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98(2009)년 제2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최 치 성
1. 《특별과제》
거리나 마을에서 어른들의 눈에 비낀 소학교 4학년생이란 아주 작고 어린 꼬마에 지나지 않을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기분나빠하지 않는다. 열살이면 정말 아직 키도 몸도 작고 그리고 마음도… 작기때문이다. 하지만 소학교의 울타리안에 들어와서 한두시간쯤 돌아보고난 다음에도 그렇게 말한다면 대뜸 볼이 부어오를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4학년생들은 소학교의 당당한 《좌상》들로서 1, 2, 3학년 꼬마들모두의 형님, 누나들이니까.… 금방 입학한 1학년막냉이들은 물론 2, 3학년애들도 저희들끼리는 옥신각신할 때가 가끔 있어도 우리와 마주서기만 하면 배부른 애기염소들처럼 곰상스러워지군 한다. 소학교 4학년생쯤이면 벌써 철부지도 꼬마도 아니라는것은 며칠전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특별과제》를 놓고보아도 얼른 알수 있다. 그날 저녁 나는 밥술을 놓자마자 삑 돌아앉아 숙제장을 펼쳐놓았다. 그러자 밥을 잡숫던 아버지가 대견한 눈길로 돌아보며 물었다. 《준이, 요새두 공부 잘하겠지?》 《예ㅡ 계ㅡ속 5점이예요.》 나는 노래부르듯 대답하고나서 부리나케 숙제를 해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별스레 덤벼치는데는 그럴만 한 까닭이 있었다. 새로 나온 아동영화CD가 나를 기다리고있었기때문이였다. 불이 번쩍 나게 숙제를 해치운 나는 얼른 록화기를 켰다. 《무슨 숙제를 그렇게 빨리 하니? 꼭 도깨비기와장 번지듯 하는구나?》 아직 밥상도 채 거두지 못한 어머니가 눈이 둥그래서 하는 말이였다. 하지만 도깨비든 기와장이든 관계없이 텔레비죤에서는 벌써 재미나는 화면들이 흘러가고있었다. 우주를 향해 살같이 날아가는 려행로케트, 그속에서 아웅다웅 론쟁을 하고있는 너구리와 야웅이, 곰과 원숭이… 동생 남이도 재미나서 엉뎅이를 들썩거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가.… 《준이야, 나 좀 봐라.》 돌아보니 아버지가 나의 숙제장을 펼쳐들고있었다. 《오늘 내준 수학숙제가 속셈문제냐?》 《아… 닌데요.》 《그런데 이건 뭐냐? 문제를 써놓고는 풀이과정도 없이 답들만 댕그랗게 써놓았구나. 이거야 속셈이지 문제풀이냐?》 속이 띠끔해진 나는 얼른 록화기를 정지시켰다. 멎어선 화면에서 능청스럽게 생긴 원숭이가 나를 내다보고있었다. (너 혼나게 됐구나.)라고 하는듯이… 《그리구 이 국어숙제를 봐라. <깉다>, <깇다>, <긷다>가 다 들어가게 짧은글짓기를 하라는건데… 여보, 당신두 좀 들어보오. 이렇게 지으면 되겠는가. <먹다 깉은 밥을 먹고 기침을 깇으며 물을 긷다가 잠을 잤다.>…》 《하, 하, 하.》 남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웃어대는 소리였다. 내가 눈을 가로뜨고 쏘아보자 《엄마엄마, 형이 나 쏘아봐.》하고 아우성을 쳤다. 어머니가 남이를 막아주는 흉내를 내며 말했다. 《누가, 어디서, 왜? 이게 없으니 한마디로 말해서 종자가 없는 문장이구만요.》 《결론은 뭔가. 문장에두 종자가 없고 얘의 머리속에두 종자가 없다는거요. 연구심이 없이 그저 숙제를 위한 숙제를 했단 말이야. 안되겠군. 내가 일이 바쁜 구실루 한동안 관심을 안했더니… 그러고보면 전번 자연시험사건두 아버지가 너무 범상히 지나보낸게 아닐가?》 자연시험사건이란 내가 《날개》라고 써야 할것을 《발》이라고 잘못 써서 4점을 맞은 일이였다. 그때 아버지는 꾸지람은 하지 않고 그저 허허 웃으며 《작가들이 알았다간 또 만화영화가 하나 나오겠구나.》라고 롱담비슷이 말한 다음 나의 실수는 공부를 앵무새식으로 한것과 진중치 못하고 헤덤비군 하는 버릇때문에 빚어진것이라고 사근사근 타일러주기만 했었다. 내가 고개를 푹 떨구고 앉아있는데 아버지가 물었다. 《너 지금 몇살이지?》 《내가 알아. 형 지금 열살이야. 난 여섯살이구…》 이번에는 어머니가 엄하게 눈총을 쏘았다. 《남이! 그럼 못써!》 《그래 열살이지. 그러니 이제 한해만 더 지나면 뭐가 되지?》 새삼스럽고도 이상쩍은 물음이였지만 대답하기는 쉬웠다. 《중학생이 되지요 뭐.》 그제야 아버지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까 이젠 어린애가 아니지, 그렇지?》 꿋꿋해졌던 몸이 스르시 누그러졌다. 되게 욕먹을줄 알았더니 왕청같이 어른대접이 아닌가.… 내가 벌쭉벌쭉 웃자 아버지의 얼굴은 다시금 엄해졌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잡도리를 단단히 하고 달라붙어야겠다. 학과학습에 총집중하는 한편 공부를 위한 공부에만 매여달리지 말고 목표를 높이, 멀리 세워야 하겠다. 그렇다는 의미에서 내가 한가지 특별과제를 주겠다.》 특별과제? 그게 뭘가?… 알지 못할 두려움이 그리고 뾰조름한 호기심이 동시에 마음속을 둔장질했다. 《다름아니라 자기가 이제 커서 무엇이 되겠는가. 그 희망을 이루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걸 한번 생각해보라는거다. 내가 연구사업결속때문에 출장갔다 며칠 있어야 올것 같은데 그때 다시한번 마주앉아보자.》 그다음 아버지는 움쭉 일어나 웃방으로 건너갔다. 어머니는 설겆이하러 부엌으로 나가고… 《형, 형. 빨리 보자.》 남이가 우두커니 앉아있는 나를 툭툭 건드리며 재촉을 했다. 나는 심드렁한 동작으로 록화기를 시동시켰다. 얄미운 원숭이는 얼른 사라져버리고 대신 남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종알거린다. 《형 속상해하는구나. 아부지가 주신거 힘든 숙젠게지?》 남이의 짐작은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했다. 재미날것 같기도 하고 무척 말째기도 할것 같은 숙제, 아직은 힘든건지 쉬운건지 알수도 없는 숙제,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정말이지 《특별과제》이기때문이였다.
2. 무엇이 될가
지금보다 더 어린 꼬마였을 때, 정확히 말해서 유치원시절이나 1학년때 같으면 이다음에 커서 이거 될래, 저거 될래 재잘거리기 잘하던 나였다. 그런데 한살두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느샌가 그런 버릇이 말짱 사라져버렸다. 나이를 먹은 대신 그 자리에 틀고앉았던 앞날에 대한 생각이 어디론가 쫓겨가버린때문일가. 아니, 그런건 절대로 아니다. 그때 내가 이것저것 주어댄것은 앞날에 대한 그 무슨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혀 돌아가는대로 막 내뱉은것들이기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법 철이 들어서 생각이 묵직해진때문일가.… 역시 자신있게 대답할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준 숙제는 꼭 수행해야만 하는것이였다. 그렇다면 난 커서 뭐가 될가. 아무거나 되겠다고 대답해서는 안될것이다. 그런 대답이나 듣자고 아버지가 특별과제를 준것은 결코 아닐것이다. 그렇다면 박사? 혹은 《인민》자나 《공훈》자가 붙어있는 그 무엇?… 아니면 작가?… 아이구, 그건 너무 높아.… 그런데 아버지가 준 과제는 두 문제였다. 어떤 희망이든 그것을 이루자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게 더 큰 문제였다. 어쨌든 하루가 다 지나가도록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보통숙제라면 누구한테 물어보기라도 할텐데 이건 그럴수도 없는 문제였다. 《얘, 좀 물어보자. 나 커서 뭐가 될것 같니?》 이런 식으로 물었다가 괜히 《오, 내 보기에 넌 꼭 어른이 될것 같애.》 이따위 놀림이나 받으면 글쎄 어쩐단 말인가. 하지만 마음놓고 물어볼만 한 상대가 정 없는것도 아니였다. 그게 바로 내 동생 남이였다. 《남이야, 너 한번 대답해보라. 형이 커서 뭐가 됐으면 좋겠니?》 원래 틀리건 맞건 대답에 막히는적이 없는 남이는 이번에도 제꺽 입을 열었다. 《형, 그림 그리라. 미술가 되라.》 《하, 하, 하.》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림보기를 제일 좋아하고, 그래서 나한테는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한테까지 그림을 그려달라고 애를 먹이군 하는 남이가 이런 판에서도 제 리속부터 차리려드는게 아닌가. (가만!) 나는 문득 웃음을 그쳤다. 갑자기 머리속에 번쩍하고 스치는것이 있었기때문이였다. 3학년때인가 내가 남이에게 그려준 비행기와 땅크그림을 띄여본 아버지가 《어? 신통한걸.》하며 눈을 크게 떠올린적이 있지 않았던가.… 옳다, 그거다! 나는 막혔던 가슴이 확 열리는것만 같았다. 《남이야, 너 까딱말구 앉아있으라.》 《까딱말구?… 그럼 조각처럼?… 싫어, 나가놀래.》 《가만 있어. 내가 널 멋있게 그려주겠다니까.》 《정말? 야ㅡ 좋구나!》 나는 화판대신 등받이없는 쪽걸상에 마주앉았다. 그우엔 보통 쓰는 흔한 종이장을 올려놓았다. …나는 수양버들이 흔들거리는 유보도에 앉아있었다. 보기 좋은 고급화판을 척 뻗쳐놓고 멋진 붓대를 이리저리 꼬누며 색갈을 먹여나간다.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따뜻한 해빛이 쏟아져내리고 시원한 바람이 옷자락에 매달려 어리광을 친다. 《멋있구만, 꼭 진짜같구만.》 《야, 미술가들은 참 좋겠지?》… 참으로 달콤한 환상이였다. 그러나 잠간이였을뿐… 그만 덜컥 깨여져나가고 그대신 씁쓸한 현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아유, 발 저리다. 아유ㅡ》 《다 됐다. 조금만 기다려라… 자, 다 그렸다. 봐라.》 《헹! 이게 나야? 내가 맞니? 도깨비처럼 그려놨구나. 아유, 발 저리다.》 아부재기를 치는 남이의 코등에 침을 발라주고난 나는 벌렁 드러눕고말았다. (에ㅡ 이것두 아니구나.) 문득 태남이 생각이 났다. 이제 크면 유명한 영화연출가가 되겠다고 벌써부터 큰소리치는 공상가가 바로 그 애였다. 그렇다면 태남인 어떻게 돼서 연출가가 되기로 마음 먹었을가. 나는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남의 경험을 듣고 참고하는것도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했으니 그런걸 물어보는데야 창피할게 뭔가.… 《그런데 건 알아서 뭘하려구?》 태남이는 별일 다 있다는듯 눈이 둥그래서 나를 마주보았다. 《나두 혹시 연출가가 될런지 아니? 네 경험을 좀 들어보구파서 그래.》 그러자 태남이는 한번 히쭉 웃더니 나의 어깨를 툭 쳤다. 《준이야, 너 한발 늦었구나. 난 그새 다른걸루 바꾸었거던.》 《바꿔? 아니, 뭘하구 바꿨단 말이야?》 《히히, 우습구나야. 다른거 하구 바꾼게 아니구 희망을 바꾸었단 말이야. 말하자면 내가 이젠 유명한 의사가 되기루 맘먹었단 말이야.》 《유명한 의사?… 그렇다면 말해보라. 의사가 될 생각은 왜 했니?》 《생각?》 태남이는 뒤통수를 살살 긁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준이야, 그건… 후에 말하자마.》 《왜? 지금 말하라.》 《사실은… 또 한번 바꾸어야 할것 같애서 그래.》 《뭐?》 나는 슬며시 일어나서 우두커니 서버리고말았다. (엉터리공상가 김태남!)…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신발바닥은 땅에 철떡철떡 끌리고있었다. 난 커서 도대체 무엇이 될가. 공부는 그만하면 괜찮아서 지금껏 최우등을 했는데 무엇에 소질이 있는지는 딱히 생각나지 않았다. 대답은 떠오르지 않는데 또 하루가 성큼성큼 지나가고있었다. 《여 준이, 누구한테 욕먹었니?》 머리를 쳐드니 우리 아빠트 29층에 사는 중학교 3학년생인 상호형이 앞에 서있었다. 구역체육학교 축구선수인 그 형의 팔과 옆구리사이에는 얼럭얼럭한 가죽공이 멋스럽게 끼워져있었다. 나는 먼저 축구공을 한번 툭 건드려보고나서 상호형을 쳐다보았다. 《형, 나 커서 뭐가 되면 좋을가?》 (아차!) 나는 혀를 꼭 깨물었다. 궁리가 딱 막힌 나머지 그만 아니할 물음을 훌떡 뱉아놓은것이 아닌가.… 이제 뭐라고 대답해줄가. 《너 바보가 되면 좋겠구나.》 이런 퉁이나 맞는다면 글쎄 얼마나 맥풀리는노릇인가. 그런데 상호형은 머리를 기웃거리며 찬찬히 마주보더니 이렇게 묻는것이였다. 《너 지금 태남이를 닮아가는거 아니야?》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하 벌리는데 이번에는 더 어처구니없이 따져묻는것이였다. 《어째서 그런 허튼 생각을 하게 됐니?》 (허튼 생각?) 그렇다면 우리 아버지가 준 특별과제의 알맹이가 헛공상이란 말인가. 그렇게 되고보니 사연을 털어놓고 말할수도 없게 되였다. 말했다가 괜히 우리 아버지까지 그런판에 끌어들이면 어쩐단 말인가. 맹랑해져서 입만 쩝쩝 다시는데 상호형은 나의 어깨를 툭 쳤다. 《야, 그건 아직 먼 후날에 생각할 일이야. 나두 아직 뭐가 될지 잘 모르겠는데 소학교학생이 뭘 그다지나… 얘, 헛공상하지 말구 착실하게 공부나 잘해라.》 (이 형은 중학생답지 않구나. 그런데 체육학교엔 왜 부지런히 다닐가?) 그런데 상호형의 말이 옳은듯 하기도 했다. 얼른 속셈을 해보아도 내가 소학교에 입학하여 오늘까지는 천날이 훨씬 넘는 낮과 밤들이 흘러왔다. 이제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른이 되려면 2천날도 더 지나야 한다. 정말 얼마나 많고많은 날들인가. 상호형의 말대로 얼마나 멀고먼 후날에 있을 일인가. 그런데 아버지는 왜 벌써 그런 과제를 주었을가.… 아버지와 약속한 마지막하루도 이렇게 흘러가고있었다. 오늘 저녁이면 아버지가 돌아와 나와 마주앉을것이다. 그러면 분명 진땀을 빼게 될것이다. 하지만 일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3. 오늘날의 이야기
연구사업을 결속하고 오후에 공장에 도착한 아버지가 저녁에 인차 못 들어온다는 전화가 왔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한참 생각에 잠겨있더니 아버지에게 가져갈 저녁밥을 준비하는것이였다. 그걸 보고 남이가 이렇게 물었다. 《엄마, 아부지가 연구하던거 꽝 터졌나?》 《터지긴 뭐가 터지겠니.》 《영화에서 보니까 연구하다가 못하믄 꽝 하구 터지두나.》 《오ㅡ 아버지건 터지지 않았단다.》 《실패했다는거나요?》 내가 묻자 어머니는 《그런 말은 없었단다.》라고 대답하고는 부지런히 갈 차비를 했다. 그러니 아버지가 밤늦게야 들어오면 오늘 저녁엔 그런대로 넘어갈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속을 태우며 앉아 기다리고만싶지는 않았다. 욕을 먹든 무엇을 먹든 내 발로 먼저 찾아가고싶었다. 《어머니, 나두 같이 갈래요.》 《나두!》 어머니는 나와 남이를 사랑스럽게 굽어보며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우리모두 함께 가자.》 식료연구사인 아버지는 벌써 1년째 새로운 첨가제연구때문에 기초식품공장에 나가있었다. 공장은 멀지 않아서 뻐스를 타고 두 정류소만에 내려 조금 걸어가면 있었다. 공장정문에 들어섰을 때 우리의 눈에 제일 먼저 띄운것은 커다란 속보판의 첫자리를 차지한 《새 소식》란이였다. 《연구사 김경호동무! 새로운 첨가제연구에서 드디여 성공!》 《야ㅡ 성공했구나 뭐.》 속보판의 《김경호동무》는 바로 우리 아버지였다. 《어머니, 그러니까 우린 축하해주게 됐어요.》 나와 남이는 기뻐 껑충껑충 뛰여오르기까지 했다. 어머니도 뛰여오르지는 않았지만 빨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이며 저절로 벌려지는 입을 보면 나나 남이보다 더 기뻐한다는것이 헨둥히 알렸다. 아마 누구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우리보다 더 높이 뛰여올랐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난 과제를 수행 못했구나.…) 내가 이런 생각으로 머릴 수그린채 아버지의 실험실앞에 이르렀는데 문이 열리며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ㅡ니, 이게 뭐야. 남이까지 왔구나.》 이럴줄은 몰랐던지 아버지는 깜짝 놀라기부터 했다. 장난 심한 남이는 아버지가 한번 안았다 놓아주자마자 원주필을 집어들고 실험대우에 주런이 놓인 실험기구들을 챙챙 건드리면서 《요건 맥주병, 요건 간장병, 요건 식초병…》하고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왜 인차 퇴근하시지 못해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묻는 말이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씨무룩이 웃으며 롱조로 대답하는것이였다. 《동무들한테 부끄럽게 됐소. 연구가 실패로 끝났으니…》 (체, 아버진 기쁘니까 롱질을 다 하는구나.) 나와 꼭같은 생각인듯 어머니가 말했다. 《롱담마세요. 이자 오다가 봤어요.…》 어머니가 속보판소리를 하자 왜서인지 아버지의 눈은 둥그래졌다. 《아니, 벌써 그걸 써붙였더란 말이요?… 허, 그것 참…》 입을 쩝쩝 다시던 아버지는 문득 어머니의 가방을 툭 건드렸다. 《좌우간 저녁이나 먹고봅시다.》 어머니가 가방을 들어올릴 때 아버지와 내가 눈길을 마주쳤다. 《참, 우리 약속한게 있었지.…》 이런 때 나도 아버지처럼 하고도 못했노라 롱담을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나는 풀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 나두 과제를… 못했어요.》
콤퓨터에 마주앉아 바시락거리던 남이가 냉큼 끼여들었다. 《아부지, 형 미술가 되려다가 실패했어요. 날 도깨비처럼 그려줬어요.》 《도깨비? 하하하.》 그렇다고 내가 남이를 사납게 쏘아본것은 아니였다. 남이가 허튼소리를 한것은 아니기때문이였다. 《그러고보면 노력은 꽤 했던 모양이로구나. 응? 하하하.》 그 웃음소리에 나는 불쑥 마음이 커졌다. 《아버지, 그건 너무 먼 후날에 가서 볼일이예요. 난 이제 겨우 소학교학생인데…》 아버지는 나를 물끄러미 마주보고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에는 웃음이 비껴있었다. 《그래. 네가 옳게 말했다. 정말로 그건 아직 멀고먼 후날에 가서 볼일이라고도 할수 있지.》 나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아버지의 말뜻은 도대체 무얼가. 《준이야, 내 말을 들어봐라. 이제 방금 너희들이 본 그 새 소식이 현재로서는 사실이다. 그런데 첨가제 그자체는 성공했지만 더욱더 현대화될 먼 후날에 가서는 누구든 다시한번 연구해야 할 과제라는것이 이번 심의결과에서 밝혀지게 됐다. 그걸 알고서야 어떻게 모르는척 손털고 나앉을수 있겠느냐. 그래서 아버진 대담하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한거란다.》 그러니 아버지가 스스로 자기의 연구를 실패로 만들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마치도 영화나 소설책에서 나오는 이야기같아서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따져보면 내가 처음부터 멀리 앞을 내다보지 못하고 발끝만 내려다보는 식으로 연구를 시작한게 잘못이였어.》 잠시 말을 끊었던 아버지는 나의 어깨를 꾹 짚으며 말했다. 《그러니 생각해봐라. 비록 먼 후날에 가서 다시 일어날 일이지만 바로 그 일이 과연 언제부터 시작되는것인가를… 준이야, 네가 어른이 될 먼 후날에 가서 볼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때에 가서 생길 일들이 바로 네가 아직 꼬마인 오늘날부터 시작되는것이 아닐가. 네가 이다음 커서 100층짜리 집을 짓게 되든 10만t짜리 배를 뭇게 되든 그 설계는 바로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 말이다. 아직은 멀었다, 아직은 시간이 많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오늘을 껄렁껄렁 살았다간 꼭 불행한 래일이 차례지는 법이다.》 아버지는 조용히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나도 일어나 아버지의 곁에 가 섰다. 창밖의 모든것이 불그레한 노을속에 잠겨있었다. 웅웅 기계소리 울리는 공장이며 그 너머로 창마다 하나, 둘 불빛이 어리기 시작한 높낮은 집들이며 록음짙은 공원과 거리의 나무들… 《준이야, 아버지장군님께서는 지금 이 시각도 삼복철무더위와 장마철 궂은비를 다 맞으시며 멀고 험한 전선길과 현지지도의 수천리길을 끝없이 걷고계신다. 우리 장군님께서 온 세상에 자랑높이 잘살게 될 내 조국의 래일을 위해 그처럼 바쁘시고 힘겨우신 선군길을 걷고계시는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우리도… 힘겹고 어려워도 항상 래일을 위한 오늘에 살아야 한다, 우리 장군님처럼!…》 래일을 위한 오늘에!… 아버지장군님처럼… 순간에 키도 크고 마음도 크고 나는 문득 어른이 되는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 여느때라면 어른들사이에나 오고갔을 그런 엄숙하고도 절절한 이야기가 지금 나의 가슴을 쩌릿쩌릿 울려주고있었다. 아직은 작고 어린 우리들이 순간에 어른으로 되고 먼 후날과 오늘이 하나가 되는 이야기, 우리같이 나어린 아이들도 아버지장군님과 너무도 가까이 이어져있다는 그 뜻깊은 이야기가… 그 이야기가 나의 가슴을 세차게 울려주고있었다. 《이젠 식사를 해야 하지 않겠어요?》 어머니의 얼굴도 붉게 물들어있었다. 《그래 밥을 먹어야지. 오래간만에 온 집안이 다 모였으니 오늘은…》 《밥맛이 좋지요!》 역시 남이는 참새같은 재잘쟁이였다. (말만 잴잴 잘해선 안되겠는데. 공부도 잘해야겠는데…) 별안간 머리속에 어른스러운 생각이 떠올랐다는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저도 몰래 싱그레 웃음을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