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98(2009)년 제10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리 혁 민
삼복더위가 시작되려면 아직도 스무날나마 더 있어야겠는데 날씨는 여간 물쿠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코등에는 땀발이 뽀질뽀질 돋았다.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바람을 타고 더운 열기가 훅훅 쓸어들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바람으로 점심을 먹고난 나는 책상에 마주앉아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를 붙안고 거의 한시간가까이 모지름을 쓰고있었다. 마치도 눈을 싸맨 《범》처럼 내 주위를 뱅글뱅글 맴도는 수자들과 기호들을 따라다니느라 이제는 막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화김에 원주필을 탁 놓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매미들이 승벽내기로 울어대고있었다. 《맴ㅡ맴ㅡ맴ㅡ》 그 소리는 마치도 《햄ㅡ햄ㅡ 그것도 못 풀어?》하고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것 같았다. 《정혁아, 너 무슨 전투에라도 나선것 같구나. 끙끙대면서… 왜, 잘 안 풀리느냐?》 어머니가 사이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말했다. 손에는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운 도마도화채가 들려있었다. 《안 풀리긴요. 벌써 다섯문제나 풀었는데.》 나는 손등으로 코밑을 뻑 닦으며 도마도화채를 그릇채로 받아들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힘들기도 했다. 그렇게 놓고보면 학습도 전투라는 말은 정말 옳은 말이였다. 오늘도 소조선생님이 내준 수학문제를 풀면서 나는 내가 꼭 《습격전투》에 나선 《정찰병》처럼 느껴졌다. 문제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하여 《적진》속으로 뛰여든다. 하지만 조건과 공식이라는 어마어마한 울타리를 높이 둘러치고 그 무슨 《위수구역》처럼 웅크리고있는 문제들, 그 울타리들을 넘어 조심조심 들어가보니 교묘하게 만들어놓은 《적》들의 《함정》, 실패에 이어 그곳을 탈출하여 나는 다시 진짜《기지》의 비밀을 찾아헤맨다. 소조선생님은 부대장처럼 나의 《전투성과》를 안타까이 기다리고있는데 《적》들은 도무지 자기의 비밀을 내놓으려고 하지 않는다.… 문득 벽시계를 올려다보던 나는 저도 모르게 비명소리를 질렀다. 《아이쿠, 벌써 시간이?!》 어느새 소조갈 시간이 다 되였던것이다. 시간이란 한가할 때에는 때려몰아도 거부기걸음을 하지만 이럴 때 보면 비행기라도 탄듯 여간 빠르지 않았다. (할수 없지. 에라, 소조에나 가자.) 나는 책상에 널린 책들을 가방에 넣어가지고 집을 나섰다. 제 마음껏 가지를 뻗어올린 집앞의 백양나무들에서는 여전히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귀따갑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누르며 뒤켠에서 힘찬 노래소리가 요란스레 울렸다. 뒤돌아보니 제강소정문앞에 서있는 방송차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소리였다.
천리마 나래친 강선이 앞장섰다 총진군 대오가 발맞춰 따라섰다 …
노래에 이어 방송원의 힘찬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오늘 현재 우리 제강소는 상반년계획을 완전히 돌파하였습니다. 지난해 12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찾아오시여 새로운 혁명적대고조의 앞장에 내세워주신 크나큰 믿음을 안고 1강철직장 초고전력전기로의 전체 종업원들은 150일전투의 영예로운 승리자가 될…》 (히야, 저기야말로 진짜 전투장이로구나!) 그러니 우리 강선땅은 어딜 가나 전투장이고 누구나 다 전투원들이다. 제강소기사인 아버지는 초고전력전기로의 더 멋진 현대화를 위해 요즘 집에도 들어오시지 않는다. 아버지, 어머니들은 생산전투, 우리 학생들은 학습전투, 그 누구나 다 초고전력전기로에 필요한 파철을 이고지고 지원전투에 스스로 떨쳐나서고있다. 그런데 전투에서 성과가 제일 적은것은 어쩐지 나 하나뿐인듯싶어 속이 개운치 않았다. 나는 김빠진 공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터벅터벅 걸음을 옮겨놓았다. (엥이, 내가 괜히 이 길에 들어서지 않았을가?) 이 며칠사이 벌써 서너번째로 해보게 되는 생각이였다. 콤퓨터소조! 지난봄 아버지가 이 소조에 가라고 했을 때는 호기심이 부쩍 동하여 선뜻 찬성을 했었다. 한동안 얼마나 재미있었던가. 건반을 눌러갈 때마다 나는 벌써부터 정보과학자가 다 된듯 한 그런 기분이였다. 콤퓨터를 갓 배울 때에는 정말이지 시간을 잊고 살았다. 처음에는 타자법을 숙련하느라 손가락에 자개바람이 다 일었고 누구보다 프로그람활용에서 앞서기 위해 선생님을 바쁘게 하기도 했다. 일요일에는 지능계발을 위하여 콤퓨터앞에서 밤을 팬적도 있었다. 그만큼 나는 콤퓨터에 대단히 극성이였다. 그러던것이 얼마전부터 저도 모르게 소조생활에 점점 흥미가 식어들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콤퓨터소조는 오락소조가 아니라고 자꾸 통제를 해서부터일가? 아니다. 그보다는 소조에서 배우는 과목들이 따분하고 재미가 없는데다 까다롭기때문이였다. 머리가 학급에서 그중 좋다는 말을 종종 듣군 하는 나였지만 소조과목들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어느것 하나 쉬운것이 없었다. 수학문제풀이, 물리공부, 영어학습, 프로그람의 기초인 알고리듬짜기, 수학적모형화… 수학문제풀이 하나만 놓고봐도 그렇다. 우리 중학교 3학년과정안의 문제라면 나는 히쭉 웃는다. 하지만 오늘 내가 붙어잡고 씨름질한 문제들은 교과서에 제시된 풀이방법을 완전히 무시하고 보다 더 알기 쉽고도 새로운 방법으로 풀어야 하는것들로서 하나하나가 다 진땀을 뽑아내군 했다. 그런 문제를 종일토록 붙들고 씨름하느라면 정말 따분하고 막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힘들면서도 재미도 나야 성수가 나지 않겠는가. 어디선가 솔솔 바람이 불어와 달아오른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그랬건만 나의 마음은 한증칸에라도 들어앉은듯 조금도 시원한감을 느끼지 못했다. 《에익ㅡ》 나는 무작정 발길에 채인 나무토막을 있는 힘껏 걷어찼다. (아가ㅡ) 불시에 오른쪽발가락들이 아픔으로 얼얼해났다. 나무라고 괜히 얕보고 발길질을 한것이 후회되였다. 나무토막은 대여섯메터앞에 있는 속보판밑으로 데그르르 굴러갔다. 엎어진김에 쉬여간다고 나는 아픈 발가락때문에 오른다리를 구부리고서서 속보판에 눈길을 박았다. 그것은 과외활동을 잘하고있는 군안의 학교들을 소개하는 속보판이였다. 첫번째 판에는 과외소조운영을 잘하고있는 천리마중학교가 군적으로 모범이라는 내용이 실렸다. (히야, 우리 학교가 나왔구나.) 두번째 판에는 강철중학교가 학습에서도 앞장서면서 많은 파철을 수집하여 제강소에 보낸 자랑이 소개되였다. 역시 강철중학교라는 그 이름에 어울리는 내용의 속보였다. 나는 그 다음판의 내용을 읽어보다가 그만 눈이 퀭해졌다. 《제40차 전국 과외청소년체육학교 체육경기대회에 참가!》라는 표제밑에 우리 군의 과외체육학교 축구소조가 여기에 참가한다는 내용으로 주장 박금남, 문지기 렴철혁, 한광일, 고강진, 문정철 등 여러 소조원들의 이름들도 올라있었다. (고강진? 아니 그 애가 벌써?!) 강진이라면 나와 어릴적부터 함께 공을 차던 제강중학교 3학년의 그 《전주대》가 분명했다. 이것은 정말 믿기 어려웠다. 소학교때까지만 하여도 마을별로 맞서군 하던 축구경기에서 나한테 늘 꼴을 먹던 그 방어수 강진이가 아니던가. 공격수인 내가 신이 나게 공을 몰아갈 때면 어쩔줄 몰라 쩔쩔매던 방어수 강진이가 벌써 전국적인 경기에 참가한단 말인가. 그는 중학교 1학년때 과외청소년체육학교 축구소조에 들어갔었다. 그런데 2년어간에 이렇듯 놀라운 발전을 했으니 이것은 마치도 갓난아이가 하루밤새에 어른이 되여 나타난것처럼 나에게는 희한하게 생각되였다. 나는 입을 하ㅡ 벌리고 속보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야, 호랑이 없는 골안에서 토끼가 왕노릇 한다더니…》 내가 이렇게 중얼거리는데 이때 《너 정혁이 아니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린 나는 그만 입을 딱 벌렸다. 이게 누군가? 강진이가 아닌가! 마치 속보판의 이름이 그대로 사람이 되여 나타난듯싶었다. 《아니, 네가 어떻게?》 나는 그 애한테 다가가 어깨를 쥐여박았다. 《음, 지나가다보니 딱 너같더라니…》 강진이도 거의나 감겨질듯 한 눈으로 해쭉 웃으며 나의 손을 잡았다. 오래간만에 소꿉친구를 만나니 나는 여간만 반갑지 않았다. 《그런데 너 이따금씩 우리 학교에랑 좀 놀러오려마. 소학교땐 뻔질나게 오더니 이젠 선수가 됐다고 거드름 피우는게 아니야?》 내가 언짢은 표정을 짓자 강진이는 얼른 손사래를 치며 변명했다. 《체, 거드름 피울새도 없어. 요즘 얼마나 바쁜지 아니?》 《오, 이것때문에? 그래 언제 가니?》 나는 속보판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래일 떠나. 그래서 오늘은 모두 휴식을 줬어. 난 지금 집으로 가던 길이야. 그런데 오면서 보니까 네가 속보판에 난 내 이름을 보면서 뭐라뭐라 중얼거리지 않겠니?》 멜가방을 추슬러올리며 틀지게 웃는 강진이한테서는 벌써 《체육인》냄새가 풍겨오는것 같았다. 《중앙경기라… 어쨌든 넌 좋겠다야.》 나는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말 축구바람이 좋긴 좋다. 강진이가 다 중앙경기에 참가하러 떠나다니. 《야, 나도 그때 너처럼 과외체육학교 축구소조에 들어갔더라면 좋았을걸.》 나는 닭알침을 꼴깍 삼키였다. 《하긴 너야 재간있는 공격수가 아니였니. 정말 그렇게 됐더라면 래일 나랑 같이 한 뻐스에 타게 됐을지도 몰라.》 《모른다는건 또 뭐가? 틀림없이 타는거지.》 나의 말에 강진이는 자기 말을 제꺽 고쳤다. 《그래그래, 틀림없이 타는걸. 그것도 운전사 옆자리에!》 《하하하.》 역시 성격이 씨원씨원한 강진이와는 말할 재미가 있었다. 《넌 이젠 됐다야. 그러니 네 앞길이 쭉 열린셈이구나. 확실히 네 일은 척척 잘되거던. 넌 정말 행운아야.》 《행운아? 넌 뭐 안 그렇니? 난 오히려 콤퓨터소조에 다니는 네가 부럽더라. 미래의 재능있는 정보과학자 김정혁동지! 우리 식의 새로운 체계프로그람을 개발하여 전국프로그람경연에서 1등, 우승컵, 꽃다발, 박수…》 강진이가 형상까지 해가며 우스개소리를 했지만 나는 왜 그런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비행기는 그만 태워. 남은 속상해 죽겠다는데…》 《속상하다? 왜? 무엇때문에…》 강진이는 지금까지 히들거리던 인상은 어디다 두었는지 아주 정색해서 물었다. 《으음, 아무것도 아니야. 강진아, 네 보기엔 내가 이제라도 축구소조에 들어가면 어떨것 같니? 좋을것 같니, 나쁠것 같니?》 《축구소조? 아니, 그럼 지금 다니는 콤퓨터소조가 싫어졌니?》 《싫어지기야 뭘. 그저 힘들어서 그러지. 그리구 하루종일 앉아서 공부하는게 얼마나 지루하구 따분한줄 아니?》 나는 쓴입을 쩝쩝 다시였다. 솔직히 말한다면 이제라도 당장 책가방을 벗어놓고 축구장에 뛰여들고싶은 심정이였다. 《정혁아, 글쎄 난 너희 소조에서 어떤 공부를 하는지는 몰라도 그게 힘들리라는건 알아.》 강진이는 나의 손을 꼭 잡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잘 생각해봐. 우리 소조선생님이 그러는데 언제나 남이 가는 길이 더 좋아보인대. 자, 그럼 난 가겠다.》 강진이와 헤여진 나는 다시 학교로 스적스적 걷기 시작했다. 나의 머리속에는 온통 축구소조생각뿐이였다. 내가 왜 진작 이 생각을 못했을가. 거기 가면 생활이 얼마나 흥미진진할것인가. 이제 간다 해도 늦은건 아닐것이다. 이제라도 방향전환을 해야 해. 그럼 콤퓨터소조는?… 그만두자. 이제 당장 선생님을 만나 소조를 그만두겠다고 말해야겠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무거운 배낭을 벗어버린듯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느덧 학교정문이 바라보이자 나는 나는듯이 달려갔다. 소조실앞에 이르러 배심좋게 문손잡이를 잡으려는데 문이 열리면서 소조선생님이 나왔다. 《아, 정혁학생이로구만요. 그런데 왜 늦었어요?》 《저…》 정작 선생님은 만났지만 갑자기 입이 얼어붙기라도 한듯 나는 하려던 말을 내뱉지 못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 걀쑴한 선생님의 얼굴에는 금시 근심스러운 빛이 어리였다. 《저 사실은…》
《어디 아파서 그러는게 아니예요?》 《아… 아닙니다.》 나는 종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럼 어서 소조실에 들어가세요.》 등뒤에서 문이 닫기자 나는 맥이 탁 풀리는감을 느꼈다. (에익, 못난이! 바보!) 나는 책상에 앉아 자신을 사정없이 욕질했다. 왜 말을 못했을가? 아버지는 늘 내가 우물쭈물한다고, 사내대장부답지 못하다고 했는데 이제보니 나는 정말 그런 못난이였다. (아, 이젠 어쩌면 좋담? 그럼 래일 말해?) 아니다. 또 사내대장부답지 못한 생각이다. 무조건 오늘중으로 말할테다. 나는 주먹을 꽉 틀어쥐였다.
소조운영이 끝나고 동무들이 다 돌아간 뒤 나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전… 소조를 그만두겠습니다.》 《아니, 그건 무슨 소리예요?》 텅 빈 방이여서 선생님의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크게 들리였다. 《말을 해야 알지. 왜 그만두겠다는거예요?》 《저… 전 콤퓨터소조가 힘들어서…》 선생님은 한동안 아무말없이 나를 지켜보았다. 정작 말을 떼고보니 뭐 별치 않았다. 지금 선생님은 무슨 생각을 할가? 이제 뭐라고 할가?… 이런 생각들이 얼핏얼핏 떠오를뿐이였다. 《안돼요. 정혁인 수학적재능이 뛰여나고 창조력이 있기때문에 꼭 과학자가 돼야 해요.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아요.》하고 말그루를 박는다면 어떻게 한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은근히 가슴을 조였다. 그러나 선생님의 어조는 생각외로 아주 평온했다. 《그만두겠단 말이지? 이 문제에 대해 아버지와 토론해봤어요?》 나는 입술만 감빨면서 대꾸를 못했다. 이것은 전혀 예상치 않았던 질문이였던것이다. 그러나 이왕 말을 뗀김에 물러서고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들어오시지 않아 물어보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아마 승낙할겁니다.》 선생님은 고개를 기웃하였다. 《정혁학생은 자기 아버지를 다는 모르는군요. 난 정혁이가 이렇게 나약한줄은 몰랐어요. 좋아요. 정 그렇다면 어디 좀 생각해보자요.》 나는 선생님에게 꾸뻑 인사를 하고 소조실을 나섰다. 이젠 됐다. 선생님에게 말을 해두었으니 래일부터 소조에 안 나간다면 그만둔것으로 여길것이다.… 그리고는 과외체육학교 축구소조로 씽ㅡ하고 날아가버리자. 집으로 돌아가는 나의 마음은 올 때와는 달리 한결 흥그러워졌다. 흥흥 코노래를 부르며 학교정문을 나서던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소조실창문을 올려다보며 이자 한 선생님의 말씀을 되새겨보았다. 《정 그렇다면 어디 좀 생각해보자요.》 생각해본다? 혹시 아버지와 토론해보겠다는 소리가 아닐가? 정말 그렇게 되면 야단이였다. 나는 두눈을 깜빡거리며 잠시 생각을 굴렸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아버지를 만나면 되겠구나. 아버지의 승낙을 받으면야… 그러자면 제강소엘 가야 하겠어. 그것도 이제 당장!) 나는 집을 향해 종종걸음을 놓았다. 하지를 앞둔 때라 낮시간은 길었다. 해님이 서산마루에 걸터앉을무렵 나는 제강소를 향해 달음질쳤다. 정문앞에 이른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전기로앞에서 하얀 방열복을 입은 아버지들이 바삐 일하고있을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던것이다. 생각끝에 정문에서 좀 떨어진 나무밑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기 시작하였다. 날이 어두워졌다. 그러나 강선의 붉은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였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버지가 누군가와 열심히 이야기를 하며 정문을 나서고있었다. 《아버지!》 나는 급히 나무밑에서 달려나갔다. 나를 얼핏 띄여본 아버지가 그 사람과 몇마디 더 주고받고는 곧장 나에게로 다가왔다. 《오, 네가 어떻게 왔니?》 《아버지, 참고도서들을 가지고 왔어요.》 《참고도서들을?》 아버지는 대견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았다. 《원 녀석두… 참고도서들까지야 뭘.》 《그래두 어머니가 꼭 가져다주라고 했어요.》 아버지는 대견한듯 내 어깨에 손을 얹고 걷기 시작하였다. 《그래 소조공부하기가 재미나냐?》 나는 급소를 찔린 사람처럼 흠칫했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아버지는 《허, 재미가 없는게로구나.》하며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였다. 《아버지.》 나는 조용히 아버지를 불렀다. 그리고는 침을 꼴깍 삼키고나서 용기를 내여 말했다. 《아버지, 전 콤퓨터소조를 그만둘래요.》 《뭐 소조를 그만둔다구? 그게 사실이냐?》 어지간히 놀란듯 아버지의 눈이 둥그래졌다. 《그래 왜 그만두려고 하지?》 《난 아무래도 콤퓨터를 못하겠어요. 어찌나 힘든지. 그래서 축구소조에… 가려고 해요.》 나는 말을 하면서 아버지의 기색을 슬며시 살피였다. 《축구소조? 오, 그러니 공을 차려구?》 《예. 난 원래 공을 좀 차지 않았나요?》 나는 내친김에 강진이를 만났던 일까지 거침없이 다 쏟아놓았다. 그런데 나의 말을 듣고있던 아버지의 얼굴빛이 저녁하늘처럼 갑자기 어두워졌다. 《후ㅡ 그러니 그 기사 말고도 또 한명이 패배자로 되려는구나.》 《예? 패배자란 말이예요?》 너무도 뜻밖의 말에 나는 눈이 퀭해서 아버지를 보았다. 《정혁아, 내 이야기를 하나 해줄가?》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며 나의 손을 잡았다. 《우리 제강소 기술과에 한 기사가 있었단다.》 그리고는 붉게 물든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난해 이맘때였다고 한다. 제강소에서는 1강철직장에 초고전력전기로를 세우자는 의견들이 제기되였는데 그때 그 기사는 그만 주춤거리지 않을수 없었다. 공장을 현대화하고 생산을 늘이자는것은 좋지만 자체의 힘으로 그것을 꽤 해낼수 있겠는지 걱정부터 앞선것이였다. 그의 속마음을 들여다본 설계제작조의 로책임설계가가 엄하게 꾸짖을 때에야 그 기사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그렇다. 자기의 힘, 자기의 기술을 믿지 못하고 동요한다는 그자체가 벌써 패배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이 시대의 패배자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그 기사는 모진 자책감으로 하여 며칠동안이나 가슴을 쳤다. 그는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고 분발하여 뛰쳐일어났다. 물론 초고전력전기로를 세우는 일은 처음부터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들이 백걸음 걸은것을 한걸음에 뛰자니 시련과 난관이 없을수가 없었던것이였다. 하지만 설계제작조 성원들은 초고전력전기로에 운명을 걸고 어떻게 하나 해내고야말겠다는 각오를 안고 산악같이 떨쳐나섰다. 그후 설계가 완성되고 조업식을 할 때에도 그 기사는 어쩐지 떳떳이 머리를 들수 없었다. 더우기 강선에 찾아오신 아버지장군님께서 초고전력전기로가 아주 멋있다고, 이것을 몇달동안에 완성하였다고 그처럼 기뻐하실 때 그 무슨 《첨단기술》앞에 겁을 먹고 뒤걸음질쳤던 자신을 더더욱 가슴아프게 뉘우치지 않을수 없었다.… 《아버지, 그 기사가 누구나요?》 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나서 모락모락 피여오르는 호기심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기술과 기사라면 아버지 부서사람일텐데… 《음ㅡ 정혁아, 그 기사는 바로 이 아버지란다.》 《예?》 나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있다. 초고전력전기로의 원격조종화와 련속조괴기의 자동조종에서 한몫 했다던 아버지가 아닌가. 《아버지, 그건 거짓말이지요. 예?》 《아니, 그건 사실이다. 전기로를 위해 내가 좀 한게 있다면 그건 자기 잘못을 진심으로 깨달은 그후에 해놓은것들이란다. 내 이 말만은 너에게 숨기자고 했지만 오늘 보니 네가 꼭 아버지가 걸은 길을 밟을것 같아 시간이 없어도 이렇게 말해주는거다.》 나는 굳어진듯 서버렸다. 조각으로 빚어놓은 사람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그만큼 아버지의 이야기는 나의 작은 가슴에 받아들이기에는 충격이 너무도 컸던것이였다. 동무들한테도 초고전력전기로를 세우는데서 큰 일을 했다고 자랑해온 아버지에게 그런 가슴을 치는 사연이 있었단 말인가. 아, 《변절》의 첫걸음을 내짚을번 했던 아버지 그리고 그 길로 들어서려고 하는 나! 듣기에도 소름이 끼치는 표현이였지만 콤퓨터소조에서 나오려고 했으니 응당 이런 소리를 들어도 할소리가 없는 나였다. 《정혁아, 물론 축구도 좋지. 어느 길로 가든 끝까지 가면 되니까. 그러나 넌 꼭 과학자가 되여야 한다. 우리가 초고전력전기로와 같은 훌륭한 전기로를 세우자고 해도 그렇고 우리 나라를 경제강국으로 건설하자고 해도 정보과학을 몰라가지고서는 한걸음도 전진할수 없단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네가 하루빨리 10대, 20대의 박사, 정보과학자가 되여 이 제강소를 빛내이는 주인이 되라고 너를 콤퓨터소조에 떠밀어보낸거란다. 내 선생님한테서 들으니 네가 소조에서 발전이 그중 빠르다던데… 그 말을 듣고 내 얼마나 기뻐했는지 아느냐?》 나는 아버지의 앞에서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고 버젓이 소조를 옮기겠노라고 말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버지는 손목시계를 보고나서 걷기 시작하였다. 나도 그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정혁아, 넌 이걸 명심해야 한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고 달라붙으면 무조건 된다는 각오를 안고 시대의 앞장에서 달려나가는것이 바로 이 강선이다. 나도 그렇고 너도 응당 강선의 이 거세찬 보폭에 발을 맞춰야 한다. 물론 힘은 든다. 공차는것처럼 재미나지도 않구… 하지만 네가 가는 그 길은 가장 보람있고 영예로운 길이라는것을 잊지 말고 끝까지 가기를 이 아버지는 바란다.》 《아버지!…》 나는 가슴이 울컥하여 더 말을 못했다. 《됐다. 자, 그럼 어서 가자.》 나는 아버지와 집에 도착하였다. 허나 아버지의 말은 그냥그냥 귀전에서 울리였다. 소조를 옮기는 문제가 그렇듯 심각한 문제일줄은 나는 정말 몰랐다. 아버지앞에 그리고 선생님앞에 부끄럽고 죄송스럽기만 했다. 불현듯 강진이 생각이 나 아버지와 헤여져 그의 집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때 어디선가 축구공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가 어둠속에서도 공을 차면서 이쪽으로 오고있었다. 공소리가 울리는 바람에 또다시 축구소조생각이 났다. 그 공은 마치도 나의 의지를 시험하려고 나타난듯싶었다. (아, 이거 어디 결심을 가다듬을수가 있나? 그런데 저 앤 대체 누구야?) 다가오는 그 애를 유심히 살펴보던 나는 그만 《허ㅡ》하고 웃고말았다. 《너 강진이 아니가?》 내가 이렇게 소리치자 강진이도 나를 보더니 벌씬벌씬 웃는것이였다. 《아니, 너 정혁이구나. 챠, 오늘은 너 만나는 날인게다.》 《내 말이 그 말이다. 그런데 래일 당장 떠난다는 애가 좀 쉴게지. 경기에 나가서도 실컷 차지 않으리.》 내가 핀잔조로 말을 하자 강진이는 도리머리를 저었다. 《아니, 난 아직 멀었어. 우리 학교와 고향마을의 영예를 떨치는 일인데 쉬울게 뭐니. 쉴새없이 훈련해도 모자라.》 나는 강진이의 모습을 다시 보지 않을수 없었다. 지금껏 훈련하다 왔는지 얼굴에 흐르는 줄땀이며 푹 젖어 달라붙은 옷, 온통 먼지투성이로 된 신발, 두발목에 찬 모래주머니… 나는 불시에 가슴이 뜨끔해짐을 느꼈다. 이런줄도 모르고 나는 강진이가 행운아여서 그런 복이 차례진줄로 생각했었다. 나는 강진이의 모습을 보면서 모든것을 똑똑히 깨달았다. 아버지가 왜 자기의 떳떳치 못한 지난날을 이야기해주었는지 그리고 강진이의 성공뒤에는 무엇이 있었는지를… 내앞에 서있는 그가 아득한 높이에 올라 서있는듯 한 느낌이 들었다. 《강진아, 아까 낮에 내가 소조를 옮기겠다고 말한것 있지 않니. 그건 그저 해본… 소리야.》 《누가 뭐라니? 나두 너처럼 맥을 놓고 주저앉을번 했는데…》 《정말?》 《정말 아니면… 난 뭐 프로그람만 넣으면 마지막까지 기동하는 콤퓨터인줄 아니?》 《하하하.》 우리들은 두손을 맞잡고 마음놓고 웃었다. 《강진아, 내가 잘못 생각했댔어.》 《됐어. 이젠 그만해. 뭐 아주 옮기기라도 한것처럼 그러니? 정혁아, 우리 목표로 정한 길을 끝까지 가자.》 《그래. 우리 꼭 훌륭한 강선아이들이 되자.》 《강선아이?! 야, 그 말이 참 좋구나.》 나는 축구공을 올려뿌리며 기뻐하는 강진이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언제 솟아올랐는지 동켠하늘에서 보름달이 환하게 웃고있었다. 마치도 내가 가는 앞길을 축복해주듯 달은 밝은 빛을 아낌없이 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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