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100(2011)년 제11호에 실린 글
□ 단편소설 □
최 복 실
창밖에는 두그루의 은행나무가 우뚝 서있었습니다. 여름내 파릿파릿하던 잎사귀들이 하루가 다르게 노르끼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호는 여느때없이 일찍 눈을 떴습니다.
맞은켠벽에 걸려있는 달력에서 17일이라는 글자가 눈에 확 안겨들었습니다.
대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앉았습니다.
9월 17일, 오늘은 그가 열번째로 맞이하는 생일날입니다. 잘 익은 사과알처럼 오동통한 얼굴, 머루알같이 크고 까만 눈, 상큼한 코날…
대호는 문득 전실쪽으로 귀를 강구었습니다.
방싯 열린 사이문짬으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소곤소곤 새여들어왔습니다.
《우리 대호가 제일 좋아하는건데… 내 저녁전에 제꺽 눌러가지고 오마.》
(야! 외할머니가 오셨구나.)
대호는 싱긋 웃으며 사이문을 활짝 열어제꼈습니다.
《외할머니!》
《오냐, 대호가 깨여났구나.》
넓다란 전실에서 어머니와 마주앉아있던 외할머니가 반색을 했습니다.
《좋긴 좋다. 생일날이 너에게 나이 한살 더 주고 그대신 늦잠자는 버릇을 앗아갔구나. 하하하…》
즐겁게 웃으시는 외할머니의 무릎앞에는 닭알꾸레미며 빨간 사과알들이 놓여있었습니다.
그옆에 놓여있는 바구니속에서는 외할머니네 집에서 기르던 알락암닭 두마리가 눈을 또록거리며 내다보고있었습니다.
눈이 둥그래졌던 대호는 다음순간 두손바닥을 딱 마주쳤습니다.
《옳지, 꼬꼬닭두 내 생일을 축하해주자구 찾아왔구나.》
외손자의 생일때문에 새들도 잠을 깨기 전에 새벽걸음을 하신 할머니가 정말 고마왔습니다.
《우리 외할머니 제일이야.》
대호는 외할머니앞에 엄지손가락을 한번 내보이고나서 물었습니다.
《외할머니, 이자 내가 제일 좋아한다구 한건 물론 농마국수겠지요?》
《원 녀석, 귀두 밝다.》
처녀때엔 보름달같이 환했다던 외할머니는 또 한번 인상좋게 웃고나서 말씀하시였습니다.
《네 외삼촌이 더 극성이라니까. 요새 네가 1중학교입학준비때문에 몸이 상한것 같다면서 종자암닭들까지 붙잡아주며 날 떠밀지 않겠니.》
《야!》
마음이 마냥 즐거워진 대호는 암닭들의 뾰족한 부리를 톡 건드렸습니다.
외할머니는 그러는 대호를 기쁘게 바라보며 《대호야, 그새 외할머니의 농마국수 누르는 솜씨가 더 늘었단다. 오늘 저녁은 닭고기국물에 말아줄테니 동무들과 함께 오거라.》하시였습니다.
《예, 좋아요. 난 저녁에 두그릇 아니, 세그릇 먹을래요. 동무들두 농마국수는 다 좋아하거던요.》
×
길가에 곱게 핀 코스모스도 생일을 맞는 대호를 축하하는듯 한들한들 춤을 추었습니다.
머리우에 날아예는 아침까치도 대호의 생일을 기뻐하며 깍깍깍 고운 청을 뽑아 노래를 부르는듯 합니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호는 학교길에 올랐습니다.
시루봉과 대각산이 병풍처럼 빙 둘러솟은 한복판에 대호네가 사는 마을이 있습니다.
대호네 마을에서 돌포장을 곱게 한 길을 따라 10분쯤 내려가면 외할머니네 집이 있는 로동자구 소재지마을이 있는데 바로 거기에 3층으로 된 아담한 학교가 자리잡고있었습니다.
대호가 부지런히 걸어가는데 무엇인가가 뒤잔등을 톡 때리였습니다.
(이게 뭐야?)
뒤를 돌아보니 키가 쭉 빠지고 서글서글하게 생긴 얼굴에 벙글벙글 웃음을 지은 아이가 서있었습니다. 학교적인 1중학교입학을 위한 예비시험때 1, 2등을 다투던 이웃학급의 기찬이였습니다. 어깨우로 올라간 그의 손에는 금방 또 던지려는듯 잣 한알이 들려있었습니다.
《기찬아, 너 참 명사수로구나.》
대호가 한마디 하자 기찬이는 대답대신 잣 한줌을 쑥 내밀며 히쭉 웃었습니다.
《고맙다.》
두 아이는 어깨나란히 걸음을 다그쳤습니다.
그런데 기찬이가 문득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습니다.
《아니?! 너의 외삼촌이 아니야?》
그가 가리키는쪽을 바라보니 마을에서 세멘트공장으로 들어가는 갈림길어구에서 외삼촌이 힘차게 삽질을 하고있었습니다.
대호는 눈이 둥그래져서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외삼촌―》
《오, 너희들이냐?》
외삼촌은 땀에 젖은 구리빛얼굴에 웃음을 띄웠습니다.
《그런데 왜 외삼촌이 도로수리를 하나요?》
어제 밤 쏟아져내린 사나운 폭우로 한군데 푹 패여나갔던 길섶이며 거기에 단단히 다져진 흙들을 보면서 대호가 묻는 말이였습니다.
《도로가 이렇게 상했으니 손질을 해야지.》
《도로관리원아저씨들이 있잖나요.》
《있기야 있지. 하지만 내가 먼저 보았는데 어떻게 그냥 지나칠수 있겠냐?》
《외삼촌이야 세멘트공장의 한다하는 직장장인데…》
《원 녀석두, 세멘트공장 직장장은 뭐 도로수리를 하면 안된다더냐. 우리 마을길이고 우리 사람들이 다니는 길인데 누구나 제 일처럼 생각해야지. 네일내일, 너와 나를 따로 갈라봐선 안된단다.》
외삼촌은 대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습니다. 키가 구척같고 가슴이 쩍 버그러진 외삼촌을 대호는 얼마나 따르고 자랑하는지 모릅니다.
《학교 늦겠구나. 어서 가봐라.》
머리숙여 인사를 하고나서 발걸음을 옮겨놓던 대호는 다시 고개를 돌렸습니다.
《외삼촌, 오늘 저녁엔 무조건 인차 와야 해요.》
《오냐, 가구말구.》
《전번날 약속했던 생일기념품 잊지 않았지요?》
《걱정말아.》
외삼촌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였습니다.
《야, 좋구나!》
대호는 기쁜 마음을 안고 기찬이와 함께 나는듯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저녁에 외삼촌이 자기앞에 척 내놓을 실력판정문제집이 얼른거렸습니다.
(우리 외삼촌은 참 좋은분이야!)
마을에서도 공장에서도 《우리 직장장》으로 소문이 자자한 외삼촌이였습니다.
어떤 때는 직장사람들을 불러일으켜 마을앞공원의 깨여져나간 색블로크들을 새것으로 바꾸어 깔아주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소성로부속품을 어깨에 메고 기계공장으로 반달음쳐가기도 하군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쉬는 날이면 출장을 떠난 직장종업원네 집뜨락에서 해가 저물도록 구멍탄을 찍기도 합니다.
기찬이가 부러워하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넌 꽤 좋겠다야, 좋은 외삼촌이 계시니.》
《아무렴, 좋지 않구.》
대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싱긋 웃었습니다.
×
멀리 대각산너머로 저녁해가 살그머니 내려앉습니다.
뒤따라 곱고고운 노을이 우뚝 솟은 세멘트공장 굴뚝이며 기계공장의 높고낮은 건물들과 집집의 지붕들을 감빛으로 물들이며 소리없이 퍼져나갑니다.
대호네 집은 아침녘보다 더 즐거운 웃음소리, 노래소리로 흥성거리고있었습니다.
대호는 지금 학급의 동무들과 이마를 맞대고 윷놀이를 하고있습니다.
외삼촌을 기다리며 흥을 돋구자는것입니다.
《모― 나와라, 모― 나와라, 휙― 아이쿠! 걸이구나.》
《고놈을 잡아라. 휙― 아이쿠! 개로구나.》
서로 따라잡을 내기를 하며 한동, 두동 넘겨나가고있을 때였습니다.
마당에서 인기척이 나는가싶더니 《얘, 대호 엄마야, 이걸 좀 받아다우.》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외할머니가 오셨구나!》
대호는 얼른 방문을 열었습니다.
두손에 묵직한 음식그릇들을 갈라든 외할머니가 부엌문앞에 서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급히 마주나가 그것들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외할머니, 외삼촌은 안오시나요?》
대호가 묻는 말이였습니다.
《오냐…》
외할머니는 뜻도 모를 대답을 한마디 하고는 《어이구.》하며 허리를 쭉 펴십니다.
《〈오냐〉는 또 뭐예요? 외삼촌이 왜 안오시는가 물어보았는데…》
대호는 외할머니의 허리를 주먹으로 톡톡 두드려주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외할머니는 대호에게 웃음이 어린 눈길을 돌렸습니다.
《대호야, 외삼촌은 좀 늦어올것 같다.》
대호는 좀 시쁘둥해서 말했습니다.
《쳇, 우리 대호, 우리 대호 할 땐 언제구 오늘같은 날에 딱…》
《갑자기 일이 생겼으니 어쩌겠니? 글쎄 급한 사정이 생겨 먼곳에 출장떠난 한직장사람네 아들의 생일이 바로 오늘이라누나. 그런데 그애 어머닌 양묘장에서 애어린 나무모들을 돌보고있는데 아니 글쎄, 오늘 밤따라 강한 바람이 불것이 예견된다면서 온밤 작업장을 뜰수 없다는구나.》
《그래서요?》
대호는 심각한 표정을 짓고 할머니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니 그 애가 한해에 한번밖에 없는 생일을 어떻게 즐겁게 쇨수 있겠니? 어머니마저 옆에 없이… 그래서 외삼촌이 생각던 끝에 네 외삼촌어머니랑 다 데리구 그 집엘 먼저 건너갔구나.》
《그 애가 누군데요? 이름을 모르나요?》
《기찬이라던지…》
《예?!》
대호는 자리를 차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기찬이! 그애 생일이 나와 꼭같은 날이란 말이야?! 그런것두 모르구 난…)
대호는 전화기가 놓여있는 탁앞으로 씽 다가갔습니다. 줌안에 드는 전화번호수첩을 손에 들고 후르르 번졌습니다. 기찬이네 집 전화번호가 눈에 탁 띄였습니다. 대호는 콤퓨터건반을 누를 때처럼 전화기의 번호판을 재빨리 눌러나갔습니다.
그러던 대호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굳어져버렸습니다.
문득 오늘 아침 외삼촌이 번쩍이는 삽날을 도로에 박으며 하던 말이 귀전을 윙― 울렸습니다.
《…네일내일, 너와 나를 따로 갈라봐선 안된단다.》
대호는 눈앞에서 번개불이 또다시 번쩍하는것 같았습니다.
(아, 그래서였구나. 외삼촌은 나도, 기찬이도…)
대호는 창밖으로 기찬이네 집이 있는 웃마을쪽을 오래도록 바라보았습니다.
외삼촌이 무척 돋보이고 또 돋보이였습니다.
그런데 대호 자기는?…
학급장이라고 으시대기만 하였지 동무들을 진정으로 따뜻이 품에 안아주지 못했습니다. 얼마전엔 학급의 한 동무가 감기로 며칠째 못나왔는데도 그까짓 감기쯤 하고 생각하면서 찾아가보지조차 않았습니다. 그런 학급장을 동무들이 그 누가 진심으로 따르겠습니까?…
《대호야, 왜 그러고 서있느냐? 전화를 하려면 빨리 하지 않구. 이제 좀더 있으면 중학생이 될텐데 속이 커야지.》
외할머니가 핀잔하듯 말씀하시였습니다.
《그런게 아니예요, 외할머니!》
대호가 그 무엇인가를 결심한듯 아래입술을 꼭 깨물었습니다.
《대호야, 그럼 외삼촌에게 이 엄마가 전화를 할가? 비행기를 타구 빨리 날아오라구.》
어머니가 다심하게 하시는 말씀이였습니다.
대호는 큰숨을 한번 씨익 내쉬고나서 저벅저벅 어머니앞으로 다가갔습니다. 외할머니도, 어머니도 두눈이 둥그래졌습니다.
《어머니, 외할머니, 농마국수랑 떡이랑 닭알이랑 다 싸주세요!》
《아니 그건 왜?》
《동무들이랑 기찬이네 집에
가서 함께 생일을 쇨래요! 그리고 내 생각엔 외할머니랑 어머니랑 우리모두 함께 가면 더 좋을것 같애요. 내 생일두 아예 기찬이네 집에서 함께
쇠면 더 좋지요 뭐.》
《?!》
《원 녀석두, 우리 대호가 정말 좋은 생각을 했구나.》
외할머니가 무릎을 치며 환히 웃음을 지었습니다. 어머니도 환하게 웃었습니다.…
잠시후 대호와 그의 동무들은 즐겁게 집을 나섰습니다.
맨 앞장에 선 대호의 두손에는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성의껏 마련한 음식들이 가득 담긴 그릇이 들려있었습니다.
그속에는 농마국수와 설기떡이며 갖가지 음식들만 들어있는것이 아니였습니다.
아버지장군님께서 지켜주시고 빛내여주시는 내 나라, 너와 나가 하나로 되고 우리로 되는 곱고고운 마음이 철철 넘쳐흐르고있었습니다.
그 마음처럼 아름다운 저녁노을이 정다운 고향산천에 고요히 내려앉고있었습니다.
노을빛은 대호의 가슴에도 붉게붉게 물들여지고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