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97(2008)년 제3호에 실린 글
□ 단편소설 □
리 동 섭
정국이 막연한 생각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그냥 누워있는데 토방으로 올라서는 인기척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정국은 몸을 화닥 일으키며 《누구예요?》하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문앞에는 누나가 조용한 미소를 짓고 서있었습니다. 《들어온지 오래 됐냐?》 정국은 누나의 물음엔 대답없이 다시금 털썩 드러누웠습니다. 그리고는 외로 돌아누우며 언제까지고 입을 열려 안했습니다. 누나는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나서며 《얘, 어디 아프니?》하고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그러나 정국은 시무룩해서 고개를 저을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해는 벌써 서산너머로 기울었습니다. 마당으로 살금살금 땅거미가 스며들었습니다. 호박덩굴이 뒤엉킨 수수대바자는 어둠에 잠기면서 한결 우중충해보였습니다. 그옆에 주런이 키돋움하며 늘어선 강냉이대는 저녁바람에 잎들을 가벼히 흐느적였습니다. 부엌에서는 누나의 쌀이는 바가지소리가 가벼이 울려왔습니다. 정국은 불쑥 몸을 돌리더니 부엌에 대고 소리쳤습니다. 《누나!》 《응.》 누나는 행주치마에 손을 닦으며 방안에 들어섰습니다. 《왜 그러니?》 누나의 상냥한 물음에 정국은 한동안 입을 다물고있다가 볼부은 어조로 말을 꺼냈습니다. 《누나,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학교에 가.》 누나는 한동안 허거픈 미소를 지으며 앉아있더니 《애두 참, 누가 학교에 간다던?...》하고는 다소 노여운 어조로 말을 이었습니다. 《내 말이 그렇게 믿어지지 않니? 괜히 해본 말이라구 하지 않았니?》 정국은 벌떡 일어나며 볼멘 소리로 맞받았습니다. 《누난 거짓말이야, 남들이 다 그렇게 말하는데 뭐.》 누나가 진짜 성을 내며 다우쳐묻는 바람에 정국은 한동안 어물어물하다가 목안으로 기여드는 소리를 내였습니다. 《우리 분단 애들이 다 그러는데 뭐...》 《너의 분단?...》 누나는 갑자기 놀라운 표정을 짓더니 한참만에야 입속으로 들릴듯말듯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그 애들이 어떻게 알았을가?...》 그리고는 말없이 어둑한 방 한구석을 이윽토록 바라보며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기는것이였습니다. ...사실 어제 밤, 누나가 늦어진것은 관리위원장아저씨가 만날 일이 있다고 불렀기때문이였습니다. 왁작거리던 사무실안이 좀 조용해지자 관리위원장아저씨는 허리를 의자등받이에 기대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정애야, 너 이번에 대학에 가지 않겠니?》 누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대학이요?》 《그럼, 왜 가기 싫니?》 사람좋은 관리위원장아저씨는 기름한 얼굴에 웃음을 그리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이 참, 내가 무슨 대학엘 다 가겠어요.》 누나는 수줍은듯 얼굴을 붉히며 말끝을 채 맺지 못하는데 아저씨는 정색하여 말을 이었습니다. 《우리 이번에 너를 농대에 추천하기로 당위원회에서 결정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시험준비를 단단히 하는게 좋을거다.》 이 말에 누나의 얼굴이 갑자기 흐려졌습니다. 그러더니 한참만에 힘없는 소리로 《저는 안 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관리위원장아저씨는 놀라운듯 《왜?》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러나 고개를 차분히 내리숙인 누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려 안했습니다. 아저씨도 무슨 짐작이 가는듯 말없이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기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너 혹시 동생때문에 그러는게 아니냐?》 《아니예요. 꼭 학교에 가야 맛이나요?》 그러나 아저씨는 짙은 눈섭을 찌프리고 뒤로 젖히였던 허리를 일으켜세우며 나직하나 심중한 어조로 말을 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도 대학문제가 제기되였을 때 너의 동생걱정을 하지 않은게 아니다. 네가 대학에 가면 동생은 어떻게 할가? 동생을 두고 정애가 가겠다고 할가? 그러나 단순히 이 문제때문에 응당 가야 할 대학을 못 갈수야 없지 않니? 문제는 누굴 보내야 조합의 장래발전에 유익할수 있겠는가 여기에 있는거지...》 아저씨는 또 잠시 말을 끊더니 다정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을 계속했습니다. 《정애야, 동생걱정을 말아라. 아무렴 동생을 돌봐줄 사람이 없겠니? 모두가 부모이자 형제인 우리 사회에... 동생은 내가 직접 맡기루 했다. 하기야 너처럼 살뜰할수야 없겠지. 그러나 내 자식처럼 생각하여 키우면야 별반 실수 있겠니? 그저 대학에 가서 공부나 잘하구 오너라.》 금시 대학에 가게나 된듯이 말하는 아저씨의 말씀에 누나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그저 가슴이 후더워온 누나는 숙였던 눈길을 약간 쳐들었다가 더욱 깊숙이 파묻을뿐 아무런 대꾸도 할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다음순간 누나는 고개를 쳐들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저씨, 전 동생때문에 그런게 아니라지 않아요.》 《그럼 학교 갈 필요가 없단 말이냐?》 아저씨의 다그쳐묻는 말에 누나는 또 말문이 막혀 입속으로 《아이 참...》하며 다시금 고개를 떨구고말았습니다. 아저씨는 빙그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혜숙이한테서두 편지가 왔더구나.》 그러면서 오른켠 호주머니에서 이젠 모서리가 까실까실 보풀이 인 자그마한 봉투 한장을 꺼내보였습니다. 누나는 숙였던 얼굴에 살짝 웃음을 띠우며 《좀 봐요!》하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지난날의 중학교동창생의 편지를 펼쳐든 누나의 얼굴에는 전에 없는 웃음이 흘러넘쳤습니다. 그러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습니다. 편지 맨끝에 이런 글이 씌여있었던것입니다. 《...아버지, 이번에 정애는 기수검정시험에 전과목이 합격되였다지요? 참말 나는 자기 일처럼 기뻤어요. 나는 그 동무가 꼭 그렇게 성공하리란걸 믿었어요. 전에 학교를 다닐 때두 분단위원장으로 머리가 비상하고 의지가 강한 동무로 소문이 났으니까요. 그런데 아버지, 정애는 요전번에 나한테 편지를 써보내왔는데 가만히 보려니 자기도 대학에 퍽 가고싶은가봐요. 나보고 다 본 교재를 보내달라면서 <야- 나도 너처럼 대학에 다녔으면 얼마나 좋겠니.> 이렇게 쓰지 않았겠어요. ...》 여기까지 읽고난 정애는 그만 무엇에 데기라도 한듯 얼굴을 확 붉히며 편지를 탁 덮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인사도 할새없이 밖으로 뛰쳐나가며 밑도 끝도 없이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아저씨, 전 절대로 대학에 안 가겠어요!》 그런데 지금 마을에선 정애가 래일이라도 방금 대학에 가게 된듯 떠들고있는것입니다. ... 누나는 속상한듯 가벼운 한숨을 지으며 저 혼자 이렇게 중얼거렸습니다. 《남은 갈 생각두 안하는데 모두 왜 저럴가...》 그러나 누나의 얼굴에 비낀 그늘은 좀처럼 사라질줄 몰랐습니다. 누나는 무슨 다짐이라도 하듯 시무룩이 곁에 앉아있는 정국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국아, 괜한 걱정을 말아라. 아무렴 내가 너를 두고 어디 가겠니?》 그러나 그날 밤 자리에 누운 정국은 도무지 잠을 잘수 없었습니다. (왜 누나는 대학에 가려 하지 않을가? 정말 가기 싫어서 그럴가?... 나때문에 그럴게야.) 이렇게 생각해보는 정국은 몸을 돌이키며 누나를 조용히 불렀습니다. 《누나.》 《응...》 이제껏 잠자듯 조용히 누워있던 누나는 정국이쪽으로 돌아누웠습니다. 《왜...》 정국은 머리맡에 드리운 전등불을 빤히 올려다보다가 누나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였습니다. 《누나... 누난 나때문에 대학 가고싶은것두 안 가지?》 누나는 갑자기 당황한 기색을 띠우며 욱박지르듯 나무랐습니다. 《애두 참, 넌 나중엔 못하는 소리 없구나. 빨리 자기나 해라. 그래야 래일 아침 일찍 학교에 가지. ...》 정국은 더는 아무 말도 못하고 반듯하게 되돌아 누웠습니다. 그러나 머리속에선 여전히 복잡한 생각들이 뱅뱅 맴돌이쳤습니다. (확실히 누난 나때문에 학교 안 가는게야. ... 그러니 어떻거면 좋을가?) 정국은 그만 가슴속이 답답해서 덮었던 이불을 옆으로 밀어던졌습니다. 밖에선 우수수 나무잎이 설레였습니다.
3
이튿날 아침 정국이가 새노란 노전이 깔린 방바닥에 물걸레를 치고있는데 마당밖에서 《정국동무!》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정국은 물걸레를 치다말고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거기에는 분단위원장 봉기며 한마을에서 다니는 십여명의 분단동무들이 와있었습니다. 《너의 누나 있니?》 봉기가 먼저 물었습니다. 《응 있어. 들어와.》 정국을 따라 마당에 들어선 애들은 부엌에서 나오는 누나를 보자 한결같이 손을 번쩍 쳐들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아이구. 일찍들 왔구나. 어서 올라들 앉아라.》 누나는 서둘러 돗자리를 토방우에 펴놓고 애들을 그곳에 앉으라 하였습니다. 애들은 전선줄에 올라앉은 제비들처럼 토방우에 주런이 걸터앉았습니다. 그리고는 부엌문을 들락거리는 누나에게서 눈길을 뗄줄 모르며 저희들끼리 이따금 키드득 웃군 했습니다. 《누난 대학에 가면 좋겠는데...》 이런 눈치였습니다. 정국이가 밥술을 놓자 애들은 와짝 떠들어대며 큰길에 나섰습니다. 애들이 조용해지자 이제껏 말없이 웃고만 있던 봉기가 정국이 옆으로 다가서며 이렇게 말을 뗐습니다. 《정국아.》 《응.》 《너의 누나 언제 가니?》 《몰라...》 봉기는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너 누나가 학교 가면 우리 집에 와있지 않겠니? 난 벌써 어머니와 다 얘길 했다.》 이러자 다른 몇몇 애들도 옆으로 다가서며 선뜻 얘기에 끼여들었습니다. 《나도 집에 가서 얘기했다. 우리 집에 가있자!》 《나도 얘기했다. 우리 집에 가있자!》 《아니, 우리 집에 가있자!》 그러는데 여느 애들도 《응 그렇게 해라. 그래야 너의 누나 마음놓구 학교에 가지.》하며 끼여들었습니다. 정국은 그만 말문이 막혔습니다. 이런 때 무어라 대답해야 할가.... 가슴속이 뿌듯해진 정국은 붉어진 얼굴에 미소를 그리며 묵묵히 걸음을 옮기였습니다. 그러는데 길 저켠에서 염소 한마리가 고개를 꺼덕꺼덕 고삐를 질질 끌면서 이쪽으로 다가왔습니다. 이것을 맨먼저 본 한 애가 《염소다!》하고 소리를 지르며 벌써 저만큼 달려나갔습니다. 덩달아 뛰여가는 애들은 《위-위-》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깜짝 놀란 염소는 몸을 움쭉하더니 껑충껑충 되돌아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뒤다리 사타구니밑에서는 담배주머니만 한 젖통이 흔들거렸습니다. 그냥 뒤따라 달리던 애들은 염소가 곧은 길에서 옆으로 삐여져나갔을 때에야 비로소 《하하하...》 웃어대며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뒤로 느릿느릿 따라가던 정국이도 저도 몰래 입가에 벙긋이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참 좋은 동무들이야!...) 그날 저녁이였습니다. 정국은 저녁빛을 등에 받으며 길가의 돌멩이들을 툭툭 차며 집으로 돌아오고있었습니다. 관리위원회앞마당에 이르니 문을 활짝 열어젖힌 위원장아저씨의 방에서 왁작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정국이 웬일인가싶어 몇발작 앞으로 나서며 들여다보니 거기에는 숱한 마을어른들이 모여있었습니다. 앉은 사람, 선 사람, 문가에 기대여 선 사람... 그들은 거의 정국이네 분단동무들의 학부형들이였습니다. 한가운데 놓여있는 책상에는 관리위원장아저씨가 웃으며 앉아있는데 그 량녘에 마주선 여물먹이 할아버지와 봉기 어머니가 그중 성이 나서 어성을 높이고있었습니다. (왜 저럴가?...) 저으기 의아해진 정국은 집뒤로 해서 남향받이뙤창문에 바싹 붙어섰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기웃이 방안을 들여다보며 얘기를 엿듣는데... 아 이게 웬일입니까! 그들은 바로 정국이를 둘러싸고 저마끔 자기네가 키우겠다고 다투는것이였습니다. 정국은 갑자기 화닥화닥 뛰는 가슴을 창문가에 지그시 누르며 계속 귀를 강구었습니다. 마침 방안에서는 봉기 어머니의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제발 빌어요. 아무모로 보나 정국은 내가 키워야 하지 않겠어요? 정국은 우리 봉기와 한반이거든요. 또 전에서부터 이웃에서 살았구. 그러니 정국은 내 아들이나 다를게 뭐 있어요?》 이 말에 여물먹이할아버지는 노발대발해서 맞받아 소리쳤습니다. 《그런 말은 여기 모인 사람들이 다할수 있지! 그래 여기에 정국이를 자기 아들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소. 그런 당치도 않는 소리는 하지도 마오! 정국이는 내가 전에도 키웠던 애요! 그러니 그 앨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오!》 여물먹이할아버지가 어찌나 사납게 웨치는지 그 누구도 맞대꾸를 하는 사람이 없는데 봉기 어머니는 그만 기막힌듯 한숨을 지으며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아유, 이걸 어쩌누... 오늘 저녁 봉기는 한잠두 못 자겠구만.》 이러자 이제껏 묵묵히 앉아있던 사람들도 술렁거리며 한마디씩 끼여들었습니다. 《그런 말루면 우리 집 애들두 안 그럴것 같소?》 방안은 잠시 조용해졌습니다. 어둑하던 방안에 전등불이 환히 켜졌습니다. 관리위원장아저씨는 기름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습니다. 《자, 이젠 그만들 합시다. 괜히 이러다가 나중에 싸움이라도 일어나겠습니다.》 그리고는 허허... 웃으며 《하여간 결정은 당위원회와 토의해서 합시다.》하고 그루를 박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둘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여물먹이할아버지도 걸터앉았던 걸상모서리에서 움쭉 일어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여간 정국이는 누구도 건드리지 못할줄 아오!》 이윽고 방안엔 관리위원장아저씨 혼자만이 남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니, 아주머니는 왜 가지 않습니까?》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정국이가 발꿈치를 약간 쳐들고 방안을 들여다보니 문설주에 한 아주머니가 그냥 기대여 서있었습니다. 그는 전재고아로 읍에 있는 생산협동조합에서 일하다가 며칠전에 이 마을로 시집온 새각시였습니다. 그는 수줍은듯 고개를 숙이고 괜히 옷고름만을 만지작거리고있었습니다. 마치 《관리위원장동무, 어떻게 하랍니까?》하고 말없는 가운데 처분만 바라는듯 한 그런 눈치였습니다. (아, 저 낯선 아주머니도 나때문에 왔구나!) 여기에 생각이 미친 정국은 갑자기 가슴속이 뭉클해오고 눈앞이 흐릿해옴을 느끼며 언제까지고 그 자리에서 움직일줄 몰랐습니다. 정국은 화닥화닥 뛰노는 가슴을 진정할줄 모르며 집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기였습니다. 큰길에 나서자 개울 건너 창고앞에서 《우릉 우릉...》 탈곡기 돌아가는 소리가 귀가 메도록 들려왔습니다. 전등불이 둥둥 달린 마당 한복판에선 아주머니들이 송풍기를 돌린다, 키질을 한다, 밀알을 고루어 편다.... 야단법석이였습니다. 하늘엔 별들이 총총했습니다. 우둥산 머리에선 서늘한 저녁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정국은 자기 집 마당에 들어서자 《누나!》하고 힘있게 불렀습니다. 행주치마를 두르고 부엌문에 나선 누나는 《아니, 너 왜 늦었니?》하고 놀라운듯 물었습니다. 그러나 정국은 그말에 아랑곳없이 《누나!》하고 다시금 불렀습니다. 누나는 정국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다가 《너 왜 그러니?》하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그래도 정국은 대답없이 한참만에 이렇게 부르짖는것이였습니다. 《누나! 누나는 내 걱정말고 학교에 가!》 누나는 눈이 휘둥그래서 입만 벌리고 섰는데 정국은 다시금 웨쳤습니다. 《글쎄 가라는데두, 내 걱정은 하지 말구.》 누나는 그만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아니 정국아, 너 웬일이냐?》 그러나 흥분을 누를길 없는 정국은 얼굴에 함빡 웃음을 띠우고 저혼자 부르짖듯 말하였습니다. 《야- 참 좋은 사람들이야! 난 그런 사람들과 함께라면 산도 옮길수 있어! 바다두 메울수 있어!》 그리고는 누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나, 난 남들이 다 키워주겠다구 그랬어!》 《뭐?!》 깜짝 놀란 누나는 《아니 애야, 이제 뭐라구 했니?》하며 다우쳐묻는것이였습니다. 정국은 그만 누나의 태도에 덩둘해졌다가 한참만에야 머뭇머뭇 입을 열었습니다. 《이제 관리위원회에서 위원장아저씨랑 여물먹이할아버지랑 봉기 어머니랑 모두 모여서 그러던데 뭐.》 《그래?...》 두말없이 홱 돌아선 누나는 어느새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휭하니 뛰쳐나가는것이였습니다. (아니 왜 저럴가?) 눈이 퀭해서 그 자리에 박힌듯 서있는 정국은 도무지 영문을 알아차릴수 없었습니다. 그는 누나가 사라진 어둠속을 이윽히 바라보다가 걸음을 재우쳐 누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누나는 벌써 관리위원회사무실앞에 멈춰서있었습니다. 그런데 위원장아저씨의 방엔 주먹만한 자물쇠가 댕그러니 걸려있었습니다. 누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창고앞의 밀탈곡장으로 곧장 건너갔습니다. 과연 거기에 관리위원장아저씨가 있었습니다. 그는 콩알만큼씩 굵직굵직한 밀알을 한웅큼 집어들고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아주머니들에게 이런 말을 묻고있었습니다. 《자- 그래 금년에 모두들 100만t증산이 자신있습니까?》 이러자 아주머니들은 웅성웅성하는데 한 아주머니가 반죽좋게 오히려 되묻는것이였습니다. 《아주바이 생각은 어떻수?》 《내 생각엔 떼여논 당상이외다.》 《그러면 우리도 그렇지요!》 그러자 마당엔 와그르 웃음이 터졌습니다. 마당 한구석에 서있던 누나는 큰 용기라도 내는듯 위원장아저씨의 앞으로 다가서며 약간 고개를 숙여보였습니다. 그러자 위원장아저씨는 《아니 정애, 웬일이야?》하며 약간 놀라운 빛을 띄워보였습니다. 누나는 고개를 수굿하고 아무 대답이 업었습니다. 아저씨는 입가에 어린 흐뭇한 미소를 지울줄 모르며 《어디 조용한데 갈가?》하면서 밀짚이 듬뿍이 쌓인 뒤로 스적스적 걸어갔습니다. 아저씨는 밀짚을 깔고 적당히 걸터앉더니 《그래 웬일이냐?》하며 옆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누나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나 누나는 아래를 굽어볼뿐 아무런 대꾸도 없었습니다. 아저씨는 물었습니다. 《말을 해야지 이렇게 그냥 앉아있겠니?》 그래도 누나는 밀짚오래기를 집어들고 오무작거릴뿐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누나는 한참만에야 고개를 살며시 쳐들며 《아저씨...》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응.》 그러나 역시 누나는 고개를 떨구며 다음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기둥발에 기대여서서 엿듣고있던 정국은 여간 안타깝지 않았습니다. 《왜 누나는 저렇게 우물거릴가?...》 정국이 안타깝게 발끝을 달싹거리는데 그제야 누나가 들릴듯말듯 입을 열었습니다. 《저... 저희들때문에 오늘 무슨 얘기가 있었댔나요?》 《그래 있었다.》 아저씨는 이렇게 서슴없이 대답하는데 누나는 또 고개를 떨어뜨렸습니다. 아저씨는 《그건 왜?》하고 되묻는것이였습니다. 누나는 얌전히 일으켜세운 왼쪽무르팍에 얼굴을 기대고 한동안 말이 없더니 고개를 숙인채 공손히 말을 이었습니다. 《저... 전 이미 말하지 않았나요?...》 《그래서?》 이렇게 되묻는 아저씨의 어조는 전에없이 퉁명스레 울렸습니다. 아저씨는 언짢은듯 누나의 얼굴을 흘끔 쳐다보았습니다. 정국은 무슨 영문인지 알수가 없었습니다. 아저씨는 하늘 한끝에 시선을 던지고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기였습니다. 교교한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은 깊은 시름에 잠긴듯싶었습니다. 언제나 웃음이 사라질줄 모르던 두툼한 입가엔 괴로운 빛이 확연히 피여올랐습니다. 아저씨는 한참만에야 눈길을 쪼프린채 그 어떤 먼 회상에 잠긴듯 나직하나 깊숙이 울리는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습니다. 《그래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떻게 이 세상을 떠났는지 아느냐? 전쟁의 승리를 위해 투쟁하다 놈들의 폭격에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고말았다. 그래 너희 부모들이 세상을 떠날 때 너를 보았더라면 뭐라고 말했을것 같니? 아마두 <정애야. 너는 정국이를 데리고 꼭 이 마을을 아름다운 락원으로 꾸려다오. 조상들의 뼈가 묻힌 이 땅을 말이다!> 했겠지? 그런데 지금 정애는 어떠냐? 조합의 기대, 부모의 뜻을 어기고있지. 그래 네가 학교로 가는것이 단순히 배우러 가는것인줄 아느냐. 그건 조합의 장래발전을 위해서, 부모의 뜻을 잇기 위해서 그래서 가라는거야. 그런데 너는 못가겠단 말이냐?》 여기까지 얘기하고난 아저씨는 가슴이 답답한듯 땅이 꺼질듯이 한숨을 후- 내쉬였습니다. 그리고는 눈길을 쪼프린채 은하수가 가로 비낀 처마끝을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하늘에선 별찌 하나가 허공을 쭉 그으며 산너머로 기울었습니다. 앞에선 아주머니들의 두런두런한 목소리가 여기까지 간간이 들려왔습니다. 아저씨는 어성을 낮추며 부드러운 어조로 달래듯 말을 이었습니다. 《정애야, 아무렴 내가 네 심정을 모르겠느냐? 네가 학교에 가고싶어하는것두 동생을 차마 남에게 맡길수 없어 그러는것두, 그러나 그것이 바로 좁은 생각인게야. 그래 우리 제도하에서 정국은 단순히 네 동생인줄로만 아느냐? 그는 우리 조합의 아들이구 조국의 아들이야! 그런데 네가 응당 가야 할 대학을 망설인단 말이냐?》 아저씨는 다시금 조용히 말을 끊었습니다. 그는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자기의 친딸과 얘기하는듯 스스럼없는 태도로 또 말을 계속했습니다. 《글쎄 오늘두 정국이때문에 숱한 사람들이 내 방에 오지 않았겠니? 어디서 알고왔는지 와선 저마끔 정국이를 키우겠다는데 나는 그만 내가 키우겠다는 말을 입밖에 내지도 못했구나. 그래서 난 이렇게 생각했다. 정국이를 누구 한사람에게 맡길게 아니라 온 조합이 키우자구. 아무튼 한사람이 키우는것보다 100사람, 200사람이 키우는게 낫지 않겠니?》 이때 구름속에 가리웠던 열하루달이 빠끔히 얼굴을 드러냈습니다. 그러자 사위는 대낮같이 훤해졌습니다. 행길쪽에선 뜨락또르의 《퉁퉁퉁...》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와 함께 정국의 가슴도 세차게 들먹거림을 느꼈습니다. (아, 나는 어떻거면 이 신세를 갚을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어보는 정국은 숨막힐듯 뿌듯해오는 가슴이 활짝 열리게 마음껏 소리쳐보고싶었고 마음껏 웨쳐보고싶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의 달도 별도 뿌예졌습니다. (아, 이거?...) 화닥 놀랜 정국은 얼른 눈가에 손을 가져갔습니다. 그의 눈에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맑은 눈물이 층층 고여있었던것입니다. 그런데 아래를 굽어보니 누나도 슬며시 왼켠 손끝을 눈가에 가져가는것이였습니다. (아, 누나도 울고있구나!) 정국은 《아저씨》하고 부르짖으며 관리위원장아저씨의 품에 와락 안기고싶었습니다. 씨원한 밤바람이 정국의 뺨을 서느러이 어루만져주었습니다. 휘영청 달은 밝기도 했습니다.
정국이와 누나는 집뒤로 밋밋이 기여오른 산등성이에 올라앉아 정다운 고향마을을 굽어보고있었습니다. 나지막한 산밑으로 줄줄이 들어앉은 아담한 기와집들, 마을 저켠으로 흰 띠를 늘인듯 끝없이 뻗어흐른 자그마한 개울물, 산발마다 새로 꾸린 푸르싱싱한 과수밭들, 저쪽골짜기로 듬성듬성 들어앉은 소, 돼지우리들. 마을은 들판 한옆으로 오목이 들어앉아 그리 크지도 않고 모록이 모여앉은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정국은 볼수록 마음 흐뭇해지는것이였습니다. 정국은 제 흥에 겨워 옆에 가지런히 앉은 누나를 슬쩍 건드렸습니다. 《누나 좋지?》 그러자 누나는 말없는 가운데 빙그레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여 마을에서 오래도록 눈길을 뗄줄 몰랐습니다. 누나는 래일 학교로 떠나는것입니다. 관리위원장아저씨와 만난 며칠후 누나는 대학으로 시험치러 갔었는데 이틀전에 입학통지서가 조합에 왔던것입니다. 누나는 지금 너무나 크고 넓은 앞날의 희망에 마음달랠수가 없는듯 빙긋이 떠오른 웃음을 노상 지울줄 모릅니다. 지금 정국의 마음도 그랬습니다. 머리우로 둥둥 떠가는 구름마냥 그의 마음도 래일의 희망에로 끝없이 저 멀리 나래쳐가고있는것입니다. (누나가 이제 대학에 갔다오면 나도 대학에 갈테야. 누나는 마을의 농산기사가 되구, 나는 축산기사가 되구...) 이렇게 생각해보는 정국은 한바탕 목청껏 소리라도 쳐보고싶었습니다. 물론 정국은 누나와 헤여지는것이 여간 섭섭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래일에 올 행복한 새 생활로 해서 그의 마음은 그저 기쁘고 그저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는 이제 누나가 떠나게 되면 봉기네 집에 가있게 될것입니다. 조합에선 두루 토의하던 끝에 정국의 뒤바라지는 전적으로 조합에서 하고 살기는 좋은 동무가 있는 봉기네 집에서 지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생활반은 여물먹이할아버지네 웃방에서 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할아버지, 애들이 모여서 공부하는건 그 집 웃방에서 합시다. 그러면 정국을 매일 저녁 볼수 있을게 아닙니까?》 이렇게 되여서야 할아버지는 《정 그러면 할수 없지. ...》하면서 자기의 고집을 굽히였던것입니다. 요즘 마을사람들이 벌써 정국이를 아주 제집식구처럼 여기고있습니다. 며칠전 군에서 체육대회가 있었는데 전날 저녁 정국이네 집에는 세컬레의 운동화가 대번에 날아들어왔습니다. 마을아주머니들이 《얘 정국아, 래일 체육대회에 이 신발을 신고 가거라. 우리 집 애들두 사다주었다.》하면서 저마끔 들고왔던것입니다. 그날 저녁 전재고아인 새색시도 정국이네 집에 처음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정국이 모자에 씌우라고 자기가 직접 재봉기를 달달 돌려서 만든 옥양목씌우개를 들고왔던것입니다. 이렇게 동리사람들의 지극한 사랑과 념려속에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 정국은 차츰 조합의 모든것에 대해서 무심할수가 없었습니다. 길목의 게시판이 기울었으면 그걸 곧바로 세워놓고 돌멩이를 괴여주고, 짬만 있으면 들판으로 달려나가서 일손을 거들어주고... 이전엔 마을청소를 나오라면 잠을 못 깨 짜증낼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누구보다 아침 일찌기 일어나서 마을동구밖까지 큰 비를 휘휘 휘둘러 검불 하나 없이 쓸어놓군 하였습니다. 참말로 그에게 있어서 내 집이요, 우리 집은 온 조합인것입니다.... 《정국아!》 누나의 정다운 목소리에 제정신이 든 정국은 《응...》하며 누나를 돌아보았습니다. 누나는 언제나 그러하듯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차근차근 이렇게 일깨웠습니다. 《너는 앞으로 동리어른들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동무들과도 친하게 놀구...》 이 말에 정국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이며 《응!》하고 대답했습니다. 누나는 나직이 말을 이었습니다. 《그리구 절대 이 마을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된다. 일생을 고향마을의 행복을 위해 일하고 일생을 이 마을의 번영을 위해 일하구...》 정국은 다시금 이 말에 고개를 끄덕여보였습니다. 《응!》 이러는데 마을아래켠에서 《정애야-》 《정국아-》 하고 소리쳐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나와 정국이 흠칠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기엔 마을의 민청원(당시) 누나들과 정국이네 분단동무들이 모여서있었습니다. 그들은 래일이면 떠나게 될 누나를 축하하려고 이제껏 찾아다녔던것입니다. 《응- 내려간다-》 이렇게 마주 소리친 누나와 정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목을 잡고 마을로 뛰여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민청원누나들과 분단동무들도 와짝 떠들며 산등성이를 톺아 맞받아 달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정국이와 누나, 두 오누이를 한껏 껴안아주려는듯 가로 길게 늘어서서 손을 높이 흔들어보였습니다. 정국이와 누나도 그들의 품에 안기려는듯 손목을 꼭 잡은채 맞받아 뛰여내려갔습니다. 서쪽하늘엔 별들이 더욱 밝은 빛을 뿌리였습니다.
끝
주체50(196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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