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문학

잡지 《아동문학》 주체98(2009)년 제9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량 철 수

 

(아버지, 난 이젠 어쩌면 좋아요. 아버지!)

마음속으로 이렇게 부르짖는 옥녀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올랐다.

너부죽한 얼굴에 늘 서글서글한 웃음을 띄우군 하던 아버지의 얼굴이 눈앞에 우렷이 떠올랐다.

원래부터 아버지를 몹시 따르던 옥녀는 어머니가 미군놈들에게 잡혀간 지금 아버지가 더더욱 그리워났다.

인민군대인 아버지가 한시바삐 달려와 가증스러운 미군놈들과 《치안대》놈들을 모조리 족쳐버렸으면 얼마나 좋으랴.

옥녀의 눈앞에 어머니가 놈들에게 붙잡혀가던 오늘 낮의 일이 다시금 떠오르며 몸서리가 쳐졌다.

《흥, 그동안 덩실한 기와집에서 흰쌀밥을 먹으며 아주 잘 살았겠구만.》

해방전 지주놈의 아들이였던 《치안대》대장놈이 어머니앞에서 뇌까리던 말이였다.

어머니는 얼굴이 기다란 말상인 그놈의 상통을 불이 펄펄 이는 시선으로 쏘아보며 나직하나 준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 우리 공화국의 덕택으로 해방후 5년동안 정말 사람답게 살았다.》

《음, 그래서 네년의 남편은 애국미를 선참으로 바친 열성농민이 되였구 또 인민군대에까지 나갔구나.》

《사람이 은혜에 보답하는건 응당한 도리다.》

《흥, 그런데 이젠 그 공화국이 없어졌으니 어떡하지.》

《이놈아, 우리 공화국은 영원하다. 하루살이같은 네놈들이 망할 날은 멀지 않다.》

《에익, 이 악질빨갱이년…》

《치안대》대장놈은 선불맞은 승냥이처럼 날뛰며 권총을 뽑아들었다.

《엄마.》

옥녀는 엄마의 앞을 막아서며 팔을 꼭 부여잡았다.

《으응, 요년도 새끼빨갱이렷다?》

대장놈은 옥녀를 노려보더니 다시 어머니의 팔을 잡아당기며 《치안대》본부로 가자고 으르렁댔다.

어머니는 더럽고 끔찍한 송충이라도 와닿는것 같아 놈의 손을 탁 쳐버리였다.

《이년이 정말…》

대장놈은 이새로 이렇게 내뱉더니 어머니의 머리칼을 움켜잡아 힘껏 나꾸어챘다.

어머니는 그만 몸의 중심을 잃고 땅바닥에 태를 치며 쓰러졌다.

《엄마!》

옥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쓰러진 어머니의 곁에 다가갔다.

《울음을 그쳐라. 네가 울면 저 원쑤놈들이 좋아한다.》

어머니는 손을 들어 옥녀의 눈물자국을 지워주며 준절히 말했다.

옥녀는 머리를 끄덕이며 울음을 씹어삼키였다.

그리고는 어머니의 팔을 힘껏 잡아당겨 어머니가 일어나도록 도와주었다.

《우리 옥녀가 참 용쿠나.》

어머니는 흐트러진 옥녀의 머리를 곱게 쓰다듬어주었다.

《자 가자, 이년.》

놈들은 어머니를 끌고나갔다.

《엄마!》

옥녀는 어머니를 따라가며 애절히 부르짖었다.

《노우, 노―》

눈알이 새노란 키꺽다리 미군장교놈이 옥녀의 앞을 막아나섰다.

옥녀가 놈을 피하여 에돌아 나가려는데 그놈은 털이 부수수한 손으로 옥녀의 턱을 받쳐들더니 뭐라고 알지 못할 소리로 씨벌여대는것이였다.

옥녀가 또다시 옆으로 빠져나가려 하자 장교놈은 그의 귀뺨을 후려쳤다.

옥녀는 눈에서 시퍼런 불이 번쩍하는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러지고말았다.

또다시 울음이 터져나오려는것을 입술을 앙다물고 참아냈다.

원쑤놈들에게 끌려가는 어머니의 뒤모습이 점점 멀어져갔다.

《엄마―아!》

옥녀는 어머니쪽을 향해 팔을 내뻗치며 피터지게 웨치였다.

《옥녀야― 아버지의 당부를 잊지 말아라.》

어머니도 옥녀쪽을 뒤돌아보며 애타게 부르짖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가에 그렁그렁 고였던 눈물이 어느 사이에 볼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꼭 감아쥔 종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내는 옥녀의 머리에는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행복에 넘친 생활을 누리던 전쟁전의 일들이 마치도 영화화면처럼 떠올랐다.

해방전 지주놈네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아오던 아버지가 꿈에서조차 생각해보지 못했던 자기 땅을 분여받고 흙에다 얼굴을 비비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던 일, 그 땅에서 지은 농사가 매해 풍년이 되여 추녀가 건듯 쳐들린 기와집을 새로 짓고 외양간에 누렁황소까지 사다 매던 일, 그중에서도 제일 잊을수 없는 일은 아버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에 입학하러 가던 일이였다.

대대로 머슴살이를 하느라 학교문전에도 가보지 못한 자기네 집안이였다.

그런데 바로 옥녀 자기가 해방덕에 이처럼 학교에 입학하게 된것이였다.

입학식이 있던 날, 옥녀와 같이 지난날 지지리 못살던 머슴군이나 소작농의 자식들이 학교정문에 들어서자 교원들과 마을사람들이 아이들의 가슴에 커다란 꽃송이들을 달아주고 귀가 멍멍하도록 박수를 쳐 축하해주었다.

그날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옥녀는 꿈만 같은 기쁨과 행복에 겨워 학습장에 글을 쓰고 또 썼다.

난생처음 자식을 학교에 보낸 아버지, 어머니도 너무 감격스러워 온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연필을 꼭 감아쥐고 열심히 글을 쓰는 옥녀의 모습을 눈물이 글썽해서 바라보던 아버지는 석쉼하고, 갈린 목소리로 말했다.

《옥녀야, 오늘의 꿈같은 행복을 안겨주신 김일성장군님께 우리 충정을 다바쳐 보답하자꾸나. 아버지, 어머니는 농사를 잘 짓구, 너는 공부를 잘해서 말이다.》

옥녀도 그날 공부를 잘하리라고 굳게 속다짐했었다.

옥녀가 학교에 입학한 바로 그해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였다.

온 마을사람들이 떨쳐나 북과 꽹과리를 울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리인민위원회 앞마당에 갔더니 높이 솟은 기다란 장대에서 한가운데에 빨간 오각별이 그려진 람홍색 커다란 기발이 휘날리고있었다.

《옥녀야, 저것이 바로 우리 나라의 기발이란다. 고맙고 귀중한 내 조국의 상징이란다.》

기발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번쩍이고있었다.

그해에 아버지는 마을의 세포위원장이 되고 또 마을적으로 제일 많은 애국미를 바치여 표창장까지 받았다.

또 옥녀 자기는 최우등을 하여 학교와 마을에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소문이 났다.

정말 경사에 경사가 겹치는 해였다.

지난날을 돌이켜보던 옥녀는 지난해 9. 9절날에 있었던 일이 어제일처럼 생생히 떠올랐다.…

옥녀는 누군가 흔들어깨우는 바람에 눈을 번쩍 떴다.

앞을 바라보니 아버지의 둥글넙적한 얼굴이 자기를 내려다보고있었다.

《자, 이젠 그만 일어나거라.》

옥녀가 누운채로 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채 밝지 않은 새벽이였다.

《좀더 잘래요.》

옥녀는 눈을 비비며 잠기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우리 공화국이 창건된 명절인데 빨리 일어나야 해.》

옥녀는 잠기가 삽시에 싹 가셔지는것을 느끼며 벌떡 일어나앉았다.

《옥녀야, 얼른 세면을 하고 새옷을 갈아입어라. 자, 당신두 얼른 차비를 하오.》

아버지는 옥녀와 어머니에게 재촉을 했다.

옥녀는 아버지가 왜 이른새벽부터 이처럼 서두르는지 알수 없었다.

하여튼 오늘이 명절이라는것과 새옷을 갈아입으라는 말에 기분이 둥둥 떠올랐다.

어머니는 어느 사이에 치마저고리를 갈아입고, 머리단장까지 끝내고 아버지도 군이나 면으로 회의를 하러 다닐 때마다 입군 하는 새옷을 입었다. 옥녀는 얼마전에 새로 지은 색동저고리와 치마를 꺼내입었다.

옥녀가 새옷을 입고 옷매무시를 살피는데 아버지가 환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옥녀가 그렇게 차려입으니까 옛날 선녀 부럽지 않구나. 자, 이젠 밖으로 나가자.》

아버지는 이러며 장농속에서 흰천으로 정히 싼 물건을 꺼내들었다.

옥녀는 아버지가 새벽부터 어디로 나가자는것인지 몹시 궁금해났으나 여느때없이 엄숙해보이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는 그만 물어볼념을 내지 못하였다.

마당에 나선 아버지는 흰천으로 쌌던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것은 지난해 공화국이 창건되던 날 리인민위원회 앞마당에서 보았던 바로 그 공화국기발이였다.

아버지는 기발을 펼치여 미리 준비해놓았던 기발대에 매였다. 그리고 사다리를 타고 지붕우로 올라가 기발대를 세웠다.

금방 떠오르는 아침해빛을 받아 선명한 람홍색으로 빛나는 기발은 불어오는 바람결을 타고 힘차게 펄럭이였다.

공화국기발을 바라보는 옥녀는 가슴이 뭉클해지며 코마루가 찡해졌다.

마당에 다시 내려선 아버지는 어머니와 옥녀를 돌아보며 말했다.

《장군님께서 나라를 해방시키고 공화국을 창건해주시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됐겠느냐. 이 아버지는 아마도 종신머슴살이신셀 면치 못했을거구, 옥녀 너두 지주놈집 아이보개가 아니면 머슴이 되였을거다.

정말 장군님께서 세워주신 공화국이야말로 우리 행복의 요람이구 삶의 전부다. 자, 오늘은 우리 공화국의 생일날이니 공화국기발을 향해 인사를 드리자.》

아버지는 공화국기발을 향해 정중히 허리굽혀 인사를 하였다.

옥녀도 어머니와 함께 인사를 하였다.

이날 마을에서는 옥녀네 학교운동장에서 공화국창건 1돐을 경축하여 성대한 모임과 체육유희놀이들을 진행하였다.

아버지는 어느 사이에 만들어두었댔는지 색종이로 오려붙인 수십개의 공화국기발들을 학교운동장 상공에 줄을 매달아 띄워놓았다.

9월의 맑고 푸른 하늘에서 팔랑이며 유난히 빛나던 수십개의 공화국기발들, 그 아래에서 벌어졌던 가지각색의 즐겁던 체육유희놀이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한없이 벅차오르게 하는것이였다.…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더니 어둠은 어느 사이에 온 누리를 콱 덮치였다.

옥녀는 불도 켜지 않은 방안에 그린듯이 앉아있었다. 어머니가 놈들에게 잡혀간 뒤 옥녀는 두끼나 밥을 건네였지만 배가 고픈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였다.

전쟁전 현물세창고로 쓰던 곳에 갇히워있는 어머니는 지금쯤 얼마나 배가 고프고 추울가, 또 놈들이 잡아간 애국자들을 마구 고문한다는데 어머니도 매를 많이 맞지 않았을가. 이러한 생각들로 하여 옥녀의 가슴은 막 졸아드는것만 같았다. 그럴수록 행복스럽던 자기네 생활을 무참히 짓밟으려는 원쑤놈들에 대한 분노가 불길처럼 활활 타올랐다.

문득 놈들에게 끌려가면서도 아버지의 당부를 잊지 말라고 웨치던 어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밟혀왔다.

(아버지의 당부!…)

옥녀는 입속말로 조용히 외워보았다. 옥녀는 어머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아버지는 미제원쑤놈들이 전쟁의 불을 지르자 공화국의 품속에서 행복했던 모든 생활을 목숨으로 지키려 용약 전선으로 달려나갔다. 아버지는 군복을 입고 전선으로 떠나던 날 작별의 아쉬움으로 눈물이 글썽해있는 옥녀를 꼭 그러안아주며 간곡히 말하였다.

《옥녀야, 지금 미제놈들과 그 앞잡이놈들이 우리의 행복을 뺏으려고 미쳐날뛰고있다. 이놈들과 결사전을 벌려 싸우지 않고서는 우리의 행복을 지켜낼수가 없다. 아버지는 총을 들고 전선에서, 어머니와 너는 후방에서 잘 싸우고 승리하는 날 떳떳하게 만나자.》

옥녀는 그때 미처 대답은 못하고 머리만 끄덕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원쑤놈들과의 싸움에서 자기도 꼭 한몫 하리라고 단단히 결심을 하였었다.

어머니는 바로 그날의 아버지의 말씀을 잊지 말라고 한것이였다.

이제야말로 원쑤놈들과 결판을 낼 때가 온것이다.

원쑤놈들은 마을에 달려들어 학교를 빼앗고 어머니를 비롯한 사람들을 마구 잡아가고 또 죽이고있다.

아버지가 말씀했던것처럼 우리의 행복했던 모든 생활을 모조리 빼앗으려 날뛰고있는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하면 그놈들과 싸울수 있을가, 아직 겨우 열살밖에 되지 않은 내가 그놈들과 꽤 싸울수 있을가? 옥녀는 지금처럼 자기가 아이인것이 한스러워본적은 없었다.

이때 어디선가 《똑, 똑, 똑.》하는 소리가 들려오는것 같았다.

옥녀는 화뜰 놀라며 귀를 바싹 강구었다. 하지만 사위가 고요할뿐 더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옥녀는 자기가 불도 켜지 않은채 이렇게 맥을 놓고 주저앉아있는것을 알면 아버지가 몹시 섭섭해하실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옥녀는 얼른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어머니가 있을 때처럼 방도 깨끗이 거두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두루 방안을 살펴보았다.

《똑, 똑, 똑.》

또다시 아까와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분명 마당가의 삽짝문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한순간 온몸이 오싹해지며 머리칼이 곤두서는것 같았다.

또 어떤 나쁜 놈들이 달려들지나 않는가 해서였다. 하지만 인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조심스럽게 들리는 문기척소리는 나쁜 놈이 아니라는것을 말해주는것이였다.

옥녀는 마당으로 나가 대문쪽에 대고 조용히 물었다.

《누구예요?》

《옥녀야, 나야 나.》

조심스러우면서도 성급하게 들리는 목소리의 임자는 뜻밖에도 철남이였다.

철남이는 옥녀와 한학급동무인데 그 애네 아버지, 어머니 역시 농사를 잘 지어 나라에 애국미를 많이 바친 열성농민이라고 하여 놈들이 붙잡아갔다. 철남이는 그후 외가집이 있는 마을로 간다면서 없어졌댔는데 오늘 밤 불쑥 이렇게 나타난것이였다.

옥녀는 얼른 삽짝문을 열어주었다.

철남이는 고양이처럼 발자국소리도 내지 않고 살그머니 들어섰다.

《넌 외가집에 갔다더니 언제 왔니?》

옥녀는 자기 혼자 이렇게 외롭게 있을 때에 철남이가 나타난것이 얼마나 반가운지 알수 없었다.

《아까 낮에…》

시무룩해서 대답하는 철남이의 모습은 어쩐지 풀이 죽어있었다.

철남이는 원래 장난이 세차고 성격이 쾌활한 아이였다. 그래서 장난을 치다가 어른들한테 되게 꾸중을 들어도 그리 욕을 타지 않았다. 옥녀에게 있어서 그 애는 그 무슨 눈물이나 락심같은것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는 애로 보였었다.

옥녀는 그렇게 풀이 죽은 철남이의 모습을 처음 보는지라 의아한 표정으로 그 애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손을 잡아 방안으로 이끌었다. 방안으로 들어온 철남이의 눈가에는 무어라 말할수 없는 슬픈 빛이 어려있었다.

《철남아, 무슨 일이 있었니?》

옥녀는 가슴속에서 심장이 쿵쿵 뛰는것을 느끼며 불안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옥녀야.》

철남이는 이렇게 부르고도 고개를 숙인채 미처 말을 잇지 못하고있다가 머리를 번쩍 쳐들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했다.

《미군놈들이… 미군놈들이 우리 외할아버지를 총으로 쏘아죽였어. 외할머니는 잡아가구…》

《뭐?…》

옥녀는 어마지두 놀라며 커다래진 눈으로 철남이를 지켜보았다.

지난해에 언젠가 옥녀는 철남이를 따라 웃마을에 있는 그 애네 외가집에 갔던적이 있었다. 그때 철남이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극진하게 대해주던 고마왔던 일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았다.

《네가 아래마을 세포위원장네 딸이라지. 그 사람이 해방전에 숱한 고생을 하더니 오늘은 참 이렇게 고운 딸까지 두구 락을 보는구만.》

철남이 외할아버지는 옥녀의 손을 꼭 부여잡고 어루쓸며 목메인 소리로 말했다. 외할머니는 떡을 쳐준다, 닭을 잡아준다 하며 부산을 피웠다.

그렇게 인정깊고 어질던 그분들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이고 잡아간단 말인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내는 철남이를 바라보던 옥녀는 자기의 슬픔까지도 겹쳐 가슴이 쓰리도록 미여져왔다.

《그놈들이 너의 외할아버지는 왜 죽이구 또 외할머니는 왜 잡아갔니?》

옥녀는 미여져오는 가슴을 가까스로 다잡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눈굽을 훔쳐내며 터져오르는 설음을 진정시키던 철남이는 잠시후에야 겨우 말을 시작했다.

철남이네 외가집이 있는 마을에서는 며칠전부터 삐라들이 여기저기에 나붙기 시작했다.

미군놈들과 《치안대》놈들은 말그대로 눈이 벌컥 뒤집혀 돌아갔다. 하지만 도무지 누구들의 소행인지 알수 없었다.

악이 오를대로 오른 원쑤놈들은 마을의 집집을 발칵 뒤지며 지랄을 했다.

철남이네 외가집에 달려든 원쑤놈들은 《검둥이》가 사납게 짖는다고 하여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쏘아죽이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밖으로 끌어냈다.

《령감, 삐라를 붙인 놈들을 모르는가?》

《검둥이》를 쏘아죽인 놈이 총끝으로 할아버지의 가슴을 쿡쿡 찌르며 씨벌였다.

할아버지는 불이 펄펄 이는 시선으로 그놈을 쏘아보다가 침을 탁 뱉으며 말했다.

《난 모른다, 그렇지만 내게 삐라가 있대두 붙이겠다.》

《뭐, 뭐라구? 이놈의 령감태기가…》

그놈은 총탁을 들어 할아버지의 어깨를 내리쳤다. 할아버지는 그만 푹 꼬꾸라졌다.

《이 악귀같은 놈들아.》

할머니가 쓰러진 할아버지를 안아일으키며 부르짖었다.

할아버지는 피 흐르는 입귀를 손으로 훔쳐내며 원쑤놈들을 향해 불을 뿜듯 내쏘았다.

《이놈들아, 네놈들이 망할 날은 멀지 않았다. 인민군대가 돌아와 네놈들을 꼭 멸살시키고야…》

순간 《땅》하는 총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는 가슴을 움켜잡으며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권총을 뽑아든 미군장교놈의 낯짝에 흉물스런 웃음이 비끼였다.

이날 원쑤놈들은 할아버지를 쏘아죽인것만도 성차지 않아 할머니를 붙잡아갔다.

철남이의 이야기를 듣던 옥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원쑤놈들에 대한 증오심이 활화산처럼 활활 타번졌다.

《한데 너의 어머닌 어디 갔니?》

철남이가 집안을 휘둘러보며 물었다.

옥녀는 그만 커다란 슬픔이 온 가슴속을 휘젓는것 같았다. 그는 간신히 슬픔을 씹어삼키다가 떠듬거리며 대답했다.

《우리 엄마두 오늘 낮에 잡혀갔어.》

《너의 어머니두? 에익, 그놈들을 그저…》

철남이는 불끈 틀어쥔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빨리 우리 아버지들이, 인민군대들이 와서 그놈들을 모조리 쳐죽였으면 좋겠는데…》

옥녀는 다시금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며 중얼거렸다.…

다음날, 그밤중으로 옥녀네 집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던 철남이가 새벽을 타서 다시 나타났다. 철남이의 얼굴에는 어제와 달리 기쁜 빛이 어렸다.

철남이는 마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어제밤 끝끝내 인민유격대에서 정찰활동을 하고있는 소년단지도원선생님을 만났던것이였다. 소년단지도원선생님은 이제 하루이틀내로 인민군대가 곧 재진격해나온다는것, 철남이랑 옥녀랑 맥을 놓지 말고 미군놈들과 그 앞잡이놈들을 반대하여 용감하게 싸워야 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철남이에게서 그 말을 전해듣는 순간 옥녀의 눈에서는 그 무슨 불꽃같은것이 반짝 튕겼다. 옥녀는 철남이의 손을 덥석 그러잡으며 성급히 물었다.

《그런데 너의 외가집이 있는 마을에선 삐라를 붙였다는데 거기엔 뭐라고 씌여있었니?》

《응, 〈미제침략자들에게 죽음을 주라!〉, 〈인민군대는 곧 돌아온다!〉,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이런 내용들이였어.》

철남이는 눈에 생기를 담으며 마치도 자기가 삐라를 붙이기라도 한것처럼 신이 나서 대답했다.

《그으래.》

옥녀는 눈을 깜박거리며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기였다.

그의 눈앞에는 삐라를 보며 혼비백산하여 눈깔이 뒤집혀 돌아가는 원쑤놈들의 몰골이 선히 떠올랐다.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야참, 우리도 삐라를 붙일수 없을가, 그러면 놈들을 속시원히 복수할수 있을텐데, 그래야 앞으로 돌아올 아버지도 떳떳이 맞이할수 있을것이다. 골똘히 생각을 굴려나가던 옥녀의 눈가에 밝은 빛이 확 피여올랐다.

《철남아, 우리도 삐라같은걸 붙여보자.》

《뭐? 삐라를… 좋아, 그런데 삐라를 어디서 구하겠니?》

대뜸 찬성해나서던 철남이는 그만 풀이 죽어버리고말았다.

《내게 좋은 생각이 있어. 자, 날 따라와.》

옥녀는 등잔불을 켜들고 밖으로 나섰다. 철남이도 호기심이 잔뜩 동해가지고 옥녀의 뒤를 따랐다.

옥녀가 나간 곳은 집뒤에 있는 감자움이였다.

철남이를 데리고 감자움속에 들어간 옥녀는 벼짚들을 헤치고 나무궤짝 하나를 찾아냈다. 옥녀는 궤짝뚜껑을 열고 그안에서 기름종이에 정히 싼것을 꺼내 헤쳐놓았다.

《야! 공화국기발.…》

철남이의 입에서 탄성이 튀여나왔다.

철남이의 눈앞에는 차곡차곡 겹쳐서 쌓아놓은 색종이로 만든 수십장의 공화국기발들이 나타났다.

《이건 우리 아버지가 지난해 9. 9절날에 학교운동장에 띄워놓았던 기발들이야.》

옥녀와 철남이는 즐겁고 기뻤던 그날의 일들을 생각하며 공화국기발들을 바라보았다.

《철남아, 난 삐라대신 이 기발들을 거리에 내다붙이자는거야.》

옥녀는 정숙해진 얼굴로 철남이를 바라보았다.

철남이는 옥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만세를 부르듯이 두손을 쳐들어 흔들며 웨쳤다.

《좋아, 참 좋은 생각이다.》

이윽고 옥녀와 철남이는 기발들을 어떻게 붙이겠는가 하는 문제를 토의하고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아예 오늘 밤부터 시작하기로 하였다.

날씨도 옥녀네를 도우려는지 밤하늘에 구름장들을 덮어놓아 별빛마저 감추어버렸다.

옥녀와 철남이는 서로 망을 보아가며 거리의 여기저기에 기발들을 붙이였다.

처음에는 누가 방금 뒤덜미라도 덮치는것 같아 머리칼이 곤두섰다.

얼마후 오늘 밤 가지고나온 기발들을 다 붙였을 때에는 얼마나 땀을 흘렸는지 잔등이 축축해났다. 하지만 자기들의 힘으로 원쑤놈들을 복수하는 장한 일을 해냈다는 생각으로 마음은 날아갈듯이 기뻤다.

다음날 거리는 발칵 뒤집혔다.

미군놈들과 《치안대》놈들이 눈깔이 뒤집혀가지고 거리와 골목으로 미친듯이 싸다녔으나 헛물만 켰을뿐이였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갔다.

옥녀와 철남이는 그사이 매일 밤 공화국기발들을 가지고 거리에 나갔다. 이제는 대담해져 원쑤놈들이 둥지를 틀고있는 학교담장벽에까지 기발을 붙이였다.

학교담장에 기발을 붙인 이튿날, 갑자기 귀청이 째지는듯 한 싸이렌소리가 온 거리와 골목들을 누비였다. 뒤따라 자동차에 설치한 휴대용확성기로 《치안대》대장놈이 지껄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 10시까지 모든 소학생들은 학교운동장에 모이라, 미군장교님의 중요말씀이 있겠다. 만약 오지 않은 아이놈이 있으면 엄벌에 처하겠다.》

옥녀는 놈들이 갑자기 아이들, 그것도 왜 소학생들만 모이라고 하는지 아무리 궁리해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철남이 역시 머리를 기웃거리다가 말했다.

《하여간 한번 가보자꾸나. 그놈이 뭐라구 지껄이나.…》

옥녀는 철남이와 함께 학교운동장으로 갔다.

운동장에는 이미 수십명의 아이들이 모여들어 웅성거리고있었다. 운동장둘레로는 총을 비껴든 괴뢰군놈들이 띠염띠염 서서 살벌한 기운을 풍기고있었다.

잠시후 또 한패의 아이들이 《치안대》놈들에게 등을 밀리워 운동장에 들어섰다. 이윽고 미군장교놈이 《치안대》대장놈을 뒤에 달고 아이들앞에 나타났다.

《자, 조용들 해라. 이제 미군장교님이 말씀하시겠다.》

《치안대》대장놈이 왜가리청으로 소리를 질렀다. 뒤이어 미군장교놈이 뒤짐을 지고 거드름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영어로 뭐라고 한참 씨벌여댔다. 그 말을 《치안대》대장놈이 되받아 통역했다.

《너희들두 알겠지만 요사이 거리에는 여기저기 공화국기발들이 나붙는 비상사건이 생겼다. 그런데 기발을 붙인 높이로 보아 그건 분명 너희들같은 소학생놈들이 한짓이 틀림없다.》

옥녀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혀끝을 꼭 깨물었다. 자기나 철남이나 미처 그런 생각까지는 하지 못한것이였다. 기발을 붙인 높이가 단서로 될줄은 정말 몰랐다. 운동장으로 대장놈의 왜가리청이 다시금 울려퍼졌다.

《에, 그래서 이제라도 기발을 붙인 애들은 솔직히 앞으로 나서거라. 사실 너희 애들에게야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뒤에서 시킨 놈들이 나쁜 놈들이지. 솔직히 자백만 하면 용서해줄뿐만아니라 장교님이 큰 상도 주시겠다고 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던 운동장에서는 호수가에 돌덩이라도 던진듯 파문이 일어났다. 아이들은 서로마다 돌아보며 수군거리였다.

《자, 빨리 나서거라.》

이렇게 재촉을 하며 운동장을 빙 둘러보던 대장놈은 드디여 눈알을 사납게 굴리며 고아댔다.

《음, 나서지 않겠단 말이지. 좋다, 그러면 우리가 밝혀내는 방법이 있다. 자, 다섯명씩 모여서 앞으로 나서라, 사진을 찍어야겠다.》

옥녀는 물론 운동장에 모인 모든 아이들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무슨 사진을 갑자기 찍자는것인지 영문을 알수 없었다.

대장놈은 자동차있는 곳으로 가더니 사진기를 하나 들고 돌아왔다.

《에, 이 사진기로 말하면 미국제특수사진기여서 사진을 찍으면 죄를 지은 놈의 얼굴은 빨갛게 나타난다. 그러니 이제라두 제발로 나서거라.》

대장놈은 여우같은 웃음을 짓고 운동장을 한바퀴 휘 둘러보더니 졸개놈들에게 고함을 쳤다.

《야, 다섯놈씩 앞으로 끌어냇.》

운동장에서는 삽시에 복닥소동이 일어났다. 《치안대》놈들이 꽥꽥거리며 아이들을 다섯명씩 조를 무어 앞으로 끌어냈다.

벌써 몇개의 조가 나가 사진을 찍히웠다. 얼마 안있으면 옥녀와 철남이의 차례도 될판이였다. 옥녀는 가슴이 콩콩 뛰는것을 겨우 눅잦히며 철남이쪽을 돌아보았다. 철남이 역시 불안스러운 얼굴색을 감추지 못하며 서성대고있었다.

(나랑 철남이 얼굴이 빨갛게 나오면 어쩔가.)

조바심이 난 옥녀가 입술을 감빨며 서있는데 놈들이 옥녀를 비롯한 다섯명의 애들을 앞으로 내몰았다. 마침 철남이는 옥녀와 같이 나가게 되지는 않았다.

옥녀는 눈을 부릅뜨고 사진기와 사진을 찍어대는 대장놈을 쏘아보았다. 그러다가 대장놈이 사진기를 눈에 대고 샤타를 누르는 순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만 옆으로 얼굴을 돌리고말았다.

《아하, 요 계집년, 앞으로 나왓.》

대장놈은 독수리가 병아리를 덮치듯 어느사이에 옥녀의 팔을 잡아 앞으로 잡아챘다.

《음, 옥녀 네년이 한짓이 틀림없구나. 얼굴을 돌리는것을 보니까.…》

대장놈은 이발새로 침을 찍 내쏘더니 다시 흥이 나서 뇌까렸다.

《흥, 요 악질빨갱이년아, 깜빡 속았지. 세상에 얼굴이 빨갛게 나오는 사진기가 어디에 있겠니. 자 이젠 네년에게 기발을 붙이라구 시킨놈과 또 같이 붙인 놈을 대거라. 그럼 넌 용서해줄테다.》

옥녀는 가슴속에서 불이 이는것 같았다. 미군놈이나 이런 메돼지같은 놈에게 속아넘어간 자신이 막 저주스러웠고 그만큼 또 교활하고 음흉한 놈들이 증오스럽기 그지없었다.

《어서 말해봐라. 여기에 서있는 애놈들중에서 어느놈이 너와 함께 기발을 붙였니? 그리고 그런짓을 하라고 누가 시켰니?》

대장놈은 마치 살이라도 베여줄것처럼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옥녀의 귀전을 간지럽히였다.

《난 몰라, 모른단 말이야.》

옥녀는 불이 펄펄 이는 눈길로 놈을 쏘아보았다.

《모른다구? 자, 그러지 말구 빨랑 말해.》

놈은 이번엔 좀 거치른 어조로 재촉했다.

옥녀는 운동장에 모여선 아이들을 빙 둘러보았다. 그들은 자기를 걱정해주는듯싶기도 했고 용하다고 용기를 북돋아주는것 같기도 했다. 옥녀는 아이들속에 서있는 철남이와 눈길이 마주치는 순간 그만 몹시 불안해졌다. 철남이는 울상이 된 얼굴로 자기를 지켜보는것이였다. 저러다가 성격이 급한 애가 어떤 일을 저지를지 알수 없었다. 옥녀는 야무진 목소리로 급하게 웨쳤다.

《난 모른다, 몰라. 기발은 나 혼자 붙인거다.》

《에익, 애비에미를 닮아 지독하기 짝이 없는 요 빨갱이년.…》

대장놈은 드디여 승냥이본성을 드러내며 옥녀를 주먹으로 치고 발길로 마구 걷어찼다.

옥녀는 그만 쓰러졌다. 삽시에 피투성이가 되여버린 그는 가물거리는 의식속에서 자기를 애타게 부르는 동무들의 목소리를 마치도 꿈나라에서처럼 겨우 가려들었을뿐이였다.

옥녀는 《치안대》본부에서 정신을 차렸다. 온몸의 여기저기 쏘고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하지만 자기의 아픔보다도 철남이랑 어떻게 되였는지 걱정스러웠다.

《음, 네년이 정신을 차렸구나. 이제라도 말을 해라. 그럼 널 당장 집에 보내줄테다. 그렇지 않으면 저길 봐라.》

대장놈은 눈을 부라리며 방 한쪽구석을 가리켜보였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고문을 하는 흉기들이 널려져있었다.

옥녀는 대장놈의 태도로 보아 아직 철남이에 대해서는 모르는것 같아 어느정도 안심이 되였다. 그는 대장놈의 흉물스런 상통이 보기 싫어 고개를 외로 돌려버리고말았다.

《이년, 아직두 입을 열지 않을테냐.》

대장놈이 사나운 이발을 드러내고있는데 책상우에 놓인 전화통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질러댔다.

송수화기를 쳐들었던 대장놈은 갑자기 허리를 굽석굽석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한참 전화를 받던 대장놈은 옥녀쪽으로 돌아서더니 이제까지의 태도와는 정반대로 한껏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말했다.

《미군장교님이 너를 관대히 용서해주라고 한다. 네가 철이 없어 그렇게 하였으니 그만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그리고 네 어머니도 인차 내보내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니 그리 알아라.》

옥녀는 영문을 알수 없었다. 승냥이같은 원쑤놈들이 왜 갑자기 이런 《인정》을 베푸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옥녀가 집으로 돌아온것은 저녁어스름이 깃들무렵이였다.

어둠이 나래를 펴자 옥녀는 불쑥 철남이를 찾아가보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기때문에 걱정하고있을 그 애를 안심시켜주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도 의논하고싶었다. 옥녀가 차비를 하고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울밖에서 누군가가 언뜻 사라지는것이 눈에 띄였다. 옥녀는 온몸이 바싹 긴장해지는것을 느꼈다. 옥녀는 그제서야 모든것이 깨달아졌다. 놈들이 자기를 내놓고 몰래 감시를 하는것이였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철남이까지 잡아들이자는것이였다.

옥녀는 집으로 다시금 들어오고말았다. 교활한 원쑤놈들의 검은 속심을 알게 되자 더더욱 격분이 치미는 옥녀였다.

(이제는 어쩌면 좋을가?)

옥녀는 몇번이나 자신에게 물었다. 이제 주저앉아버리면 결국은 원쑤놈들에게 지는것으로 될것이였다. 그리고 철남이도 어느땐가는 자기에게로 찾아오다가 놈들에게 잡힐것이다.

옥녀는 이를 꼭 사려물었다. 차돌처럼 굳은 결심이 눈가에 어리였다. 옥녀는 걸상을 놓고 올라서 집천정의 한쪽구석을 올리밀었다. 그리고는 손을 더듬어 흰 천으로 정히 싼 물건을 꺼내들었다. 방바닥에 내려선 옥녀는 흰 천을 조심히 헤쳤다. 그러자 오각별 빛나는 커다란 람홍색공화국기발이 나타났다. 그것은 아버지가 지난해 9. 9절에 지붕우에 띄워놓았던 그 천기발이였다.

옥녀는 이윽토록 기발을 들여다보았다. 기발우로 너부죽한 아버지의 얼굴과 동그스름한 어머니의 얼굴이 함께 어리며 자기를 바라보는것이였다.

(아버지, 어머니, 전 꼭 아버지, 어머니의 당부대로 살겠어요. 그리고 소년단지도원선생님, 절 믿어주십시오.)

옥녀는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리고 기발을 다시금 차곡차곡 접어 품속에 정히 간수했다.

새벽이 가까와올무렵 옥녀는 결연히 집을 나섰다. 그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총총히 발걸음을 옮겼다. 사나운 칼바람이 달려들어 온몸을 후려쳤으나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옥녀가 간 곳은 전쟁전에 큰 공장이 자리잡고있던 곳이였다. 미군놈비행기의 폭격으로 공장건물은 무너져버렸으나 높은 굴뚝만은 우뚝 솟아있었다.

옥녀는 굴뚝밑에 가섰다. 마침 굴뚝에는 꺾쇠같은것으로 박아놓은 쇠사다리가 있었다. 옥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 아니… 저년이 어쩌자구?》

굴뚝아래에서 옥녀를 미행하던 놈이 바빠맞아서 소리쳤다. 그놈은 옥녀가 굴뚝아래에서 그 누구와 만날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뜻밖에도 굴뚝으로 올라가자 몹시 바빠맞은것이였다.

놈이 옥녀를 향해 달려오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놈의 뒤통수를 큰 돌멩이로 힘껏 깠다. 놈은 괴상한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뻐드러졌다.

《아니, 철남이가?…》

철남이와 그옆의 이름모를 한 아저씨가 옥녀를 향해 주먹을 흔들어보이며 싱긋 웃었다. 옥녀도 그 아저씨와 철남이에게 손을 흔들었다.

옥녀는 더욱 배심이 든든해졌다.

옥녀는 힘차게 굴뚝의 맨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공화국기발을 꺼내 사다리의 맨 웃쪽란간에 기발을 비끄러매였다. 쉽게 풀어지지 않게 몇번이나 꽁꽁 조여맸다.

동녘하늘이 희붐해지며 려명이 불타기 시작했다.

어느덧 아침해가 서서히 얼굴을 내밀자 람홍색의 공화국기발은 아침해빛을 받아 더더욱 선명한 색을 드러내며 세차게 펄럭이였다. 옥녀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웅성 물밀듯이 모여들고있었다. 그들은 공화국기발을 우러러보며 저저마다 환성을 터쳤다.

바로 그 시각 재진격해나오는 인민군대와 인민유격대아저씨들이 미군놈들과 그 앞잡이놈들을 무자비하게 족치기 시작했다.

거리는 우렁찬 《만세!》의 함성소리와 총소리로 떠나갈듯 했다. 언뜻 내려다보니 철남이가 옥녀를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어주고있었다. 아니, 온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손을 흔들며 목청껏 《만세!》를 웨치고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아침노을을 배경으로 저 하늘가에 우뚝 서서 공화국기발을 바라보는 그의 눈가에는 한없는 감격과 기쁨의 미소가 그윽하게 피여올랐다.

공화국기발은 더욱더 세차게 펄럭이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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