ᆷ단편소설ᆷ
결 심
최 영 호
1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면 하늘도 아는것 같다. 어제 밤까지만 해도 무더기비가 억수로 쏟아지더니 아침에는 희한하게도 목화송이같은 흰구름이 몽실몽실 피여났다. 나는 기분이 고무풍선처럼 붕 떠올랐다. 솔직히 말해서 오늘날씨를 놓고 밥상끝에 굴러가는 닭알을 바라보듯이 얼마나 가슴을 조여왔는지 모른다. 품들여 계획한 일요일의 가족들놀이가 심술궂은 장마비때문에 물거품으로 돌아갈가봐 말이다. 그렇지 않아도 겨우 아버지의 승낙을 받아낸 들놀이인데 문밖에 나서보지도 못하고 그만두고만다면 얼마나 싱겁고 맹랑한노릇인가. 그런데?… 그런데 이제는 그런 걱정거리가 씻은듯이 활 날아나버리고말았다. 보라! 하늘이 얼마나 맑고 푸른가. 마치 내 마음속을 빤히 들여다보기라도 한것처럼! 나는 흥그러운 마음으로 오늘 펼치게 될 작전을 또다시 그려보았다. (아침 일찍 도에 올라가서 고모랑 외삼촌이랑 반갑게 만나고 그다음에는 정방산에 올라 가족들놀이를 하고, 또 그다음에는 시내를 한바퀴 빙 돌면서 사진이랑 찍고, 맨 나중에는 도예술극장에서 명배우들의 공연까지 보고…) 그야말로 빈틈없는 작전계획이였다. 딱소리나게 장담하건대 학급애들이 이 작전내막을 알게 된다면 모두가 입을 하 벌리고 눈들만 반짝거릴것이다. 놀라움과 부러움을 듬뿍이들 담아서 말이다. 하하… 나는 아래방에 계시는 어머니를 소리쳐 불렀다. 《어머니, 빨리 준비하세요. 이제 아버지가 곧 오실텐데.…》 《준비? 무슨 준비 말이냐?… 오, 들놀이준비?! 인혁아, 내 몇번을 말했니, 아버지는 바쁘시다구! 그런데도 넌 자꾸 그런 엉뚱한 생각만해내니…》 나는 눈이 둥그래졌다. 쉬는 날 가족들놀이를 나가자는것이 엉뚱한 생각이라니? 얼마나 멋진 생각이게. 며칠전 아버지도 나의 계획을 들으면서 《거참 아주 좋은 문화정서생활이로구나.》하시지 않았는가. 글쎄 쉽게 승낙은 하지 않으셨지만… 그래 어머니는 아버지가 늘쌍 일에만 파묻혀 지내시는게 마음에 걸리지도 않는단 말인가. 또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는 아들의 심정이 엉뚱하게 안겨오고… 《어머니, 우리 아버진 군에서 제일 쎈 간부인데 그렇게도 시간을 내기가 힘드나요?》 《인혁아, 아버진 군에서 제일 쎈 간부가 아니라 제일 많은 일을 해야 할 일군이란다. 말하자면 군내 모든 사람들의 심부름군이지!》 나는 어머니의 말이 아리숭했다. 아버지가 심부름군이라니? 남이 시키는대로 하고 남이 좋다는대로 움직이는 그런 심부름군?… 전화종소리가 《따르릉-》 귀따갑게 울려왔다. (야, 아버지로구나.) 나는 콩튀듯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보나마나 승용차를 가지고 곧 갈터이니 아빠트현관앞에 나와있으라는 전화일것이다. 《아버지나요?》 나는 송수화기를 들기 바쁘게 소리쳤다. 《이크, 귀청 떨어지겠군!》 아버지의 석쉼한 목소리가 진동판을 울렸다. 《그만큼 일렀는데 아직도 전화받는 본새가 그 모양이냐. 먼저 자기소개부터 해야 한다고 내 몇번이나 말했니. 뭐 그러구두 중학교 1학년생, 소년단열성자, 넌 자격이 없다.》 《…》 나는 말문이 꼭 막혔다. 그러지 않아도 학급애들과 전화를 할 때마다 《례절》없이 말하군하여 아버지로부터 종종 나무람을 듣군 하는 나였던것이다. 《아버지, 잘못했어요. 그런데 언제 오실래요? 지금 눈이 새까매서 기다리고있는데…》 《인혁아, 아버진 오늘 시간을 낼것 같지 못하구나. 후날 보자.… 그래 어머니는 계시니?》 《예…》 나는 더 말을 붙여볼념도 못하고 송수화기를 어머니에게 넘겨주었다. 온몸이 삽시에 물먹은 솜처럼 나른해오면서 그 자리에 폴싹 주저앉고싶어졌다. 전화를 마친 어머니가 곁으로 다가왔다. 《인혁아, 아버진 오늘 집에 들어올것 같지 못하시다누나.》 《무슨 일이 생겼나요?》 나는 의아한 기색으로 어머니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어제 밤 내린 무더기비에 덕수골 양어장이 큰 피해를 입었다는구나. 뚝이 여러군데 패이고 종어장의 물이 최고수위를 넘어서 당장 알을 쓸게 된 엄지고기들이 떠내려가게 되였다질 않니. 그래서 아버지가 거기 가보셔야 한다는구나.》 듣고보니 급한 일은 급한 일이였다. 하지만 군인민위원장이 꼭 가보아야 될 일은 아닌것 같았다. 아버지밑에도 숱한 사람들이 있지 않는가. 양어사업소 지배인아저씨를 비롯해서 그런 일을 전문으로 맡아보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닐텐데 왜 꼭 아버지가 가보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아버지가 야속했다. 이럴줄 알았더라면 당초에 예견했던 산놀이에나 갔을걸 하는 후회가 굴뚝처럼 치솟았다. 중학교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되는, 더구나 학급반장으로 선출되여 처음으로 조직했던 학급애들의 산놀이마저도 후날로 미루면서 오늘의 가족들놀이에 왼심을 써왔는데 이제는 영낙없는 깨진 닭알이 되고말았다. 깨진 닭알… 흥, 닭알이라는 소리는 그래도 듣기에나 좋다. 물거품이라고 해야 딱 맞을것이다. 물거품! 세상에 이처럼 슴슴하고 뼈 없는 말마디가 또 어데 있겠는가. 나는 저도 모르게 《호》하고 한숨을 내쉬였다. 《인혁아, 아버지를 섭섭히 생각말아. 너도 잘 알지 않니. 아버지가 덕수골 양어장때문에 얼마나 마음을 써오셨는지.…》 물론 잘 안다. 지금껏 관심을 두지 않아 다 꺼내먹은 빈 과자봉지처럼 버림받아오던것을 아버지가 새로 와서 여러개의 고기못도 다시 파고 숱한 새끼고기들도 가져다 넣었다는것을, 멀지 않아 팔뚝같은 물고기들이 밥상에 오르게 된다는것을 나는 알고도 남는다. 그러나 물거품이 되여버린 오늘작전을 생각하면 속마음은 여전히 풀떡풀떡 풀무질을 해댄다. (에이참, 아버진 너무해. 내 마음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그저 일밖엔 몰라.…)
2
교실안은 마치도 쑤셔놓은 벌둥지같았다. 뚝닥뚝닥 요란스레 망치질소리를 내는것은 책상수리를 맡은 남자애들이고 물걸레를 들고 교탁이며 창문턱에 오구작작 모여붙어 재잘거리고있는것은 녀자애들이다. 학급의 익살군인 철학이의 표현을 그대로 옮겨놓는다면 교실대청소에 참가한 학급반장소속 남자애들과 분단위원장소속 녀자애들이다. 모두가 자기 맡은 일들에 여념이 없는데 벌써부터 일자리가 푹푹 났다. 회칠을 맡은 애들은 어느새 일을 다 끝내고 목공실에 가서 바닥청소용톱밥까지 날라온다. 이 속도로 나간다면 학부형회의가 열리게 되는 저녁 6시까지는 모든 일을 깨끗이 마무리할수 있을것 같았다. 그러고보면 모든 일은 책임자가 어떻게 조직하고 내미는가에 따라간다는 아버지의 말이 백번도 더 맞는 소리이다. 다른것은 말고서라도 선생님의 지시를 받고 오늘 작업조직을 할 때만 보아도 그렇다. 경식이가 책상수리만은 학교 목수할아버지에게 부탁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의견을 냈을 때 나는 단호하게 밀막아버렸다. ... 학부형회의를 하는 오늘같은 날 목수할아버지가 할 일이 오죽이나 많겠는가. 그럴것없이 우리 남학생들이 하자. 우리야 이젠 당당한 중학생이 아닌가! 이렇게 주장을 세우고 내밀었더니 벌써 적지 않은 걸상들이 수리를 끝내고 한쪽켠에 쌓아졌다. 나는 흐믓한 마음으로 교실안을 빙 둘러보았다. 그러던 나의 눈길이 분단위원장인 수영이에게 가서 멎었다. 글쎄 키도 자그마한게 맨 꼭대기 창유리를 맡아가지고 땀을 뽀질뽀질 흘리고있지 않는가. (애두 참, 제가 난딱 나서서 저럴건 뭐람?) 속이 좋지 않았다. 작업분담을 할 때 녀자애들의 조직사업만 하라고 슬며시 귀띔을 주었는데도 듣지 않더니 저게 무슨 창피람, 분단위원장이라는게 제 설 자리도 모르고... 나는 학급에서 제일 키가 큰 정민이를 찾았다. 《정민아, 너 수영이가 하는 일을 좀 도와줘라!》 《뭐? 그럼 이 책상수리는 어떻게 하고?》 정민이는 선뜻 응하려 하지 않았다. 《음 그건 천천히 해도 돼. 몇개 안남았으니까. 나머지는 다른 애에게 맡기겠다.》 《내가 하던거야 내가 마저 해야지 또 다른 애에게 맡길게 있니?》 《뭐, 뭐라구?》 나는 그의 대꾸가 맑은 날 천둥소리만큼이나 놀랍게 여겨져 두눈이 올롱해졌다. 이럴수 있는가. 다른 여느 애라면 몰라도 정민이 이 애야 내 말이라면 흰쌀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곧이듣던 그런 애가 아니였던가. 그런데 이 학급반장의 말에 뿔을 세우다니? 그것도 숱한 학급애들앞에서... 《인혁아, 거 뭐 한참 일하는 정민이보고 그럴게 있니? 네가 좀 도와주면 될걸 가지구.》 돌아보니 경식이였다.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넌 참견말아.》 《?...》 경식이는 뜻밖의 큰소리에 두눈만 디그르르 굴렸다. 그러는 그를 보느라니 인츰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사실 경식이 이 애는 큰소리를 좀 들어봐야 한다. 세상에 자기 아버지이상 없는것처럼 뽐을 내군 하는데 기분 나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어제 아침일만 봐도 그렇다. 교실에 들어와 책가방을 펼쳐놓기도 전에 자랑보따리를 먼저 풀어놓았는데 그 자랑이란게 또 판에 박은 소리였다. 전날 저녁에 자기 아버지가 멋있는 책상을 사왔다느니, 중학생이 된 자기에게 주는 기념품이라느니 뭐 이러며 자기 아버지자랑을 곡상으로 피여올리는데 글쎄 학급애들앞에서 그런 자랑은 무엇때문에 지루하게 늘어놓는단 말인가. 내 원참, 아버지가 가구공장지배인이면 학교에 새 책상이나 만들어 달랠것이지 자기 집 책상자랑은 무슨... 《인혁동무, 그렇게 서있지만 말고 날 좀 도와줘.》 난데없이 수영이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귀전에 날아왔다. 《뭘 말이야?》 나는 맞갑지 않게 되물었다. 《여기 와서 맑은 물에 이 걸레를 좀 빨아줘.》 《뭐, 뭐라구?...》 나는 아연해졌다. 정민이도 그래 경식이도 그래 오늘은 학급의 모든 애들이 나에게 약을 올리자고 약속이라도 한듯 했다. 그렇지 않다면야 저 얌전한 수영이가 저런 청까지 들이대겠는가, 뭐 물걸레를 빨아달라고? 누구보고? 이 학급반장을 보고?... 나는 수영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물걸레를 빨아주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걸로 닦는 사람이 따로 있니? 이건 뭐 공주님 한가지로구나.》 《인혁동무, 난 공주가 돼서 그런게 아니라 인혁동무를 생각해서 그래.》 《뭘? 날 생각해서?...》 《그렇게 한자리에 꼼짝 않고 서있자니 얼마나 다리랑 아프고 갑갑하겠니? 옆에서 보기가 다 따분하다야.》 《...》 나는 수영이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남들이 다 일하는데 뒤짐을 지고 서있기만 하면 되겠느냐는 힐난이였다. 나는 속이 불끈해졌다. 누군 뭐 망두석처럼 서있고싶어서 서있는다던가. 학급반장이니까 할수 없이 서있는거지. 그래 내가 아니면 그시그시 달라지는 일감을 누가 일일이 분담해주며 혹 잘못된 일이 나타나기라도 한다면 누가 책임적으로 바로잡아준단 말인가. 나는 속이 울컥했으나 꾹 참았다. 숱한 학급애들앞에서 학급반장과 분단위원장이 서로 얼굴을 붉히며 열을 올릴수는 없는 일이였다. 더구나 나야 사내이고 수영이야 녀자애가 아닌가. 나는 수영이가 올라섰던 자리에 서서 쉴새없이 힘차게 창유리를 닦아댔다. 누가 말했던가, 성난 말의 투레질이 더 기운차다고.
3
생일이란 누구에게나 즐거운 법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친한 동무들도 찾아오고 맛있는 음식이 아무리 그득하다 해도 아버지, 어머니가 없는데야 어떻게 즐겁단 말인가. 나는 아버지를 리해할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나가실 때까지만 해도 뭐라고 말씀하셨던가. 아무리 바빠도 오후에는 시간을 내보겠다고, 병원에 입원한 어머니를 대신해서 음식준비도 잘하고 또 재미난 이야기랑 기딱막힌 기타독주랑 들려주고 멋진 생일사진도 찍어주겠으니 공부가 끝나면 친한 동무들을 다 데리고 오라고 곱씹어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밥상우에 놓인 쪽지편지를 다시 집어들었다. 《인혁아, 급한 일이 생겨 가보아야겠다. 오늘 밤에 센 비바람과 무더기비가 몰려온다니 방안창문과 베란다나들문건사를 잘하거라. 그럼 동무들과 음식이랑 들면서 즐겁게 놀도록 해라.》 들여다볼수록 몰방으로 한숨이 터져나오는 아버지의 편지였다.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경식이랑 학급애들앞에서 아버지자랑을 사탕물처럼 발라가며 정식 초청까지 해놨는데 이제 와서 그 애들한테 뭐라고 변명한단 말인가. (에이참, 할수 없지.) 나는 웃방으로 달려올라가 벽장안에 걸어놓은 사진기를 벗겨들었다. 동무애들이 들이닥치면 곧장 거리로 데리고 나가 사진부터 찍고 볼판이다. 그러느라면 아버지도 돌아오실수 있으니 급한 고비는 넘기는것으로 된다. 《딸랑-딸랑》 부름종소리가 울렸다. 나들문을 여니 경식이가 벙글거리며 서있었다. 《인혁아, 생일을 축하해!》 경식이는 등뒤에서 큼직한 꽃묶음을 잽싸게 꺼내든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듯 갑자기 《축하해!》하는 여럿의 목소리가 울리며 낯익은 모습들이 문가에 나타난다. 학급애들이였다. 《고마와! 어서 들어... 아, 아니 잠간 기다려.》 나는 부리나케 신발을 찾아들었다. 그리고는 애들을 향해 빙긋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얘들아, 우리 사진부터 찍는게 어때?》 《사진?... 오, 생일기념사진?! 좋아. 오늘이야 인혁이 네 날인데 우린 그저 네가 하자는대로 하겠어!》 철학이의 말에 저저마다 고개들을 끄덕거렸다. (그러면 그렇겠지!) 나는 애들을 뒤에 달고 거리에 나섰다. 밖은 무덥기 그지없었다. 바람 한점 없는데다가 어찌나 찌물쿠는지 마치도 화끈 달아오른 무쇠가마앞에 선듯 한 심정이였다. 《이거 굉장히 물쿠는데... 당장 한소나기 퍼부을것 같구나.》 경식이가 찌뿌둥한 하늘을 바라보며 누구에게라없이 던진 말이였다. 《애두 참, 일기예보를 못들었니? 오늘 밤부터 굉장히 많은 무더기비가 내린다는걸!》 철학이의 퉁명스러운 말에 경식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래?... 그럼 거 전번 무더기비때처럼 또 양어장이 피해를 입는게 아니야?》 《얜 방정맞게스리... 아 그거야 방송에서도 말한것처럼 수십년래에 처음 들이닥친 자연재해에 의한 피해인거구 이번에야... 이번엔 어림두 없어. 아, 인혁이 아버지랑 숱한 사람들이 떨쳐나서 뚝도 더 든든히 쌓고 빈틈없는 대책을 세웠는데 뭐! 그렇지, 인혁아?》 《아, 그럼! 그렇지 않구!》 나는 확신성있게 찍어 말하며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우리 사촌누나가 그러는데 그때 인혁이 아버지만 아니였다면 양어장이 어떻게 되였을지 누구도 몰랐다는거야. 모두 손맥을 놓고 앉아있는데 인혁이 아버지가 맨 선참으로 흙가마니를 메고 나섰다질 않니.》 《그래?!》 감동어린 눈길들이 나에게로 모아졌다. 나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무렴 덕수골양어장에서 관리원으로 일하는 철학이 사촌누나의 말을 어느 누가 부인한단 말인가. 《됐어됐어, 우리 사진이나 찍자. 참, 맨먼저 아동공원에 가서 찍는게 어때?》 나는 짐짓 태연한 기색으로 학급애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찬성이였다. 우리는 읍거리 중심부에 자리잡은 아동공원으로 향했다. 명절날이나 휴식일이면 많은 아이들로 흥성거리던 아동공원이 예상외로 조용하였다. 하긴 그럴수밖에 없다. 오늘이야 조금만 움직여도 목덜미에서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덥고 습한 날이 아닌가. 이런 날에 밖에 나와 뜀박질을 해댈 애가 있을것 같지 않았다. 조용한것이 차라리 잘되였다고 생각하며 애들을 곰조각상옆에 줄느런히 세웠다. 그리고는 사진기를 꺼내들고 적당한 거리를 보장한 다음 렌즈의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사진찍을 준비를 다 마치고났을 때 피끗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사진기 누를 사람이 없는것이다. 나는 급기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일이 안되려는지 오가는 사람들도 별반 눈에 띄우지 않았다. 상심하여 고개를 돌리려던 나의 눈앞에 드디여 《반가운》사람이 나타났다. 오륙십발자욱정도 떨어진 곳의 하수도망홀앞에서 웬사람이 아래우가 맞달린 고무비옷을 입고 꺼꺼부정히 서있는것이 아닌가. 하수도망관리원인것 같았다. 나는 선뜻 발걸음을 내짚었다. 그 아저씨앞에 이른 나는 눈이 퀭해졌다. (아니, 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아저씨가?…) 나는 인사를 꾸벅 했다. 《부위원장아저씨, 안녕하세요?》 《아니 이게 누구냐? 인혁이로구나. 네가 여길 어떻게? 오, 아버지를 만나려고?》 《아니예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네 얼굴에 다 씌여져있는데! <나는 생일날 집에 혼자 있기가 적적해서 아버지를 데리러 왔습니다.> 이렇게 말이다, 맞지? 조금만 기다려라. 아버지가 지금 여기 하수도망안에 들어가셨는데 인츰 올라오실게다.》 《예?》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부위원장아저씨가 내 생일을 알고있다는것은 둘째치고라도 급한 일때문에 자리를 뜨신다는 아버지가 바로 여기 하수망안에 들어가계신다는것이 얼음덩어리로 몸을 덥힌다는것만치나 믿어지지 않는 말이였다. 나는 아버지가 들어가계신다는 망홀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의문은 놀라움과 아연함으로 이어졌다. 정말 아버지가 시커먼 망홀안에서 불쑥 몸을 솟구치는것이 아닌가. 부위원장아저씨와 꼭같은 차림을 하고 온몸에 흙매닥질을 잔뜩 하고서 말이다. 《아버지!》 나는 억이 막혔다. 《아니 네가?》 《아버진 뭐예요. 씨. 이런 일이나 하자구…》 대뜸 이런 푸념이 터져나왔다. 경식이와 철학이가 곁에 다가오지만 않았더라면 또 어떤 소리가 터져나왔겠는지 알수 없었다. 《인혁이 아버지, 안녕하세요?》 《오, 너희들이로구나. 그래 놀러들 나왔니?》 아버지는 경식이와 철학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나는 애들을 비집고 아버지앞에 나섰다. 《아니예요. 우린 사진 찍으러 나왔어요. 그리고 이제 집으로 가서 아버지한테서 재미나는 이야기랑 듣자고 했어요.》 《아참 그랬지! 가만 그런데 이걸 어쩐다? 아버진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아버지는 난처한 기색을 지으며 부위원장아저씨를 돌아보셨다. 《위원장동지, 여기 일은 저한테 맡기고 이젠 그만 집으로 들어가보십시오. 인혁이랑 애들이 이렇게 찾아나왔는데…》 나는 부위원장아저씨가 고마왔다. 이제는 아버지가 우리를 따라나설것이다. 내가 손목을 잡아당기고 부위원장아저씨가 등을 떠미는데야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텐가. 그러나 아버지는 깊숙이 박힌 바위돌처럼 꿈쩍도 안하셨다. 《부위원장동무, 고맙소. 하지만 당장 큰 비가 오겠는데 그 많은 하수망들을 어떻게 혼자서야 다 돌아보겠소?》 《왜 혼자라고 하십니까. 상하수도사업소 동무들도 있지 않습니까?》 《물론 그 동무들도 있지. 하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지 않고서는 마음이 놓일것 같지 않구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리쪽으로 고개를 돌리시였다. 《얘들아, 우리 후날 모여앉자꾸나. 그땐 내가 재미난 이야기도 해주고 또 경쾌한 기타곡도 들려주지. 오늘 못한걸 두곱, 세곱으로 덤을 놓아서 말이다. 어때, 좋지?》 《예.》 아이들은 선선히 응했다. 나는 그만 입을 다물고말았다. 이때 몸이 뚱뚱한 아저씨 한분이 숨을 헐썩이며 달려왔다. 《위원장동지, 아 여기 계시는걸 온 읍거리를 다 돌았습니다.》 《식료공장 지배인동무가 어떻게?》 《위원장동지, 성공입니다, 성공!》 《성공이라니?》 《아, 맛좋은 새로운 콩우유를 꽝꽝 생산해낼수 있는 새로운 촉매제와 첨가제연구가 성공했단 말입니다.》 《그게 정말이요?》 아버지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수고했소, 정말 수고했소. 그러니 이젠 우리 군 아이들에게도 맛있는 콩우유를 마음껏 먹일수 있게 되였다. 그 말이겠소. 응? 하하하.》 그런데 이때 어디선가 또다시 아버지를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다보니 뜻밖에도 경식이 아버지였다. 《위원장동지, 드디여 과업을 수행했습니다.》 《그래 가구공장 지배인동무는 또 무슨 기쁜소식을 안고 달려왔소?》 《일전에 학부형회의를 하는 날 위원장동지가 준 과업말입니다. 우리 군 아이들이 쓸 책상, 걸상! 그걸 다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얼굴이 또다시 밝아졌다. 《벌써 말이요? 정말 수고했구만!》 《위원장동지, 전 이번에 똑똑히 깨달았습니다. 우리 일군들이 서야 할 위치가 어딘가를 말입니다. 위원장동지처럼 어렵고 힘든 일의 앞장에 서서 대중을 이끄는것- 이것이 오늘 우리 선군시대 일군들이 서야 할 위치이고 우리 일군들이 발휘해야 할 투쟁기풍이라는것을말입니다.》 《허허, 지배인동무, 너무 요란하구만! 우리에게야 인민의 복무자, 심부름군이라는 그 말 한마디면 다 어울릴텐데말이요!》 아버지는 호탕하게 웃으셨다. 부위원장아저씨도 웃었고 경식이 아버지랑 식료공장 뚱보아저씨랑 다 같이 따라웃었다. 그러나 나만은 웃지 않았다. 웃을수가 없었다. 언제인가 어머니가 말하던 심부름군소리가 가슴에 되새겨졌다. 그렇다. 아버지는 심부름군이였다. 어른, 아이 할것없이 우리 군사람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나 다 하는 심부름군! 그래서 아버지는 남들이 다 쉴 때에도 덕수골양어장으로 찾아갔고 남들이 저어하는 하수도망안에도 흔연히 뛰여드신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처럼 훌륭한 아버지를 리해하려고 하지 않았고 그런 아버지처럼 살려고 애써 노력하지도 않았다. 소년단열성자라는게 저만 똑 제일인것처럼 생각하면서 큰소리나 칠줄 알았지 언제한번 학급애들의 앞장에 서서 어깨를 내댄적이 있었던가. 그런 학급반장을 애들이 좋아하면 얼마나 좋아하고 따랐으면 얼마나 따랐겠는가. 나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자, 그럼 하수망을 마저 돌아보고 새 책상도 콩우유맛도 보러 가기요.》 아버지는 또다시 망홀안으로 들어가셨다. 《인혁아, 너희 아버진 정말 좋은 아버지야!》 경식이와 철학이가 나의 손을 잡으며 하는 말이였다. 나는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무엇인가 뜨거운것이 가슴 그들먹이 고여올랐다. 《얘들아, 인혁이 아버지는 바로 저런분이란다. 인혁아, 너도 아버지를 본받아 훌륭한 소년단열성자가 되여야 한다. 알겠니?》 부위원장아저씨가 아버지를 따라 하수도망안으로 들어가면서 남긴 말이였다. 나는 결심했다. 아버지처럼 모든 일에 앞장서고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는 그런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굳게굳게 마음다졌다. 나의 결심에 대한 수긍인지 키높이 자란 은행나무우듬지에 고운 새 한마리가 앉아서 연송 고개를 까딱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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