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98(2009)년 제11호에 실린 글
□ 단편소설□장 익 성
하루수업이 끝나자 별이는 순애와 함께 교실문을 나섰습니다. 오늘도 5점꽃을 피운 자랑때문인지 그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떠날줄 몰랐습니다. 운동장앞에 우뚝우뚝 키높이 자란 백양나무에서는 매미들이 마치 그들을 축하나 해주듯이 저마다 목청을 돋구어 《맴맴맴》 노래를 불러줍니다. 학교정문앞에서 그들은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순애야, 잘 가.》 《응, 다시 만나.》 지난해 같으면 교양원선생님이나 아버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유치원정문을 나섰을 그들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당당한 소학교 1학년생들이라고 제법 어른스럽게 손까지 흔들면서 래일 아침에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서로 헤여졌습니다. 집으로 가는 별이의 발걸음은 날개라도 돋힌듯싶었습니다. 그러다가도 얼마 못가서 깡충깡충 토끼뜀을 하군 했습니다. 그때마다 등에 진 빨간색책가방은 별이의 발장단에 맞추어 좋아라 달싹달싹 춤을 추었습니다. 어느 사이 집에 다달은 별이는 방안에 책가방을 벗어놓기 바쁘게 다시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는 마당의 한옆에 서로 앞을 다투어 울긋불긋 망울을 터치고 제 모습을 자랑하는 꽃밭으로 발볌발볌 다가갔습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에 꽃향기가 물씬 풍겨와 못 견디게 코안을 간지럽혀주었습니다. 꽃밭에서는 아름답게 피여난 금전화며 백일홍, 봉선화, 코스모스꽃들이 서로 경쟁이나 하듯이 《별이야, 나를 먼저 좀 보렴.》하고 저마다 키돋움을 하고있었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신통히도 수닭의 볏을 방불케 하는 빨간 맨드라미꽃이 오늘따라 별로 산뜻하고 새침해서 별이의 얼굴을 빠금히 쳐다보고있었습니다. 그러거나말거나 꽃밭에 다가선 별이는 봉선화앞에 냉큼 앉고말았습니다. 그의 쌍까풀진 새까만 두눈은 기쁨으로 반짝거렸습니다. 오늘 아침 학교에서 있었던 일이였습니다.… 《따릉, 따릉, 따르릉.》 첫 수업시간을 알리는 예령종소리가 울리자 교실안은 갑자기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습니다. 한책상에 나란히 앉은 별이와 순애도, 모두들 선생님이 들어오시기를 조용히 기다리고있었습니다. 이때 순애가 책상우에 가만히 손을 올려놓으며 소곤소곤 귀속말을 했습니다. 《별이야, 이것 좀 봐. 곱지?》 《야, 정말 곱구나!》 별이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큰 목소리가 튕겨나왔습니다. 그러자 교실안은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벌둥지를 쑤셔놓은것처럼 말입니다. 녀자애들은 물론 남자애들까지 무슨 일이냐고 오구구 모여와 별이와 순애의 둘레로 어깨성을 쌓고 저저마다 싱갱이질을 벌렸습니다. 《별이야, 뭐가 곱니?》 《나도 좀 보자꾸나.》 순간 얼굴이 구운 가재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순애는 재빨리 두손을 책상밑으로 더 깊숙이 감추었습니다. 《야, 우리도 좀 같이 보자꾸나. 너무 시시하게 놀지 말아.》 누구인지 등뒤에서 시까스르듯 하는 말이였습니다. 그는 탁아소때부터 순애네 옆집에서 같이 사는 호남이란 애였습니다. 장난꾸러기 호남이라면 학년적으로도 모르는 아이들이 없었습니다. 《순애야, 내가 알사탕 줄게 딱 한번만 보여주려무나.》 호남이가 슬금슬금 순애앞으로 다가들었습니다. 《누가 알사탕 먹겠다니? 어서 저리 비켜.》 이번에는 별이가 두눈을 할깃 흘기며 되알지게 내쏘았습니다. 그래도 호남이가 여봐란듯이 우습강스레 코살을 찡긋거리자 아이들은 까르르 웃어댔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수업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또다시 울림과 동시에 흰눈처럼 하얀 저고리에 까만 치마를 산뜻하게 받쳐입은 담임선생님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섰습니다. 아이들은 방바닥에 뿌려진 콩알들처럼 자기 자리로 쫘르르 흩어져갔습니다. 당황한 호남이도 제자리로 급히 돌아서다가 《아야.》소리를 지르며 쿵ㅡ 하고 교실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야말았습니다. 걸상에 그만 발이 걸렸던것입니다. 《하하하》… 《호호호》… 어떤 애들은 선생님앞이란것도 그만 까맣게 잊은듯 저저마다 크고작은 웃음보따리를 펼쳐놓았습니다. 풀이 죽은 호남이는 그만에야 그 자리에 말뚝처럼 굳어져버렸습니다. 《어떻게 된 일이예요? 호남학생.》 《저, 사실은…》 방금전까지의 호남이는 어디로 사라져버렸는지 그는 금시 자라목을 해가지고 말끝도 맺지 못했습니다. 당장 무슨 《봉변》이라도 당할것만 같아 안절부절 못하고 뒤통수만 긁적거리는 호남이, 그는 지금 어느 구석에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막 들어가 숨어버리고싶은 심정이였습니다. 이때 순애가 살며시 일어났습니다. 《선생님, 호남동무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사실은…》 귀방울이 앵두알처럼 빨갛게 달아오른 그는 두손을 쭈밋쭈밋 선생님앞에 내보였습니다. 그제서야 아이들은 그의 열손가락 손톱들이 모두 빨갛게 물들여져있는것을 보게 되였습니다. 선생님도 그제야 모든것을 다 알았다는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갸름한 얼굴에 밝은 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리고는 순애의 손을 높이 쳐들어올렸습니다. 《자 학생동무들, 모두 여기를 보세요. 순애학생의 손이 얼마나 고와졌습니까?》 그러자 여기저기서 부러움에 찬 목소리들이 울려나왔습니다. 《히야, 쌩하구나.》 《그래, 정말 곱지?》 어떤 녀자애들은 참지 못하고 뽀르르 달려나와 순애의 손을 잡아보기까지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따뜻한 눈길로 그러는 학생들을 둘러보며 조용히 말하였습니다. 《순애학생의 손이 이렇게 더 고와진것은 봉선화꽃잎으로 손톱을 빨갛게 물들였기때문이랍니다. 경애하는 아버지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우리 어린이들이 즐겨하고있는 제기차기, 연띄우기, 팽이치기, 줄넘기를 비롯한 여러가지 민속놀이들을 더 많이 하도록 나날이 뜨거운 사랑을 돌려주고계십니다. 또한 우리 나라에는 예로부터 전해져내려오는 훌륭한 민속전통과 풍습들도 정말 많답니다. 동무들도 어디 한번 순애학생처럼 봉선화꽃잎을 따서 손톱에 물들여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순애학생은 꽃잎같이 곱고고운 그 손으로 5점꽃을 더 활짝 피우세요.》 《야!》 아이들은 입을 모아 탄성을 터쳤습니다. 짝자그르 박수소리가 터져나오고 부러운 눈길들이 순애한테로 날아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별이의 눈에서 반짝 불꽃이 튕겼습니다. (야, <꽃잎손>! 나도 할테야. 순애보다 더 곱게, 더 멋있게… 그래서 래일 아침엔 모두 오늘보다 더 깜짝 놀라게 할테야.) 이런 속생각이 그의 가슴속에 남몰래 자리잡았던것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좀전까지만 해도 웃음이 찰랑거리던 별이의 해맑은 얼굴은 점점 더 찌뿌둥하게 흐려졌습니다. 한번 또 한번… 아무리 색갈고운 봉선화꽃잎을 따서 손톱에 대고 있어보았으나 종시 빨갛게 물들여지지 않았기때문이였습니다. 자기도 순애와 동무들앞에 보란듯이 뽐내고 싶었는데 시작부터 모든것이 수포로 돌아가는것만 같았습니다. (선생님은 분명 봉선화꽃잎이라고 했는데 왜 내 손톱은 빨갛게 물들여지지 않을가? 도대체 순애는 봉선화꽃잎으로 어쩌면 그리도 곱게 손톱을 물들였을가?) 별이의 생각은 눈덩이 굴러가듯 자꾸만 커져 갔습니다. 그러나 선뜻 신통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가슴이 막 바질바질 타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다 공장에 나가고 학생소년회관 가야금소조에 다니는 언니는 저녁에야 돌아오겠으니 그 누구한테 물어볼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다람쥐 채바퀴 돌리듯 생각을 굴리던 별이는 불쑥 머리를 쳐들었습니다. 오늘 학교정문을 나설 때 순애와 나누었던 말들이 문득 떠올랐던것입니다. 《별이야, 너의 집 꽃밭에도 봉선화가 있니?》 《응, 우리 언니가 꽃밭에 심었어. 그런데…》 별이는 무엇인가 물어볼듯말듯 하다가 그만두었습니다. 그러자 순애는 이상하다는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물었습니다. 《별이야, 너 왜 그러니?》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이렇게 말하고 순애와 헤여진 별이였습니다. 지금 그의 눈앞에는 새물새물 웃기 잘하는 순애의 모습이 사진을 들여다보듯 또렷이 떠올랐습니다. 오똑한 이마며 코날, 날씬한 몸매, 웃을 때마다 오른쪽입가에 인상깊게 드러나군 하는 하얀 덧이 그리고 두갈래로 땋아드리운 까만 쌍태머리… 순애는 별이와 제일 친한 동무이기 전에 또 둘도 없는 《경쟁자》였습니다. 유치원시절에는 《빨간 별》을 누가 더 많이 타는가 경쟁을 했고 지금은 누가 5점꽃을 더 많이 피우는가 하는 말없는 경쟁을 하고있었습니다. (순애가 정말 봉선화꽃잎으로 물을 들였을가? 고 이악쟁이가 혹시… 아니야. 선생님도 분명 봉선화꽃잎으로 물을 들였다고 하셨는데 뭐. 그렇다면 우리 집 꽃밭의 봉선화하고 순애네 봉선화가 서로 다를가? 에이, 어디 한번 가서 속시원히 보고 와야지.) 순애는 별이네 바로 아래마을에서 살고있었습니다. 한달음에 순애네 집까지 달려오긴 했지만 선뜻 순애를 찾게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담너머로 몰래 꽃밭을 들여다볼수도 없는 일이였습니다. 아무리 《경쟁자》사이라고 해도 그것은 별이가 도저히 상상조차 할수 없는 행동이였던것입니다. 이럴가?… 저럴가?… 별이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며 한동안 망설이고 서있었습니다. 이때였습니다. 《아니, 이게 누구냐? 너 별이로구나. 그런데 집에는 안들어가고 왜 담장밖에 말뚝처럼 박혀있는거냐. 순애가 집에 없는가부지?》 토끼풀을 뜯어가지고 오던 순애 할머니가 별이를 반기며 하는 소리였습니다. 《순애 할머니,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사실 난…》 별이는 혀아래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찼습니다. 《원, 애두… 순애가 없으면 뭐라냐? 어디 잠간 나갔겠지. 어서 들어가자. 아니, 그렇게 그냥 밖에 서있을 참이냐?》 할머니는 별이의 등을 정답게 떠밀었습니다. 그제서야 엉거주춤 마당가에 들어선 별이는 그통에도 순애네 꽃밭부터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뜯어봐야 자기 집 꽃밭의 봉선화와 별다른 점이 있는것 같지 않았습니다. 별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이때 방안문이 벌컥 열리며 뜻밖에도 순애와 호남이가 함께 나서는것이였습니다. 그들도 얼떨떨해서 별이와 할머니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아니, 순애랑 집에 있었냐? 그런데 별인 왜?…》 할머니는 영문을 알수 없다는듯 잔조롬한 두눈을 끔벅거렸습니다. 별이의 얼굴은 도마도처럼 빨갛게 되여버렸습니다. 별이가 어쩔바를 몰라하는데 호남이가 먼저 별이의 손목을 담쑥 잡아끄는것이였습니다. 《별이야, 너도 숙제공부를 같이 하자고 왔니? 어서 방안으로 들어가자.》 순애의 얼굴에서도 그 인상적인 덧이가 새하얗게 드러났습니다. 순애도 몹시 반가운 모양이였습니다. 《그래그래. 별이야, 어서 들어오렴.》 그러나 비둘기마음 콩밭에만 가있다고 별이의 입에서는 왕청같은 말이 튀여나오고말았습니다. 《응, 그런데 너의 집 봉선화가 정말 곱구나.》 《뭐, 봉선화?》 순애는 두눈을 동그랗게 치켜떴습니다. 호남이도 멀뚱멀뚱 별이를 바라보았습니다. (아차!) 별이는 혀끝을 깨물었습니다. 그러는 별이를 한동안 말끄러미 지켜보던 순애가 그제야 모든것을 알아차린듯 또다시 얼굴에 밝은 웃음을 담뿍 담았습니다. 《그래, 정말 고운 꽃이야. 하지만 옛날에는 저 봉선화를 가리켜 눈물의 꽃이라고 불렀대.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너도 그 노래를 잘 알고있잖니?》 《눈물의 꽃?》 이번에는 별이가 두눈이 올롱해서 순애의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 별이도 호남이도 막 눈물을 흘릴거야. 난 그 이야기를 몇번이나 들었지만 들을 때마다 그냥 울었어.》 《순애야, 할머니한테 우리에게두 그 이야기를 좀 해달라고 해줘.》 호남이의 얼굴에도 호기심이 짙게 어렸습니다. 《그래. 자, 어서 방으로 들어가자.》 순애는 토끼풀이며 돼지물을 주고 방안에 들어서던 할머니의 팔목을 다짜고짜 부여잡았습니다. 《할머니, 별이랑 호남이랑 그때 그 봉선화이야기를 듣고싶어해요. 이 애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예?》 《원 녀석들두… 이 좋은 세월에 그 이야기를 또 들어서는 뭘 하겠다구?》 《할머니, 어서 들려주세요. 예?》 별이가 더 참지 못하고 할머니앞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졸랐습니다. 할머니는 이윽하여 무겁게 감았던 눈을 뜨고 세 아이를 천천히 둘러보았습니다. 《하긴 너희들은 그런 일을 상상조차 할수 없을게다.…》 이렇게 말머리를 뗀 할머니는 한참이나 창밖을 내다보다가 아이들앞에 험상궂은 두손을 내보였습니다. 할머니의 푸릿한 손잔등에는 움푹움푹 패웠던 허물자리가 아직도 또렷이 나타나있었습니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어린시절의 기억들이 하나, 둘… 희미해지지만 60여년전 그날의 일만은 마치 어제이런듯 순애 할머니의 눈앞에 삼삼히 다가들었습니다.… 보비(순애 할머니의 이름)가 여섯살나던 해였습니다. 야마모또라는 왜놈이 경영하던 양주간(술집)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징용》에 끌려나간 뒤 어머니와 어린 보비는 그곳에 몸종으로, 아이보개로 끌려오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아버지가 양주간에서 일할 때 깨먹은 술통 2개 값을 물지 못했다는것이였습니다. 사실 이것은 등치고 간 빼먹는 야마모또놈의 간교한 술책이였습니다. 페인이 다 되다싶이한 병든 사람 한명을 뽑아던지고 대신에 《건강》하고 고분고분한 그들 두명을 끌어오는 잔꾀를 부렸던것이였습니다. 이렇게 되여 어린 보비는 야마모또놈의 세살난 병신딸애를 힘겹게 업어주어야 했고 온종일 그 애의 갖은 시중을 다 들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시중이란것도 입에 올리기조차 지겹기 그지없는것들만이였습니다. 그러다가도 그 애를 조금만 울리기만 하면 무서운 매질이 죽도록 차례졌습니다. 그 광경을 볼 때마다 보비 어머니의 가슴은 칼로 도려내듯이 아프고 쓰렸습니다. 아, 하늘도 무심하구나! 저 어린것이 무슨 죄를 졌기에 잔뼈도 아직 굳기전에 왜놈의 아이보개가 되고 날마다 모진 매를 맞아야 한단 말인가? 한숨과 눈물밖에 모르는 저 딸애한테 기쁨과 행복을 줄 그날은 과연 언제면 오려나? 사람 못살 이 왜놈의 세상 벼락이나 콱 맞아라.… 이렇게 보비도, 보비 어머니도 끝없는 울분과 설음으로 나날을 보내고있던 어느날 저녁이였습니다. 야마모또것들의 산더미같은 빨래감을 다 빨고 집으로 돌아온 보비 어머니는 지치고지친 몸을 더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물먹은 흙담벽처럼 토방우에 풀썩 주저앉았습니다. 이때 마당가에 가냘프게 피여난 몇송이 봉선화가 방긋이 웃으며 보비 어머니를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유난히도 빨갛고 곱게 피여난 꽃송이였습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보비 어머니의 머리속에는 보비에 대한 생각이 불쑥 솟구쳐올랐습니다. (저 봉선화꽃잎으로 우리 보비의 손톱을 빨갛게 물들여주면 그 애가 얼마나 좋아할가. 잠시 잠간만이라도 우리 보비가 한번 마음놓고 웃는것을 보았으면…) 보비 어머니의 창백한 얼굴에는 한가닥 미소가 비꼈습니다. 그리하여 그날 저녁 험해질대로 험해진 어린 딸애의 열손가락 손톱들은 모두 빨갛게 물들여지게 되였습니다. 눈물자욱이 마를줄 모르던 보비의 피기없는 얼굴에도 순간이나마 웃음꽃이 피여났습니다. (이게 정말 내 손이 옳긴 옳을가?) 보비는 자기에게 찾아온 이 기쁨이 혹시 꿈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 몇번이고 두눈을 감았다떴다해보았습니다. 빨갛게 물든 손톱들은 꿈이 아니라 분명히 자기 보비손의것이였습니다. 《야, 우리 엄마가 제일이야! 내 손이 꽃잎처럼 고와졌어.》 너무 좋아 생글거리는 보비의 그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가에도 한줄기 핑그르 기쁨의 눈물방울이 솟구쳤습니다. 다음날 아침이였습니다. 이날도 보비는 야마모또놈의 병신딸애를 업고 넓은 뜨락을 팽이처럼 돌아갔습니다. 그러다가도 고와진 자기의 손이 자꾸만 또 보고싶어져 남몰래 들여다보군 하였습니다.
이때 보비의 손을 어깨너머로 내려다보던 야마모또놈의 딸애가 자기 손도 그렇게 해달라고 느닷없이 칭얼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으앙ㅡ》하고 요란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러자 방안 미닫이문이 드르릉하고 열리더니 야마모또놈이 기겁한듯 게다짝을 끌고 밖으로 뛰쳐나왔습니다. 《야 이 계집애야. 또 아이를 울려?》 그놈은 게사니처럼 꽥꽥 소리치며 보비의 연한 귀박죽을 있는 힘껏 잡아비틀기 시작했습니다. 《아야야ㅡ》 찢어지는듯 한 아픔에 몸부림치며 보비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아버지, 내 손을 저 거지년보다 더 곱게 해달라. 빨리빨리… 잉잉…》 야마모또놈의 딸애가 보비의 손을 가리키며 막 졸라댔습니다. 그러자 야마모또놈은 보비의 손을 홱 나꾸어들었습니다. 《칙쇼, 조선놈의 계집애. 누가 네년의 더러운 손을 일본주인집의 따님보다 곱게 치장하라고 했는가? 앙?》 이렇게 뇌까리던 야마모또놈은 보비를 땅바닥에 태질쳐놓고는 그 작고 야들야들한 손을 게다짝으로 마구 짓밟아대기 시작했습니다. 순간 보비의 손잔등에서는 빨간 피가 사정없이 솟구쳐올랐습니다. 개울가에서 딸애의 아츠러운 비명소리를 듣고 허겁지겁 달려온 보비 어머니는 순간 억이 꽉 막혔습니다. 어머니를 띠여본 보비도 《엄마야, 나 손 아파, 손 아파.》하고 소리치며 땅바닥에서 그냥 대굴대굴 굴었습니다. 보비의 손잔등에서는 아직도 빨간 피가 줄줄이 솟구치며 어머니의 치마자락우에 방울방울 떨어지고있었습니다. 《보비야, 이게 웬일이냐?》 너무도 기가 막혀 보비를 붙안고 통곡하던 어머니는 야마모또놈에게 사나운 눈총을 돌렸습니다. 《내 딸의 손이 무슨 죄가 있다고 이렇게 만들었소?》 《조선놈의 아이손은 일본아이 손보다 고와서는 안된다는걸 모르는가?》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소?》 《법? 이것이 일본법이란 말이야. 알았소까?》 《난 그런걸 모른다. 봉선화꽃잎으로 손톱을 곱게 물들이는건 예로부터 내려오는 우리 조선민족의 민속풍습이다.》 《칙쇼, 나쁜 년. 조선이 어디 있는가? 조선풍습이란게 어디 있는가? 이 지구상에 조선이란 나라는 없다. 조선이름도 조선말도 조선풍습도 없단 말이다.》 야마모또놈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서도 코밑에 기른 얄미운 나비수염까지 파들파들 떨었습니다. 《왜 조선이 없다는거냐? 네놈이 딛고 선 이 땅도 조선땅이고 네놈이 마시는 물과 공기도 다 조선의것이다. 이 개만도 못한 쪽발이놈아, 네놈들이 망할 날은 반드시 온다.》 어머니의 두눈에서는 증오와 항거의 불길이 펄펄 일었습니다. 그러자 굶주린 승냥이처럼 이발을 사려문 야마모또놈은 어머니에게 마구 달려들어 머리태를 그러쥐고 사정없이 내동댕이쳤습니다. 《빠가야로, 조선놈이나 남자건 녀자건 애새끼건 다 죽여야 한다. 이렇게… 이렇게…》 놈은 정신나간것처럼 뇌까려대며 어머니의 가슴이며 허리를 게다짝으로 그 몇번이고 내리찍었습니다. 정신잃고 쓰러진 어머니의 곁으로 겨우 기여간 어린 보비는 목놓아 소리쳤습니다. 《엄마야, 죽지 말아. 어머니…》 어린 보비의 분노에 찬 그 웨침소리는 저 멀리 하늘가로 피타게 울려퍼져갔습니다.… 할머니는 슬며시 눈구석을 훔치며 긴숨을 내쉬였습니다. 별이도 호남이도 두눈에 찰랑찰랑 고인 눈물을 손으로 뻑 닦고나서 다시 물었습니다. 《할머니, 그뒤엔 어떻게 되였나요?》 《그날부터 시름시름 자리에 앓아누운 어머니는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몇달만에 눈을 감았지. 나는 그놈의 집에서 쫓겨나 거지가 되였고… 그런데 그해 8월에 조국해방의 날을 맞이할줄이야.》 《야!》 세 아이는 조국해방이라는 말에 탄성을 올렸습니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그날에는 울밑에 핀 한송이의 봉선화도 아름다운 제모습을 자랑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가슴을 허비는 눈물의 꽃, 슬픔의 꽃으로 시들어버렸단다. 어떤 꽃인들 그 운명을 달리할수가 없었지. 위대한 대원수님께서 빼앗긴 내 나라를 찾아주시고 우리 장군님께서 선군의 머나먼 길을 쉬임없이 걷고 걸으시기에 이 땅, 이 하늘아래 그 어디에나 이제는 봉선화며 온갖 꽃들이 기쁨의 꽃, 행복의 꽃으로 활짝 피여나 제모습을 마음껏 자랑하고있지. 오늘 아침 순애의 손이 더 고와진것도 아버지장군님께서 가꾸어주신 <꽃잎손>이라고 말할수 있지. 안 그렇냐?》 《할머니, 잘 알았습니다.》 별이도 호남이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할머니의 얼굴에 흐뭇한 웃음이 퍼져가는데 순애가 문득 입을 여는것이였습니다. 《별이야, 어서 너의 두손에도 봉선화꽃잎을 물들이자.》 《너 그게 정말이가?》 별이의 쌍까풀진 고운 눈이 또다시 올롱해졌습니다. 《아무렴, 우리야 유치원때부터 <빨간 별>도 꼭꼭 함께 타군 했었지. 그러니 오늘이라고 달라지겠어? 내 손이 더 고와지면 네 손도 함께 고와져야 해.》 그러더니 하얀 비닐봉지가 놓여있는 책상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저게 뭘가?) 별이는 의아한 눈길로 순애를 바라보았습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새물새물 웃기 잘하는 순애는 하얀 덧이를 살짝 드러내보이며 별이앞에 그 비닐봉지를 내밀었습니다. 《별이야, 자 받아. 너를 위해 마련해두었던거야.》 《날 위해… 그런데 이게 뭐게?》 《응, 봉선화꽃잎에 백반을 두고 짓찧은거야. 숙제를 다하고 호남동무와 함께 너의 집에 찾아가려고 했댔어.》 《우리 집에?》 별이는 놀랐습니다. 가슴속에서 그 무엇인가 뜨거운것이 치밀어올라 목안을 꽉 메우는것같았습니다. 《오늘 학교에서 헤여질 때 내가 묻지 않았댔니? 나도 어제 할머니에게서 들어서야 알았는데 봉선화꽃잎은 백반이나 식초를 조금 두고 함께 짓찧어 우러나온 물을 손톱에 들여야 한대. 그래야 손톱에 곱게 빨간 물이 잘 든대.》 별이의 마음은 마치 전기에 감전된것처럼 짜릿해났습니다. (동무들도 자기처럼 생각하고 위해주려는 순애. 그런데 난… 자기 혼자만 생각하고 동무들앞에서도 순애보다 더 잘난체 뽐내려고 했었지.) 생각할수록 순애가 정말정말 높이도 돋보였습니다. 《순애야, 날… 날 용서해줘.》 별이는 순애의 손을 살며시 그러잡았습니다. 《아니, 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가?》 《난 그런 네 마음도 모르고 사실 몰래 너의 집 봉선화를 보자고 왔댔어. 그런데… 그런데…》 순애는 알만 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하지만 더 밝게 웃음지으며 별이와 호남이의 손을 꼭 모두어쥐였습니다. 《얘들아, 우리 약속하자. 우리모두 래일부터 곱고고운 이 <꽃잎손>으로 공부를 더 잘해서 언제나 5점꽃송이만 아름답게 피우자는걸. 그래서 아버지장군님께 그 언제나 기쁨만을 안겨드리는 훌륭한 선군동이들이 되자는것을.》 《그러자.》 별이가 선참 대답했습니다. 《나두.》 별이를 따라 호남이도 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세 아이는 함박꽃같은 웃음을 얼굴에 가득 담고서 서로서로 자기들의 《꽃잎손》을 굳게굳게 마주잡았습니다. 그들의 가슴속엔 끝없이 아름다운 래일의 꿈이 꽃밭에 만발하게 피여난 온갖 꽃송이들처럼 더욱더 향기롭게 피여나고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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