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96(2007)년 제5호 잡지 《청년문학》에 실린 글  

          

         벽 소 설

 

눈 높 은  처 녀

 

리  서  호               

 

8월의 무더위가  계속되던 어느날 어느 한 인민군구분대에서 군관으로 복무하고있던 명철은 군사임무수행을 위해 만포ㅡ해주행 렬차에 몸을 실었다.

말복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렬차안은 불볕이 내리는 창밖과 큰 차이는 없는것 같았다.

한껏 열어젖힌 차창으로 흘러드는 바람도 달아오른 렬차안의 공기를 식혀주지는 못하고있었다.

열어놓은 차창가에 앉아 언뜻언뜻 불어오는 바람속에 단몸을 식히는 명철의 눈앞엔 무연하게 펼쳐진 벌이 한눈에 안겨왔다.

고개를 무겁게 숙이고 훈풍에 스적이는 벼이삭들을 바라보는 명철의 가슴속엔 이 땅을 지켜가는 자랑과 긍지가 서서히 샘솟아올랐다.

얼마후 수도 평양의 아름다운 모습을 차창에 비껴담고 달리던 렬차가 대동강역에 서서히 멎어섰다. 역홈은 내리고 오르는 손님들로 붐비였다.

새로 오른 군인들의 손짐정돈이 끝나고 자리에 앉고나자 렬차안은 한결 조용해졌다.

이때였다. 렬차에서 내리고 오르는 손님들을 위해 승강구로 나갔던 렬차원이 다급한 걸음으로 손님들에게 량해를 구하며 렬차안으로 들어오고있었다. 그 뒤를 이어 웬 녀인이 한사람을 등에 업은 군인을 앞세우고 따라오고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들의 눈길이 쏠리고 자기 자리를 권하는 군인들도 있었다.

렬차원이 잡아주는 자리에 녀인과 함께 등에 업었던 사람을 조심히 내려놓고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도록 해준 군인은 녀인과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더니 거수경례를 하고는 총총히 렬차안을 빠져나갔다.

의아해하며 바라보는 군인들의 시선을 감촉한 렬차원처녀는 적십자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나온 특류영예군인이라고 그들의 의심을 풀어주었다.

몇몇 군인들이 영예군인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녀인과도 말을 주고받는것이 보였다.

파란색의 사쯔를 입은 녀인은 곁에 다가온 군인들의 말에 조용히 웃기도 하고 뭐라고 이야기도 하며 영예군인의 시중을 들고있었다.

특류영예군인과 일생을 약속한 녀인의 소행에 감동되여 줄곧 녀인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던 명철은 한동안이 지나 일어나서 이마의 땀을 가볍게 씻은 녀인이 머리를 돌리는 순간 아연해졌다.

날렵한 몸매, 갸름한 얼굴, 쌍가풀진 시원한 눈…

그는 틀림없는 사촌동생 영순이였다.

그도 이상한 느낌이 드는듯 명철을 세세히 바라보다가 뜻밖인듯 한동안 멍해 서있더니 기쁨에 넘쳐 다가왔다.

《오빠, 오빠가 어떻게 된 일이예요?》

명철의 곁에 다가온 영순은 명철의 두팔을 덥석 잡으며 반가운듯 발을 동동 굴렀다.

오누이의 류다른 상봉이 손님들의 눈길을 끌었다.

주위사람들의 관심이 적어지고 반가운 상봉의 순간이 지나자 명철은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네가 어떻게 여기에 다 왔니?》

반가움이 남실거리던 영순의 얼굴에 어줍어하는 빛이 어렸다.

《저… 그렇게 됐어요.》

영순은 검진을 위해 적십자병원에 왔던 일이며 병원앞을 지나가던 군인들이 자기의 등에 업힌 사람이 영예군인임을 알고 도와준 사실을 이야기했다.

《그러니 저 영예군인이…》

《예. … 저의 남편이예요.》

영순은 부지중 흘러나온 자기의 말에 부끄러움을 느낀듯 얼굴을 붉혔다.

사뭇 놀라운 표정으로 영순을 바라보는 명철의 머리엔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신천박물관을 참관하려고 신천땅을 찾았던 명철은 시간을 받고 길에 나섰다.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삼촌의 집이 있었던것이였다. 가까운 친척이라고는 삼촌밖에 없었던 명철은 중학교시절에 방학때면 늘 삼촌의 집을 찾군 하였던것이다. 이제는 삼촌을 만나본지도 십년이 되였지만 때없이 오군 하던 삼촌과 사촌동생들의 편지는 그날의 추억을 가끔가끔 눈앞에 떠올려주군 하였다.

불볕에 뜨겁게 달아오른 도로를 따라 걸음을 옮기던 명철은 무춤 멈춰서지 않을수 없었다.

어린시절에 새겨진 추억의 자욱을 되살리며 밟아나갔지만 놀랍게 변모된 마을들의 모습앞에 서고보니 도저히 길을 알수 없었던것이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만 놀랍게 전변된 농촌의 모습은 명철이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놓은것이다. 난처해진 명철이가 연신 시계만 들여다보고있는데 스무살이나 됐을가 한 처녀가 삽을 메고 지나가는것이 눈에 띄웠다.

명철은 처녀에게 다가가 길잃은 사연을 이야기하고나서 삼촌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집을 물었다.

《아니 그럼… 영순언니의 집을 말인가요?》

처녀가 눈을 잔조롭히며 반문했다.

《그렇소.》

명철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 얼른 그의 물음을 긍정해주었다.

그런데 처녀는 새물새물 웃기만 하더니 무슨 일로 오는가고 또다시 물어보는것이였다.

이상한 생각이 머리속에 갈마들었으나 명철은 그 처녀에게 사실대로 이야기하지 않을수 없었다.

명철의 말을 끝까지 듣던 처녀는 《그래요?》하더니 까르르 웃음을 터치는것이였다.

어쩐지 경망스러워보이는 처녀의 행동에 명철은 아연해졌다. 명철의 얼굴색이 좋지 않음을 느꼈던지 처녀는 이내 웃음을 거두고 미안해하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농장청년동맹초급일군인 영순에게 많은 대상들이 찾아왔었다고 한다. 교원, 의사 등등…

하지만 영순은 왜 그런지 그들의 청을 모두 거절하였다는것이다.

리청년동맹비서까지도 영순의 대상자선정을 위해 나섰으나 결국 그도 두손을 들고말았다는것이였다. 그때부터 영순에게는 《눈높은 처녀》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게 되였다는것이다.

처녀는 그래서 자기도 혹시 영순을 만나러 온 대상자가 아닌가 하고 생각을 했었다는것이였다.

이번엔 반대로 명철이 허허 하며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수 없었다.

그 처녀의 도움으로 삼촌의 집에 도착한 명철은 반가와 어쩔줄 몰라하는 영순에게 그게 사실인가고 물으며 다시한번 웃음을 터뜨리지 않을수 없었던것이다.…

그때 영순은 시대와 혁명의 부름앞에 자기를 서슴없이 내세울수 있는 사람을 자기의 영원한 길동무로 택하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니 결국…

《영순아, 축하한다.》

명철은 두눈을 슴벅이며 영순을 축하해주었다.

《고마워요, 오빠.》

수집게 고개를 숙인 영순의 귀밑이 붉게 물들어있었다.

명철은 영순에게 무슨 말인가 해주고싶었으나 뜨거움이 울컥 솟구쳐올라 말을 이을수가 없었다.

이때 《다음렬차가 멎을 역은…》하는 렬차원의 챙챙한 목소리가 울렸다.

명철은 아쉽게도 영순이와 헤여져야 하였다.

이번에 멎는 역에서 명철은 내려야 했던것이다.

명철은 영순이와 함께 이제는 매부가 된 영예군인에게로 다가가 인사를 나눴다.

승강구까지 따라나온 영순은 손을 흔들며 바래주었다.

명철이도 렬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며 영순의 앞길을 진심으로 축복해주었다.…

그때로부터 9년이 흘렀다.

군인들의 군무일과를 집행하고 사무실로 들어서던 명철은 한통의 편지를 받게 되였다. 그것은 뜻밖에도 영순이가 보낸 편지였다.

반갑다기보다는 그후의 생활에 대해 알고싶어 명철은 서둘러 편지를 펼쳤다.

《…

오빠, 기뻐하세요.

아니 글쎄 선군혁명령도의 그 바쁘신 속에서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특류영예군인들과 가정을 이룬 저희 세 형제에 대한 보고를 받으시고 감사를 보내주시고 대를 두고 길이 전할 사랑의 선물을 안겨주시였어요. 그리고 막내동생 경숙에게는 사랑의 결혼식상까지 보내주셨어요.…》

구절구절 가슴뜨거운 사연들로 엮어진 편지를 읽어내려가던 명철은 뭉클 솟구치는 뜨거움에 눈시울이 젖어와 편지에서 눈길을 뗐다.

나라일이 그처럼 바쁘신 우리의 장군님께서 감사를 보내주시다니…

그러니 맏이 영순의 뒤를 이어 두 동생들도 특류영예군인과 가정을 이뤘단 말이지.

장하다. 내 동생들아.

명철은 다시 편지에 눈길을 돌렸다.

《…

오빠,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삶과 행복이 무엇이겠나요?

그것은 차례지는 행복을 누리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동지들을 위하여, 사회와 집단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것을 깡그리 바치는 긍지와 보람에 있는것이 아니겠나요?…》

명철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창밖에서는 봄날의 따뜻한 해빛을 받으며 연붉은 살구꽃들이 다투어 망울을 터뜨리고있었다.

동생들에 대한 생각이 명철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우리의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아끼고 사랑해주시는 특류영예군인들의 참된 길동무가 되여준 동생들을 비롯한 이 나라의 유명무명의 처녀들, 이들이야말로 온 나라의 사랑을 받아야 할 《눈높은 처녀》들이 아니겠는가.

명철은 마음속으로 자기의 동생들만이 아닌 이 나라의 《눈높은 처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 축복의 인사를 보냈다.

활짝 열어젖힌 창문으로 향긋한 살구꽃향기가 흘러들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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