줄을 놓아 오늘 이처럼 귀한 목수국나무를 구해오는 길이였던것이다.... 태림의 가슴속에 뿌리내린 목수국나무가 활짝 아지를 펼치고 푸은 잎새를 흔들 그날을 그려보던 영금은 갑자기 자전거가 멎는 바람에 생각에서 깨여났다. 《다 왔네.》 로인은 천천히 자전거를 멈춰세웠다. 《수고를 끼쳐 미안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영금은 오린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오는길에 실어다줬는데 수고는 무슨... 이제부턴 밤길에 수고를 해야겠네.... 아무쪼록 비가 오지 말아야 하겠는데... 그럼 난 가겠네.》 로인은 갑자기 어두워지는 하늘을 미심쩍게 바라보며 운총리쪽으로 자전거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사위는 벌써 어둠에 휩싸여있었다. 해 떨어지기 바쁘게 터진 골바람이 영금의 봄가을외투자락을 마구 헤저어댔다. 인적없는 길가는 달빛 한점 없어 캄캄하기 그지없었다. 영금은 등에 진 배낭을 추슬러올리며 지름길인 고개길에 접어들었다. 이 고개길만 넘으면 나머지 길은 지척과 같다. 고개를 오를 때만 하여도 운총리 소재지의 밝은 불빛이 등을 밀어주는것 같아 별로 몰랐는데 막상 고개마루를 넘어서자 우중충한 산발과 시커먼 숲이 담벽처럼 막아서는것 같아 더럭 무섬증이 들었다. 변덕이 심한 산골날씨마저 무슨 심술을 부리는지 떼구름이 꾸역꾸역 밀려들기 시작하더니 이해의 첫 봄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보슬보슬 일매지게 내리는 봄비는 소리없이 옷섶으로 스며들었다. 비소리, 바람소리, 숲이 설레이는 소리... 이따금 인적기에 놀란 밤새들의 깃치는 소리가 영금의 발목을 잡군 했다. 바싹 긴장하여 어느 한 비탈진 굽인돌이를 돌아서던 영금은 《아!》하는 비명소리와 함께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어둠과 숲이 한데 어울린 음침한 골짜기에서 웬 허연 짐승이 찬 랭기를 확 끼얹으며 다가드는감이 들었던것이다. 순간 고개마루쪽에서 《어허, 어허-》하는 소리와 함께 한줄기 전지불빛이 비쳐내렸다. 그 바람에 어지간히 담이 생긴 영금은 방금 달려들던 짐승을 찾아 골짜기쪽을 누벼보다가 그만 픽-하고 허구픈 웃음을 웃고말았다. 음달진 쪽에 백곰같이 옹크리고있는 묵은 잔설을 보았던것이다. 《혹시 성계리까지 가는 체네가 아닌지?...》 전지불을 비치며 가까이 다가든 사람은 뜻밖에도 꽃나무집로인이였다. 《아이! 할아버지.》 영금은 사람을 만났다는 안도감에 너무 반가와 어떻게 다시 왔느냐는 인사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옳구만. 이걸 받으라구.》 로인은 손에 들었던 우산과 함께 큼직한 비닐주머니를 내놓았다. 《갑자기 비가 오길래 마음이 놓이지 않아 운총리에서 이걸 빌려가지고 다시 왔네. 젊은이걸음을 따라서자니 헐치 않구만. 이걸루 나무모를 잘 감싸라구. 뿌리에 붙은 흙이 비물에 씻기지 않게. 목수국나무는 땅가림이 심해서 처음에는 제 자란 땅 흙이 뿌리에 잘 엉켜붙어있어야 등탈없어.》 로인은 비닐주머니로 목수국이 들어있는 배낭을 꼼꼼히 감싸주었다. 영금은 눈굽이 저려들었다. 나무뿌리가 비에 씻길가보아 비내리는 밤길을 다시 온 로인의 그 심정이 헤아려져서였다. 《할아버지! 고맙습니다.》 《고맙긴, 귀히 쓸 나무 같은데 잘 다루라구. 나무를 심고가꾸는데서도 제 땀을 심어봐야 그 나무 귀한줄 안다니.》 영금이 이젠 가보라고 아무리 만류해도 로인은 시뭇이 웃기만 할뿐 계속 함께 걸었다. 영금은 하는수없이 꽃나무집로인과 함께 고개를 내렸다. 《이렇게 밤길을 걷는걸 보니 이 꽃나무에 무슨 사연이 있는것 같구만.》 큰길에 접어들어 얼마쯤 걷던 꽃나무집로인이 궁금한지 말꼭지를 뗐다. 《저...》 영금은 망설였다. 태림이가 떠나기 전에 누구도 모르게 심어놓자고 작정한 일이여서 오직 삼촌에게만 속을 터놓았던것이다. 그래서 꽃나무를 구하러 떠나면서도 자기의 행처만은 굳이 밝히지 않았던 영금이였다. 《허허, 이 늙은게 괜한걸...》 옹색해하는 영금의 마음을 눙치려는듯 꽃나무집로인은 짐짓 흔연히 웃었다. 《아닙니다. 할아버지, 사실은...》 영금은 한그루의 목수국나무를 위하여 비내리는 밤길까지 함께 걸어주는 로인이 고마와 꽃나무를 구하러 떠나게 된 전후 사연을 스스럼없이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내 어쩐지...》 로인은 말끝을 흐리며 한참동안이나 성계리의 우중충한 산발들을 추연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무 한그루라도 제손으로 심어보아야 제 고장 귀한줄 아는 법이야.》 로인이 혼자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영금은 어데선가 익히 듣던 소리 같아 이상하게 마음이 울렁거려졌다. 불현듯 그의 눈앞에는 학교교정에서 소소리 높이 자라고있는 한그루의 수삼나무가 떠올랐다. 이십여년전 한 졸업생이 해병이 되여 모교를 떠나면서 심어놓은 수삼나무였다. 나무는 해마다 키돋움을 하며 자랐고 떠나간 해병도 이제는 어뢰정의 어엿한 정장이 되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적과의 해상전에서 큰 위훈을 세우고 영웅이 되였다는 소식이 온 고향땅에 전해졌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학교에서는 그가 싸움터로 떠나면서 보낸 편지를 학교 연혁소개실에 전시하게 되였다. 이제는 너무도 보고 또 보아 영금에게는 눈을 감고서도 그 편지의 구절들이 눈앞에 삼삼했다. ...얼마전에 진행된 어뢰실탄사격에서 우를 맞고 표창휴가명령이 내려진 때로부터 마음은 줄곧 고향으로만 달립니다. 고향을 그릴 때마다 제일먼저 들려오는것은 내가 모교에 심어놓고온 수삼나무잎이 설레이는 소리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고향이라는 따뜻한 요람속에서 행복만을 받아안으며 살아온 내가 처음으로 자기의 량심을 비쳐보며 심은 나무이기때문일것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그 한그루 나무를 통하여 고향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에도 어떤 진한 땀과 량심이 바쳐졌는가를 알았기때문이라고 해야 옳을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그 수삼나무잎이 설레이는 소리는 어서 오라 부르는 고향의 정겨운 손길처럼 늘 나의 마음속에서 떠날줄 모릅니다. 검푸른 바다길을 달릴 때도 떠오르고 만경창파를 헤가르며 뭍으로 돌아올 때도 제일먼저 떠오르는것이 그 수삼나무의 정겨운 설레임소리입니다. 이제는 얼마나 컸을가요? 정말 보고싶어 한번 품에 안고 마음껏 흔들어라도 봤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선생님, 오늘 새벽 갑자기 비상정황이 생겼습니다. 해상분계선에서 적들의 거동이 심상치 않다는것이였습니다. 내가 책임진 어뢰정에도 순찰임무가 내려졌습니다. 이상하게도 간밤까지 어서 오라 나를 부르던 수삼나무도 이번에는 해상순찰길로 나를 떠밀어주는것 같았습니다. 그 나무에 대해서 제가 그토록 애착을 가지는것은 한그루의 나무를 심어도 제 땀을 바쳐봐야 이 땅을 가꾸어온 고향사람들의 수고를 알고 그 땅을 지켜싸울 마음도 생긴다던 생활의 크나큰 진리를 받아안던 잊을수 없는 그날이 새삼스럽게 돌이켜지기때문입니다. ...그날 우리는 새로 지은 학교에 나무심기를 하게 되였습니다. 나는 동무들과 함께 마을앞산에 올라 수종이 좋은 나무들을 골라 뜨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한겨울만 지나면 조국보위초소로 떠날 우리들이였습니다. 조림사업소에서 나무모들을 보내주겠다고 하였지만 우리는 앞산에 숲을 이룬것이 나무들인데 기왕이면 크게 자란 나무를 떠옮겨 빛을 내고싶었습니다. 우리가 한창 나무뜨기를 하고있는데 《이 녀석들아! 그만하지 못할가?》하는 벽력같은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우리 마을 산림감독원이였습니다. 《피가 동이로 끓는 녀석들이 제 오금이 아까워 남이 떠다 심어서 이젠 이렇게 다 자란 나무에 손을 대다니...》 드러난 나무뿌리를 덮어주는 산림감독원아저씨의 손은 후들후들 떨렸습니다. 《이 산의 나무들이 어떤 나무들인지 알아? 전쟁때 폭격에 벌거숭이로 된 산에 고향사람들이 무너진 제집두 짓기 전에 한포기, 두포기 심은 나무들이야. 그 산을 더 무성하게 하기 위해 후대들이 또 한포기, 두포기 심은 나무들이구... 제 고향 산천에 하나라도 보탬은 못줄망정 손을 대다니?! 이렇게 눈가림식으로 일하면 못써. 한그루의 나무를 심어도 제 땀을 바쳐봐야 이 땅을 가꾸어온 고향사람들의 수고를 알고 그 땅을 지켜싸울 마음도 생기는 법이야. 그 땀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겐 그걸 지킬 마음도 안 생겨.》 산림감독원아저씨의 말은 길지 않았지만 우리의 손을 얼어붙게 하기에는 충분했습니다. 우리는 비맞은 수닭처럼 후줄근해져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뜻밖에도 산림감독원아저씨가 나무모를 한짐 지고 학교에 나타났습니다. 밤새 읍 조림사업소까지 다녀왔다는 아저씨의 옷자락은 새벽이슬에 함뿍 젖어있었습니다. 《이렇게 제손으로 고향에 나무 한그루라도 보태놓으니 얼마나 좋으냐. 이제 너희들이 군사복무를 마치고 돌아오면 이 나무그늘밑에서 오늘을 옛말할게다. 그때 난 그 그늘밑에서 장기나 놀게고... 하하하.》 나무심기를 마친 아저씨가 나의 등을 두드리며 헌헌하게 웃었지만 나는 머리를 들지 못했습니다. 차리리 종아리라도 얼얼하게 얻어맞았으면 속이 후련할것 같았습니다. 이런 사연이 깃들어있어 나의 마음속에 더 깊이 뿌리내린 수삼나무인지 모릅니다. 나는 수삼나무의 정겨운 설레임소리를 손저어 바래주는 고향의 손길로 그려보며 순찰의 길을 떠났습니다. 기다리라, 수삼나무여... 우리 다시 만나자.... 어서오라 손저어 부르는 고향의 품을 뒤에 두고 해병은 나서자란 고향땅의 정겨운 부름을 조국보위의 절절한 호소로 받아안으며 원쑤와의 싸움에 한목숨 서슴없이 바칠 각오를 가지고 격전장으로 떠난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각오를 안고 그의 뒤를 이어 그의 후배들이 떠나가고 이번에는 태림이네가 조국보위초소로 떠나게 된다. 한그루의 목수국나무를 위해 발부리에 피멍이 지도록 먼길을 달려오던 태림의 모습이 안겨와 발걸음은 더더욱 총총해진다. 《가만 선생, 저게 웬 불빛이요?!》 꽃나무집로인이 걸음을 멈추었다. 멀리 마을쪽에서 여러개의 불뭉치들이 너울대며 이쪽으로 다가오고있었다. 《선생니-임!》 어렴풋이 들여오는 소리는 분명 귀에 익은 학급학생들의 목소리다. 《아니, 저 애들이 어떻게 알고?》 영금은 잠시 의아해졌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떠난 걸음이였던것이다. 영금이 밤길을 떠났다고 삼촌이 교장선생님에게 알린것이 분명했다. (하다면 아이들은?) 삼촌이 알렸으면 교장선생님에게 알렸겠는데 학생들까지 떨쳐나선것이 암만해도 리해가 되지 않았다. 《영금선생! 수고했소. 정말 수고했소.》 자전거를 타고 앞서 달려온 교장선생님이 나무배낭부터 받아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고 이 밤중에 학생들까지...》 영금은 시종 흐뭇한 미소를 짓는 나이지숙한 교장선생에게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허허... 내가 영금선생 삼촌의 전화련락을 받고 필경 지난해에 심은 나무에서 사달이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교재림에 나가보니 글쎄 태림이네가 한발 먼저 나와있질 않겠소. 이제 조국보위초소로 떠나면 돌봐주지 못하겠는데 받침목 하나라도 더 든든히 받쳐주고 가자고 말이요. 집을 떠나는 마지막밤까지 고향의 한그루 나무라도 위해주고싶어하는 그들을 보노라니 내 그만...》 교장선생은 목이 메는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도수높은 안경만 벗어 닦았다. 《그래서였구나, 그래서였어.》 영금은 마냥 같은 소리만 되뇌이였다. 이제는 다 자랐구나 하는 대견한 생각이 가슴을 꽉 채웠다. 《동무드-을.》 마주오는 불빛을 향하여 뛰여가는 영금의 두볼로는 눈물인지 비물인지 모를 물기가 쉬임없이 흘러내렸다. 《태림학생!》 《선생님!》 영금은 앞장서 달려온 태림의 손을 와락 부여잡았다. 《이제 날이 밝으면 조국보위초소로 떠나야겠는데 이렇게 온밤 찬비를 맞으면...》 영금은 목이 꽉 잠겨 말을 이을수 없었다. 《선생님, 너무하십니다. 나무를 구하러 가면 간다고 말해야지 이렇게 홀로 밤길까지 걸으면 우린 뭐가 됩니까?》 태림은 입귀를 실그러뜨리며 울먹였다. 《달리 생각말아요. 태림학생이 어떻게 심은 나무인가요? 그런데 뿌리가 못 내린것을 알면서도 태림학생을 웃으며 바래줄수 있겠어요. 그렇다구 태림이가 그 귀한 나무를 당장 구할수도 없는거구...》 《선생님!》 태림의 눈가에서는 끝내 물기가 반짝였다. 《어험, 어험. 아무쪼록 인민군대에 나가는 너희들을 위하는 선생님의 수고를 잊지 말거라.》 한쪽에 비켜서있던 꽃나무집로인이 건기침을 톺으며 한마디 비쳤다. 로인의 목소리에 교장선생님이 놀라 그쪽을 바라보았다. 《아니 로인님, 저를 모르시겠습니까?》 교장선생님이 로인에게로 다가가 두손을 맞잡아 흔들며 웨쳤다. 《참, 동무들, 이 로인님이 바로 스무해전 오늘과 같이 먼 밤길을 걸어 수삼나무를 비롯한 나무모들을 구해가지고 학교에 왔던 그 산림감독원아저씨랍니다.》 《야!》 교장선생님의 소래를 듣고 학생들은 환성을 올렸다. 수삼나무에 깃든 사연을 너무나도 잘 알고있는 학생들이였던것이다. 《할아버님, 고맙습니다.》 영금은 새삼스럽게 꽃나무집로인에게 다시 머리숙여 인사를 올렸다. 예이제없이 사람들에게 고향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에도 자기의 참된 땀과 넋을 바쳐야 그 귀중함을 알수 있다는 진리를 말없이 깨우쳐주는 로인의 그 진정을 다시금 뜨겁게 새겨안으며 올리는 인사였다. 《인사는 오히려 내가 해야겠수다. 진작 그 사연부터 말했으면 이 고생을 안 시키는건데...》 꽃나무집로인은 손사래를 쳤다. 《선생님, 이제 우린 초소에 서서도 우리가 심어놓은 이 나무들의 설레임소리속에 스민 고향사람들의 절절한 부탁을 언제나 잊지 않고 조국을 위하여 위훈을 세운 영웅해병처럼 장군님의 참된 병사로 살며 싸우겠습니다.》 태림이가 동무들을 대표하여 의젓하게 말했다. 밤, 소리없이 내리는 비줄기...
그속에서 영금은 태림이네와 함께 나무를 심었다. 어느덧 동녘하늘이 희붐히 들리며 비맞은 산마루에서는 선선한 새벽바람이 불어왔다. 바람맞은 숲이 기지개라도 켜듯 설레이기 시작했다. 영금에게는 그 소리가 미구에 더 무성해질 푸른 숲의 설레임소리로, 고향땅이 자기의 장한 아들들에게 위훈을 당부하는 절절한 목소리로 들려왔다. 참으로 생각도 많고 사연도 깊은 산골의 한밤이였다.
(평양시 만경대구역 도시미화사업소 로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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