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97(2008)년 제6호에 실린

 

 단편소설

 

엄호삼

       

                            

××역 기다림칸에는 도서열람실이 있다. 차표파는곳 맞은편에 유리칸막이를 하고 자리잡은 열람실은 별로 크지 않았다. 허나 서가에 질서있게 꽂힌 책들과 노란 액틀을 한 열람실명판으로 하여 대뜸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지금 열람실은 조용했다. 방금 떠나간 렬차가 열람실의 손님들까지 모두 실어간것이다. 40살가량의 중년녀인이 대출탁에 앉아있을뿐이다. 이 녀인이 바로 열람실의 유일한 책임자이고 사서인 리현경이다. 얼굴이 둥실하고 키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초면인 사람도 대번에 마음의 안정을 얻을수 있는 그윽하면서도 정깊은 눈빛을 가진 평범한 녀인이였다.

현경은 좀전에 군식료공장 기사장이 출장길에 구해온것이라며 놓고간 새책들을 보며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가 군인민위원회 부원인 남편의 지지와 방조속에 처음 열람실을 꾸릴 때만 하여도 부족한 책들이 많아 얼마나 애타했던가.… 그러나 지금은 기사장과 같은 고마운 사람들에 의해 장서가 늘어나고 려행자만이 아닌 길가던 손님들까지 즐겨 찾는것으로 하여 자기 일에 대한 긍지와 보람을 느끼고있었다. 그런데 이런 긍지와 기쁨속에서도 현경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죄의식이라고 해야 할지, 아쉬움이라고 해야 할지 딱히 규정하기 어려운 응어리가 이따금 녀인의 마음을 무겁게 하군 했다. 그런 때이면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여나오군 했다.

문득 현경의 명상을 깨뜨리며 문열리는 소리가 났다. 눈길을 드니 열람실의 출입문으로 한 처녀가 들어서고있었다. 계절에 맞는 산뜻한 옷차림을 한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은 상쾌한 여름날 아침 활짝 피여난 수선화를 련상시켰다. 왼쪽입가에 살짝 패인 보조개는 그 꽃잎에 맺힌 물방울이라고 할가.…

현경은 정신이 맑아지는감을 느끼며 다정히 물었다.

《어서 오세요. 무슨 책을 보겠습니까?》

순간 처녀의 얼굴에서 실망의 빛이 스쳐지나갔다. 이상한 느낌이 든 현경은 처녀의 얼굴을 찬찬히 여겨보았다. 어딘가 낯이 익은 얼굴이다.

(누굴가?)

마침내 처녀의 입가에 난 보조개가 눈에 확― 안겨들며 10대의 소녀의 얼굴을 되살려주었다.

순간 현경의 가슴은 후두둑 높뛰였다.

《혹시 처녀이름이… 남희가 맞지?》

처녀의 얼굴에서 기쁨의 빛이 확 피여올랐다.

《절 알아보시는군요. 사서어머니,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그래그래. 나야 잘있지 않구. 남희가… 남희가 이렇게 자라다니, 정말 꿈을 꾸는것 같다.》

두 녀인은 기쁨과 감격에 겨워 어쩔줄 몰라했다. 이들이 서로 알게 된것은 10년전 바로 이 열람실에서였다.

 

×

 

맵짠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1월 어느날 오후였다.

한 소녀애가 유리칸막이너머로 열심히 열람실을 들여다보고있었다. 그 애와 눈길이 마주친 현경은 빙그레 웃으며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소녀애가 주춤주춤 열람실로 들어왔다. 꼭 다문 입술, 깔끔하니 내리떨군 속눈섭… 어지간히 자존심이 강해보이는 애였다. 그런데 소녀애의 얼굴에서 수심기가 엿보였다.

《그래 무슨 책을 보려니?》

《저― 〈초순이〉가 있나요?》

열람실에 없는 책이였다. 현경의 입가에 어려있던 미소가 순간에 사라졌다.

《없단다. 다른 책을 보지 않겠니?》

《그럼 〈1학년생〉은요?》

미안해하는 현경의 심정을 간파한듯 소녀애가 제꺽 다른 책제목을 댔다. 무척 똑똑한 애였다.

분명 책도 많이 본것 같았다.

《그 책은 있다.》

현경은 서가에서 책을 뽑아들고 되돌아와 소녀에게 물었다.

《네 이름은 뭐냐?》

《남희예요, 김남희.》

책을 넘겨받은 소녀애는 역홈이 내다보이는 창문쪽에 가앉았다.

렬차시간이 다가오자 역기다림칸은 물론 열람실에도 손님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현경은 손님들에게 책을 내주고 받을 때마다 소녀애쪽에 눈길을 주군 했다. 소녀애는 헛눈 한번 파는적없이 책을 읽었다. 간혹 그 애의 입가에 방긋 웃음이 피여나군 했다. 아마 재미있는 대목을 읽는 모양이다.

왼쪽입가에 보조개가 살짝 패운 소녀애의 웃는 모습은 볼수록 사랑스러웠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문득 기다림칸쪽에서 차표를 팔아드리겠다고 알리는 역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열람실의 손님들은 책을 바치고 차표파는 곳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소녀애만이 여전히 책을 읽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뿌웅― 기차소리가 들려왔다. 순간 주위에 관심이 없는것 같던 소녀애가 벌떡 일어서더니 창가에 매달렸다. 역 남쪽 산굽이에서 기관차의 앞머리가 나타났다. 소녀애가 쪼르르 현경이한테로 달려왔다.

《잘 봤습니다.》

머리숙여 인사를 한 소녀애는 열람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차표를 뗀 손님들이 가는 나들문을 향해 달음박질했다.

(애두 덤비긴…)

현경은 걱정어린 눈길로 그 애를 바래웠다.

어느덧 조용해진 열람실에 저녁어스름이 깃을 펴기 시작했다. 열람실을 청소하던 현경은 얼핏 기다림칸창문밖에서 낯익은 모습을 띄여보았다. 분명 남희라는 소녀애였다. 렬차는 이미 떠나갔으나 감색솜옷을 입은 그 애만이 닫겨진 나들문을 지켜보며 홀로 서있었다. 렬차에서 내린 손님들은 몰아치는 눈보라를 팔로 막으며 멀리 사라지고있었다. 소녀애는 장갑을 끼지 않아 빨개진 두손을 자주 눈에 가져가군 했다. 우는것이 분명했다. 마침내 소녀애도 머리를 숙인채 역전공원쪽으로 걸어갔다.

(무슨 일일가?)

현경은 의혹에 잠겨 멀어져가는 그 애를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이튿날 오후였다. 왜서인지 열람실의 손님들이 여느때보다 많아졌다. 도서목록을 정리하던 현경은 누군가가 다가온것 같아 눈길을 들었다.

남희였다. 빈자리가 없어 망설이는 기색이다. 현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가로 나드는 작은 문을 열었다.

《남희야, 여기 들어와 책을 보거라.》

《일없나요?》

남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현경은 입에 손가락을 대여 조용하라는 신호를 하며 그 애의 손을 끌어당겼다. 자기가 앉았던 걸상을 대출탁옆에 옮기고 남희를 앉힌 현경은 죄스러워하는 그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어제 보던 책을 보겠니?》

《예, 그런데 걸상엔 사서어머니가 앉으세요. 전 서서 봐도 일없어요.》

《오늘은 손님들이 많아 앉을 사이가 없단다. 그러니 마음놓고 앉아 책을 보거라.》

서가에서 책을 가져온 현경은 남희의 이마에 드리운 머리카락을 쓸어넘겨주며 다정히 물었다.

《남희야, 역에는 왜 나왔니?》

《나 저어… 엄마마중을 나왔어요.》

《어제 오시겠다고 했니?》

《아니요. 병원으로 떠날 땐 30일쯤 있다가 오신다고 했어요. 그런데 40일이 지났는데두 아직… 그래, 방학숙제를 미리 끝내고 요즘은 매일 나오군 해요.》

《그랬구나.…》

현경은 무엇인가 더 말하고싶었으나 말마디를 고를수가 없었다. 공장에 간 어머니가 조금만 늦어져도 길가에 나와 기다리던 자기의 어린시절이 생각났던것이다. 어둠속에서도 어머니의 체취와 발자국소리를 제꺽 알아보고 한달음에 달려가 어머니품에 와락 안기던 자기였다. 그런 자기를 꼭 껴안아주고 따스한 손으로 두볼을 닦아주던 어머니였다. 매일 어머니를 보건만 한시도 그 품을 떠나기 싫어했던 자신이 아니였던가.… 그런데 남희는 벌써 한달나마 어머니와 헤여져있는것이다. 이런 남희의 심정을 무슨 말로 달래일수 있으랴.…

오후 3시에 도착하게 되여있던 렬차는 많이 늦어질것 같았다. 눈사태에 철길이 막혔다고 한다. 밖은 벌써 어두워지고있었다.

책을 보던 남희는 어느새 소르르 잠이 들었다. 전등빛이 그 애의 잠든 얼굴을 포근히 어루만지고있었다. 현경은 자기의 머리수건을 남희에게 씌워주었다. 그가 허리를 펴니 웬 중년의 녀인이 열람실안을 들여다보고있었다. 누군가를 찾는것 같았다. 마침내 녀인이 현경이쪽으로 다가왔다.

《저… 혹시 여기에…》

말머리를 떼던 녀인이 대출탁에 엎디여 자고있는 남희를 보았다. 순간 걱정이 어렸던 녀인의 낯색이 환해졌다.

《여기 있었군요.》

《누구신지?》

《전 남희의 담임선생이예요. 남희가 계속 역전에 나가길래…》

현경은 담임선생이라는 녀인이 돋보였다. 자기가 맡은 학생이 걱정되여 이 추운 겨울밤에 역에까지 찾아오다니…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저 남희를 깨울가요?》

《아니, 그만두세요. 남희의 자존심이 보통이 아니랍니다.》

녀선생의 말에 현경은 미소를 지었다.

《정말 그런것 같아요. 그런데 남희의 아버지는 무얼 하시는가요?》

녀선생은 현경의 물음에 대답이 없이 한동안 잠이 든 남희의 머리를 쓰다듬고있었다.

《남희의 아버진 작년 여름에 뜻밖의 일로 물에 빠진 학생들을 구원하고는…》

순간 현경은 심장의 아픔을 느꼈다.

(그래서였구나. 바로 그래서 남희의 얼굴에 수심이 비껴있었구나.)

녀선생의 이야기는 계속되였다.

《참 훌륭한 선생이였지요. 학생들을 위해서는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쳤어요. 그런 사람이니 돌격대에서 동지들을 위해 서슴없이 자기 한몸을 바쳤던 처녀를 안해로 삼았지요. 자기는 건강한 몸이 못된다고 만류하는 처녀를 뜨거운 인간애로 사랑했어요. 그 처녀가 바로 남희의 어머니였어요.

정말 모두가 부러워하던 가정이였는데…》

한 손님이 다가오자 녀선생은 말을 끊었다.

《제가 손님들에게 페를 끼치는군요. 그럼 전 마음놓구 가보겠어요. 남희에게는 제가 왔댔다는 말을 하지 말아주세요.》

《알겠어요. 그럼 안녕히 가세요.》

그는 다시한번 남희의 모습을 바라보고는 검은 털실로 짠 머리수건을 쓰며 문을 나섰다.

현경은 따뜻한 마음으로 그를 바래웠다.

(오늘도 오후에 오려나…)

아침부터 현경은 남희가 오지 않는가 하여 기다림칸 출입문쪽을 바라보군 했다.

어제도 남희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으나 《저 혼자 가겠어요.》 하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머리를 숙인채 떠나간 남희였다.

출입문에서 눈길을 뗀 현경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나서 조심히 대출탁의 서랍을 열었다. 그안에는 빨간 털실장갑과 빵봉지가 있었다. 남희에게 주려고 출근길에 사온것이다. 장갑이 그 애 마음에 들겠는지, 자존심이 강한 애니 자기의 진정을 동정으로 오해하고 뿌리치지는 않겠는지…

현경은 착잡한 심정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서랍을 다시 닫았다. 이때였다. 불쑥 그의 눈앞에 작은 두손으로 받쳐든 따끈따끈한 고구마가 나타났다. 자그마한 손의 임자는 남희였다.

《잡수세요.》 하며 남희가 해쭉 웃는다. 눈을 깜박이며 밝게 웃는 그 애의 감색솜옷은 반쯤 헤쳐져있었다. 고구마가 식지 않게 품속에 넣고온것이 분명했다.

《애두 참, 네가 먹으렴.》

남희의 밝던 얼굴이 금시에 시무룩해졌다.

(이런 내가 실수를 했군.)

현경은 자기 생각이 짧았음을 깨달았다. 고구마 한알, 비록 큰것은 아니였으나 거기에는 어린 남희가 현재 다른 사람에게 베풀수 있는 그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뜨거우면서도 가장 큰 성의가 담겨있었던것이다.

현경은 남희의 손에서 고구마를 받아쥐며 그 애의 솜옷깃을 꼭꼭 여며주었다.

《내 먹겠다. 그런데 나도 남희한테 줄것이 있는데…》

살풋이 내리깔았던 남희의 눈까풀이 의문으로 하여 쳐들려졌다.

현경은 빙그레 웃으며 서랍안의 털실장갑을 꺼내들었다.

《마음에 들겠는지 모르겠구나.》

《제게두 장갑이 있어요.》

《알고있다. 그래두 받아주렴.》

현경은 망설이는 남희의 손에 장갑을 쥐여주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고구마가 식기전에 어서 드세요.》

현경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또 자기의 진정을 기꺼이 받아주는 남희가 무척 사랑스럽고 기특했다. 고구마껍질을 벗기니 노랗게 익은 고구마속살에서 모록모록 김이 솟아오른다. 절반 갈라 남희에게 내미니 생긋 웃으며 도리질을 할뿐이다.

《참, 여기에 빵이 있지.》

현경은 내놓기 주저했던 빵봉지를 남희앞에 꺼내놓았다.

《빵을 좋아하니?》

《예, 좋아해요. 이걸 옆집애들과 나눠먹어도 일없지요?》

현경은 머리를 끄덕였다. 잠시후 남희가 눈을 올리뜨고 생각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번엔 <너를 기다린다>를 보여주세요.》

《그러자꾸나. 참 남흰 책을 많이 읽었구나.》

책을 받아들고 걸상쪽으로 가던 남희가 웬일인지 주춤거리다가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기대어린 눈길로 현경을 바라보며 선뜻 말을 떼지 못했다.

《저… 저…》

《왜 그러니?》

현경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용기가 솟은듯 남희가 속을 터놓았다.

《어머니한테서 소식이 왔는데 인차 올것 같지 못하대요. 그래 저어… 여기에 매일 오고싶은데 일없나요?》

《일없지 않구. 나도 남희가 오는게 좋단다.》

남희의 입가에 밝은 웃음이 활짝 피여났다. 바로 이때 그들의 뒤에서 《어머니》하고 찾는 소리가 났다. 현경이가 돌아보니 8살난 아들 혁철이다. 어디서 눈장난을 하다 오는지 장갑에는 눈이 묻어있었고 털모자를 쓴 머리에서는 김이 막 솟아오르고있다. 현경은 손수건을 꺼내 혁철의 이마와 볼을 닦아주며 가볍게 꾸짖었다.

《이렇게 땀을 흘리다 감기들면 어쩌려구.》

《일없어요. 그림책이나 보여줘요. 이자 동생들한테 눈사람을 만들어주구 오는 길이예요. 오늘 방학숙제두 다 했거든요.》

혁철의 목소리에는 자랑기가 한껏 어려있었다.

《애두 참, 뻐기지 말아. 이 남희누난 방학숙제를 다 끝냈다.》

그제야 혁철이가 눈이 휘둥그래져 남희를 쳐다본다. 남희가 얼굴을 붉히며 생긋 웃어보이자 혁철이도 눈을 끔뻑해보이며 따라 웃는다. 그러다가 남희의 손에 쥐여있는 빵봉지를 보고는 군침을 꿀꺽 삼키는것이였다. 남희가 제꺽 빵 두개를 꺼내주었다. 그것을 닁큼 받아든 혁철이는 책망어린 눈길을 보내는 현경에게 벌쭉 웃어보이고나서 먹어대기 시작했다.

《저런 천천히 먹어라. 목이 메겠다. 누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지.》

현경의 타이름을 들은 혁철이가 입안의것을 꿀꺽 삼키고 남희에게 인사했다.

《누나, 고마워. 내 이름은 혁철이야. 우리 친하자. 내겐 동생들이 많지만 누난 없거던.》

《좋아, 난 남희라고 해.》

두 애가 서로 다정히 자기소개를 했다. 그리고는 각기 책들을 받아쥐고 걸상쪽에 가 앉았다. 한 걸상에 나란히 앉아 책을 보며 이따금 친형제마냥 조용히 소곤거리는 두 애를 바라보는 현경의 마음은 즐거웠다.

 

다음날부터 남희는 눈보라가 치든 눈이 쏟아지든 매일 열람실에 오군 했다. 아침마다 찬바람에 빨개진 얼굴에 담뿍 미소를 담고 열람실에 들어서는 남희를 현경은 반겨맞군 했다. 그동안 남희와 혁철이의 사이도 무척 가까와졌다. 요즘은 장난꾸러기인 혁철이가 열람실에 붙어살다싶이 했다. 남희의 방조밑에 방학숙제를 하는것이다. 혁철이의 숙제가 끝나면 두 애는 나란히 앉아 책을 읽는다. 그러다가 무슨 할 말이 있으면 손님들에게 방해가 될세라 조용히 밖으로 나간다. 얼마 안있어 역전공원쪽에서 그 애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군 했다.

생기발랄함을 되찾은 남희를 보는 현경의 마음은 즐겁기 그지없었다.

어느날 저녁 현경이가 퇴근준비를 하고있는데 문득 텅 빈 열람실에 남아있던 두 애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혁철아, 너의 어머닌 정말 좋은분이야.》

《누나두 우리 어머니에 대해서 잘 아니?》

《그럼, 너의 어머닌 음― 음―》

말문이 막혔는지 남희가 끙끙 갑잘랐다. 다음말이 떠오르지 않아 이마살을 찌프렸던 그 애가 마침내 선언하듯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시는분이거던.》

혁철이가 그 말에 입을 삐쭉 내밀었다.

《피― 누난 잘 모르댔구나. 그런데 우리 어머니가 그러는데 누나네 부모들은 훌륭한 사람들이래.》

남희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그 애는 현경이한테로 달려왔다.

《저 우리 아버지, 어머니를 아세요?》

현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어떻게 아세요?》

남희가 반가움과 의문이 뒤섞인 어조로 다우쳐 물었다. 현경은 인차 대답할수 없었다. 누구나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 자주 추억하며 이야기하군 한다. 한것은 아름다운 소행은 사람들을 참된 길로 이끌어주고 행복한 앞날을 약속해주는 리정표와도 같기때문인것이다. 그런데 남희에게 어떻게 말해주어야 이걸 리해할수 있겠는지…

현경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남희의 두볼을 어루만지며 이렇게 말했다.

《남희야, 훌륭한 사람들이 많아야 더 좋은 앞날이 빨리 온단다. 그러니 우리가 그런 사람들에 대해 몰라서야 되겠니.》

남희의 까만 머루알같은 두눈이 깜박거렸다.

《나도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어요.》

《나두요.》 혁철이도 덩달아 소리쳤다.

현경은 두 애를 품에 꼭 껴안아주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날, 아침마다 열람실에 오던 남희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루 쉬려는가부다 하고 생각했었으나 다음날에도 그 다음날에도 남희는 나타나지 않았다.

방학이 끝나가니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가, 혹시 어머니가 돌아온게 아닐가.… 이런저런 생각이 현경의 머리속에서 맴돌아쳤다. 남희의 귀여운 얼굴을 보지 못하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어느새 그 애한테 정이 든것이다.

혁철이도 다정히 지내던 남희가 오지 않으니 무척 궁금해했다.

《누나가 왜 안 올가요?》

《글쎄, 혹시 알겠니. 어머니가 오셨을수도 있거던.》

《야 그렇다면 좋겠는데…》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혁철이는 서운한 눈길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때로부터 며칠이 지나간 어느날 오후였다.

3월 중순이였으나 봄은 아직 늦어지고있었다. 아침이면 쌀쌀한 바람이 불고 때없이 진눈까비가 쏟아지군 했다. 작년 이맘때면 활짝 피였을 역전공원주변의 나리꽃들도 이제야 겨우 새움을 내밀고있었다.

열람실을 찾는 손님들은 겨울옷을 벗지 못한채로였다. 역방송으로 렬차가 도착한다고 알리자 손님들은 나가기 시작했다. 받은 책들을 서가에 꽂아넣던 현경은 이상한 감촉이 들어 얼핏 창문에 눈길을 주었다. 나들문으로 빠져나가는 손님들만 보일뿐 특별히 눈에 띄이는것이 없었다. 하지만 감색솜옷을 입은 남희의 모습이 창유리에 비낀것을 꼭 본것 같았다.

착각인가? 현경은 아쉬움속에 가볍게 긴숨을 내쉬였다.

기다림칸에는 정적이 깃들었다. 문득 육중한 기다림칸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현경은 반사적으로 그쪽을 향해 돌아섰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였다. 분명 감색솜옷을 입은 남희가 고개를 숙인채 열람실쪽으로 오고있었다. 너무도 반가와 현경은 그 애한테로 뛰여가 두손을 부여잡았다.

《남희가 왔구나. 그새 잘 있었니?》

남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뿐 발끝만 내려다보고있다. 자세히 보니 그 애의 눈이 젖어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니?》

이때 뿌웅― 하는 기적소리가 들려왔다. 마침내 남희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사서어머니, 안녕히 계세요. 난 학원에 가요.》

이 말을 남긴 남희는 출입문을 향해 뛰여갔다.

순간 현경의 눈앞이 뿌잇해왔다.

(어머니가 장기환자라더니 병치료가 오랜 모양이구나.…)

 

×

 

10년전의 그날을 돌이켜보는 현경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고이고있었다. 그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창가로 얼굴을 돌렸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꽃향기를 머금은 초여름의 선들바람이 불어왔다. 역전공원에 활짝 피여난 갖가지 꽃들, 짙어가는 록음, 따뜻한 대기…

화려한 꽃들도 시샘할 정도로 아릿다운 처녀로 자란 남희를 보니 현경은 온갖 시름이 풀리는것 같았다. 10년세월 그의 마음 한구석에 맺혀있던 응어리가 봄눈 녹듯 스르르 녹아버렸다.

《이렇게 다시 만날줄은… 정말 기쁘다.》

《저도 사서어머니가 보고싶었어요.》

두 녀인의 목소리는 물기에 젖어있었다.

현경은 그윽한 눈길로 남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지금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니?》

《지난 4월에 사범대학을 졸업했는데 ××중학교 문학교원으로 배치받고 오는 길이예요.》

《그러니 아버지가 계시던…》

《예, 그래요.》

《정말 생각을 잘했다, 잘했어.》

현경은 감격하여 남희의 손을 꼭 그러잡았다.

《참, 어머니는 어디에 계시니?》

《그때 건강한 몸으로 병원에서 퇴원한 후 고향에서 농사일을…》

《그랬댔구나.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하시겠니.》

《나라에서 따뜻이 보살펴주고 대학공부까지 시켜주었는데 고향으로 돌아온것이야 응당한 일이지요 뭐.》

《그래그래, 남희가 몰라보게 자랐구나.

너 우리 혁철이가 생각나니? 둘이서 앞으로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맹세하던 일이 말이다.》

남희는 밝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혁철이는 잘 있어요?》

《잘 있다. 군대에 나간 그 애한테서 종종 편지가 온단다.》

이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중학교 3학년쯤 돼보이는 처녀애들이 들어왔다.

《어머니, 군대나간 혁철오빠한테서 편지가 왔어요.》

현경은 편지를 받으며 애들에게 말했다.

《인사해라. 앞으로 너희들을 배워주실 선생님이시다.》

《선생님?!》 하는 소리가 그들의 입에서 동시에 새여나왔다.

남희가 처녀애들에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현경은 머리숙여 인사하는 애들을 남희에게 소개해주었다.

《이 애는 중학교 4학년생인 현미, 저 애는 중학교 3학년인 경순이. 모두 우리 집 애들이다.》

《아니, 집의 애들이라니요?》

남희의 눈이 커졌다.

《그렇게 됐다. 사실 혁철이랑 저 애들은 <고난의 행군>시기 조국을 위해 자기의 모든것을 다 바친 사람들의 자식들이다.》

방금 받은 충격의 여운이 사라지지 않은듯 남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서어머니, 어머닌 정말 훌륭한분이예요.》

《애두 참, 너무 그러지 말아. 난 저 애들이 자기의 부모들처럼 조국과 인민을 위해 옳게 살기를 바랄뿐이다.》

남희는 뜨거운것이 목을 꽉 메워 말을 더 잇지 못했다.

저 평범한 녀성인 현경의 가슴속에 간직되여있는것은 과연 무엇인지.… 그것은 결코 값눅은 동정이 아니였다.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였고 헌신이였다.

《저… 어머니, 저도 이렇게 부르고싶어요. 허락하시지요?》

현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남희는 현경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두 녀인의 눈에서 맑은것이 흘러내렸다. 인간애와 조국애로 가득찬 이들의 가슴속으로부터 솟구쳐오르는 저 맑은것은 정녕 티없이 정갈한 샘의 용솟음과도 같은것이였다.

맑은 샘!

이는 엄혹한 겨울에도 무더운 여름에도 쉼없이 솟아오른다.

이 땅에 생명수를 부어주고 강과 바다를 이루며 그 어떤 자랑과 불평도 없이, 명예와 보수를 바람이 없이…

그렇다, 그 샘은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사랑이 있어 더욱 마를줄 모르고 영원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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