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선생님의 모습에서
리 우 선
생활에서는 간혹 우연이라고 해야 할지 필연이라고 해야 할지 그런 일들이 있게 된다.
나에게서도 역시 이것은 례외가 아니였다.
해빛이 쨍쨍 내리비치는 한여름의 어느날 삼지연군안의 건설장들에 대한 취재를 위해 평양-혜산행렬차에서 내린 내가 이마의 땀을 연신 훔치며 취재지로 걸음을 옮기고있을 때였다.
《저… 미안하지만 말씀 좀 물어두 될가요?》하는 약간 주저하는듯 하면서도 나이 지숙해보이는 녀인의 목소리가 울렸다.
《저를 찾았습니까?》
무심결에 대답하며 뒤돌아보니 푸수하나 지성미가 다분히 느껴지는 50대의 녀인이 나를 찬찬히 바라보고있었다.
《저 혹시… 고향이 철원군이 아닙니까?》
믿음과 기대가 한껏 어린 녀인의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예? 아니, 그런데 어떻게 저의 고향을…》
너무도 뜻밖인지라 말끝을 얼버무리며 녀성을 찬찬히 바라보던 나는 흠칫했다.
놀랍게도 그 녀성은 중학시절 나의 담임선생님이였다.
《선생님…》
나는 너무도 반가운김에 말끝을 맺지 못했다.
선생님도 너무도 뜻밖인지라 차마 더 입을 열지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한지도 이제는 30여년세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지만 그 10년이 3번씩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처녀시절의 모색은 고운 눈매며 인상적인 볼우물에 아직도 남아있었다.
수십년만에 다시 만난 감격적인 상봉의 열띤 환희가 차츰 잦아들자 나는 선생님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가시던 길입니까?》
《학생들을 데리고 백두산답사를 왔던 길이예요. 겸해서 삼지연군안의 건설장들에 우리 학교의 교직원들이 마련한 지원물자를 가져다주고 오는 길이예요.》
《그렇습니까, 그 먼곳에서 지원물자까지…》
나는 선생님의 그 지성이 가슴에 마쳐와 눈굽이 젖어왔다.
《그저 마음뿐이예요. 지금 온 나라가 삼지연군을
나는 가슴속에 차오르는 흥분을 애써 누르며 선생님의 모습을 다시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모습을 바라보느라니 나의 학창시절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전형적인 왼손잡이였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고등중학교(당시) 2학년까지는 왼손으로 글을 썼다.
내가 인민학교(당시)에 다니던 시절 나의 부모님들은 나에게 오른손으로 글쓰는 법을 가르쳐주려고 적지 않게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저녁식사가 끝나면 나를 책상앞에 앉혀놓고 오른손으로 글쓰는 련습을 시켰다고 한다. 오래전 일이여서 나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그때는 내가 오른손으로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는것이였다. 하다못해 아버지가 과제를 주면서 오늘 밤 이것을 다 쓰지 못하면 밥을 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나는 굶으면 굶었지 오른손으로 글을 쓰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우리 부모님들은 나에게 《항복》하고말았다고 한다. 이제 크면 제절로 고치겠지 하면서 말이다. 하여 나는 결국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 2학년까지 왼손으로 글을 쓰게 되였다.
그런데 3학년에 올라오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나의 학급담임선생님이 하루수업이 끝나면 나를 교실에 혼자 앉혀놓고 오른손으로 글쓰는 련습을 시켰던것이다.
우리 나라 글을 처음 배우는 학생처럼 나의 손우에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학교교원들이 나에게 오른손으로 글쓰는 법을 배워줄데 대한 토의를 하였다는것이다.
며칠이 지나 이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내가 무엇이라고, 평범한 농장원의 자식인 내가 무엇이라고 학생들의 실력을 높이는 문제며 학교교육사업에서 나서는 크고작은 문제들이 토의되여야 할 교원들의 모임에서 론의된단 말인가.
나는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하여 선생님들앞에서, 동무들앞에서 머리를 들수 없었다.
이제부터라도 분발하자, 더는 수치와 부끄러움으로 머리를 못 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오른손으로 글쓰는 련습을 피나게 하자!
결심하고 달라붙으니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였다.
그때부터 나는 의식적으로 수업시간에 오른손으로 받아쓰며 글쓰기를 익혀나갔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군에서 어느 한 대학의 학생선발을 위한 예비시험을 치던 때의 일이였다.
군안의 중학교졸업반 학생들속에서 선발된 60여명의 학생들이 추천되여왔다.
시험을 치러온 학생들의 얼굴마다에는 누구라 할것없이
드디여 시험이 시작되였다. 나는 한과목 한과목의 시험을 책임적으로 치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다음날 아침 다 모인 대렬앞으로 해당부문의 한 일군이 나섰다.
《지금부터 합격된 동무들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마장고등중학교 김철남…》
한사람 또 한사람… 긴장한 시선들이 쏠린 가운데 해당부문 일군은 련이어 학생들의 이름을 불러나갔다. 자기 이름이 지명되여 안도의 숨을 내쉬는 동무가 있는가 하면 초조하게 자기 이름이 나오길 기다리는 동무들도 있었다.
《…이상 합격된 동무들의 이름을 불러드렸습니다. 이름을 부르지 않은 동무들은 자기 학교로 돌아가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백로산고등중학교의 리우선학생은 남으시오.》
순간 나는 어리둥절하였다. 우리 학교에서 5명의 동무들이 올라왔는데 그들은 모두 합격되고 나의 이름만이 없었던것이다. 학교에서 실력으로 놓고볼 때 그래도 제노라고 하던 나였던것이다.
모임이 끝나자 나는 그 일군을 다시 만났다.
《제가 백로산고등중학교의 리우선입니다.》
《아, 그렇소? 나를 따라오시오.》
푸수하게 보이는 그 일군은 나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무슨 문건인가 한동안이나 뒤적이던 그는 어느 한곳을 유심히 보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동문 시험을 괜찮게 쳤더구만. 시험성적을 등수로 보면 동문 1등이요.》
《그런데 어째서 합격된 동무들의 명단에 제 이름이 없습니까?》
나는 기쁨과 의혹이 한데 뒤섞인 눈길로 그 일군을 바라보며 다우쳐물었다.
한동안 웃음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일군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우리도 만나보자고 한거요. 그런데 오른손을 다치지는 않았소?》
순간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이내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저는 오른손을 다친적이 없습니다.》
《그렇소? 그런데 어째서 시험칠 땐 왼손으로 글을 썼소?》
나는 얼굴이 수수떡빛이 되였다.
시험을 칠 때 시간이 빠듯하여 나는 저도 모르게 왼손으로 시험을 쳤던것이다. 순간도 주저할수 없었다.
《저는 오른손으로도 글을 쓸수 있습니다.》
나는 확신에 넘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 그럼 어디 내가 부르는것을 한번 받아써보오.》
그 일군은 종이 한장과 원주필을 나의 앞에 내밀었다.
내가 그 일군이 불러주는 수자며 우리 글을 거침없이 받아쓰자 그는 《허, 쓰긴 괜찮게 쓰는구만. 그런데 왜서 시험을 칠 땐 왼손으로 글을 썼나?》하고 다시 물었다.
나는 뒤더수기를 긁으며 《저 그만 버릇이 돼서…》하고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후 나는 합격된 동무들과 함께 그 대학으로 시험을 치러 떠나게 되였다. …
그 시절을 돌이켜볼 때마다 선생님이 나에게 기울인 그 모든 사랑과 정성이 생각되면서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든다.
담임선생님은 나뿐이 아니라 우리 학급모두에게 할수 있는 모든것을 다하였다.
앓는 동무의 미진된 수업을 위해 수십리 밤길을 걷기도 하고 때로는 다과목선생님이 되여 수업이 끝나면 우리들의 학습지도도 해주셨다.
그속에서 나는 기자가 되고 또 허동무는 농업대학교원이 되고 홍동무는 조선인민군 련대장으로 성장하였다.
선생님의 다심한 손길과 보살피심속에서 우리는 조국의 부강번영을 위해 자기 몫을 단단히 할수 있는 일군들로 자라났다.
그렇다. 철없던 우리들을 조국앞에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아들딸들로 키우시느라 살뜰하고 친근하고 때로는 엄격하기도 한 선생님의 모습에서 나는 조국의 모습을 보았다.
이 나라 천만자식들의 다심한 어머니가 되고 엄격한 아버지가 되여 태여나면 세상 부러운것 있을세라 보살펴주고 배움의 나래를 활짝 펼치라 다심한 손길로 이끌어주는 조국의 품속에서 내가 자라고 그대가 자라고 온 나라 인민이 안겨 조국의 영예를 떨쳐가는 과학자로, 체육인으로 나라의 영웅으로 자라나는것이 아니랴.
그래서 이 나라의 천만아들딸들은 자기들을 키워준 그 품이 고마와 가요 《세상에 부럼없어라》를 목청껏 부르고 또 부르는것이 아닌가.
이런 선생님들을 키워 우리에게 보내준 고마운 어머니조국에 다시한번 감사의 큰절을 드린다.
조국의 크나큰 그 사랑, 그 믿음에 보답하고저 나는 선생님과 헤여져 취재지인 삼지연군건설장으로 힘찬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