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98(2009)년 제9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김 금
미
첫 수업을 알리는 예비종소리와 함께 교실문이 방긋 열렸습니다. 순간 나의 입에서는 가벼운 속삭임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니, 수향이가?…》 정겨운 웃음을 함뿍 담고 들어서는 담임선생님의 뒤에 글쎄 우리 마을에 새로 이사온 수향이가 따라선것이 아니겠습니까. 수십쌍의 호기심어린 눈길앞에 수향이의 통통한 얼굴은 도마도처럼 빨갛게 익어있었습니다. 소곳이 인사를 하고서도 숫저운듯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애를 보며 나는 샘물처럼 퐁퐁 솟구치는 가슴속 기쁨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어느결에 비여있는 옆자리를 돌아보았습니다. 만일 옆동무만 있었더라면 나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귀속말로 소곤댔을것입니다. 《저애 이름은 수향이야. 이틀전에 내가 사는 고층살림집에 새로 이사왔어. 우리 집보다 세층 아래인 4층 2호에… 우린 벌써 손가락을 걸었단다. 제일 친한 딱친구가 되자고말이야.》 선생님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나는 얼른 자세를 바로했습니다. 《우리 학급에 새로 들어온 리수향학생입니다. 수향학생은 강원도의 바다가마을에서 살다가 전학왔습니다. 공부 잘하는 최우등생이고 소년단조직생활에서도 언제나 모범이였다고 합니다. 난 수향학생이 여기서도 그렇게 잘해나가도록 동무들이 더 친근하게 대해주고 잘 도와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학급안에 서로 돕고 위하는 기풍이 더 활짝 꽃펴나도록 합시다.》 《예!》 우리들은 일제히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은 만족한 눈빛으로 우리들을 굽어보시다가 수향이의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자, 그럼 들어가 앉으세요. 가만… 어느 자리에 앉힐가?》 나는 마음을 바재이며 선생님의 눈길을 따랐습니다. 그러다 옆자리에 와닿는 순간 기다렸다는듯 몸을 솟구쳤습니다. 《선생님, 제가 수향동무와 같이 앉겠습니다. 우린 집도 아래웃층이고… 벌써 친한 동무가 됐습니다.》 흥분된 나의 말에 수향이의 고개가 살짝 들리웠습니다. 쌍까풀진 고운 눈이 나를 향해 별처럼 정답게 반짝입니다. 선생님도 기쁜듯 《그래요?》 하시더니 수향이를 내 책상앞으로 데려왔습니다. 《미향이와 수향인 이름도 쌍둥이형제처럼 비슷하군요. 호호… 그럼 한책상에 나란히 앉아 마음맞춰 공부를 잘하는 진정한 동무가 되세요.》 나의 가슴은 풍선마냥 부풀어올랐습니다. 옆자리가 비여있은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던지 몰랐습니다. 수업시간에도 나는 자꾸 수향이한테 눈길이 갔습니다. (어서 휴식시간이 되였으면…) 하지만 휴식시간이 되기 바쁘게 애들이 오구구 모여와 우리 책상을 에워쌌습니다. 《넌 매일 바다를 보았겠구나. 바다도 우리 대동강만큼 물이 맑니?》 《네가 공부하던 학급도 영예의 붉은기학급이니?》 《너 학급에서 성적이 몇등이댔니?》 호기심어린 별별 물음이 다 튀여나왔습니다. 나중에는 학급에서 제일 친했던 동무의 이름이며 담임선생님의 담당과목까지도 까근까근히 알고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수향이는 그 모든 물음에 생글생글 웃으며 사근사근 대답해주었습니다. 나도 가슴을 들레이며 그애쪽에 아예 몸을 돌려대고 앉았습니다. 호젓하던 내 책상이 수향이로 하여 떠들썩한것이 마냥 즐겁기만 했습니다. 세번째 휴식시간이 되여서야 우리는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습니다. 《미향아, 저애 말이야. 우리 옆책상에 앉은 애… 저앤 이름이 뭐니? 아까 인사를 나눈것 같은데…》 《오, 유정이. 저앤 우리 학급에서 공부를 제일 잘해.》 《그런것 같애. 공부시간에 대답하는거랑 휴식시간마다 단어장을 들고다니는거랑 보면…》 《한데 1등가는 새침데기야. 원래는 내옆에 앉았던 은심이가 첫손가락에 꼽히댔어. 그애가 다른 중학교에 가면서 이젠 유정이가 됐지. 참, 이번에 구역적인 학과경연이 진행되는데 우리 학급에서는 저애가 참가한단다.》 《그래―》 수향이는 말끝을 길게 뽑으며 홀린듯이 유정이를 바라보았습니다. 무슨 생각에 옴했는지 내가 묻는 말에도 인츰 대답을 못했습니다. 나는 조금 섭섭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습니다. (아무리 그래두 수향인 나와 제일 딱친구가 될거야. 집도 아래웃집, 책상도 한책상, 게다가 이름도 한형제이름인데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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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국어시간이였습니다. 선생님은 칠판우에 우리가 쓰게 될 글짓기제목을 써나갔습니다. 《내 동무.》 크고 활달한 필체의 세글자가 자석마냥 내 마음을 확 끌어당겼습니다.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도 멋들어진 글을 써낼것 같았습니다. 수향이도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칠판의 제목을 보고있었습니다. (무얼 생각할가?) 그러자 불쑥 나의 눈앞에 한장의 사진이 다가들었습니다. 꼭같은 교복차림을 한 두 처녀애가 다정히 어깨를 껴안고 찍은 사진입니다. 노란 수지테를 두른 사진밑에는 《학창시절 내 동무》라는 일곱글자가 멋들어진 흘림체로 새겨져있었습니다. 어제 저녁 나는 새로 도배한 작은 방을 학습실로 꾸리는 수향이를 돕다가 그 사진을 보았습니다. 수향이는 짐속에서 꺼낸 사진액틀을 앉은뱅이책상우에 올려놓으며 자랑스레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애가 바로 선화야. 내가 말하던 바로 그 딱친구! 마음이 무척 착한 앤데 공부에선 양보를 모르는 이악쟁이란다. 지어는 딱친구인 나한테까지도. 호호… 그때문에 우린 다툰적도 있었어. 하지만 인차 화해하군 했단다. 헤여지던 날 우린 한참이나 붙잡고 아무 말도 못했어. 난 기차를 타고오면서도 내내 이 사진을 들여다보았어. 앞으로 선화같은 내 동무를 다시 만나게 될가 하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선화같은 내 동무?!) 나는 속으로 수향이의 말을 곱씹으며 부러움속에 사진을 보고 또 보았습니다. 들여다볼수록 갸름한 얼굴의 선화보다도 수향이의 복스러운 얼굴에 더 마음이 쏠렸습니다. 《수향아, 걱정마. 내 꼭 선화보다 더 좋은 동무가 되여줄게.》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말보다도 실지 행동으로 보여주고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가 순식간에 웬 떡이냐싶게 찾아들줄이야. 벙글써 열려있는 책상빼람안에서 그애의 파란 출생증이 《어서 날 보라는데, 어서!》 하듯 나를 빠금히 올려다보는게 아니겠습니까. 책꽂이에 책을 정리해넣던 나는 마침 수향이가 큰방에 건너간참이라 얼른 출생증을 펼쳐보았습니다. 생년월일에 눈길을 주던 나는 《어마!》 하고 환성을 질렀습니다. 7월 20일, 놀랍게도 이제 이틀후면 그애의 생일이였습니다. 새 고장에 와서 쇠는 수향이의 첫 생일, 하마트면 놓칠번 한 딱친구의 생일입니다. 나는 도곤도곤 뛰는 가슴우에 두손을 얹으며 생각했습니다. 뜻이 깊게, 인상깊게 쇠주어야겠다고…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수향이는 머리를 소곳하고 앉았습니다. 마침내 글감이 떠올랐는지 방그레 웃음을 머금으며 또박또박 부지런히 써나갑니다. 내가 엿볼가봐서인지 다른 팔로 살며시 가리우고말입니다. 아마도 학습장에 선화에 대한 그리움을 애틋이 담아보는 모양입니다. 나는 나대로 생그레 웃음을 피워올리며 가방에서 남몰래 자그마한 수첩을 꺼내 펼쳤습니다. 그리고 어제 밤부터 골몰해온 생일상차림표를 놓칠세라 하나하나 적어나갔습니다. 하지만 그 흥은 인차 깨여지고말았습니다. 《오늘 내줄 숙제는 〈내 동무〉에 대한 글을 마저 완성하는것입니다. 모두 잘 지어와야겠습니다. 특별히 잘된 글은 동무들앞에서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하는 선생님의 말씀에 이어 수업끝을 알리는 종소리가 길게 울렸던것입니다. 다음시간은 수학시간입니다. 바빠맞은 나는 헤덤비며 교과서와 학습장을 펼쳤습니다. 숙제로 내준 지능문제풀이 일곱문제가 반뽐만큼씩 한 공간을 두고 띠염띠염 적혀져있었습니다. 오늘 아침 시간표를 갈다가 깐깐히 훑어보았지만 자신있는 문제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나는 얼른 건너편 책상의 유정이를 찾았습니다. 유정이가 돌아보자 《유정아, 좀…》 하고 손을 내밀어 사정하는 시늉을 해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애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이어 눈을 내려깔며 고개를 돌려버렸습니다. 무안해난 나는 제김에 코웃음이 나갔습니다. (흥, 깍쟁이 같은거. 어디 혼자 실컷 잘해보라마.) 이때 제자리에 들어와 앉던 수향이가 쌕쌕거리는 나를 보고 의아해했습니다. 《왜 그러니? 미향아.》 나는 수학학습장을 탁 덮어버리며 유정이한테 눈총을 쏘았습니다. 《저런 애한테 손을 내민 내가 잘못이지.》 수향이는 짐작이 갔는지 얼른 학습장을 펼쳤습니다. 《너 어제 나때문에… 미안해. 못 푼 문제가 뭐니?》 살틀한 그 물음에 나는 되려 놀랐습니다. 《그럼 너도 다 풀었다는거니?》 《두문제를 내놓고는…》 나는 입을 딱 벌렸습니다. 힘든 지능문제도 그렇지만 수향이는 엊그제 새로 전학온 애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어제 오후 그애한테 오늘 배울 과목의 학습장들을 보여주며 이런 말을 덧붙였던것입니다. 《이 수학숙젠 네가 우리 학급에서 공부하기 전에 내준거야. 그러니 넌 하지 않아도 될거야.》 그런데 밤새 이렇게… 《몇번째를 못 풀었니?》 다시금 곱씹는 수향이의 물음에 나는 더 생각할새도 없이 그애의 학습장을 끄당겼습니다. 《몇번째가 뭐니? 하나도 못했는데.》 얼굴이 뜨끈해났지만 나는 쉬임없이 원주필을 《달려라달려라》했습니다. 수향이의 쌍까풀진 두눈이 놀라움을 머금고 나를 지켜보는것도 아랑곳 없었습니다. 수학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설 때에야 나는 안도의 숨을 호― 내쉬며 수향이를 열적게 돌아보았습니다. 헌데 참 공교롭기란… 나는 숙제검열에서 선생님의 지명을 받아 칠판앞에 나서게 되였습니다. 그것도 공부 잘하는 유정이와 나란히.엎친데덮친격으로 수향이가 못 푼 문제가 딱 제시되였습니다. 나는 문제만을 써놓은채 한참이나 갑자르며 진땀을 뽑았습니다. 어느새 풀이를 끝낸 유정이가 자신있게 설명하는 목소리가 귀전을 칠 때에는 모든것을 단념하고 그린듯이 서있기만 했습니다. 《일곱문제를 다 푼 학생은 손을 들어보세요.》 선생님의 물음에 손을 든 애는 고작해서 다섯손가락안팎이였습니다. 선생님은 힘든 문제이지만 스치고 넘기면 안될 중요한 문제들이라고 못 박으며 또다시 숙제로 제시했습니다. 거기에 세문제를 더 포함해서 말입니다. 수학시간이 끝나자 나는 마치 어깨에서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은 기분이였습니다. 수업시간에 땀을 빼는 일은 종종 있기마련이라 나는 심드렁해 앉아있는 수향이의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휴식시간인데 우리 밖에 나가 시원한 바람을 쏘이고 오자.》 그런데도 수향이는 움직일념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래?》 나는 은근한 목소리로 물으며 가볍게 그애 몸을 흔들었습니다. 그제서야 그애는 낯빛을 풀며 나를 마주했습니다. 《미향아, 내가 잘못했어. 어제 집꾸리는 일을 미루고서라도 너랑나랑 함께 숙제공부부터 해야 하는건데…》 자책에 젖은 목소리가 나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진정어린 눈길이 내 마음을 파고드는듯 했습니다. 나는 사뭇 감동에 젖어 그애 손을 잡았습니다. 《애두 참, 어쩌다 한번쯤이야 뭘… 이제부터 잘하면 될게 아니냐.》 나는 이렇게 흔연스레 속삭이며 저먼저 교실문을 나섰습니다. 한여름철의 짙은 꽃향기가 기다렸다는듯 나의 몸을 휩쌌습니다. 갖가지 아름다운 꽃들이 다투어 피여웃는 꽃밭우로 꿀벌, 나비들이 쉬임없이 날아옙니다. 나의 머리속에서도 수향이에 대한 생각이 즐겁게 꼬리를 물고 돌아갑니다. 나때문에 그토록 안타까와하던 수향이… 뭐 자기 잘못이라구? 아니, 그앤 잘못한게 하나도 없어. 유정이와 달리 숙제장도 군말없이 내줬던 앤데… 잘못은 바로 나한테 있는거야. 어제저녁 집에 돌아온 다음에라도 숙제문제를 들여다봐야 하는건데. 나는 온통 딴생각에만 묻혀있었댔지. 그 딴생각이란 다름아닌… 호호, 아직은 비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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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수향이의 열한번째 생일날입니다. 수업이 끝나자 우리는 예전처럼 어깨나란히 집으로 향했습니다. 맑고 푸른 하늘에 햇솜같은 흰구름이 뭉게뭉게 떠갑니다. 《미향아.》 수향이가 걸음을 멈추며 마주섰습니다. 《오후에는 지능문제풀이를 하는게 어때?》 《오, 수학숙제. 그것도 해야지 뭐. 그런데 수향아, 오늘 우리 집에 아주 기쁜 일이 있단다.》 《무슨 기쁜 일?…》 나는 호기심에 반짝이는 수향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재미있게 눈을 끔뻑해보였습니다.
그 말에 수향이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수긍해버렸습니다. 《서로 지혜를 합치면 더 좋을텐데… 할수 없지 뭐. 그렇게 하자.》 한동안 우리는 말없이 걸었습니다. 이번에는 내 마음속에서 궁금증이 봄풀싹마냥 뾰조름히 머리를 쳐듭니다. (헌데 이앤 왜 아직 생일소리를 꺼내지 않을가?) 4층계단에서 헤여질 때에야 그애는 통통한 두볼에 웃음을 담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저녁에 다시 만나.》 보통 인사말외에 다른 말은 더 없었습니다. (잊었을가? 아니면…)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입니다. 이사짐을 금방 풀고났는데 생일 쇨 경황이 어디 있겠다구? 집앞에 이르자 나는 다급히 출입문을 열었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대신 고소한 기름내가 나를 맞아주었습니다. 부엌의 식탁에는 어느새 해놓았는지 맛있는 음식들이 그릇마다 듬뿍이 담겨져있었습니다. 나는 저도모르게 소학교애처럼 손바닥을 짜락짜락 마주쳤습니다. 《아이 좋아!… 한데 어머닌 어디 가셨을가?》 그 소리에 대답하듯 출입문소리가 났습니다. 배가 불룩 나온 천구럭을 량손에 든 어머니가 들어서고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이마에 드리운 굽실굽실한 머리칼은 땀에 푹 젖어있었습니다. 《자, 네 부탁대로 수향이의 생일준비를 다 해놓았다.》 제대군관인 어머니의 서글서글한 목소리에 나는 어리광스레 팔을 잡아흔들었습니다. 《야, 우리 엄마가 제일이야!》 《아이구야, 무거워죽겠는데… 이거나 받아주렴.》 나는 그제서야 얼른 어머니의 손에 들린 천구럭을 받아들었습니다. 맛있는 쨤빵이며 사과, 배, 시원한 사이다 등이 가득 들어있는 구럭을 들여다보던 나는 눈이 둥그래졌습니다. 《이렇게 많이요?》 《새 고장에 와서 맞는 수향이의 첫 생일을 뜻이 깊게, 인상에 남게 쇠주겠다면서.》 《그런데요?》 《애두. 그러자면 소년단반애들이 함께 모여 축하해주는게 더 의의있을게다. 그래야 수향이가 새 동무들한테 인차 정을 붙일게 아니냐. 그리고 그애 부모들도 모셔와야지. 집꾸리기에 바빠 미처 생각을 못했겠는데…》 《히야, 확실히 우리 엄만 옛 중대장모습 그대로야. 좋아요, 그럼 난 얼른 이모네 상점에 갔다올게요.》 이번에는 어머니가 의아해했습니다. 나는 꽃상점에 다니는 이모한테 생화묶음을 부탁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서둘러 집을 나섰습니다. 모든 일은 나의 마음이 흡족하게 착착 맞아떨어졌습니다. 두손에 아름다운 꽃묶음을 받쳐들고 집에 들어서니 해빛이 쟁글대던 창문가에 어느덧 그늘이 드리워있었습니다. 상차림을 하는 어머니를 돕고난 나는 소년단반애들을 찾아 연신 전화기의 번호판을 눌러댔습니다. 얼마후 애들이 모두 모여왔습니다. 눈들이 왕밤알만 해져서 연방 감탄을 터쳐대는 애들에게 오늘 《행사》의 흐름을 간단히 이야기하고나서 나는 수향이를 찾아 나는듯이 층계를 뛰여내렸습니다. 문가에서 나를 반갑게 맞아준것은 앞치마를 두른 수향이 어머니였습니다. 《마침이구나. 그러지 않아도 수향이가 들어오면 찾으려댔는데…》 상냥한 수향이 어머니 말에 나는 눈빛이 덩둘해졌습니다. 《수향인 어데 갔어요?》 《점심을 먹자마자 학교근방에 있다는 동무네 집으로 갔단다.》 (학교근방에 있는 동무?…) 얼핏 꼽아보니 두세명의 애들이 짚였습니다. 그중에서 유정이의 새침한 얼굴이 눈앞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수업을 끝내고 학교정문을 나설 때 앞에서 가던 유정이가 《ㄴ》자로 꺾인 고층살림집현관으로 들어가는것을 유심히 보던 수향입니다. 하고보면 나는 그애가 유정이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지는것을 한두번만 보아오지 않았습니다. 새로 교실에 들어서던 날 유정이를 꼭 알고싶어하던거며 일곱문제를 다 풀었다고 자신있게 손들던 그애를 부럽게 바라보던거며… 내가 저녁에는 그만큼 꼭 집에 있으라고 했는데도 아마 유정이와 지능문제풀이를 같이하자고 찾아간 모양입니다. 나는 서운한 생각에 몸이 나른해왔습니다. 한켠으로 입술이 삐쭉 내밀리웠습니다. (피, 그애가 문제풀이를 같이하자고 할게 뭐야. 저 혼자 삐여지게 잘하길 바라는 앤데…) 나는 손을 잡아끄는 수향이 어머니에게 다시 오겠다는 인사말을 남기고는 스적스적 현관밖을 나섰습니다. 시누런 감빛의 저녁해가 멀리 백화점지붕우에 걸려있었습니다. 온종일 금빛해살을 깡그리 쏟고나서 나처럼 맥이 없어 잠간 다리쉼을 하는듯 했습니다. 뒤마당에 휘늘어진 아름드리 버드나무밑에 이르러 나는 학교쪽으로 눈길을 주었습니다. 울타리 한귀퉁이가 엿보이는 좁은 길목입니다. 분명 수향이는 저 귀퉁이에 한점으로 나타날것입니다. 유정이의 《거절》을 당하고 되돌아설수 없어 학교의 선생님을 찾아들어갔을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 달리 수향이는 그 맞은편 길목에서 불쑥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또 한 애와 함께… 점점 가까와지자 손잡은 팔을 다정하게 내젓는 두 애의 모습이 또렷이 안겨왔습니다. (그러니 이제껏 정말 유정이와 함께…) 까닭모를 시샘이 가슴을 호드득 뛰게 합니다. 나는 얼른 나무뒤에 몸을 숨겼습니다. 두 애의 목소리가 귀전에 또렷이 들려왔습니다. 《야참, 넌 너무해. 생일소리를 이제야 하면 어쩌니? 차마 빈손으로야 어떻게…》 《왜 빈손이라구 그러니? 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난 오늘 열문제를 막힘없이 다 풀지 못했을거야. 넌 오늘 나에게 가장 귀중한걸 안겨준셈이야.》 《정말이니?》 《그럼. 우리한테야 공부, 공부를 잘하는것이상 있니?》 《야, 넌 어쩜… 수향아, 난 사실 너같이 학습에서 이악한 동무와 친하고싶었더랬어. 그런데 우리 학급엔…》 유정이의 실망어린 말소리에 나는 속이 발끈했습니다. (우리 학급엔 뭐 어쨌다는거야? 너무 저만 똑 제일인체 하지 말아.) 수향이도 내 마음과 꼭 같은가봅니다. 슬그머니 그애 손을 놓아버리더니 잦아들듯 걸음발을 늦추었습니다. 몇걸음 떨어진 곳에 두 애는 마주섰습니다. 《유정아, 난 사실 선화같은 친구를 다시 만날수 있을가 걱정했댔어. 그런데 정작 여기 와보니 미향이랑 좋은 동무들이 참 많더구나.… 미향이가 수학시간에 망신당한것도 실은 나때문이야.… 유정아, 난 네 설명을 들으면서 혼자서 안타까와할 미향이를 생각했댔어.》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 젖어들었습니다. 유정이와 문제풀이를 하면서도 나를 생각하는, 자기만이 아니라 둘이 함께 기쁨을 나누고싶어하는 수향이의 깨끗한 그 진정에 나는 눈시울이 따갑게 달아올랐습니다. (수향인 날 선화처럼 여기고있었구나. 그런데 난… 난…) 《어서 가자. 미향이가 기다리고있을거야.》 두 애는 다시 손잡고 나란히 걸음을 옮깁니다. 어깨를 맞대고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는 두 애를 나는 한결 개운해진 마음으로 뒤따랐습니다. 저녁해가 걸터앉아있던 백화점지붕에 어느샌가 연분홍색노을이 곱게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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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안은 물을 뿌린듯 조용했습니다. 교탁앞에 수향이가 나섰습니다. 며칠전 새로 교실에 들어서던 그날처럼 통통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그애는 학습장을 펴들었습니다. 《작문 〈내 동무〉!…》 부끄럼때문인지 아니면 방금 들은 선생님의 칭찬때문인지 그애는 잠시 말을 끊고 숨을 가누다가 살며시 내쪽을 바라봅니다. 그 눈길에 나도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저애가 나에 대해 쓴게 아닐가?) 생일상을 마주하고 고마움에 내 손을 놓지 못하던 수향이의 얼굴이 새록새록 눈앞에 밟혀왔습니다. 《내 생일을 어떻게 알았니?》 《애두 참, 제 옆동무의 생일도 모를가?》 의미깊은 내 말에 수향이는 내 손을 더 꼭 잡았습니다. 《옳아, 넌 정말 내 동무야. 선화같은 내 동무!》 그러나 교실안에 도란도란 울려가는 수향이의 목소리는 선화에 대한 잊을수 없는 추억을 불러오고있었습니다. 《우리 집 책상에는 뜻깊은 사진이 놓여있습니다. 나와 선화가 어깨겯고 찍은 사진입니다. 지금도 그 사진을 찍던 일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는 중학교에 올라와 학년적인 첫 수학학과경연에 참가하였습니다. 그 경연에서 선화는 놀랍게도 2등을 하였습니다. 나는 등수에 들지 못했지만 동무의 영예를 두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날저녁 선화가 눈물이 글썽하여 나를 찾아왔습니다. 그애의 손에는 내가 꺾어준 진주꽃송이가 들려있었습니다. 〈난 이 꽃을 받을 자격이 없어.〉그 말에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애가 자격이 없다면 대체 누가… 나는 언짢은 소리로 물었습니다. 〈하긴 넌 이악쟁이니까 2등도 맘에 안 차겠지?〉 〈그때문이 아니야.〉 〈그럼 우등생이 준 꽃이라는거지?〉 이번에도 선화는 도리머리를 저었습니다. 〈아버지한테… 말을 들었어.〉 선화의 아버지는 해안포부대의 군관입니다. 기쁨에 한껏 취해있는 선화한테서 학과경연성적을 알게 된 선화의 아버지는 생각깊은 어조로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넌 수향이와 어떤 사이냐?〉 〈세상에 둘도 없는 딱친구!〉 선화는 주저없이 꼽아나갔습니다. 〈우린 집도 한마을, 책상도 한책상 그리고 마음도 뜻도 다 하나예요.〉 〈제일 중요한게 빠졌구나.〉 아버지의 말씀에 선화는 얼떠름해졌습니다. 그런 선화에게 아버지는 절절히 타일렀습니다. 〈너도 잘 알테지. 학생의 기본임무는 학습이라는것을. 때문에 경애하는 아버지장군님께 드리는 가장 큰 기쁨은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학습을 잘하는것이야. 인공지구위성 〈광명성2호〉의 성과적발사도, 얼마전에 또다시 지하핵시험을 통쾌하게 성공시킨것도 다 너희들같은 그 시절에 우리 과학자, 기술자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한 결과란다. 헌데 그 길에서 너희 둘은 뜻을 같이하지 못했구나. 그러니 딱친구란 말이 너무도 어울리지 않지.〉 그 이야기에 나는 모닥불을 뒤집어쓴듯 하였습니다. 우등을 하고서도 창피를 모른 나였습니다. 오히려 제딴에는 동무의 영예를 자기의 기쁨으로 여길줄 아는 나를 선화의 진정한 딱친구라고만 생각했댔습니다.… 그날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우정의 첫발을 내디디였습니다. 아버지장군님께 기쁨 드리는 배움의 그 한길에서 목표도 열정도 영예도 꼭같은 선군동이 내 동무가 되자고 말입니다.》 약속이나 한듯 요란한 박수소리가 터졌습니다. 나도 뜨거움을 삼키며 열렬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아, 내 동무! 학창시절 내 동무! 수향이가 그토록 선화를 잊지 못해하는것은 바로 그때문이였습니다. 그래서 새 고장에서 맞는 첫 생일날에도 수향이는 못다 푼 문제를 위해 유정이를 찾아갔던것입니다. 그런데 난… 옹졸한 난… 얼굴을 따갑게 하는 부끄러움으로 하여 나는 제자리로 들어오는 수향이를 선뜻 마주보지 못했습니다. 감동에 젖어 빛나는 애들의 눈길이 수향이를 따라 우리 책상으로 옮겨왔습니다. 그 눈길들앞에 나는 자꾸만 눈이 허둥거려졌습니다. 마치 남의 자리에 앉기라도 한듯 자꾸 몸이 들썽거려졌습니다. 한책상에 앉았다고, 한마을, 아래웃집에서 산다고 내 동무가 되는것이 아니였습니다. 딱친구가 되는것이 결코 아니였습니다. 휴식시간이 되자 제일먼저 유정이가 우리 책상으로 왔습니다. 《수향아, 넌 정말 좋은 동무를 만났댔구나. 나도 선화처럼 될수 있을가? 공부를 해도 자기만이 아니라 동무들과 모두 함께 잘하기 위해 애쓰는 진짜동무가 말이야.》 《그럼, 넌 벌써 그날부터 나랑 미향이랑 돕고있지 않니?》 수향이가 밝게 웃으며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나도 후더운 눈길로 수향이를, 다음엔 유정이를 번갈아보았습니다. 모여온 동무들모두가 기쁨의 눈길을 마주칩니다. 선군동이들의 배움의 한길에서 뜻도 하나, 마음도 하나인 학창시절 내 동무들이!
(평양시 락랑구역 통일3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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