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에 실린 글

 

□ 단편소설 □

은희의 거울 

                                 김  성  웅             

              

 

은희에게는 귀중한 물건이 하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값비싼것도 아니고 특별한 모양을 가진것도 아니다. 누구나 흔히 쓰고있는 보통 손거울이다. 그러나 은희에게는 그것이 가장 귀중한 물건이였다.

이 거울은 퍽 오래전, 은희가 책가방을 메고다니던 그 시절에 아버지가 준것이였다. 그때 아버지가 한 말을 은희는 지금도 기억하고있다.

《은희야, 이 거울은 너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신기한 보물이란다. 사람이란 언제나 얼굴보다 마음이 더 고와야 하는 법이지. 네가 지금은 이 거울에 얼굴을 비쳐보지만 앞으로는 마음을 비쳐보게 될게다. 그때엔 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될게다.》

은희가 이 말을 다 리해한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이 거울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되게 하는 신기한 보물이라는것만은 믿었다. 그래서 언제나 남몰래 꺼내보군 하였다.

하기야 아름다운 사람으로 되는걸 싫다고 할 아이가 어데 있겠는가?! 이것은 물론 어린 마음에 남몰래 품게 된 혼자의 생각이였다. 그러나 책가방을 메고다니는 그 시절에는 비밀이란 참으로 신기한것이여서 저혼자 알고있기가 무척 힘든것이다.

어느날 은희는 유치원시절부터 딱친구인 예경이를 이끌고 내가로 나갔다.

《네게 멋진 보물을 보여줄게.》

은희는 사방을 둘러보고 그것도 부족하여 예경이를 숲속으로 끌고들어갔다.

이 어마어마한 분위기에 압도된 예경이는 거울속에서 맛있는 과자나 고운 인형아기가 나온다고 해도 믿게끔 되였다.

더구나 거울에 대한 동화같은 이야기는 예경이의 마음을 홀딱 사로잡고말았다.

《어서 보여줘!》

《너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돼!》

《응, 절대로 말 안할게.》

《자, 이거야!》

예경이는 손바닥을 치마에 닦고나서야 두손으로 거울을 받쳐들었다.

그때로부터 해가 바뀌여 은희도 예경이도 이제는 열다섯살이 되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동화같은 흥미는 점차 사라졌으나 거울에 대한 사랑은 더욱 커갔다.

그 거울에는 남다른 사연이 깃들어있었던것이다.

은희는 아버지를 무척 사랑한다.

왜 안 그러랴! 은희의 아버지는 이 지방에서 가장 큰 기업소인 탄광지배인이다.

학교도 문화회관도 종마골 사택마을도 모두 탄광때문에 생긴것이다.

그래서 탄광마을에서는 물론 주변농장들, 지어는 읍거리에서까지 아버지를 모르는 사람이 없는것이다.

은희가 이런 아버지를 자랑으로 생각하는것은 응당한 일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조국해방전쟁에서 한쪽팔을 다친 영예군인이 아닌가!

바로 거울에 담긴 남다른 사연이란 이러한 아버지와 관계되는 일이였다.

…그때 아버지네들은 전선을 떠나 대학으로 가고있었다. 전선에서는 아직 싸움이 간고했으나 조국은 어제날의 대학생들을 다시 대학으로 불렀던것이다.

아버지네들이 전연으로부터 얼마쯤 떠나왔을 때였다.

갑자기 길가의 나지막한 고지에서 자지러지는 총성이 들려왔다.

예견치 않은 후방에서의 적의 공격, 이것은 전연지대가 포위될수 있다는것을 의미한다.

더구나 이 고지에는 한개 분대 인원밖에 없었던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가던 세 전우는 고지로 뛰여올라가 전투에 합세하였다.

싸움은 매우 가렬하였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전우들은 하나, 둘 중상을 당하여 쓰러졌고 아버지 역시 적포탄파편으로 하여 한팔에 부상을 입었다. 그 어려운 순간에도 아버지는 끊어진 통신선으로 팔을 졸라매고 입으로 수류탄고리를 뽑아던졌다. 그러나 원쑤들은 코앞에까지 게바라올라왔다. 전호바닥에 놓은 수류탄도 한팔로는 미처 던지기 힘들었다. 참으로 위급한 순간이였다. 바로 그때 어데선가 난데없이 나타난 애어린 단발머리간호원이 수류탄고리를 뽑아서 아버지에게 섬겨주기 시작하였다. 이에 고무된 아버지는 전호우에 우뚝 올라서서 원쑤들에게 수류탄벼락을 안겼다.

전우들이 고지로 달려왔을 때 두사람은 다 쓰러져있었다. 아버지는 너무 많은 피를 흘렸기때문이였고 간호원은 너무 많은 피를 뽑아 넣어주었기때문이였다.

얼마후에 정신을 차린 간호원은 곧 떠나가버렸다. 그때 아버지를 후방병원으로 후송하던 전우들이 아버지의 배낭에 간호원이 흘리고간 손거울을 넣어주었다.

그후에 후방병원으로부터 곧장 대학으로 가게 된 아버지는 끝내 그 간호원이 누구인지 모르고말았다.

전선으로 나가던 간호원인지, 혹은 아버지네처럼 대학으로 가던 길인지 남은것이란 잊고간 거울과 그 간호원의 눈이 거울처럼 맑고 별처럼 빛나더라는 회상뿐이였다.

그 간호원을 찾지 못한 아쉬움을 두고 은희는 지금도 아버지를 나무라는 때가 있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언제나 꼭같은 대답을 했다.

《…그때는 그럴 새도 없었거니와 그런 일쯤은 흔히 있는 일이였거던.》

그 전투후에 아버지의 위훈은 신문에 나서 온 나라에 알려졌고 훈장도 받았다.

하지만 함께 고지를 지켜싸웠고 자기의 더운 피로 전우를 구원한 단발머리녀전사의 위훈은 이젠 10년세월이 되여오는데도 잘 알려지지 않았다.

잊지 못할 단발머리언니!

언니는 지금 어데서 무엇을 할가? 아버지처럼 지배인이 되였을가, 아니면 유명한 학자로 되였을가?

그리고 언니는 어떻게 생겼을가?

물론 은희는 그 언니를 본적이 없다. 그러나 상상속의 그 얼굴은 별처럼 빛나며 거울처럼 맑은 눈을 가진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였다.

만일 후날에라도 언니의 이름이 알려진다면, 제발 이름만이라도 알았으면 틀림없이 빛나는 이름으로 될것이다.

은희는 두손으로 거울을 가슴에 꼭 붙안고 뜨겁게 속삭였다.

《사랑하는 언니! 나도 언니처럼 살겠어요!》

이렇게 되여 거울에 대한 사랑은 언니에 대한 사랑으로, 동화같은 흥미는 언니를 찾는 열정으로 바뀌여졌다. …

은희가 간호원언니를 본받으려고 한것처럼 예경이 역시 은희를 닮으려고 애썼다.

놀란듯이 끝이 약간 쳐들린 눈섭, 둥근가 하면 또 갸름해뵈는 얼굴, 호리호리한 몸맵시… 뜯어보나 전체로 보나 곱게만 보이는 은희였다.

남달리 키가 작은 예경이는 키만이라도 은희처럼 날씬하기를 얼마나 바랐던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커보이도록 치마까지 길게 입으려고 애썼다.

재주를 두고봐도 그랬다.

예경이 역시 손풍금수여서 유치원때부터 은희의 노래에 반주를 해왔다. 그러나 칭찬과 꽃다발은 주로 은희가 받는다.

혹시 은희가 미안해하면 예경이는 오히려 제편에서 위안을 하군 했다.

《노래부르는거야 내가 아니라 네가 아니냐. 나야 그저 반주를 해서 네가 노래를 잘 부르게 하면 되는거야.》

지금 은희의 노래는 굉장한 소문이 나서 장차 그 애가 유명한 가수가 되리라는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게다가 또 피아노는 얼마나 잘 치는가!

한마디로 말해서 은희에게 홀딱 반한 예경이는 모든 일을 은희가 하는대로 했다. 너무 그러던 나머지 은희의 말을 그대로 받아외우군 해서 《산울림》이란 별명까지 붙게 되였다.

그러나 이러한 예경이가 《산울림》이기를 그만두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새 담임선생님이 오신 그날부터였다.

그때 은희네들은 떠나간 담임선생님을 두고 이야기하고있었다.

《참 씨원씨원한 성격이였어.》

《노래는 또 얼마나 좋아했니?》

《얼굴은 또 얼마나 곱구…》

《그보다두 더 중요한건 실력이야. 얼굴생김이 배워주는데야 무슨 상관이람.》

《왜 상관이 없어? 사람이란 우선 잘나고 봐야 돼. 그래야 더 위신이 서거던. 은희야, 안그래?》

《옳아. 사람이란 모든것이 아름다와야지 뭐. 얼굴도 마음도 목소리도 난 그렇게 생각해.》

이때 《소식통》이라고 불리우는 선영이가 뛰여들어오며 손가락을 입에 댔다.

《쉿ㅡ 얘들아, 교장선생님이 낯선 녀성생님을 데리구 오셔. 틀림없이 새 담임선생님같애.》

모두의 눈은 나들문에 집중되였다. 새 담임선생님은 과연 어떤분일가?

교장선생님과 들어선 낯선 새 담임선생님을 보는 순간 은희는 마음이 허전해짐을 느꼈다.

자그마한 키에 조용해뵈는 모습, 주름살이 간 얼굴, 남다른 특징을 애써 찾는다면 가느다란 은빛테안경을 쓴것이라고나 해야 할지?

교장선생님은 새 담임선생님이 생물을 가르치게 된다고 소개하였다. 그것 역시 은희의 마음을 더욱 섭섭하게 했다. 생물학은 은희가 그중 재미없어하는 과목이였던것이다.

교장선생님이 나가신 뒤 담임선생님은 출석을 부르며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익혀나갔다.

《김예경.》

《네.》

《김은희.》

《네ㅡ 에.》

《학생이 은희군요. 노래를 잘 부른다지요. 그리구 피아노도 잘 친다면서요?》

이렇게 오자마자 은희에게 관심을 두는걸 보면 전번 담임선생님처럼 음악을 좋아하시는분이 아닐가?

출석을 다 부르고 난 선생님은 곧 수업후 사업을 조직하였다. 학급반장은 오늘 나무심기에 서른한명이 동원된다고 보고했다.

《왜 그렇게밖에 안되나요?》

《네명은 토끼우리당번이고 세명은 예술소조원입니다.… 예술소조원들은 다른 사업에 참가하지 않고 모이군 합니다.》

《예술소조원이 누구들인가요?》

은희와 예경이 그리고 재담을 잘하는 《소식통》 선영이가 일어섰다.

《나무를 심고와서 소조활동을 하면 안될가요? 큰 지장이 없다면 그렇게 합시다. 나라의 산림자원을 가꾸는 일인데 음악가로 될 사람이건 물리학자로 될 사람이건 다 함께 참가해야지요. 앞으로는 그 어떤 소조건 학급일에는 꼭같이 참가합시다. 어때요. 예술소조원동무들! 그렇게 할수 있어요?》

(생물선생님이 다르구나, 아마 음악선생님이라면 그렇게 말씀 안하실거야. … 전번 담임선생님은 예술소조활동에 적극적이였는데…)

은희는 별로 마음이 허전해져서 동무들의 뒤를 멀찍이 따라갔다.

동무들은 지금 선생님을 둘러싸고 가면서 무엇인가 웃고 떠들어댄다. 가까이 가보니 저마다 들꽃을 뜯어가지고와서 물어보고있다.

(생물선생님이라니까. 으음, 저것봐. 예경이까지 함께 묻어돌아가누나.)

《선생님, 이건 무슨 풀입니까?》

《아기원추리예요. 단나물에 속하는것이고 토끼도 잘 먹는답니다. 이건 솜방망이군요.》

《아이참, 별난 이름도 다 있네.》

《좀 보세요. 솜털이 얼마나 빽빽한가. 이제 꽃대가 돋아나고 꽃망울이 맺히면 마치 막대기끝에 솜뭉치를 매단것 같답니다. 그래서 솜방망이라 부르나봐요. 이렇게 식물의 모양과 크기는 달라도 잎들은 절대로 서로 그늘지지 않게 붙어있답니다.》

《선생님, 왜 그렇습니까?》

《해빛을 잘 받자는거예요. 해빛이 없으면 살아갈수도 꽃을 피울수도 없으니까요.》

예경이가 은희옆에 슬그머니 다가와 속살거렸다.

《은희야, 선생님은 정말 모르는 꽃이 없지? 어쩌면 저런 자질구레한 들풀이름까지 죄다 아실가!》

은희의 대답은 저도모르게 퉁명스러웠다.

《생물선생님이니까 다 알지!》

예경이는 놀란듯이 은희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이때부터 예경이는 《산울림》이기를 그만두기 시작하였다. 남보기에는 그것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으나 은희에게만은 사소한것에서도 느껴졌다.

역시 그 이튿날도 수없이 끝난 후에 나무를 심으러갔다. 들길에 나서자 은희의 마음은 어제와는 달리 시내물처럼 맑아졌다. 왜 안 그러랴! 각양각색의 꽃들이 모두 제나름으로 몸단장을 하고 반겨주지 않는가. 먼산의 진달래는 마치 하늘의 노을이 그대로 내려앉은듯 산허리를 연분홍색으로 물들였다. 진달래는 몸을 먼저 알린다고 사랑을 받는다. 이 꽃을 두고는 시도 짓고 노래도 부른다.

길가에 서있는 저 살구나무는 또 얼마나 보기 좋은가! 땅우에 굉장히 넓은 그림자를 던지며 우뚝 서있는 모양은 마치 합창단앞에 나선 독창가수와 같다. 그렇게 보면 산허리에 핀 진달래는 합창단성원이고 여기 길가나 밭최뚝들에 피여난 각양각색의 자그마한 들꽃들은 관현악단인셈이다.

그렇지만 자질구레한 이 들꽃들은 키도 꽃송이도 보잘것없이 작아서 살구나무나 진달래보다 먼저 꽃을 피우면서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

이 꽃들을 두고는 시를 짓는 사람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없다. 굉장한 그림자도 없다. 아니, 이름마저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런 뜻을 이야기했더니 예경이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작은 꽃송이 하나를 꺾어들었다.

《그럼 난 무엇이 될가? 살구나무? 진달래? 아니야, 난 관현악단성원이니까 들꽃이 되겠어.》

《그래, 난 살구나무가 되겠다.》

《너야 언제나 독창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야. 같은 값이면 뒤처리군이 될게 뭐야, 언제나 앞에 서야지.》

그런데 예경이는 무엇이 우스운지 또다시 까르르 웃어댄다.

《예경아, 너 왜 그러니?》

《그림자를 보고 그래. 저것 봐, 내가 네게 다가서면 저 그림자들도 다가서구 내가 빨리 가면 저것들도 빨리 가거던. 자, 보렴. 그러니 암만 해야 따라잡을수 없는건 그림자란 말이야.》

《호호호, 굉장한 발견을 했구나! 그렇지만 요 똥똥보 〈산울림〉아! 앞선건 너구 뒤떨어진게 그림자야.》

《그건 또 무슨 뜻이니?》

《그림자라는건 너 하는대로만 하지 않니. 진정 너를 앞서려면 네 마음을 알아야지 겉흉내만 내서야 앞설수가 있겠니?》

《호호호, 정말!》

예경이는 꺾어든 작은 꽃송이를 들고 동무들에게 뛰여가며 소리쳤다.

《이 꽃이름을 아는 사람?》

《늘 보는 꽃인데 모르겠네.》

《풀이니까 그러지. 어떻게 풀이름까지 죄다 안다던?》

《그래두 꽃은 맨먼저 피더라.》

《그까짓 콩알보다 작은것두 꽃이나?》

그 말에는 은희도 한마디 보탰다.

《옳아, 이렇게 작은건 꽃축에도 못 섞이나봐.》

《작다구 꽃이야 아닐가 뭐!》

뜻밖에 예경이가 반박을 했다. 참으로 뜻밖이였다. 은희의 《산울림》이라던 예경이가 다름아닌 은희의 말에 반박을 하다니, 그것도 새 담임선생님이 보는 앞에서… 은희는 그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옳아요. 크고 화려한것만 꽃인건 아니예요. 보세요. 요렇게 작아도 누구보다 해님을 극진히 따른답니다. 하도 해님을 따라 양지쪽에서만 산다고 이름도 양지꽃이라 했나봐요. 작아도 사랑스런 꽃이예요. 이런 꽃들이 많아서 우리 조국이 더 아름다운것이랍니다.》

은희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오늘은 누구에게나 퉁을 맞는 날인지… 하지만 이것도 뒤에 있은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

원래 이날 은희에게는 할 일이 무척 많았다. 나무도 심고, 예술소조공연 관통련습도 하고, 간호원언니도 찾아봐야 했던것이다.

아침밥을 먹을 때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새로 생긴 종마골 사택마을에 전쟁때 간호원으로 복무한 녀자가 이사를 왔다는것이였다.

그런데 나이로 보나 복무년대로 보아 그 간호원이 아닌지 모르겠으니 알아봐야겠다고 했다.

은희는 그 말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알아볼 때까지 기다릴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찾아보리라 결심했다. 간호원으로 복무한 녀자라면 무조건 만나보군 한 은희였던것이다.

혹시 그 언니가 아닌지 어이 알랴. 그런데 아직 나무도 심어야 하고 관통련습도 해야 한다.

마음이 조급해진 은희는 누구보다 설피게 나무를 심어나갔다. 그래서 맨먼저 나무심기를 끝내고 돌우에 앉아 땀을 들이였다.

선영이가 은희의 곁으로 다가왔다.

《선영아, 예경인 아직 못다 심었니? 왜 보이지 않아. 그러다가 관통련습은 언제 하겠니?》

《글쎄말이야. 나보다도 먼저 끝낸것 같은데… 옳지! 저기 오는구나. 아니, 그런데 나무모를 또 가져오지 않니?》

《뭐?》

은희는 곧바로 예경이에게 다가갔다.

《아직 다 못 심었니?》

《내 맡은건 다 심었어. 그런데 아직 빈자리가 많더구나.》

《야 참! 그런걸 꼭 우리가 해야 하니?》

《우리가 안하면 누가 하니?》

은희의 조급한 마음을 모르는지 예경이는 오히려 제편에서 놀라와한다.

《련습보다 이 일이 더 중요하니? 련습을 못하면 숱한 사람들앞에서 망신을 당한단 말이야.》

이때 은희를 바라보는 예경이의 눈은 예전처럼 순종하는 눈이 아니라 못마땅해하는 눈이였다.

역시 처음있는 일이였다. 그래서 은희는 더욱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흥, 제 혼자 잘난체 하면서 일부러 일감을 만들어내지. 어서 실컷 알랑거려!》

예경이의 코가 벌름거리더니 굵다란 눈물방울이 뚤렁 떨어졌다.

이날 은희는 처음으로 반주없이 노래련습을 하였다. 이래저리 마음이 좋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처음으로 반주가 없기때문인지 흥도 나지 않았고 갑자기 가사까지 막혀버려서 관통련습은 중단되고말았다. 이런 일 역시 처음있는 일이였다.

동무들앞에서 이게 글쎄 무슨 일이람? 은희는 울고싶도록 안타까와 그만 무대뒤로 뛰여들어가버리고말았다.

《반주가 없으니 노래도 맥을 추지 못하는구나.》

《그러게 반주성원들을 하찮게 보지 말아야 해.》

《그래두 꽃다발은 언제나 앞에 나선 사람이 받는다니까.》

무대에서 동무들이 하는 말소리가 은희에게까지 들려왔다.…

그 이튿날 수업후였다. 은희는 악보를 옮겨쓰다가 너무 졸려서 밖으로 나갔다. 어제밤 간호원언니를 찾아보느라고 밤늦도록 새로 생긴 사택마을에 다녔더니 온종일 졸음이 왔던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직장도 나이도 이름도 모르고 어떻게 쉽게 찾으리라 생각했을가. 은희가 세면을 하고 교실에 들어서니 《소식통》 선영이가 무엇인가 신나게 웨치고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으로 되게 한다는 신기한 보물! 자, 동지들과 벗들이여.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싶거든 빨랑빨랑 달려나와 이 거울을 보시라!》

선영이는 호기심을 돋구려는듯 두손을 감싸쥐고 보여주지 않는다.

《〈소식통〉아, 그만하구 손바닥을 펼쳐라.》

《값을 너무 올리지 말구 어서 보여줘.》

은희는 급히 주머니를 뒤졌다. 아뿔싸, 거울이 없다. 거울을 보다가 그대로 나갔던것이다.

은희는 쏘는듯 한 눈으로 예경이를 보았다. 아니나다를가 예경이의 눈이 허둥지둥 발밑으로 떨어진다. 거울에 대한 비밀을 알고있는것은 오직 예경이뿐이다. 그런데 새 소식을 알고는 참아내지 못하는 《소식통》에게 말하다니? 이것은 놀리는거나 다름없었다. 괘씸했다. 은희는 가슴속이 끓는것만 같았다.

그런데 무엇이 더 부족한지 예경이는 살그머니 다가와 은희의 손까지 잡는다. 밉다니까 오히려 제편에서 치근거리지 않는가.

《거울을 받어. 내가 잘못했어. 그렇지만 내 생각엔…》

《네 생각이 어떻단 말이야?》

《거울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봐. 모두가 언니의 모범을 따라배우면…》

《날 놀리는걸 참을수가 없어.》

《누가 놀린다고 그래?》

만약 이런 일이 다른 아이와 있었다면 아무렇지도 않을수 있었다. 그러나 은희의 《산울림》이라던 예경이가 은희를 가르치려 들다니? 은희는 발끈해서 쏘아붙였다.

《난 네 말을 듣지 않아도 돼. 더는 내 일에 간섭말어.》

은희는 발딱 일어나서 문가로 향했다. 그리고는 성난김에 나들문을 발로 차서 열었다.

그 순간이였다. 은희는 열려지는 문에 누구인가 부딪쳤다는것을 느꼈다.

《?》

은희는 굳어지고말았다. 열려진 문뒤에 담임선생님이 놀란 얼굴로 서있지 않는가.

선생님이 다들 자리에 앉으라고 해서야 제자리로 들어와앉은 은희는 머리를 들수가 없었다. 암만 해도 담임선생님과의 관계가 별스럽게 꼬이기만 한다. 이게 다 누구때문인가? 다름아닌 예경이때문이다. 은희는 예경이를 흘겨보았다.

담임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것처럼 조용한 목소리로 어제 나무심은 일을 총화하기 시작하였다.

《…어제 일부 동무들은 나무를 제대로 심지 못했습니다. 잘 다지지 않아서 나무모가 흔들리는가 하면 조금만 당겨도 쑥쑥 뽑아졌습니다. 이런 나무는 예술소조원들이 심은 곳에서 나타났어요.…》

은희는 가슴이 덜컥하였다.

어제 덤벼치며 심지 않았던가.

(고 똥똥보때문에 성이 나서 그랬지. 아니야, 언니를 찾아보려고 조급해서 그랬어.

야 참! 내 일은 왜 이다지도 꼬이기만 할가? 그러나 솔직해야 해.)

은희는 서슴없이 일어섰다.

《선생님! 제가 그랬습니다. 그런 일은 별로 평가받을 일이 못된다고 생각해서…》

《솔직해서 좋구만요. 옳아요. 평가를 바라서 하는 일은 거칠기마련이랍니다. 오직 진심으로 하는 일만이 아름다운 법이예요.》

뜻밖에 예경이가 일어섰다.

《사실은 저… 은희동문 시간이 없었습니다. 관통련습도 해야 하구 더구나 은희네 집에서 전쟁때부터 찾는 간호원언니가 있는데 그 언니를 찾아봐야 했기때문에… 그런걸 알면서도 제가 그만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예경이는 아마 은희가 저때문에 노했으니까 이 기회에 풀어주려 했던 모양이였다. 그것이 은희에게는 더 불쾌했다.

《언니를 전쟁때부터 찾는다는건 무슨 말이예요?》

《선생님, 저 사실은…》

은희는 모든것을 말하리라 결심했다.

그러면 선생님도 이번 일만은 리해하여주실것이다. 아무렴 아버지의 생명을 구원한 은인이며 이름없는 영웅을 찾는 일이 아닌가.

은희의 이야기를 듣고난 선생님의 눈도 감동에 젖은듯 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렇다고 해서 나무를 잘못 심은 결함은 묵과될수 없어요. 그 언니도 그런걸 바라지 않을거예요.》

은희는 선생님에 대한 모든 기대가 무너졌다고 생각하였다.

(원칙밖에 모르셔. 인자해보이면서두 무척 딱딱하구…)

《그리구 이건 좀 다른 말이긴 하지만 내 생각엔 그 언니가 자기를 그 무슨 생명의 은인이니 영웅으로 생각하고 찾는다는걸 알면 노여워할것 같구만요. …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으니까요.》

원래 놀란듯 한 은희의 눈섭이 더욱 치켜올라갔다.

왜 언니의 위훈을 하찮게 보실가? 그런 사람이 과연 숨은 영웅이 아니란 말인가? 은희자신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나 언니에 대해서만은… 섭섭했다. 아니 마음이 아팠다. 모든것이 예경이때문이다. 무엇때문에 두둔하는척 하면서 언니의 말을 꺼냈담? 거울에 대한 비밀은 왜 소문내고?

(질투를 하는거야!)

 

날씨도 은희의 마음처럼 찌뿌둥 흐렸다. 아지랑이 춤추던 들길우에 스산한 바람만이 불어친다.

둘은 어느덧 갈림길에 이르렀다.

아무도 없다.

《예경아, 말 좀 해봐. 넌 왜 날 못살게 구니?》

《?!》

은희의 표표한 눈초리에 겁을 먹었는지 예경이는 머리를 숙이고 발끝으로 땅을 후볐다.

《넌 질투를 하는거지?》

《은희야, 어쩌면 그렇게… 어쩌면…》

애원에 찬 목소리, 예경이의 주먹코가 벌름거리더니 두눈 가득히 눈물이 고인다.

《아니면 왜 그래? 한때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더니 넌 무엇이 잘났다고 남을 헐뜯어? 흥, 졸망구 흉내쟁이주제에…》

예경이가 머리를 번쩍 든다. 그 바람에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옳아, 난 졸망구야. 그리구 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어. 하지만 알고보니 네가 바루 허풍쟁이 그림자야.》

《뭐ㅡ 뭐? 내가 허풍쟁이라구?》

《같은 값이면 앞에만 서야 한다고 한것두 알고보니 제 이름만 날리자는거였어. 너도 그랬지, 마음을 배워야지 흉내를 내서는 그림자로 된다구. 네가 바로 뽐내던 그 살구나무 그림자야. 실컷 이름을 날리렴. 난 결코 그림자로 되고싶지는 않아!》

우르릉! 쾅! 봄우뢰가 터진다. 그러나 예경이의 말은 그 우뢰소리보다 더 크게 은희의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휘ㅡ 익! 회오리바람이 은희의 머리칼을 흐트려놓고 길가의 먼지를 휘말아올린다.

예경이는 그 먼지속을 뚫고 뛰여갔다. 그때에야 비로소 은희는 머리칼이 곤두설 정도로 분이 치미는것을 느꼈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아야 들길우에 일어나는 먼지뿐, 누구에게도 밸풀이할데가 없다. 다만 뽐내던 살구나무만이 뒤흔들리고있는것이 보일뿐이다.

바람에 휘청거리니 위풍은 간곳 없고 그림자도 가뭇없다.

우르릉ㅡ 쾅! 은희의 마음을 담은듯 또다시 우뢰소리가 터졌다.

그것은 마치 화음이 되지 않게 마구 두들겨대는 피아노소리처럼 마음만 뒤헝클어놓는다.

(뭐ㅡ 내가 그림자야?)

쏴! 봄소나기가 쏟아졌다. 은희는 진창길을 마구 걸었다.

모두 약속이나 한듯이 몰아주는것만 같았다. 아, 이런 때 언니가 있다면…

《언니, 언니는 지금 어디에 계시나요?》

만약 이 순간 언니가 곁에 있다면 그 품에 안겨 실컷 울어볼수도 있을것이다. 은희는 저도모르게 거울을 꺼냈다. 끊임없이 내리는 비가 거울우로 줄줄이 흐른다. 마치 거울도 눈물을 흘리는것처럼… 은희는 거울에 비쳐진 제 얼굴을 보았다.

비물이 흐르는 얼굴, 차분히 달라붙은 머리칼, 축축히 젖은 긴 살눈섭… 은희에게는 제 얼굴도 역겹게 느껴졌다.

이런 기분에 잠긴 은희는 뒤에서 누가 찾는줄도 모르고 그냥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러다가 우산을 씌워줄 때에야 비로소 선영이가 곁에 온걸 알았다.

《암만 찾아두 못 듣는구나. 어델 가니?》

《집에…》

《난 예경이가 손풍금리드를 구해달래서 그걸 가지고가는 길이야.》

선영이를 《소식통》이라 부르는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지금도 선영이는 묻지도 않는 이야기를 줄줄이 쏟아놓는다.

《그런데 알고보니 제 손풍금때문이 아니더구나. 뭐 종마골 유치원 손풍금이 고장났다나? 그런걸 하필 왜 네가 고쳐야 하느냐고 물으니까 오히려 제편에서 놀라는게 아니겠니. 〈내가 안하면 누가 하니?〉 〈수리소에 보내라고 하려무나.〉 〈내가 고칠줄 아는 이상 내가 안하면 마음이 편하겠니?〉 이러거던.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애가 난쟁이 〈산울림〉이긴 해두 속엔 씨알맹이가 들었어. 개암알처럼 말이야. 호호호.》

《…》

《고 똥똥보가 참 기특하거던. 글쎄 〈내가 안하면 누가 하니?〉라고 하더란 말이야.》

《…》

《은희야, 너 참 담임선생님에 대한 이야길 들었니? 못 들었다구? 이것 역시 새 소식이구나.》

《?》

《우리 선생님은 전쟁때 간호원으로 싸운 영예군인이래.》

《뭐?》

《그리구 또 음악가였대! 전쟁전에 전국학생축전에서 피아노연주상까지 받았대. 놀라긴 왜 놀라니? 또 있어. 우리 선생님은 말이야, 원래 음악교원이였는데 우리 학교에 와서 생물교원이 부족된다는걸 알구 자진해서 생물과목을 맡았다는구나.…》

《그게 다 정말이니?》

《내가 언제 거짓소식을 전할 때가 있니?》

(옳아! 그러니 음악을 좋아하신건 사실이구나. 가만있자. 간호원… 영예군인…)

《선영아, 너 담임선생님이 어느 마을에 사는지 아니?》

《〈소식통〉이 모르는것도 있을가?》

《글쎄 어디야?》

은희는 선영이를 잡아흔들었다. 심장은 그 어떤 예감으로 쿵쿵 방아를 찧는다.

《새로 건설한 종마골 사택마을이야.》

(옳구나!)

지나간 일들이 번개처럼 떠오른다. 오자마자 은희에게 관심을 두던 일, 언니의 위훈을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일… 오직 자신이 세운 위훈에 대해서만 그렇게 말할수 있을것이다.

아, 그런걸 원칙밖에 모르는 딱딱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었지! 이제 와서는 모든것이 정답게 느껴진다. 자그마한 키에 인자한 모습, 주름살이 간 얼굴, 심지어 가느다란 은빛테안경까지도 독특한 매력을 가진듯이 생각되였다.

(그래, 분명 그 언니야.)

언제 날이 개이고 언제 선영이와 헤여졌는지 몰랐다. 또 언제 학교로 향했는지도 몰랐다.

조급한 마음으로 달려가던 은희는 학교에서 멀지 않은 산굽이에서 우뚝 섰다.

가슴이 후두두 뛴다. 거기에 선생님이 계신것을 알아보았던것이다.

(선생님ㅡ 아니, 언니지. 사랑하는 언니, 언니는 지금 또 무슨 일을 하시나요? 옳지! 무슨 책을 들고있는걸 보니 들꽃을 관찰하시는 모양이다. 정말 그렇구나. 음악을 하시던분이 생물을 가르치자니 저렇게 남모르는 수고를 하겠지.)

아마 저렇게 남모르는 길을 한평생 걸을지도 모른다.

《선생님!》

은희는 달려가는 그길로 선생님의 품에 와락 안겼다.

《은희군요. 그런데 옷이 왜 이렇게 젖었어요?》

은희는 어리광을 부리듯이 선생님의 가슴에 머리를 마구 비벼댔다.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

《전쟁때 간호원으로 싸웠다는 이야길 이제야 들었습니다. 선생님이 우리 아버지를 구원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지요?》

은희는 선생님의 눈을 말끄러미 올려다보며 성급히 종알거렸다.

《섭섭하겠지만 내가 아니야. 내가 그 언니라면 왜 숨기겠어?》

《네ㅡ 에?》

《그 전투가 있은 곳이 어데라구?》

《태백산줄기의…》

《그것 봐요. 난 줄곧 전선서부에서만 복무했거던.》

은희는 비에 젖은 잔디밭에 털썩 주저앉았다.

섭섭했다. 가슴가득 설음의 파도가 밀려든다. 울고싶다.

선생님은 은희를 일으켜세워 찬비에 젖은 두손을 따뜻이 감싸주신다.

《선생님!》

자꾸만 눈물이 쏟아질것 같다. 이상하게도 언니가 아니라는걸 믿고싶지 않다. 아니, 오히려 언니라고 믿고싶다. 언니를 못 견디게 그리워한 탓일가. 아니면 언니와 비슷한 특징이 있기때문일가? 그렇다면 그 특징은 무엇일가?

《선생님은 왜 피아노를 그만두시고 교원이 되셨습니까?》

《정전이 된 그때는 교원이 부족했단다.》

《그래서 교원으로 배치받으셨습니까?》

《아니.》

《그럼 자진해서 학교로 올 필요야 없지 않았나요. 그랬으면 지금쯤 유명한 연주가로 됐을텐데…》

《아니야. 그렇다고 내가 안하면 또 누가 하겠어?》

이런 말을 또 누가 했더라? 옳아, 예경이가 그랬지…

《나도 화려한 무대와 꽃다발을 꿈꾼 때가 있었지.… 그러나 은희가 찾는 언니를 생각해봐요. 명예를 위해 그런 일들을 했을가?》

두사람은 봄꽃이 만발한 들길을 거닐었다. 길가에 피여난 자그마한 꽃들이 그들을 반겨 방긋방긋 웃음짓는다.

《이런 꽃들을 두고 하던 말이 생각나요? 이름없는 꽃과 해님에 대한 이야기였지. 그 말은 어떤 나이많은 전사 작곡가선생님이 한 말이였어. 그날 난 그 작곡가의 손가락을 처치하며 울었지. 다시는 피아노를 칠수 없게 되였으니까. … 나도 그때 지금 은희와 비슷한 말을 했어, 눍은분이 작곡이나 하시지 왜 전선에 나와서 손가락을 부상당했는가구. 그때 노여워하시던 그분의 얼굴이 지금도 눈앞에 선해요. 〈간호원동무, 그럼 난 조선사람이 아니란 말이요?〉 작곡가선생님은 한참동안 모두숨을 쉬다가 고지에 피여난 이런 들꽃을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했어요. 〈이것 보오. 해빛이 없다면 저 꽃들은 살아갈수도 없구 꽃을 피울수도 없겠지. 그래서 해님에게 보답하려구 이렇게 산속에 피여있을거란말이요.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절로 진심으로 하는 일이니까 명예같은건 생각도 안하고 말이요. 바로 이런 꽃이 많아야 우리 조국이 더욱 빛날게 아니겠소? 그런데 날더러 왜 전선에 나왔느냐구? 그건 아마 꽃을 피우지 말라는 말이나 같을거요. 사랑을 받은것도 나고 이 땅의 주인도 난데 글쎄 내가 싸우지 않으면 누가 싸워준단 말이요?〉 이날 무너진 그 전호에서 난 참다운 명예란 무엇이며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웠어요.》

이 순간 선생님의 눈은 별처럼 빛났다. 그 언니의 눈도 저렇게 빛날것이다.

은희는 비로소 선생님을 간호원언니처럼 생각케 하는 그 특징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그렇다! 작곡가도 선생님도 언니도 모두 이런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힘든 일에 뛰여들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안하면 누가 하나?》

이 말을 또 누가 했더라? 문득 눈물이 가득 고인 예경이의 눈이 떠오른다.

아, 언제나 꽃다발을 사양하는 동무, 스스로 일을 찾아하는 동무, 내가 그런 동무를 모욕하다니…

불현듯 예경이의 얼굴이 선생님곁에 나란히 나타난다. 그런데 언니의 얼굴도 보인다.

그들은 한결같이 별처럼 빛나는 눈으로 은희를 바라본다. 만약 예경이가 정말로 선생님옆에 서있다 해도 은희는 서슴없이 그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할것이다.

(예경아, 날 좀 호되게 비판해줘!)

온종일 참아오던 눈물이 드디여 왈칵 쏟아졌다.

은희는 쓰러질듯이 선생님의 품에 안겼다.

《언니!》

눈물은 걷잡을수없이 흘러내렸으나 그것은 벌써 슬픔의 눈물이 아니였다.

그 눈물은 별처럼 빛나고 거울처럼 맑은 눈에서만 나올수 있는 뜨거운것이였다.

 

은희는 또다시 맑은 하늘아래로 들길을 걸어간다. 지금 은희의 눈에는 상상해오던 언니의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큰 기업소의 지배인도 아니고 이름난 학자도 아니다. 평범한 생물교원인 선생님과 같은 모습 아니, 그저 소박한 보통 방직공의 모습일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있어 조국이 빛나는것이리, 그들이야말로 가장 숭고하고 참된 사람이 아니겠는가!

(예경아, 난 언니의 모습을 찾았어. 난 언니의 그 모습을 거울삼아 언제나 내 마음을 비쳐보며 살아가겠어.)

이날부터 은희의 거울은 정말로 신기한 보물이 되였다. 왜냐하면 은희가 점점 더 아름다운 사람으로 되여갔으니까.…

 

주체70(19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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