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청년문학》 주체112(2023)년 제1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정성
김류정
제 3 회
사람들은 흔히 외과의사라고 하면 남자의 모습을 떠올린다.
날카로운 눈빛이 안경속에서 번쩍거리고 굳센 턱이 네모난데다 손끝이 예민한 사나이의 모습을 외과의사의 전형이라고 생각하는것이다.
틀린것은 아니다.
내가 여태 만나본 외과의사들은 말할것도 없고 대학에서 외과학을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기타 다른 과목을 배워주는 교원들보다 더 사내싸고 조금 거칠어보일 정도로 호방했으며 그러면서도 예민한 눈빛의 소유자들이였다. 허나 나는 녀자였다. 스물일곱살의 처녀였다.
처녀로는 나이찬 축이라고 볼지 모르지만 의학계에서는 더우기 외과에서는 이제 젖먹이나 다름없는 풋내기인것이다. 내가 외과를 전공하게 된데는 깊은 사연이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군관이였다.
지금으로부터 16년전 아버지는 어느한 섬방어대에서 군사임무수행중 뜻밖에도 골반뼈를 심히 상하게 되였다. 급히 섬에서 후송되여 가까운 군인민병원(당시)에 갔지만 치료는 불가능했다.
당시 고난의 행군, 강행군을 이겨낸지 얼마되지 않아 전국적인 먼거리의료봉사체계도 세워져있지 않았고 의약품과 기재를 비롯해서 치료사업의 이모저모에서 몹시 어려울 때였다.
아버지는 군인민병원에서 다시 도인민병원(당시)으로 후송되였다. 그때 지금의 권철웅과장선생님이 아버지를 담당했었다. 당시 과장선생님은 갓마흔에 들어선 젊고 쟁쟁한 의사였다.
아버지를 놓고 여러 차례 벌어진 협의회에서는 골반에 침습한 염증으로 하여 골수가 상처를 입었으므로 다리를 자르자는 방향으로 토의가 되였었다.
섬에서의 후송과 군에서 도로 올라오는 사이에 시간도 많이 경과되였고 상태가 악화되여 부득불 군관의 다리를 절단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다고 의사들은 인정했다. 허나 담당의사인 권철웅선생님만은 그 결정을 끝까지 반대했다고 한다.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간호를 위해 도에 올라왔던 나는(그때 우리는 섬에서 살았었다.) 복도에 서서 의사협의회에서 권철웅선생님이 토로하는 열변을 듣게 되였었다.
때는 무더운 여름이라 협의회가 진행되던 의사실의 문이 조금 열려있어 복도에 있는 긴나무걸상에 앉아서도 안에서 오가는 말을 낱낱이 들을수가 있었던것이였다.
《환자는 대대기술참모입니다. 아마 건강만하다면 련대급, 사단급의 지휘일군이 될수도 있을겁니다. 앞길이 구만리인 사람의 다리를 우리가 자르면… 생명은 연장되겠지만 군복을 입은 그의 앞길은 끝장나게 될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다리와 함께 인생의 모든 희망도 뭉청 잘리울거란 말입니다.》
《선생, 선생은 의사년한 15년동안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환자를 맡기가 이번이 처음이요?》
그것은 당시 병원 기술부원장의 목소리였다.
척 보기엔 인심좋은 할아버지같던 기술부원장이 그토록 차가운 쇠소리를 낼줄은 정말 몰랐었다.
《군인의 다리를 잘라보기는 처음입니다.》
《그거야 우리가 사회병원이니까. 언제 군대환자들과 접촉할수 없어서 그런것이지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지금 내 아들도 군관이요. 물론 군의일군이긴 하지만 어쨌든 군복을 입고있단 말이요. 그러니 이런 결정을 하는 내 심정도 편안치 않다는걸 알겠지?》
《여기에 마음이 편안한 사람이야 없겠지요.》
어린 나이에도 권철웅선생님의 대꾸는 조금 퉁명스럽게 생각되였었다.
그때 나는 12살이였다.
남자는 12살이면 아직 철부지일수도 있겠지만 녀자는 그 나이에 이르면 일명 《세상물정》에 환하다고 할수 있다. 육체적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녀자는 남자보다 성장이 빠르기때문일것이다.
《그리고 지금 병원에는 군관의 안해와 딸이 와있습니다. 이제 수술장에서 다리가 없는 아버지가 나오는것을 본다고 합시다. 그때 그 어린 딸의 마음에 어떤 상처가 생기겠습니까. 그 아이의 눈을 마주본 사람이 여기 있습니까? 순결무구한 그 눈빛을 똑바로 쳐다본 사람이 있다면 한번 말해보십시오. 아버지의 다리를 잘라내고도 그 아이의 눈을 마주볼수 있겠는가 하는것을 말입니다.》
《여보시오, 철웅선생! 우리는 의사가 아니요. 의사란 모두 과학자이며 연구사란 말이요. 감정이 중요한줄 몰라서 이러는건 아니지만 인간생명을 놓고 감정에 빠져있으면 의사로서의 책임은 어떻게 한다는거요?》
《기술부원장선생님, 만약 랭철한 리성만이 의사의 책임감을 불러일으켜준다면 의사란 피도 열도 없는 수술칼이나 다를바없다고 생각합니다.》
단호한 목소리였다.
나의 눈빛에 대해 말할 때부터 나는 울고 있었다. 정말이지 나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하는 말같았기때문이였다.
《제발 우리 아버지의 다리를 자르지 말아주세요.》하는 애원으로 가슴을 끓이고있던 나였다. 그런데 권철웅선생님은 나의 그 심정을 대변하여 토로하는것이였다.
《나는 어떻게 하나 환자를 일으켜세우겠습니다. 책임은 전적으로 제가 지겠습니다.》
《나도 담당의사선생의 주장에 동의합니다. 우리 과의 모든 의사들이 철웅선생을 도울것입니다.》
내가 할아버지선생님이라고 부르던 나이지숙한 과장선생님의 목소리였다. 그때 나의 마음속에 무엇인가 밝고 따뜻한것이 움터나는것을 느끼였었다. 비록 아직은 작고 여리지만 그것은 어둠을 몰아내고 시원한 숨을 내쉴수 있게 하는 생명의 활력소같은것이였다.
며칠후 아버지에 대한 수술이 진행되였다.
근 6시간에 걸친 수술이였다. 어머니와 나는 무덥고 습한 병원의 복도에서 안절부절하며 6주일맞잡이인 그 6시간을 흘려보냈었다.
드디여 수술이 끝나고 문이 열렸다.
놀라운것은 아버지의 수술집도를 기술부원장선생님이 했다는 사실이였다.
수술장갑을 낀채 수술장에서 걸어나오던 기술부원장선생님의 피로하던 그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것은 아버지와 함께 담당의사선생님도 밀차에 실리여나오는것이였다.
어머니는 담당의사선생님이 의식을 잃은것을 보자 너무 놀라 《앗!》 소리까지 쳤었다. 그때 기술부원장선생님이 다가와 어머니를 안심시켰다.
《놀라지 마시오. 아주머니의 남편은 저 사람이 일으켜세웠습니다. 자기의 골수를 바쳐 애아버지의 다리를 살려냈지요.》 그리고는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나는 어린 나이인지라 골수를 바쳤다는 말이 어떤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지 알수는 없었지만 담당의사선생님이 아버지를 위해 무엇인가를 희생했다는것은 어렴풋이나마 느낄수 있었다.
그후 아버지는 한달이 지나서 퇴원하였다.
담가에 누워 병원에 들어온 아버지가 자기발로 땅을 박차며 병원문을 나섰다. 하지만 담당의사선생님은 그때까지 침대에 누워있었다.
아버지보다 나이가 많아 회복이 늦어졌다고 한다. 아버지가 퇴원을 하던 날 고마움에 눈물짓던 어머니의 모습을 나는 지금도 방불히 기억한다. 거듭하여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는 어머니와 군인들의 감사에 담당의사선생님은 고개를 저으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애의 눈에 기쁨이 어린것을 보니 난 정말 기쁨니다.》
오로지 그 한마디만을 하는 담당의사선생님의 모습은 오래도록 나의 랑만속에 머물러있었다.
다리를 잃을번한 아버지가 성성한 두다리로 병원문을 나서서 나를 얼싸안아 추켜올렸을 때 나는 하얀 위생복을 입은 의사들을 경건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죽은 사람도 살려내는 거룩한 요술쟁이들 같았다.
그때 벌써 나는
아버지는 늘 《네가 커서 의사가 되면 담당의사선생님처럼 되거라. 사람이 사람을 살리는 일만큼 아름답고 숭고한 일은 없다.》 하고 말하군 하셨다.
어쨌든 손풍금까지 내버리고 의학의 길에 들어선데는 나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것만은 사실인것이다. 그래서 나는 소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는 꿈을 의사로 정하고 학업에 분투했다. 고마운 사회주의제도는 어린 소녀의 꿈을 조금도 유감없이 현실로 꽃피워주었다.
평양의학대학에 입학하던 날 아버지는 또다시 자기에게 골수를 바친 담당의사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앞으로 반드시 그런 의사가 되라고 당부하셨다.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지면서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때이면 수술을 받았던 오른쪽다리를 조금씩 절군 하였다. 아마 수술부위에 이상이 생기는 모양이였다.
나는 대학 박사원을 졸업하고 도종합병원에 배치를 받았다. 우리 집은 군에 있어 나는 병원합숙에서 생활하군 한다.
놀라운것은 과에 배치를 받고보니 그전날의 아버지의 담당의사선생님이 과장이 된것이였고 그 역시 흐린 날이나 비가 오는 때이면 오른쪽다리를 조금씩 절군 하는것이였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고마움과 함께 죄스러움이 겹쳐들군 했다.
어떻게 하나 나의 연구론문을 완성하여 아버지도 그리고 가정의 은인인 권철웅과장선생님도 인생의 황혼길을 정보로 걷게 하리라 결심을 벼르었었다.
그래서 짬만 있으면 병원의 전자도서실로 달려가 골수염과 골절상치료의 약물리용에 관한 세계적인 자료들도 열람하고 직접 번역도 해보면서 론문을 완성해나갔다.
이제는 림상실험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