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96(2007)년 제11호 잡지 《청년문학》에 실린 글
혁 명 전 설
《송화닭》이 이름나기까지
과일군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눈뿌리 아득하게 펼쳐진 과원이며 향기로운 갖가지 과일부터 먼저 생각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과일고장에서 《송화닭》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생겨났다는것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을것이다. 주체52(1963)년 6월 25일이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이날 전국국영농목장일군협의회를 지도하시였다. 협의회에서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가금부문 일군들에게 《송화닭》의 특성에 대하여 하나하나 가르쳐주시였다. 어버이수령님의 가르치심을 받은 그들은 모두가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송화닭》을 많이 기르는 과일군 가금목장 지배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 《송화닭》을 직접 길러온 사람들도 미처 모르는 문제에 대해서까지 어쩌면 그렇듯 환하게 아실수 있을가 하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러한 의문을 풀어주시려는듯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자신께서 저택에서 《송화닭》 다섯마리를 기르고있는데 몸무게도 많이 나가고 잘 자란다고 말씀하시였다. (아니, 어버이수령님께서 저택에서 닭까지 기르시며 시험해보시다니!) 지배인은 물론 일군들모두가 놀랐다. 그 《송화닭》으로 말하면 과일군 가금목장에서 중앙우량품평회에 올려보낸것이였다. 그때 우리 나라의 가금학자들은 다른 나라의 우량종닭들만 넘겨다보면서 그것들을 우리 나라에 풍토순화시키려고 연구사업을 진행하고있었다. 하지만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송화닭》의 우수성을 첫눈에 알아보시고 보다 구체적으로 관찰하시기 위하여 그것들을 몸소 저택에서 기르시며 시험하고계시였던것이다. 사실 그때로 말하면 어버이수령님께 절대안정과 휴식을 보장해드리고 일체 사업을 하실수 없도록 조치가 취해지던 시기였다. 그런데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우리 인민들에게 고기와 알을 먹이시기 위하여 불편하신 몸으로 닭까지 기르시며 온갖 심혈을 기울이고계시는것이였다. (아, 어버이수령님께서 우리 목장 《송화닭》을 몸소 시험하고계시다니…) 어버이수령님을 우러르는 과일군 가금목장 지배인의 눈가에는 뜨거운것이 고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가금일군들을 정겹게 바라보시며 《송화닭》이 병에 잘 걸리지 않고 설사할 때에는 설사약을 모이에 섞어주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시면서 전문일군들도 알지 못하던 관리방법까지 가르쳐주시였다. 이 땅에 있는것이라면 비록 그것이 자그마하고 보잘것없는것이라 할지라도 귀중히 여기시고 후손만대에 전하기 위하여 온갖 심혈을 다 기울이신 어버이수령님의 그날의 모습을 천년세월, 만년세월이 흐른들 우리 인민이 어찌 잊을수 있으랴. 이렇게 되여 서해기슭의 이름없던 《송화닭》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였으며 온 나라에 퍼지게 되였다. 더우기 놀라운것은 그후 어버이수령님께서 가르쳐주신대로 《송화닭》을 관리하였더니 몸무게가 더 불어나고 병에도 걸리지 않고 잘 자라게 된 사실이다. 한번 가리키시면 고목에도 꽃을 피우신다는 어버이수령님의 그 전설같은 손길이 이러한 꿈아닌 현실을 안아오신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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