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97(2008)년 제2호에 실린 글
□ 단 편 소 설 □
김 성 국 그림 김광석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쯤됩니다. 봄은 온다는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왔습니다. 강남갔던 제비가 안고왔는지 아니면 랭상모를 가꿔가는 농장원누나들이 부르는 봄노래를 타고 왔는지도 모릅니다. 마음착한 봄아씨는 보슬보슬 봄비를 뿌려 해묵은 먼지와 얼음덩이눈무지들을 말끔히 씻어내더니 산과 들을 연록색으로 단장시켜놓았습니다. 《고난의 행군》에 이어 강행군을 하는 어려운 때이지만 넓은 앞벌에서는 땅김이 문문 피여오르고 시내가에서는 맑은 물이 돌돌돌 봄노래를 부르며 흘러내립니다. 한껏 무르녹는 봄정기를 함뿍 받으며 두 아이가 시내가 둔덕으로 걸어오고있었습니다. 제1중학교 입학통지서를 받아안은 금철이와 봉수입니다. 《봉수야, 좀 앉았다가자꾸나.》 팽팽 불어오른 고무공처럼 통통 뛰여가던 금철이가 잔디밭에 털썩 앉으며 말했습니다. 두 아이는 나란히 잔디밭에 누웠습니다. 하늘에는 흰구름이 둥둥 떠다니고 새들은 봄을 맞은 기쁨을 노래합니다. 금철이의 마음도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송이들처럼 떠올랐습니다. 금철이의 손은 어느새 품속에 있는 《입학통지서》를 꺼내듭니다. 이제는 열번도 더 보았으나 그래도 또 한번 보고싶었습니다. 금철이는 봉수를 건너다보았습니다. 봉수는 금철이처럼 기쁘지 않은지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봉수야, 넌 기쁘지 않니? 말 좀 하려무나.》 금철이는 제 혼자만 붕 떠있는것이 멋적은듯 말없이 누워 하늘만 바라보는 봉수에게 말했습니다. 《애두 참, 새삼스럽게…》 어딘가 모르게 고집스러워보이는 봉수는 별걸 다 묻는다는듯 이마를 찌프렸습니다. 《봉수야, 우리 어머니들이 일하는데 들렸다가 집에 갈가?》 《거 뭐 창피스럽게.》 《뭐라니, 갔다오자꾸나. 너희 어머니도 우리 어머니도 얼마나 속이 까매서 기다렸니? 우리가 1중학교 입학시험에서 미끄러질가봐 말이야. 이제 우리가 입학통지서를 들고 척 나타나면 깜짝 놀랄거야.》 금철이는 봉수의 마음에 부채질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물에 젖은 숯덩이처럼 봉수의 마음은 불이 달리지 않습니다. 워낙 바다물처럼 서서히 더워졌다가 천천히 식는 봉수입니다. 《난 안갈래. 너 혼자 가봐.》 이러더니 봉수는 훌쩍 일어나 마을로 향하는것이였습니다. 금철이도 잠시 망설이였습니다. 어쩐담! 그러나 통지서를 받아보고 기뻐하는 어머니의 밝은 얼굴이 어느새 금철이의 마음을 떠밀었습니다. 그는 혼자서 어머니가 일하는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어머니의 기쁨은 더 말할것도 없고 함께 일하는 분조원들까지도 어찌나들 기뻐하는지 모릅니다. 마치 제집경사처럼 말입니다. 서로마다 통지서를 돌려보며 한마디씩 합니다. 《금철네 집에 큰 경사가 났수다.》 《어쩌면 집안에 저런 복덩이가 태웠을가? 공부잘해, 인물 잘나, 똑똑하지, 원…》 《금철이 어머니, 오늘 저녁엔 씨암닭이라도 한마리 잡아야겠수다.》 《아무렴요. 씨암닭만 잡겠나요, 다들 저녁에 놀러들 오세요.》 이러는 모습을 보는 금철이의 마음은 흐뭇하였습니다. 봉수도 함께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봉수 어머니네가 일하는 3분조 모판도 바로 곁인데… 아마 마을에 큰 범을 산채로 잡아 메고온 사람이 있었다 해도 금철이와 봉수만큼 온 동네사람들의 그처럼 극진한 환대를 받지 못했을것입니다. 마을사람들모두가 얼마나들 진심으로 기뻐하고 축하해주는지 머리가 막 뻥해질 정도였습니다. 《얘 금철아, 오늘 저녁은 우리 집에서 한끼 하겠다. 이따가 봉수와 같이 오너라.》 《래일 저녁에는 우리 집에 와야 한다.》 그날 저녁 집집들에서 다투어가며 금철이와 봉수를 청해갔습니다. 우물집 막내삼촌이 가슴에 영웅메달을 달고 마을에 들어섰을 때처럼 말입니다. 데려가서는 닭알도 한알씩 들려주는가 하면 무둑한 떡그릇도 앞에 놓아주었습니다. 《어서 많이들 먹어라. 이제부턴 집을 떠나 기숙사생활을 해야 할텐데… 많이 먹고 가서 공불 잘해라.》 금철이와 봉수가 무슨 겨울나이준비하는 곰이라고 많이 먹어둔단 말입니까? 정말 소박하고 다정한 사람들이였습니다. 《봉수 어때? 정말 생각되는게 많지?》 후한 대접을 받고 배나무집을 나서던 금철은 흡족한 어조로 봉수에게 말을 건네였습니다. 《정말 코마루가 찡해지더구나. 그런데 난 걱정부터 앞서.》 봉수는 근심스레 눈을 찌프리며 말했습니다. 《봉수, 넌 근심이 많아 탈이야. 별게 없어. 그저 우리가 공부만 잘하면 되는거야. 우리 1중학교에 가서두 꼭 공부를 잘해 마을사람들을 기쁘게 하자.》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습니다. 온 마을사람들이 왜 그처럼 자기들의 제1중학교 입학을 두고 기뻐하며 극진히 대접해주는가를 말입니다.
그들이 읍에 있는 제1중학교로 떠나던 날은 정말 굉장했습니다. 정류소에 온 마을사람들이 다 나온것만 같았습니다. 마을의 《좌상》인 우물집할아버지앞에 두 아이는 나란히 섰습니다. 《얘들아, 너희들도 어련하겠지만 이제는 과학과 기술의 시대가 아니냐? 앞으로 농사도 넥타이를 매고 척 앉아서 콤퓨터로 짓는 때가 온다더라. 그러니 우리 고향의 래일의 주인들인 너희들이 마을사람들의 기대를 잊지 말고 많이 배워서 대학에두 가구 박사들이 돼서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고난의 행군〉, 강행군도 빨리 끝날수 있거든. 그래 자신들 있느냐?》 《알겠어요 할아버지, 꼭 박사가 되여 돌아오겠습니다.》 금철이는 우물쭈물하는 봉수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씩씩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와 어머니앞에서 또 다짐했습니다. 《할머니, 어머니, 이제 내가 박사가 되여 올테니 그날을 꼭 기다리세요.》 《오냐, 기다리마. 우리 손자가 박사가 돼가지구 오는걸 꼭 기다리마.》 금철이와 봉수가 탄 뻐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마을사람들은 그냥 손저으며 바래주었습니다.
×
밤입니다. 어둠은 소리없이 찾아와 눈에 보이던 모든것들을 검은 보자기로 감싸놓았습니다. 온 대지를 검은 장막으로 감싼 어둠도 어쩔수 없었는지 제1중학교 기숙사창가에서는 밝은 빛이 흘러나옵니다. 초저녁잠이 많아 깜빡깜빡 조을던 아기별들이 부러워 들여다보는 창너머에서는 아이들이 공부에 여념없습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물리문제를 푸느라 골을 썩이던 금철이가 그제야 생각난듯 불쑥 입을 열었습니다. 《얘들아, 오늘 새로 나온 영화를 한다는데 제꺽 가서 보구와서 공부할가?》 《그럴가?!》 영화라면 물고기맛 들인 고양이처럼 빡하는 진성이가 눈을 반짝이며 호응해나섭니다. 《영화까지 보구와서 이 많은 과젤 언제 다 하려고 그러니?》 호실장이 하는 말을 듣는 순간 금철은 주춤하였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오늘 과제가 고양이 소대가리 맡은것 같이나 아름찼으니까요. 그러나 자석한테 끌리는 쇠붙이마냥 새 영화에 대한 생각은 금철의 마음을 놓아줄줄 모릅니다. 어쩐다? 에라, 모르겠다. 《과젠 일없어. 영화를 보구 와서 아예 잠을 자지 않고 하면 돼.》 금철이는 단호하게 결심을 내렸습니다.
한마을에서 같이 와서 한호실에서 같이 살면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봉수를 위해 왼심을 쓰는 금철입니다. 《아니, 난 안가겠어.》 그만두겠으면 그만두렴. 금철이는 호실을 나섰습니다. 부모들이 걱정하던것처럼 기숙사생활은 영 나쁜것만이 아니였습니다. 집에서처럼 손발 씻어라, 공부해라 하는 등의 어른들 통제가 없으니 제 마음 내키는대로입니다. 조롱밖으로 날아나온 새라고 할가, 아니면 풀밭에서 마음대로 뛰도는 망아지라고 해야 할지 여하튼 자유롭습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니 그때까지 호실애들은 공부에 열중하고있었습니다. 금철이는 그제야 조바심이 나서 책을 꺼내들었습니다. 속도를 낼가 하면 굽인돌이라더니 두 문제도 못풀었는데 이번에는 배가 출출해왔습니다. 《봉수야, 뭘 좀 없니?》 금철이는 배를 슬슬 쓸었습니다. 《어제 저녁에 다 먹지 않았니?》 《참, 그랬더라.》 그 말에 금철이는 화가 나서 만년필을 놓고 자리에 벌렁 누웠습니다. 천정에 매달려있는 전등이 할머니와 어머니의 얼굴로 보입니다. 금철이는 눈을 꾹 감았습니다. 자꾸자꾸 떠오르는 집생각을 애써 누르려고말입니다. 아이들과 웃고떠드는 낮엔 모르다가도 식탁앞에서와 잠자리에 들면 어느새 저도 모르게 집생각이 찾아들었습니다. 오래동안 작업반장으로 있다가 지금은 농장관리부위원장으로 일하는 금철이 아버지는 외아들인 금철이가 바란다면 산이라도 떠옮겨올 사람입니다. 게다가 어머니와 할머니는 또 어떻구요. 아무리 어려운 《고난의 행군》, 강행군시기라 해도 금철이한테만은 그리운것, 부족한것이 없게 해주었습니다. 그래서 금철이가 떠나올 때 기숙사생활을 꽤 해낼가고 할머니랑 걱정했던것입니다. 전번주 토요일에도 집에 가니 할머니가 깜장닭으로 곰을 해놓은것이 아니겠습니까. 《금철아, 어서 식기전에 먹어라. 그새 한주일동안 공부할래기 몸이 축갔구나.》 할머니는 금철이가 들어설 시간을 맞추어 뜨끈하게 닭곰그릇을 덥혀놓았다가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집에 가면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불러 더 먹을수가 없었습니다. 그 닭곰이 지금 당장 이 자리에 있더라면 눈깜짝할새에 해치울텐데… 금철이가 눈감고 이런 생각을 하는새 소르르 졸음이 찾아왔습니다. 마치 기다리고있기라도 한듯 말입니다. 《금철아, 너 아예 밤잠을 안자고 공부하겠다더니 자니?》 봉수가 금철이를 흔들어깨우며 말했습니다. 《아, 졸려죽겠어. 이제 좀 자고 래일 새벽에 일어나 공부하겠어.》 《금철아. 나하구 시원히 세면하구 와서 공부하자.》 실천보다는 결심이 더 훌륭한 금철임을 잘 아는 봉수인지라 거듭 흔들며 금철을 깨웠으나 그것은 공연한짓이였습니다. 《아, 됐어. 봉수 나 래일 아침…》
×
오늘은 토요일, 금철이만이 아닌 학교의 온 기숙사생들이 기다려온 날입니다. 오늘은 집으로 가는 날이랍니다. 금철이는 새벽잠이 많아 늦장을 부리던 아이답지 않게 일직 일어나 세면장으로 갔습니다. 머리도 깨끗이 감고 신발앞코숭이도 비누로 하얗게 닦았습니다. 제1중학교학생은 우선 외모부터 다른 학교아이들과는 달리 단정해야 하니까요. 금철이와 같은 심정인지 상급생 형님, 누나들도 오늘은 별로 일찍 서두릅니다. 그날 오후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좋은 날인데 비단우에 꽃이라고 점심먹고 나오니 운동장에 집에 가는 차까지 척 있지 않겠습니까? 리에서 읍에 일보러 왔던 길에 집에 가는 제1중학교학생들을 태우고가려 들렸다나요. 《금철아, 우리 리의 〈박사선생님〉들이 다 왔나 봐라, 어서 떠나자.》 금철이와 가까운 운전사형님이 하는 말이였습니다. 그런데 어쩐담, 봉수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얘가 어디 갔을가. 점심때도 있었는데… 얘가 집에 가지 않으려나? 그것도 아니였습니다. 지금쯤 군대나간 누나가 표창휴가 왔을거라며 토요일만 기다리던 봉수였습니다. 《운전사형님, 잠간만 기다려주세요. 내가 제꺽 가서 봉수를 데려올게요.》 금철이는 얼른 생각키우는바가 있어 무작정 교실로 달려올라갔습니다. 아닐세라 봉수는 텅빈 교실에 홀로 앉아 공부하고있었습니다. 《봉수, 뭘해?! 빨리 가자. 차가 떠나겠대.》 차가 간다면 벌떡 일어날줄 알았건만 봉수는 끔쩍하지 않습니다. 《봉수, 넌 어쩌겠다는거야?》 금철이는 대뜸 약이 올랐습니다. 저 하나를 위해 숱한 사람이 타고있는 차를 기다리라 하고 3층까지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어쩌면 그럴수가 있습니까? 《금철아, 나때문에 수고했는데 난 집에 못갈것 같애.》 《뭐? 뭐? 어쨌다구?》 금철이는 죽었다살았다하는 봉수가 리해되지 않았습니다. 어제까지만도 누나가 보고싶어 몸살을 앓던 애가 오늘은 안가겠다니 웬일입니까? 《넌 뭐야. 이랬다저랬다하면서… 어제까지 집에 못가 안타까와하더니.》 《사실 나도 집에 가고싶어. 그런데 오늘 이 시험지를 받고보니…》 모든것이 다 리해됐습니다. 아까 담임선생님이 집에 가서 부모님들에게 보이고 수표를 받아오라면서 시험지를 나누어주었습니다. 금철이는 3점, 봉수는 4점이였습니다. 그러니 봉수는 한참 일없습니다. 《시험지가 어쨌다는거야. 난 너처럼 4점이라면 춤추며 가겠다. 그건 그거구… 넌 누나를 만나야 하지 않니?》 《나도 어서 가서 누나를 만나보고싶어. 그런데… 난 약속했어. 5점을 맞기 전에는 집에 들어서지 않겠다고 말이야.》 금철이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첫술에 배부르겠습니까. 오늘은 비록 4점을 맞았지만 래일이 또 있지 않습니까. 《봉수야, 어서 가자. 누나도 왔겠는데… 그동안 너야 얼마나 높이 올라섰니.》 《금철아, 됐어. 난 안갈래. 네가 가서 좀 말해줘. 누나더러 한번 읍에 나오라구 말이야.》 역시 봉수의 고집은 그 누구도 꺽지 못할것입니다. 금철이는 교실문을 나와 차에 올랐으나 속은 여전히 내려가지 않았습니다. 고집은 좀 있어도 어질고 순박하기만 하던 봉수, 공부에서도 금철이한테 떨어지던 어제날의 봉수가 아니였습니다. 지금은 봉수가 언제 자고 깨여나는지 호실애들도 모릅니다. 어제 저녁에도 금철이는 봉수가 맨 마지막까지 앉아 공부하는걸 보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눈을 떠보니 봉수는 앉아서 공부합니다. 과연 그 무슨 힘이 봉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
성적총화가 끝나자마자 금철이는 씨근덕거리며 기숙사호실로 달려갔습니다.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귀뿌리가 달아올랐습니다. 귀전에는 담임선생님의 말씀이 쟁쟁 소리를 내며 울려왔습니다. 《금철학생은 단단히 정신을 차려야 하겠습니다. 전번총화때 13등이던 금철학생이 이번달엔 26등을 했습니다. 입학초기엔 실력이 높아서 기대가 컸었는데 이번 결과를 보니 실망하게 되는군요. 아침엔 늦잠을 자니 어떻게 실력이 올라가겠어요. 한마을에서 온 봉수학생을 좀 보세요. 언제나 꾸준히 공부하는걸… 이번에도 그는 학급에서 3등을 했어요. 금철이도 봉수처럼 철이 들 때가 됐어요. 아직도 부모들에게 응석이나 부리고 밥투정이나 할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요.》 금철이한테는 이 말들이 예리한 《화살》같이 가슴에 맞혀왔습니다. 이때까지 집안의 외아들이여서 곱다, 용타, 잘한다 소리만 들어온 금철이였습니다. 공부도 그렇지요. 봉수처럼 이악은 부리지 못했어도 남들만큼은 노력했건만 왜서인지 성적은 자꾸자꾸 내려만 갔습니다. 암만 생각해보아도 여긴 있을데가 못되는곳 같았습니다. 집에 가면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학교에 다니겠는데 왜 이런 고생을 하며 여기에 그냥 있단 말입니까. 처녀애들이 있는데서 창피까지 당하면서 말입니다. 여긴 수재들이나 올 곳이였습니다. 제1중학교는 들뜬 기분에 오는 곳이 아니였습니다. 이 생각은 금철이가 선생님의 추궁을 받자마자 한 생각이 아닙니다. 원래부터 마음이 흔들흔들하던것인데 선생님의 말을 듣자 더 확고해진것입니다. 하여 금철이는 총화가 끝나자 호실로 달려왔습니다. 금철이는 트렁크를 꺼내여 짐을 싸기 시작했습니다. 옷가지들과 학용품들을 하나하나 챙겨넣어가던 금철은 문득 손을 멈추었습니다. 트렁크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좋은 학습장들과 수첩, 만년필, 원주필, 제도기와 삼각자 등 학용품의 거의 전부가 다 마을사람들과 학급동무들이 공부 잘하라고 기념으로 준것들이였습니다. 이 기념품들을 안겨주며 꼭 박사가 되여 돌아오라고 손저어 바래주던 정다운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이 꼴을 하고 집으로 가면…) 금철이는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습니다. 자기가 어찌나 가련해보이는지 금철이는 억이 막혔습니다. 문소리가 나더니 봉수가 들어왔습니다. 《금철아, 너 어쩌자구 그러니?》 《난 집에 가련다.》 《뭐, 뭐라구?!》 봉수는 억이 막혀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금철이는 더 말하지 말라는듯이 트렁크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지금껏 망설이던 애답지 않게 말입니다. 《간다 해도 내 말을 듣고 가.》 봉수는 두팔을 벌리며 막아나섰습니다. 《네 말을 듣고말고 할것도 없어. 내가 오죽했으면 이런 결심까지 했겠니?》 《금철아, 아까 선생님도 말씀하셨지만 넌 아직 철부지다. 철부지.》 《뭐, 이젠 너까지.》 금철이는 대뜸 약이 올랐습니다. 봉수도 맞받아 어성을 높였습니다. 《그래. 넌 아직도 할머니손에서 응석이나 부리구 밥투정이나 하는 어린애나 같애.》 《뭐, 어린애? 밥투정? 응석… 좋다. 그래 난 철부지다. 그럼 넌 뭐냐?》 금철이는 봉수에게 들이댔습니다. 그런데 봉수의 대답은 뜻밖이였습니다. 《나도 얼마전까지만 해도 너와 같은 애였었다. 오직 행복을 누릴줄만 알고 가꿀줄 모르는 애였다.》 《아니, 뭘?!》 《사실 부끄러운 일이여서 너한테 말하지 않았는데 나도 너처럼 1중학교를 포기할 생각까지 했댔어.》 금철이는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습니다. 《나는 차마 말이 나가지 않아 밤이 깊어서야 아버지에게 결심을 말했댔어. 난 그때 내 말을 들은 아버지가 괴로워하던 모습을 잊을것 같지 못해. 밤새 아무말없이 담배만 피우시던 아버지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더구나. 〈봉수야. 우리가 여러해째 어려운 행군을 하면서 자식들 귀한 생각만 하다보니 잘못 키웠구나. 미제놈들이 우리 나라를 먹겠다고 날뛰고있는 이때 아이들이 너처럼 약한 마음을 먹는다면 어떻게 되겠니. 정신을 차리고 단단히 공부해서 나라의 과학과 기술을 하루빨리 발전시켜야 한다. 바로 너희들의 힘으로 말이다. 이것이 바로 경애하는 장군님의 높은 뜻을 받드는것이 아니겠니.〉 난 그날 아버지의 말을 듣고 밤에 졸음도 오지 않더구나.》 봉수가 말을 끝맺자 금철이는 가슴이 찌르르 하며 무엇인가 그득 차오르는것만 같았습니다. 봉수, 네가 그래서였구나. 군대나갔던 누나가 왔어도 일요일에 집에 안가면서 밤을 새워 공부하여 끝내 3등에 올라선 비결을 인제야 알겠구나. 그러니 난… 난… 얼마나 철없이 놀았담. 참. 뚜렷한 목표도 없이 하루하루 살아왔으니. 《금철아, 어서 가자, 복습시간이야. 이제부터 정신을 차려 공부해도 늦지는 않았어. 너야 워낙 머리가 좋지 않니? 우리 함께 고향사람들앞에서 맹세하지 않았니.》 봉수가 금철이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금철은 봉수의 손을 덥석 잡으며 웨쳤습니다. 《응, 가자.》 트렁크에서 책을 꺼내드는 금철의 얼굴에는 비장한 결심이 어려있습니다. 금철이의 철부지시절은 인제부터 끝났다고 보아야 할것입니다. 이 글을 보는 동무들의 철부지시절은 언제까지입니까. 금철이처럼 아직도 철부지시절에서 헤매는 동무들이 있다면 빨리 끝장내야 할것입니다. 왜냐면 세계는 너무도 빨리 전진하고있으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