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100(2011)년 제12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한 기 석

왜놈들이 마지막발악을 하던무렵이였다.

나이는 열한살, 호리호리한 몸집, 언덕이마아래 깜장눈이 류달리 반짝반짝하는 아이, 그 애는 이웃들속에서 용세라는 이름보다 《날다람이》로 더 많이 불리운다. 그것은 용세가 나무잡이를 펄 날게 하는데서 생긴 별명이다.

그 애는 아스라한 우듬지까지 눈깜빡할 사이에 기여오르는가 하면 정말 날다람이처럼 이 가지, 저 가지에서 날아내리기도 했다.

집이라야 서너채밖에 안되는 깊은 두메산골, 용세가 뜨락을 나서면 반겨주는것은 나무들뿐이다. 그 나무들이 그 애에게는 말없는 동무였고 거기에 오르내리는것이 둘도 없는 재미였다.

만약 멀지 않은 곳에 바다나 강이 있다면? 그러면 용세에게는 또다른 별명이 붙었을런지 모른다. 《물개》라든지 《준치》라든지…

그러나 가까이에는 옹달샘이나 골개물밖에 없다. 시오리쯤 떨어진 곳에 산굽이를 돌고 높은 령을 넘어야 강이 나진다. 두만강이라고 부르는 그 강은 용세의 머리속에 눈물의 강으로 새겨져있다. 일곱살나는 해에 그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그 강을 건느면서 어른들이 눈물을 흘리는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지난해에는 왜놈들의 《토벌》에 아버지, 어머니를 잃고 할아버지와 함께 눈물을 뿌리며 그 강을 다시 건너온것이였다.…

저녁해가 노루꼬리만 한 기장을 두고 삿갓봉마루우에 걸려있었다.

오리나무가지에 걸터앉은 용세는 두눈에 손가락망원경을 걸고 골짜기 저 멀리로 아득히 흘러간 큰길쪽을 내려다보고있었다. 어뜩새벽에 약초짐을 지고 낟알을 구하러 떠난 할아버지가 행여나 돌아오지 않는가 해서였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모습은 그림자조차 찾아볼수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100여리나 되는 먼길을 떠나면서 사흘은 걸려야 돌아온다고 했던 할아버지였다.

왜놈군대 자동차가 앵앵 모기소리를 내며 딱정벌레처럼 기여가는것이 용세의 눈에 비껴들었다. 고개너머 그 어디에 놈들의 소굴이 있는지 하루에 한두번씩 눈에 띄는 광경이였다.

《에익, 유격대아저씨의 말처럼 하루빨리 저놈들을 꽝꽝 해치워야 할텐데…》

주먹을 불끈 틀어쥐는 용세의 눈앞에 열흘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날 용세는 귀틀집에서 얼마쯤 떨어진 풀밭에 앉았다가 갑자기 배를 그러안고 모로 쓰러졌다.

《아!…》

온몸이 나른해지며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에서 하늘땅이 빙빙 돌았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이것저것 마구 따먹고 뜯어먹은탓인것 같았다.

《할아버지―》

애타게 부르며 모지름을 쓰는데 숲속에서 괴나리보짐을 어깨에 걸친 웬 아저씨가 바람처럼 나타났다.

아저씨는 용세를 둘쳐업고 귀틀집으로 가서 날쌔게 아궁에 불을 지피고 물을 끓여 손발부터 주물러주었다. 여러가지 약봉지들이 들어있는 보짐에서 한두봉지를 골라 약도 먹이고 미시가루를 풀어 입에 떠넣어주기도 했다.

이틀동안 함께 지내는 사이에 용세와 그의 할아버지는 아저씨와 한식구나 다름없는 사이가 되였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조선인민혁명군의 한 소부대 대원일줄이야. 그는 국경연안에 대한 정찰임무를 받고 두만강을 건너온것이였다.

용세는 아저씨에게서 용감한 아동단원들의 투쟁이야기도 듣고 혁명가요도 배웠다.

김일성장군님께서 왜놈들을 쓸어버리고 나라를 해방시켜주실 날이 멀지 않았다는것도 알았다.

그날을 기다리지만 말고 너도나도 떨쳐나 싸워야 한다는것을 머리속에 깊이 새겨넣었다.

(지금쯤 아저씬 어데 있을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 꼭 들리마 했는데…)

둥근해가 삿갓봉너머로 숨어버리자 사위가 어둑어둑해졌다.

용세는 나무에서 내려와 귀틀집으로 향했다.

그가 뜨락에 들어섰을 때였다.

뒤켠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응?!…)

고개를 돌린 용세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저씨가 간신히 기여오다말고 자기를 손짓해 부르고있는것이였다.

《아저씨―》

용세는 한달음에 아저씨가까이로 다가갔다.

《어딜 다쳤나요?》

《응, 놈들이 얼마나 눈을 까뒤집고 싸다니는지… 놈들의 총알에 그만 다리를 좀 상했다.》

용세는 얼른 아저씨를 부축하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저씨는 다리를 좀 상한 정도가 아니였다. 왼쪽넙적다리가 관통상을 입어 퉁퉁 부어올랐는데 아직도 피가 벌겋게 내배여있었다.

용세의 눈이 퉁방울만 해졌다.

《야, 이걸 어쩌나요?》

《이쯤한거야…》

아저씨는 천연스레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눈빛에는 무거운 근심이 비껴있었다.

×

이튿날 새벽녘이였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용세의 눈은 또다시 퉁방울처럼 되였다. 아저씨가 깊은 생각에 잠긴채 벽에 기대고 앉아있었던것이다. 뙤창으로 흘러드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에 손바닥만 한 무슨 천쪼박을 펴보기도 하고 상처입은 다리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내쉬기도 하였다.

용세는 조심히 아저씨곁으로 무릎걸음을 했다.

《아저씨, 상처가 더 아프나요?》

아저씨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건 뭐나요?》

용세는 아저씨가 손에 들고있는것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천쪼박을 차곡차곡 접으며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알만 해요. 날 믿지 못해 그러지요.》

용세는 시쁘둥해서 중얼댔다.

《원 이런, 용세가 처녀애처럼 새뚝쟁이인줄은 몰랐는걸. 용세야, 백날을 몸가까이에서 살면서도 믿음이 안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 이틀사이에도 정과 믿음이 가는 사람이 있단다. 난 할아버지와 널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야 어떻게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걸 말했겠니.》

용세는 히죽이 웃으며 아저씨앞에 바싹 다가앉았다.

《그럼 말해줘요. 아저씬 지금 무슨 근심을 하구 있지요?》

아저씨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말이 옳다. 근심도 아주 큰 근심을 하구 있다.》

《무슨 근심이나요?》

《오늘 밤부터 강건너에서 련락원이 정찰자료를 기다리고있단다. 그런데…》

용세는 깜장눈을 내리깔고 생각하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아저씨, 련락원을 만나는 장소와 방법만 대주세요. 그럼 내가 가겠어요.》

《네가?!…》

아저씨는 저으기 놀라더니 입을 꾹 다물었다.

용세는 뿌루퉁해서 중얼거렸다.

《나두 아동단원들처럼 해보자는건데…》

《아동단원들처럼?》

《예.》

아저씨가 용세의 어깨에 손을 척 얹었다.

《용세야, 하지만 네 생각대루 할수 없는것이 안타깝구나.》

《그건 무슨 말이나요?》

《난 정찰임무를 채 끝내지 못했단다. 너두 싸리골을 지나 구름봉쪽으로 가는 자동차길을 알지?》

《예, 그 길루 왜놈자동차들이 자주 다녀요. 엊저녁두 두대나 기여올라가는걸 봤어요. 그쪽에 놈들의 무슨 소굴이 있는지…》

《구름봉너머 두만강가까운 등판에 놈들의 포진지가 있단다. 우리 항일유격대가 최후공격을 할 때 어째보자구 비밀리에 설치한거지. 그러나 우린 말끔히 사진을 찍어냈단다.》

《사진을요? 야, 대단하군요.》

《그런데 한가지 수수께끼같은 일이 생겼다. 사진화면에는 틀림없는 포진지가 찍혔는데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쪽으로 통나무를 많이 실어가는걸 보았을뿐 세멘트나 모래, 자갈 같은것을 실어가는건 못 보았다는게 아니겠니. 그뿐이 아니다. 숱한 포차들이 짐을 싣고 오갔지만 길이 깊이 패운적이 없었다는거다. 네가 한번 생각해봐라. 세멘트포장도로도 아니고 흙도로인데 무거운 포차들이 움직이고 나면 길이 어떻게 될것 같으냐?》

용세는 선뜻 대답했다.

《그거야 바퀴에 땅이 패워 홈이 깊이 생기지요 뭐.》

《옳다. 그러니까 여기엔 놈들의 무슨 꿍꿍이가 있는게 분명하다. 그래서 그걸 확인하려다가 뜻밖에 놈들과 맞다들렸던거다.》

용세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아저씨, 닷새구 열흘이구 우리 집에서 쉬면서 치료하자요. 그다음 임무를 마저 끝내면 되지 않나요?》

아저씨가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련락원은 사흘동안만 나를 기다리게 되여있단다. 늦어도 래일까지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아저씨는 벽에 의지하여 몸을 일으키려다가 다시 주저앉고말았다.

용세는 아저씨를 부축하며 울상을 지었다.

《야, 이 몸으루 어쩌자구 그래요?》

《목숨이 붙어있는 한 임무는…》

아저씨는 안깐힘을 쓰며 일어서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어쩌면 좋담?)

용세는 입을 꼭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

용세는 드디여 구름봉너머 등판가까이에 이르렀다. 베잠뱅이자락이 땀에 축축히 젖어있었다. 집을 떠난지 둬시간 잘되는것 같았다.

잠간 집을 비운 사이에 부상당한 다리를 끌고 개울가에까지 기여내려간 아저씨를 발견한 용세는 드디여 결심을 내렸다.

《아저씨, 그 임무를 내게 맡겨줘요.》

아저씨가 두번세번 고개를 가로 흔들자 용세는 되알지게 말했다.

《아저씨가 뭐라고 했어요? 김일성장군님께서 나라를 해방시켜주실 날을 기다리기만 해선 안된다, 너도나도 떨쳐나 싸워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나도 싸울테야요.》

용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아저씨가 마침내 고개를 끄떡했다. 그다음 용세가 해야 할 일과 주의할 점들을 차근차근 알려주고나서 그의 두어깨를 꽉 잡았다. 그렇게 되여 길을 떠난 용세였다.

잠간 땀을 들이고난 그는 귀를 강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씨륵씨륵― 풀벌레소리뿐 사위는 고요했다. 신통히도 엊저녁처럼 저녁해가 삿갓봉마루우에 노루꼬리만 한 기장을 두고 걸려있었다.

용세는 둘레에 서있는 나무들가운데서 그중 키높이 자란 나무를 골라 재빨리 오르기 시작했다. 절반을 더 올랐을가? 목을 빼들고 등판을 내려다보니 엄청나게 큰 풀색위장망을 쓴것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군데군데 웅크리고있었다. 그것들은 두만강쪽을 향해 하나같이 굵고 삐죽한것들을 내밀고있었다.

(이게 아저씨가 말하던 그 포진지라는건가? 대체 몇이나 되는가부터 알아봐야지.)

용세는 좀 더 올라가 그것을 손금보듯 하고싶었다. 그가 손발을 우로 착 올려붙이려는 순간이였다.

《딱―》

정적을 깨치며 삭정이가 발에 닿아 부러졌다.

얼결에 밑으로 눈길을 떨군 용세는 온몸이 굳어져버렸다.

누런 군복을 입은 왜놈병사 두놈이 고개를 쳐들고 급히 다가오고있었다. 한놈은 총대를 메고 다른 놈은 쇠줄퉁구리를 어깨에 걸쳤다. 용세는 그놈들이 선로감시를 나온 통신병들이라는것을 알수 없었다.

《뭐야, 당장 내려와.》

얼굴이 마늘쪽같이 생긴 놈이 총대를 꼬나들며 소리쳤다.

용세는 화득화득 뛰는 가슴을 안고 나무에서 미끄러져내렸다.

《마늘쪽얼굴》이 다짜고짜 용세의 뺨을 철썩 갈겼다.

용세는 눈앞에서 불이 번쩍 하고 얼굴이 얼얼했다. 왈칵 터지려는 분을 가까스로 참으며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일부러 울음소리를 터쳤다.

《와―앙.》

놈이 용세의 어깨를 왁살스레 틀어쥐며 악청을 돋구었다.

《요놈의 새끼, 울음이나 그쳐. 나무엔 왜 올라갔댔는가? 앙?》

용세는 꺽꺽 숨막히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짬으로 놈들의 동정을 살폈다.

다른 놈이 어깨에 걸친 통신선퉁구리를 손으로 툭 쳤다.

《이런거나 끊자고 올라가지 않았는가?》

그놈은 이렇게 씨벌이며 나무꼭대기를 힐끗 쳐다보았다.

용세도 곁따라 눈길을 들었다. 놈이 어깨에 멘것과 꼭같은 줄이 나무가지들사이로 건너간것과 함께 가지짬에 튼 새둥지가 얼핏 눈에 띄였다.

《그런걸 어떻게?… 봐요, 나한텐 손칼 하나 없어요.》

용세는 두손으로 저고리량쪽에 달린 호주머니를 툭툭 쳐보였다.

《마늘쪽얼굴》이 눈알을 데그르르 굴리며 따지고들었다.

《그럼 뭣때문에 올라갔는가?》

《새둥질 털려고요.》

《새둥지나 어디 있소까?》

《저기 있지 않나요.》

용세는 팔을 펴고 마른 나무가지로 얼기설기 성글게 틀어놓은 새둥지를 가리켰다.

《저것이나 털어 뭘하는가?》

《배가 고파서 새알을 꺼내먹으려구요.》

용세는 오른손을 배허벅에 가져다대며 우는상을 지었다. 아닌게아니라 배에서 꼬르륵소리가 나기도 했다.

《집이 어딘가?》

《마늘쪽얼굴》이 좀 누그러진 소리로 물었다.

《집이 있을거나 뭐나요.》

용세는 우정 울먹울먹하며 중얼거렸다.

《그럼 거지새낀가?》

(뭐, 거지새끼?)

속이 다시 울컥했으나 용세는 입을 꾹 다물었다.

먼지가 끼고 푸시시한 머리카락, 정갱이가 드러난 헐어빠진 베잠뱅이, 궁기가 내배인 여윈 얼굴…

놈들은 용세의 모습이 무척 초라해보였던지 눈살을 찌프리며 서로 마주보았다. 눈빛으로 뭔가 의논하는것 같았다.

이윽고 총을 쥔 놈이 한걸음 다가섰다.

《똑똑히 들어. 여긴 함부로 다녀선 안되는 곳이란 말이야. 다시 나타났다가는…》

놈은 별안간 용세의 가슴팍에 총구를 돌려대며 뇌까렸다.

《땅!― 해버리겠다. 알겠는가?》

용세는 와뜰 놀라는척 뒤로 물러섰다.

그런 모양을 보는것이 재미라도 나는듯 놈은 얄궂은 웃음을 짓더니 빽 소리질렀다.

《냉큼 사라져.》

용세는 홱 돌아서서 장달음을 놓았다.

×

돌돌돌… 물소리가 났다. 바위굽을 에돌아 실오리같은 골개물이 흘러내리고있었다.

용세는 가랑잎을 와락와락 걷어내고 넙적 엎드렸다. 꿀꺽꿀꺽 물을 들이켰다. 그제서야 정신이 맑아지는것 같았다.

(이젠 어쩔가? 돌아가서 사실대로 다 말하면 되지 않을가? 나무에 올라 분명 포진지를 봤는데…)

용세는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발을 선뜻 뗄수 없었다.

(내가 본거야 위장망을 쳐놓은것들뿐이여서 그것이 진짜포인지 가짜포인지 가려보지조차 못했는데…)

머리속에서 이런 말소리가 울려나왔다.

(용세, 돌아서선 안돼. 다시, 다시!…)

포진지쪽으로 걸음을 내짚던 용세는 주춤 서버렸다. 《마늘쪽얼굴》이 금시 총부리를 들이대는것 같았다. 어쩐지 몸이 으쓸했다.

이때였다. 유격대아저씨의 모습이 눈앞에 불쑥 떠올랐다. 기어이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서 부상당한 다리를 끌며 개울가에까지 기여갔던 억세인 모습이였다. 자기의 어깨를 꽉 그러쥐며 어떻게나 꼭 해내야 한다고 그가 당부하던 말도 귀에 쟁쟁했다.

용세는 두주먹을 돌처럼 꽉 틀어쥐였다. 부쩍 용기를 내여 걸음을 내짚었다.

저녁해는 이미 시루봉너머로 사라졌다. 귤쪽같은 쪼각달이 주위를 어렴풋이 비쳐주고있었다.

용세는 풀숲을 헤치고 나무들을 에돌며 앞으로 나아갔다.

얼마쯤 지나자 가시철조망이 앞을 막아섰다.

(옳지, 이것만 뚫고들어가면 되겠구나.)

용세는 숨을 죽이고 철조망안을 살펴보았다.

사위는 쥐죽은듯 고요했다. 오락가락하는 보초병놈도 눈에 띄우지 않았다. 다만 한곳에서 불빛이 반짝이고있었다. 귀를 기울이니 보초병놈들이 모여앉아 수군덕거리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철조망을 따라 살금살금 기여가던 용세는 《옳지!》하고 속으로 환성을 올렸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안팎으로 두그루의 큰 나무가 서있었는데 아스랗게 올려다보이는 꼭대기에서 우듬지의 나무가지들이 서로 얽혀있는것이였다.

용세는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나서 나무에 달라붙었다.

잠시후 그의 몸은 벌써 위장망을 씌운것 가까이에 떨어져있었다. 용세는 다시한번 숨을 크게 들이쉬고나서 위장망을 들치고 살그머니 안으로 기여들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거야?)

살금살금 손더듬을 하던 용세는 와뜰 놀랐다. 손에 닿는것마다 선뜩하고 굳은 쇠붙이가 아니라 나무뿐이였던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통나무들로 대포모양처럼 흉내만 내놓은것이였다.

(그러니까 나무포?! 정말 괴상한 일인데…)

위장망속에서 새여나온 용세는 부엉이눈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쯤 떨어진 곳에 비슷한것들이 또 잇달아있었다. 불빛이 비치는 곳에서는 별다른 기미가 없었다.

한결 마음이 커진 용세는 고양이걸음을 하며 차례차례 하나도 빠짐없이 위장망안으로 기여들어갔다. 하나같이 첫번째것과 꼭 같은 나무포들이였다.

《개새끼들, 유격대가 무서워 이따위것만 잔뜩 만들어놨구나.》

용세는 속으로 된욕을 퍼부으며 철조망을 넘어왔다.…

×

이밤, 귀틀집 등잔불은 여느때없이 밝았다.

《아저씨!》

《용세야!》

아저씨는 용세를 꽉 끌어안고 놓을줄 몰랐다.

《네가 정말 큰일을 했다. 장하다, 장해!》

대통을 뻐금뻐금 빨던 할아버지도 주름많은 얼굴에 흐뭇한 웃음을 담았다.

《허, 우리 집 날다람이도 쓸모가 있는셈이군.》

낟알짐을 지고 초저녁에 집에 돌아와 밤깊도록 속을 태우며 손자를 기다려온 할아버지였다.

《아저씨, 그런데 놈들이 왜 나무포를 만들어놨을가요?》

아저씨가 검실검실한 얼굴에 생각깊은 표정을 지었다.

《놈들도 제놈들이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는걸 알고있단다. 그래서 최후발악을 하는거지. 그렇게 가짜포진지를 만들어놨다가 우리 유격대가 진격해나올 때 속여넘겨보자는거란다. 생각해봐라, 놈들의 가짜포진지를 진짜로 알고 공격하면 어떻게 되겠니. 그때 놈들은 다른 곳에 있는 진짜포진지에서 못된짓을 할게 아니냐? 얼마전에 청진에 정찰 나갔던 동무들이 고말산에 설치한 포진지가 가짜라는것을 알아낸적이 있단다. 그런데 여기서도 또 그런짓을 했구나.》

아저씨는 정찰지도가 그려진 손바닥만 한 천쪼박을 펴놓더니 한쪽귀퉁이에 그려놓았던 까만 동그라미에 《×》 표식을 했다. 구름봉너머 등판에 설치한 놈들의 포진지가 가짜라는것을 알리는 표식이였다.

아저씨는 그것을 차곡차곡 접어 품속에 넣으며 그루를 박아 말했다.

《용세야, 이 자료들은 김일성장군님의 조국진군작전도에 그려지게 된다. 용감하고 슬기로운 너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면 장군님께서는 무척 기뻐하실게다.》

김일성장군님께서요?! 야!》

용세는 온몸이 하늘로 둥둥 떠오르는것 같았다. 그는 아저씨의 손을 꼭 잡으며 간절하게 말했다.

《아저씨, 나한테 새 임무를 또 주세요.》

아저씨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암, 줘야지. 너 내가 들려준 이야기랑 노래들을 잊지 않았을테지. 그걸 한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해라. 해낼수 있겠니?》

《할수 있지 않구요.》

용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렴, 우리 용세가 누구라구!》

아저씨와 할아버지가 소리내여 웃으며 대견한 눈길로 용세를 바라보았다.

《하하하…》

용세도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만세소리가 하늘땅을 뒤흔들 조국해방의 날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그날은 언제일가?…

1945년 8월 15일!

그날까지는 꼭 두달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 누구도 이것을 알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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