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99(2010)년 제1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박 명 철
1 《쿵―쿵!》 어디선가 둔중한 포소리가 온종일 그치지 않고 그냥 울려왔다. 대봉산으로 떠날 차비를 끝낸 영운이와 기남이는 배낭을 옆에 놓고 퇴돌우에 나란히 앉았다. 그들은 14살동갑나이였다. 그러나 얼핏 보면 영운이가 기남이보다 한두살 더 먹어보였다. 손우형님처럼 키도 훨씬 더 크고 몸도 실했다. 얼굴이 부하고 눈매가 서글서글한 영운이가 수더분한 인상이라면 기남이는 얼굴이 갱핏하고 눈매가 날카로운 인상이였다. 생김은 대조적으로 판판 달랐지만 그들은 언제나 마음이 맞아 돌아가는 둘도 없는 딱친구지간이였다. 며칠전 마을을 강점한 미군원쑤놈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 어린 누이동생까지 잃은 기남이가 대봉산인민유격대를 함께 찾아가자고 영운을 찾아온것도 그 우정때문이였다. 영운은 그의 부탁에 두말없이 응해나섰다. 하지만 막상 정든 보금자리를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빨리 떠나자고 서두르며 재촉하던 기남이도 그의 마음을 헤아려서인지 덤덤히 침묵을 지키며 영운이가 일어서기만을 기다렸다. 사냥명수인 말같이 큰 개 《곰이》는 어인 일이냐는듯 두귀를 쭝깃거리며 영운이와 기남이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선선한 마가을바람이 쉬익― 불어왔다. 딸랑… 딸랑… 절간마당에 세워진 8각 9층탑의 풍경들이 일시에 춤추듯 흔들거리며 청아하고 신비로운 소리를 냈다. 매일처럼 들어오는 귀에 익은 풍경소리였지만 별스럽게 영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저도 모르게 풍경소리와 함께 흘러온 못 잊을 지난날의 추억이 되새겨졌다. 일곱살나던 해 벌마을 야학선생님을 하던 아버지가 조선력사를 가르쳤다고 일제경찰놈들에 의해 감옥으로 붙잡혀가던 일이며 그후 어머니마저 한많은 세상을 떠나 마음 무던한 이웃집에 얹혀살던 일, 이태후 감옥에서 풀려나온 아버지의 손목에 끌려 여기 심산속의 절간으로 들어오던 일들… 해방전 그 나날 영운은 제또래 동무 하나 없는 절간에서 까까머리동자승(어린 소년중을 이르는 말)노릇을 해야 했었다. 보는것은 산과 나무, 바위가 전부였고 듣는것은 중들이 두드리는 목탁소리와 산새소리, 맹수들의 울부짖음소리뿐이였다. 낮도 밤처럼 어둡고 침침하기만 하던 세월이였다. 허나 세상을 등진 이곳 《구절골》에도 밝은 해빛이 비쳐들었다.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 강도 일제를 쳐부시고 나라를 찾아주신것이였다. 거리와 마을은 기쁨과 환희로 끓어번졌다. 영운은 아버지에게 졸랐다. 《아버지, 우리도 빨리 마을로 내려가자요.… 나도 동무들과 함께 살고싶어요. 학교에 가고싶어요.》 《그래, 내려가자. 우리도 새 나라를 위해 힘껏 일을 해서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은덕에 보답하자.》 아버지는 선선히 응하며 마을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때였다. 산아래마을의 리인민위원장아저씨가 보위색옷차림의 낯모를 아저씨 한분을 데리고 찾아왔다. 리인민위원장아저씨는 키가 후리후리하고 이마가 훤하게 벗어진 낯모를 그 아저씨를 김일성장군님을 몸가까이 모시고 싸운 항일유격대원이며 장군님의 령으로 도에 파견된 《파견원동지》라고 소개했다. 아버지의 안내를 받으며 절간을 일일이 다 돌아보고난 파견원아저씨는 절간앞의 돌계단에 허물없이 앉았다. 장시간 영운이네의 피눈물나는 과거사와 앞으로의 생활의향을 물어주었다. 《마을에 내려가 농사를 짓겠단 말이지요. 그럼 이 절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난 감옥에서 나온 후 이 절간에 들어와 매일처럼 부처앞에서 빌었습니다. 하루빨리 왜놈세상이 망하게 해달라구요. 하지만 그처럼 령험하다는 부처도 도탄에 빠진 우리 민족을 구원하지 못하였습니다. 일제에게 빼앗겼던 삼천리강토를 찾아주시고 우리 민족을 수난에서 구원해주신분은 오직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뿐이시였습니다. 위대한 장군님을 잘 받드는 길이 내 나라를 흥하게 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적은 힘이나마 힘껏 농사를 지어 새 나라의 건국사업을 받들려고 합니다.》 아버지는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파견원아저씨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듯싶었다. 이윽고 아버지의 거쿨진 손을 다정히 잡으며 입을 열었다. 《그 심정은 충분히 리해됩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박동무까지 떠나가면 이 절간의 민족문화유산은 누가 관리하며 보존하여 후대들에게 물려주겠습니까.… 위대한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백두산에서 싸우실 때 슬기로운 우리 인민이 창조한 력사문화유적들을 왜놈들이 닥치는대로 파괴하고 략탈하는데 대하여 몹시 가슴아파하시였습니다.…》 《그럼 이 절간을 지키는것이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드는 일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 일도 반만년의 유구한 력사와 문화를 가진 우리 나라를 더욱 빛내이시려는 김일성장군님의 뜻을 받드는 일입니다.》… 그날부터 아버지는 유적관리원이 되였다. 영운이도 더는 아버지에게 마을에 내려가 살자고 조르지 않았다. 날마다 10리산속길을 오가며 새로 일떠선 학교에 다니는것도, 심산속에 홀로 사는것도 싫지 않았다. 마음속에서는 항상 우리 아버지는 김일성장군님을 받드는 큰일을 한다는 남다른 긍지와 자부심이 고패쳤다. 아버지는 수십개의 고인돌유적과 절간을 맡아관리하며 영구보존하기 위해 밤낮으로 묵묵히 일했다. 영운이도 힘자라는껏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아버지는 전쟁이 일어나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절간의 귀중한 유물들을 안전한 장소에 소개했다. 그리고는 자진하여 절간에 남았다. 한몸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나라의 귀중한 문화재부를 지키려는 결심에서였다. 그러다 끝내 원쑤놈들에게 체포되여 끌려갔다. 영운이의 눈앞에는 절간에 달려들어 아버지를 차고 때리며 문화유물을 감춘 장소를 대라고 입에 게거품을 물고 날뛰던 가증스러운 원쑤놈들의 상통이 얼른거렸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고 복수심이 끓어올랐다. 《에익, 죽일놈들!》 영운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빨리 인민유격대아저씨들을 찾아가야 한다. 원쑤놈들에 대한 누를길 없는 증오와 복수의 피가 끓어올랐다. 불이 펄펄 이는 눈길로 원쑤놈들이 둥지를 틀고있는 마을쪽을 내려다보던 영운은 소스라쳐놀라며 그 자리에 떡 굳어졌다. 골짜기 오솔길로 총을 멘 두놈의 미군이 엉기적엉기적 올라오고있었던것이였다. 절간으로 오는 놈들이 분명했다. 《기남아, 미군놈들이다.》 《뭐, 미군놈?》 《곰이》를 쓸어주며 앉아있던 기남이가 와뜰 놀라 어쩔바를 모르고 허둥댔다. 어느새 그 기미를 눈치챈 《곰이》가 두귀를 잔뜩 곤두세우며 으르렁댔다. 《빨리 숨자.》 《응.》 그들은 앞뒤를 가릴새없이 집모퉁이의 굴뚝뒤로 몸을 숨겼다. 잠시후 두놈은 절간앞에 이르렀다. 신기한 눈길로 으리으리한 절간건물 여기저기를 살펴보던 놈들은 《대웅전》안으로 뛰여들었다. 한동안 절간안팎을 분주히 돌아치던 놈들은 아무것도 훔쳐갈만 한것이 없는지 돌탑앞으로 다가갔다. 신기한 소리를 내며 울리는 풍경소리에 끌리운듯 한동안 목이 부러지도록 올려다보던 놈들은 제놈들끼리 뭐라고 꼬부랑말로 씨벌였다. 이어 한놈이 돌탑의 단을 붙들고 섰다. 다른 한놈이 그의 어깨로 게바라올라가려고 버둥거렸다.
오래전 우리 선조들이 8각으로 된 9층돌탑을 세울 때 만들어 단 풍경이 참으로 귀중한 력사유물임을 너무나 잘 아는 영운은 가슴이 떨렸다. 아, 이런 때 총이나 수류탄이 있었으면… 그러나 맨주먹뿐이였다. 총을 가진 미군놈들을 자기의 힘으로는 당할수가 없었다. 아, 이 일을 어쩌면 좋단 말인가?… 어찌할바를 몰라 입술을 감쳐물던 영운이의 머리속에 느닷없이 아버지의 웅글은 목소리가 울려왔다. 《영운아, 우린 한목숨 바쳐서라도 이 절간과 력사문화유물들을 지켜내야 한다. 이건 손에 총을 잡고 미군놈들과 싸우는것 못지 않게 크고 중요한 일이란다.》 력사유물들을 산속에 소개하고 돌아온 날 밤 아버지가 하던 말이였다. 그렇다, 한목숨 바쳐서라도 저 풍경들을 지켜내야 한다, 어떻게 할가?… 영운이는 속이 바질바질 끓어올랐다. 피끗 그럴듯한 생각이 떠올랐다. 영운이는 기남이에게 나직이 물었다. 《기남아, 너 고무총 있니?》 《고무총? 응, 있어.》 기남이는 영문을 몰라 두눈을 껌벅였다. 《고무총으로 저놈의 대가리를 맞힐수 있니?》 기남이는 경황없는 속에서도 벌씬 웃으며 코밑을 쑥 훔쳤다. 그까짓쯤이야 문제없다는 그 나름의 표현이였다. 그럴수밖에… 기남은 고무총으로 날아가는 참새까지 쏘아맞히는 《명사수》였다. 영운은 모가 난 사금파리를 찾아 기남이의 손에 들려주며 귀속말로 소곤거렸다. 금시 눈이 떼꾼해졌던 기남이는 그제야 알았다는듯 빙그레 웃음짓더니 고무총을 꺼내들고 사금파리를 재웠다. 기남이는 별로 겨냥하지 않고 핑― 고무총을 쏘았다.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풍경을 떼려던 미군놈이 상통을 싸쥐며 허궁 땅바닥에 나떨어졌다. 동시에 《휘익―》 하고 째는듯 한 휘파람소리가 울리고 영운이의 부추김을 받은 《곰이》가 쏜살같이 달려나갔다. 미군놈들은 어마지두 혼비백산하여 총을 쏠념도 못하고 막 허둥거렸다. 뒤이어 뜻밖에도 놈들은 가슴에 황황히 십자가를 그으며 걸음아 날 살려라 산밑으로 도망쳐가는것이였다. 그 어떤 《신》의 조화나 《하느님》의 징벌로 착각한 모양이였다. 그도 그럴것이 으리으리한 절간이며 울긋불긋한 색칠을 하고 성난듯이 잔뜩 혀를 빼문 동물의 모양, 인적없이 괴괴한 살찬 공기속에서 별안간 울려오는 풍경소리, 하늘에서 문득 총알같이 날아온 사금파리와 함께 말같이 큰 《승냥이》가 달려와 울부짖는 모습이 분명 《하느님》의 징벌로 여겨졌던것이였다. 《하하하.》 두 소년은 놈들의 그런 꼬락서니를 깨고소하게 내려다보며 통쾌감을 금치 못했다. 한동안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로 미군놈들을 쫓아버린 장한 기분에 들떠 가슴을 들먹였다. 《영운아, 이젠 빨리 떠나자. 이제 저놈들이 다른 놈들을 한무리 달고 올라오면 어쩌겠니?》 기남이가 배낭을 지며 서둘렀다. 그의 손에 끌려 몇걸음 따라서던 영운은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한목숨 바쳐서라도 이 절간과 문화유물들을 지켜내야 한다던, 그것이 손에 총을 잡고 원쑤놈들과 싸우는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이라던 아버지의 간곡한 말이 발목을 잡았던것이였다. 또한 인민유격대로 들어가는 길에 들려 소년단지도원선생님이 하던 당부도 귀전을 울렸다. 《원쑤놈들의 세상은 오래 가지 못한다. 그러니 영운인 여기 남아 아버지의 일을 잘 도와야겠다.》 아버지와 소년단지도원선생님의 당부를 끝까지 지켜야 했다. 원쑤놈들이 언제 또 달려들어 어떤짓을 할지 모르는 형편에서 절간을 한시도 비워둘수 없었다. 《기남아, 난 떠날수 없어. 여기 남아있어야 해.》 《뭐, 여기 남아있어야 한다구?》 《응.》 영운이는 해방되던 해 절간을 찾아왔던 항일투사 파견원아저씨가 해주던 이야기와 소년단지도원선생님의 당부를 그대로 외웠다. 그리고 절절히 말했다. 《이 력사문화유적을 지키는 일두 원쑤놈들과 싸우는 일이야. 나라의 귀중한 재부를 지키는 큰 싸움이란 말이야.》 《큰 싸움? 총두 없이 어떻게 미군놈들과 싸움을 한단 말이냐?》 《너두 방금 우리한테 미군놈들이 혼쭐이 나서 걸음아 날 살려라 내빼는걸 봤지. 잘만 하면 여기서두 얼마든지 놈들의 총이랑 수류탄이랑 빼앗을수 있어. 그것으로 놈들을 꽝꽝 족쳐버릴수 있구.…》 자기도 모르게 튀여나간 말이였다. 그렇지만 정작 말을 해놓고보니 얼마든지 그럴 자신이 있었다. 담과 배짱이 생겼다. 《네 말을 듣고보니 정말 그렇구나. 그럼 나두 여기에 남겠어. 수류탄이랑 총이랑 빼앗아가지고 인민유격대루 가자.》 무슨 일이나 반응이 빠르고 흥분하기 잘하는 기남은 열에 떠서 주먹까지 내흔들었다. 영운은 기남이의 손을 덥석 잡았다. 《기남아, 고맙다. 나와 함께 여기서 싸우자.》 기남이도 영운이의 손을 맞잡았다. 《응, 싸우자. 솔직히 말해 난 아까 겁이 났댔어. 그런데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치는 놈들을 보니까 막 사기가 나더구나.》 《나두 첨엔 무서웠어. 그런데 미군놈들과 맞붙어보니 별게 아니더구나 뭐.…》 《미군놈들은 키나 꺽두룩했지 겁쟁이들이야, 하하하.》 둘은 즐겁게 웃었다. 원쑤놈들과 싸울 신심과 용기로 가슴을 들먹였다. 영운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부르짖었다. 《아버지, 우린 오늘 절간에 기여든 미군놈들을 쫓아버렸어요.…》
2
이튿날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난 영운은 기남이를 깨워가지고 밖으로 나섰다. 그들을 반기듯 자그마한 풍경들이 은은한 음향을 울려주었다. 젖빛안개에 휩싸인 고즈넉한 골안의 신선한 대기속으로 울려퍼지는 그 풍경소리는 웅건화려한 절간의 옛건물들과 조화롭게 어울리며 더없이 우아하고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영운아, 저 풍경소리는 정말 기딱막히게 멋있구나. 마치 우리가 옛말에 나오는 신선나라에 와있는것 같은감이 들어.》 기남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럴거야. 우리의 슬기로운 조상들은 저런 풍경이나 방울을 수천년전부터 만들기 시작했대. 이 절간이 생겨난것이 고구려시기라니까 아마 저 풍경두 그때 만들어 달아놓았을거야.》 《야, 그러니 우리 조상두 몇십 아니, 몇백대 조상들이 만든거로구나. 도대체 무엇으로 만들었길래 소리가 저렇게 아름다울가?》 기남이도 풍경소리에 심취되여 온넋을 잃은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청동으로 만들었어. 원시시대 말기에 벌써 우리 조상들은 구리를 가지고 도구를 만들어 썼는데 그것을 차츰 발전시켜 다른 금속과 섞어 굳게 만든것이 저 풍경재료인 청동이란다. 청동단검이나 청동갑옷, 청동방울같은것들도 그때부터 이 세상에 생겨나기 시작했다는거야.》 영운은 력사문화유적들에 대하여 많은것을 알고있는 아버지에게서 들었던 상식들을 막힘없이 이야기했다. 《저아래에 있는 고인돌무덤도 원시시대 말기 추장들의 무덤이였대.》 그런 다음 8각 9층돌탑의 풍경과 관련된 전설이야기를 덧붙였다. … 수백년전 어느해인가 나라에 큰 란이 터졌다. 호시탐탐 우리 나라를 엿보던 바다건너 왜적들이 수백척의 배를 타고 쳐들어왔던것이였다. 그때 싸움터로 나가던 수백명의 군사들이 《구절골》안에 숙영지를 정하고 쉬고있었다. 머나먼 행군길에 지친 군사들이 깊은 잠에 곯아떨어진 야밤삼경 별안간 8각 9층돌탑의 풍경들이 일시에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바람 한점 없는 날씨에 이 무슨 조화인가? 필경 왜적들이 쳐들어온다는 비상신호로다. 군사들은 곧 싸움준비를 하고 골짜기로 달려내려가 병풍바위우에 진을 쳤다. 아닐세라 숱한 왜적들이 살금살금 골안으로 밀려들어오고있었다. 우리 군사들이 《구절골》에서 숙영하고있다는것을 내탐한 왜적들이였다. 놈들이 매복권안에 들어서자 요란한 함성과 함께 불화살이 비발치듯 날아갔고 와당탕 불벼락이 쏟아졌다. 혼비백산한 왜적들은 아우성을 치며 화살에 맞고 돌탕에 맞아 무리로 쓰러졌다. 결국 우리 군사들을 습격하려던 왜놈들은 한놈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까마귀밥이 되고말았다. 그때부터 이 8각 9층탑의 풍경들은 더 유명한 재보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간직되게 되였다고 한다. 이처럼 우리 나라의 력사문화유적들 하나하나에는 인민들의 념원과 지향, 뛰여난 재능과 슬기들이 깃들어있는것이다.… 영운이의 이야기에 기남이는 놀라움과 부러움의 눈길을 떼지 못하였다. 《야, 넌 정말 아는것이 많구나. 력사선생님 같다 얘.》 《나야 조상들의 유물을 지키는 관리원의 아들이 아니니.〈절간지기〉! 하하하.》 영운이는 자부심에 휩싸여 즐겁게 웃었다. 기남이도 따라웃었다. 오손도손 이야기를 나누며 절간주변을 돌아보고 차거운 옹달샘물에 정신이 번쩍 들게 세면을 하고난 그들은 집으로 돌아와 아침식사준비를 서둘렀다. 어제 밤에 토론한대로 병풍바위로 싸움준비를 하러 떠나야 했던것이다. 절간에서 오리쯤 마을쪽으로 내려가느라면 아찔한 절벽들이 량옆으로 병풍처럼 서있는 좁은 자루목이 있었다. 절간으로 올라오려면 반드시 이 좁은 계곡을 통과해야 했다. 장밤 어떻게 하면 원쑤놈들이 절간에 얼씬 못하게 하고 또 총이나 수류탄도 빼앗을수 있겠는가 의논하던 그들은 이 계곡우에 매복하고있다가 돌벼락을 안길 멋진 궁리를 해냈었다. 그것을 한시바삐 실천에 옮기자면 서둘러야 했다. 볼이 메지게 다급히 밥을 퍼먹고난 그들은 점심으로 줴기밥을 한덩이씩 싸서 허리에 찼다. 《곰이》가 그들을 따라나섰다. 《〈곰이〉야, 넌 여기 남아 절간을 지켜야 한다, 누구도 얼씬 못하게.… 알겠니?》 주인의 말귀를 곧잘 알아듣는 령리한 《곰이》는 함께 가겠다고 응석을 부리듯 끙끙대더니 할수없이 대문가에 주저앉았다. 당장 큰일을 칠것처럼 기세가 등등하여 산아래골짜기를 따라 달음쳐가던 두 소년은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마을쪽에서 다급히 뛰여올라오는 한 소년의 모습이 눈에 띄였던것이다. 《?!》 의문과 긴장감을 가지고 마주 달려오는 아이와 그 주변을 눈여겨보던 영운은 흠칫 놀랐다. 자기또래 정호란 애가 아닌가. 정호는 미제침략군이 마을에 기여들자 《치안대》에 가담한 제 아버지를 도와 놈들의 병영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시중군노릇을 하는 쓸개빠진 자식이였다. 《아니, 저 자식이?》 기남이도 그를 알아본듯 매눈을 치떴다. 주먹을 불끈 쥐는것으로 보아 당장이라도 된매를 안길 자세였다. 《개자식, 마침 잘 만났다.》 영운이도 미제침략군의 더러운 개노릇을 하는 정호한테 톡톡히 버릇을 가르치리라 윽벼르며 그가 다가오기만 기다렸다. 허둥지둥 달려오던 정호가 그들앞에 멈춰섰다. 그는 미처 가쁜 숨을 톺을새도 없이 다급한 소리를 했다. 《크― 큰일났어. 미…미군놈들이 오늘 저녁 저… 절간을 불태우구 애국자들을 하… 학살하려구 해. 영운이 너… 너의 아버지랑…》 정호의 입에서 튀여나오는 뜻밖의 소리에 영운이와 기남은 한순간 얼떠름해졌다. 《야, 그게 정말이야?》 기남이가 온곱지 않은 눈길로 쏘아보며 따지고들었다. 《저― 정말이야. 우리 아버지가 빨리 영운이 너한테두 알려주구 인민유격대에 련락하게 하라고 했어. 시…시간이 급하다면서…》 《흥, 너같은 개자식의 말을 어떻게 믿어.》 기남은 코웃음을 쳤다. 순간 정호는 두눈을 어디 둘지 몰라 허둥거리며 입술을 감쳐물었다. 정호의 얼굴이 고추빛으로 물들었다. 원쑤놈들의 개노릇을 하는 부끄러움때문인지 아니면 그 무엇으로도 자기의 정당함을 증명할수 없는 안타까움때문인지 딱히 종잡을수 없는 표정이였다. 《너희들이 내 말을 믿지 않을수도 있어. 그렇지만 이건 사실이야. 후에 다 알게 될거야. 빨리 대봉산인민유격대지휘부에 알려줘. 난… 난 나쁜 애가 아니야. 우리 아버지두… 자, 부탁한다.》 절절한 부탁을 남긴 정호는 영운이와 기남이가 따져물을새도 없이 홱 돌아서서 마을쪽으로 내뛰였다. 《?!》 두 소년은 한동안 움직일줄 몰랐다. 도무지 뭐가 뭔지 갈피를 잡을수가 없었다. 꼭 그 무엇에 홀리운듯 한 심정이였다. 영운이의 머리속에는 차츰 정호와 그의 아버지가 놈들속에서 우리 일을 돕고있는 좋은 사람일수 있다는 생각이 갈마들었다. 옳다! 정호는 좋은 애다! 그렇다면?… 아,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영운은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금시 심장이 싸늘하게 얼어들었다. 눈앞이 새까매졌다. 그 다음순간 정호의 부탁대로 빨리 대봉산인민유격대지휘부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자각이 머리를 쳤다. 《기남아, 시간이 없다. 빨리 대봉산인민유격대에 알려야겠어.》 앞뒤를 가려볼 사이도 없이 무작정 기남이의 손목을 끌고 산으로 올려뛰던 영운은 차츰 발걸음이 떠졌다. 절간이 마음에 걸렸던것이다. 절간이 얼마나 귀중한 민족문화유산인가를 너무도 잘 아는 그였던것이다. 《기남아, 대봉산에 너 혼자 가야겠어. 난 그사이 절간을 지켜야 해.》 기남의 등을 떠민 영운은 절간쪽으로 내달렸다.
3
한초, 또 한초… 시간은 사정없이 흘렀다. 어느덧 점심때도 지나고 8각 9층탑의 그림자가 동쪽으로 점점 길게 드리운것으로 보아 해가 서산을 넘어설 시각도 멀지 않았다. 영운은 가슴이 바질바질 타들었다. (기남이가 왜 아직 안 나타날가. 이젠 도착할 시간이 됐는데… 혹시 가다가 무슨 일이라도?…) 한시바삐 인민유격대가 도착해야 한다는, 그래야만 아버지와 애국자들을 구원할수 있고 절간도 지켜낼수 있다는 긴장감과 절박감으로 입안이 말라들었다. 별안간 옆에 엎드려있던 《곰이》가 두귀를 쭝깃 세웠다. 무슨 인기척을 느낀것 같았다. 영운은 반사적으로 절간아래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몇백년 자란 느티나무들과 소나무들로 꽉 들어찬터여서 몇십m앞도 잘 가려볼수가 없었다. 영운은 귀를 강구었다. 멀리서 꽥꽥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곰이》가 으르렁거리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원쑤놈들이 올라오는것이 분명했다. 영운은 널뛰듯 하는 가슴을 안고 다시금 대봉산쪽을 바라보았다. 마가을바람에 설렁이는 가랑잎소리뿐 기남이의 모습도, 인민유격대아저씨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야단났구나! 이 일을 어쩌면 좋담?… 영운은 안절부절못했다. 꽥꽥 고아대는 놈들의 비린청이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잠시후 포승에 묶이운 애국자들과 호송병놈들이 절간마당으로 올라왔다. 그 맨앞에는 아버지가 서있었다. 그리운 아버지의 모습을 알아보는 순간 영운은 흠칫 몸을 떨었다. 원쑤놈들이 얼마나 악착하게 고문을 들이댔는지 얼굴은 온통 피투성이였고 옷은 갈가리 찢어져 맨살이 드러났던것이였다. 게다가 신도 없는 맨발이였다. (아버지!) 어서 목끈을 놓아달라고 끙끙대는 《곰이》의 목을 꼭 그러안은 영운은 마음속으로 아버지를 부르며 피나게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도포자락같은 군용외투를 입은 미군장교놈이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는 《치안대》대장놈에게 뭐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땅딸보 《치안대》대장놈이 졸개들을 향해 돼지 멱따는 소리를 내질렀다. 《절간지기만 내놓고 나머지 놈들은 모두 절간안에 처넣어라.》 놈들은 이리떼처럼 달려들어 반항하는 애국자들을 총탁으로 치고 발로 걷어차며 절간안으로 밀어넣었다. 복닥소동이 끝나자 미군장교놈이 아버지앞으로 다가갔다. 놈은 서투른 조선말로 씨벌였다. 《나 하느님의 사도로서 당신이나 지옥에 보내고싶지 않삽네다. 절간의 유물들을 어디다 감췄는지 대시오. 그것만 말하면 살려주겠삽네다.》 《…》 《만약 당신 절간유물 감춘 곳이나 대지 않으면 절간속에 가두고 불태워죽입네다. 불속에 타죽는거 지옥의 기름가마보다 더 무섭삽네다. 살수 있는 마지막기회입네다. 자, 빨리빨리 대시오.》 《…》 아버지가 역스러운 눈으로 미군장교놈을 쏘아보며 침묵으로 항거했다. 휘익―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딸랑… 딸랑… 풍경들이 일시에 신비롭고 우아한 소리를 울렸다. 어제나 오늘이나 풍경소리는 여전했다. 그러나 영운에게는 마치 그 소리들이 원쑤놈들을 절규하는 아버지의 피타는 웨침같이 들려오는것이였다. 미군장교놈은 한동안 음험한 눈으로 풍경을 올려다보았다. 《〈치안대〉대장, 당신 저 풍경들을 떼시오. 몽땅 떼시오.》 《각하, 그런데 저 풍경들이야 무슨 값이…》 《노우! 당신 밥통, 빨갱이들의 넋을 뽑자면 저런것들도 모두 없애야 합네다. 이 땅에 미국의 하나님 종소리만 울려야 합네다. 그래야 당신네 조선사람들 우리 미국의 노복됩네다. 알겠는가.…》 미군장교놈은 드디여 조선사람의 넋을 송두리채 뽑아내려는 양키들의 더러운 본성을 드러냈다. 영운은 더는 참을수 없었다. 자기를 억제할수 없었다. 《〈곰이〉, 저놈을 물어라. 어서!》 《곰이》는 벼락같이 미군장교놈에게 달려들었다. 《으악!》 미군장교놈은 기절초풍하여 권총을 마구 휘둘렀다. 땅땅… 용맹한 《곰이》가 그만 쓰러졌다. 총에 맞은것이였다. 한절반 얼혼이 빠진 놈은 《곰이》에게 물리워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싸쥐고 성이 독같이 나서 펄펄 뛰였다. 《까뗌! 이놈 끌어가시오. 저 절간 송두리채 불태워버리시오.》 놈들이 이리떼처럼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이 천벌을 받을 놈들아, 안된다. 내가 살아있는 한 이 절간은 절대로 못 다친다!》 아버지는 피타게 부르짖으며 원쑤놈들과 무섭게 몸싸움을 벌렸다. 그러나 포승에 묶이운 몸으로 수적으로 많은 놈들을 당할수가 없었다. 영운은 두눈을 꼭 감았다. 이제 몇분이면 아버지가 절간에 갇히우고 놈들이 불을 지를것이다. 안된다! 죽는 한이 있어도 귀중한 력사문화유적을 지켜내야 한다. 바로 그 길이 아버지가 바라는 길, 고마운 김일성장군님의 은덕에 보답하는 길이다. 삼천리 아름다운 우리 조국을 빛내이고 영원히 지키는 길이다. 비장한 각오를 가진 영운은 결연히 일어섰다. 그리고 놈들을 맞받아 마당으로 내려갔다. 《절간을 태우지 말아요. 내가 절간유물들을 감춘 장소를 대주겠어요.》 잠시 얼떠름해있던 《치안대》대장놈이 미군장교놈의 귀에 대고 절간지기의 아들이라고 불어넣었다. 《오, 절간지기 아들? 아주 똑똑합네다. 절간유물 감춘데나 대주면 당신 아버지 살려주겠삽네다.》 영운은 노린내를 풍기는 미군장교놈의 지껄임이 역스러웠지만 흔연히 대꾸했다. 《좋아요, 날 따라오라요.》 영운은 대봉산방향으로 앞장서 걸었다. 마당에 있던 놈들이 우르르 그를 따라나섰다. 절간을 벗어난 영운은 점점 걸음발을 다우쳤다. 산속에서 자란 영운이에게 있어서 산발을 타는것은 날짐승 한가지였다. 헐레벌떡 뒤따라오던 미군장교놈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지 권총을 빼들었다. 《노우, 서시오.》 영운은 산으로 올려뛰기 시작했다. 땅땅… 따쿵따쿵… 총소리가 몰방으로 터졌다. 총알이 아츠러운 소리를 지르며 영운이의 머리우로, 옆으로 날아와 푹푹 박혔다. 영운은 죽어라 달렸다. 그에게는 오직 절간을 구원해야 한다는, 인민유격대가 도착할 때까지 놈들을 자기에게로 유인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였다. 숨이 턱에 닿아 달리던 그는 그만 풀썩 주저앉았다. 총알이 다리를 꿰뚫었기때문이다. 《아―》 영운은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속에서 콩볶듯 하는 총소리와 수류탄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누군가 자기 몸을 마구 흔들며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 영운은 어렴풋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아버지와 소년단지도원선생님, 리당위원장아저씨, 기남이, 정호… 알고보니 정호와 그의 아버지도 인민유격대의 《특수임무》를 수행하고있던중이였다. 《야 영운아. 살았구나, 살았어.》 기남이와 정호랑 좋아서 어쩔줄 모르며 마구 볼을 비벼댔다. 《기남아, 유격대아저씨들은?…》 《응, 왔어. 유격대아저씨들두 오구 놈들두 모두 뒈졌어.》 《절간이랑 다 무사하니?》 《응, 무사해.》 영운은 그제야 하얀 덧이를 내보이며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그것은 고향의 력사유적을 지켜낸 무한한 긍지와 자부심에 넘치는 기쁨의 웃음이였다. 《영운아, 네가 정말 큰일을 했구나. 장하다,장해.…》 아버지도 영운이를 품에 꼭 안았다. 《아버지, 난… 난…》 영운은 목이 꽉 메여 뒤말을 잇지 못했다. 《얘야, 우리 대봉산인민유격대의 이름으로 너에게 감사를 준다. 넌 우리 나라의 만년재부인 력사문화유적을 목숨으로 지켜낸 훌륭한 애국자다, 소년애국자!》 대봉산인민유격대 대장인 군당위원장아저씨가 모두를 대표하여 엄숙하게 거수경례를 했다. 《소년애국자!》 영운은 조용히 그 말을 되받아외웠다. 무한한 긍지와 행복감이 온몸에 젖어들었다. 딸랑… 딸랑…
우리 나라의 유구한 력사와 찬란한 문화를 해와 달이 다하도록 길이길이 전해가려는듯 신비하고 청아한
풍경소리가 골안에 은은히 울려퍼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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