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11(2022)년 제1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삶의 메아리

차영식

제 1 회

 

현혜영은 창가로 다가섰다. 온통 과일나무로 가득찬 연구소구내가 눈에 안겨들었다. 어디선가 포르릉 날아온 이름모를 고운 새 한마리가 연분홍빛꽃망울을 활짝 터친 살구나무아지에 살짝 내려앉더니 흉내도 못낼 아름다운 가락을 뽑아낸다.

(저 나무들을 심을적이 엊그제같은데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구나.)

혜영은 눈을 꼭 감고 그린듯이 서있었다.

아지랑이를 피워올리는 봄날의 따스한 해볕같은 즐거운 추억이 방싯이 고개를 쳐든다.…

젊은 연구사들이 쌍쌍이 혹은 삼삼오오 조를 뭇고 연구소구내의 넓은 공지에 과일나무모를 심고있었다.

혜영은 마수철과 한조가 되였다.

마수철의 삽날에 불이 일듯하더니 나무모를 옮겨심을 구뎅이 두개가 제꺽 만들어졌다. 수철은 바께쯔를 들고 씽-하니 어디론가 달려갔다. 물을 길러 가는 모양이라고 생각한 혜영은 그가 파놓은 구뎅이안에 나무모를 들여놓고 흙을 덮기 시작했다.

혜영이 나무모웃초리를 우로 잡아당기며 흙을 꽁꽁 다지는데 어느새 나타난 수철이 휘둥그래진 눈으로 혜영의 동그스름한 얼굴을 보았다.

수철은 들고온 바께쯔를 맥없이 내려놓았다. 그제서야 혜영은 부식토가 무둑히 담겨진 바께쯔에 시선이 갔다. 그는 호- 가는 숨을 내그었다.

《혜영동무, 미안하오. 우리 힘들어도 부식토를 깔고 다시 심기요.》

수철은 삽을 들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혜영은 무의식적으로 삽질을 따라했다.

방금전까지 살아있던 발랄한 생기가 사라져버린 혜영의 동그스름한 얼굴을 띄여보며 수철이 퉁명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뿔났소?》

《아니요.》

《그럼 왜 말이 없소?》

《대답을 꼭 들어야 시원해요?》

《됐소. 나무는 부식토를 주어야 필요한 영양분을 고루 섭취해서 뿌리를 든든히 내릴수 있소. 그래야 이담 커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알찬 열매를 맺을수 있지.》

혜영은 마치 먼산의 노을을 보듯 수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수철.》 이렇게 마음속으로 불러보는 혜영의 맑은 눈동자에 애틋한 추억의 물결이 일어번졌다.

어느 한 대학의 연구사로 있던 마수철이 혜영이네 연구소에 배치되여온것은 몇달전이였다.

《아직 총각이래.》

《누구 말이야?》

《누군 누구야, 저기 창문쪽에… 저 사람말이야.》

《오, 대학연구소에 있다가 왔다는…》

《헌데 마른나무같이 너무 말랐구나. 겉볼안이니… 알만해.》

회의실의 뒤좌석에 앉은 처녀들속에서 마수철을 두고 저희들끼리 속살거리는 말이 혜영의 귀가에도 거침없이 흘러들었다.

사색짙은 얼굴, 침착하면서 조용한 말투…

항상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 사람이였다. 문득 그에 대해 제나름의 억측을 내려보는 자신을 발견한 혜영은 어이없는 웃음을 짓고말았다.

그러던 어느날 늦은 저녁이였다.

집에 들어서던 혜영은 웃방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책상을 마주한 아버지의 뒤모습을 보았다.

《아버지, 웬일이세요?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군요.》

혜영은 아버지에게로 다가섰다.

어느 한 공장에서 당일군으로 사업하고있는 아버지였다.

《일찍 들어왔어도 할 일이 많구나.》

아버지는 기다렸다는듯이 머리를 돌리였다.

《게 좀 앉아라. 내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아버지는 새삼스럽게 딸의 거동을 눈주어 살피였다.

곱게 빗어넘긴 함함한 머리채, 시원한감을 주는 넓은 이마와 영채도는 눈, 두무릎을 모두어앉는 단정한 몸가짐새, 탐구의 낮과 밤을 보낸 고뇌의 흔적은 있으되 지성미가 엿보이는 의젓한 딸의 모습이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연구소에 배치된것이 엊그제같은데 벌써 옹근 세해가 흘렀고 그사이 과학자, 기술자들의 건강보호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연구종자를 찾아쥐고 고심분투해오는 딸이라는 생각은 아버지의 가슴속에 딸에 대한 대견한 마음을 굳건히 자리잡게 하였다.

집안의 안온한 정서보다 과학연구성과로 약동하는 시대와 숨결을 같이하려는 연구사로서의 순결한 지향을 소중히 간직한 딸이여서 그의 연구사업에 늘쌍 관심을 돌려오는 아버지였다. 여느때와는 달리 자못 진중해보이는 아버지의 거동앞에서 혜영은 숨을 죽이고있었다.

마침내 아버지의 다정한 음성이 들려왔다.

《사람은 누구나 제나름으로 인생길을 간다고 할수 있다. 그러한 인생길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사람은 큼직큼직한 자욱을 내며 가고 또 어떤 사람은 큰 자욱은 없어도 빈틈이 없이 가기도 하지.》

혜영은 뜻밖의 이야기에 영문을 몰라 아버지의 얼굴만 지켜보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아버지의 인생철학은 계속되였다.

《내 너에게 좋은 사람을 하나 붙여줄 생각이다. 아직 큼직한 자욱은 남기지 못했지만 성실하고 빈틈이 없는 사람이다. 혹시 알겠는지.… 대학연구소에 있다가 얼마전에 너희네 연구소로 간 사람이다.》

혜영의 두눈이 대번에 휘둥그래졌다.

그럼 마수철?!

《왜, 아는 사람이냐?》

《아니예요.》

《우리 공장을 많이 도와준 사람이다. 사람이 성실하고 열정적이고 재능도 엿보이더라. 알고보니 수감부재료연구가 전문이더구나. 네가 개발하자고 하는 인체내유해물질측정체계도 실은 그 수감부재료개발에 크게 달린게 아니겠느냐.

과학자들의 건강보호문제를 해결하는것은 위대한 수령님들의 간곡한 유훈이라고 하면서 끝까지 해볼 결심이더라. 그 청년의 확고한 지향과 의지에 난 머리를 숙였다.》

그런 청년이라면!

혜영은 이 일이 있은 다음날부터 저도모르게 마수철이라는 청년을 주시해보게 되였다.

연구소처녀들속에서 들려오는 말은 더욱더 혜영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참 별난 사람이야. 조용하게 불이 일어 나중에는 황황 불타는… 말하자면 열정의 인간이야.》

《그게 얼마나 좋니? 난 그런 사람과 실컷 일해왔으면 좋겠다 얘.》

《헌데 너무 마른나무같지 않니? 그런 나무에도 즙이 있을가?》

《마른나무니까 불이 잘 달리겠지뭐. 그런 형은 일단 무슨 일이든 시작하면 불길처럼 타오르거던.》

《그럴가?》

그러나 마수철에 대한 혜영의 관심은 단순히 처녀일반이 가지는 그런 호기심과는 좀 다른것이였다.

혜영이 연구하는 인체내유해물질측정체계의 핵심인 수감부를 바로 그가 연구하고있었다.

그런것으로 하여 마수철은 혜영이와 어차피 얼굴을 맞대고 토론도 하면서 걸린 문제들을 같이 풀어야 할 동업자였다. 보다 중요하게는 아버지가 소개한 청년이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저녁 아버지는 당자인 혜영에게는 아무러한 말도 없이 불쑥 그를 데리고 집에 나타났다.

량주간에는 사전토의가 있었던듯 그를 맞이하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함박꽃같은 웃음이 피여나 좀처럼 사라질줄 몰랐다.

《연구사업이야 네 하고싶어하는 일이니 머리가 파뿌리될 때까지 실컷 하려무나. 하지만 한생 처녀로 살겠니? 꽃망울이 필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는 법이다. 아수해할것도 없구 쑥스러워할것도 없다.》

어머니는 혜영의 등을 떠밀었다. 역시 딸자식을 줄줄이 키우고있는 어머니다운 생활철학이였다. 어머니에게 떠밀려들어온 혜영이에게 마수철은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혜영동무의 기둥이 되겠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반대가 없다면 손을 맞잡고 우리 생활을 꾸려봅시다.》

조용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그는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렇게 혜영은 마수철과 일생을 언약하게 되였다.…

드디여 나무를 다 심고난 수철은 혜영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무를 심는거나 연구사업을 하는거나 생활의 리치는 마찬가지라고 볼수 있소. 어떤 사람들은 짧은 기간에 빛을 볼수 있는 그러한 연구종자만을 골라잡으려 하는데 연구사로서 그런 줄타기인생은 경계해야 한다고 보오. 왜냐면 그런 인생은 결코 크고 주렁진 열매를 딸수 없기때문이요.》

혜영은 나무모에 북을 주며 그의 말을 새삼스럽게 음미해보았다.

과학탐구의 길에 어찌 순탄한 길만 있으랴. 누구도 걸어보지 못한 숫눈길도 있고 위험을 동반하는 모험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길도 있는것이다.…

출입문이 열리는 소리에 혜영은 깊은 상념에서 깨여나 문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대학동창생이며 딱친구인 림하영이였다.

《래일 학술발표회가 있다지?》

고심어린 연구끝에 개발완성한 우리식의 인체내유해물질측정체계에 대한 최종연구결과를 혜영이 발표하게 된다는것을 림하영이 알고 물어보는 말이였다.

《응.》 혜영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어리였다.

《살구꽃이 정말 곱게 폈구나. 넌 또 수영이 아버질 생각하댔구나.》

두 녀인은 창가에 서서 과일나무꽃이 만발한 연구소구내를 점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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