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아동문학》 주체98(2009)년 제9호에 실린 글
 

 

단편소설

 

현 승 남
 

항일의 녀성영웅 김정숙어머님께서는 평양시내를 벗어나자 걸음을 더 빨리 하시였습니다. 어머님을 따라나선 경위대원이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연방 씻었습니다.

길옆의 동뚝에는 파릇파릇 풀싹들이 돋았습니다. 그 풀싹들사이로 연자주색제비꽃들이 유난스럽습니다.

멀리 아지랑이속에 묻힌 룡악산의 바위츠렁에는 진달래꽃망울들이 터지기 시작하여 울긋불긋합니다. 양지에는 진달래꽃들이 피지만 음달진 골안에는 겨우내 쌓인 눈무지들이 채 녹지 않아 더욱 이채롭습니다.

해방된 이듬해의 첫봄입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자못 기쁨을 금할수 없으셨습니다. 해방된 땅에서 첫봄을 맞는 기쁨도 기쁨이지만 보다 더 기쁜것은 력사적인 토지개혁이 실시되여 제땅에서 열성스레 씨붙임차비를 하는 농민들의 환희에 찬 모습을 보시는것이였습니다. 구성진 노래가락을 뽑으며 거름바리를 몰아가는 농민이 있는가 하면 신이 나서 밭을 가는 농민의 모습도 보입니다. 어머님의 얼굴에는 웃음이 함뿍 어립니다. 사람들도 웃고 땅도 웃고… 온 벌이 그저 들썽들썽하는것 같이 느껴지셨던것입니다.

어머님께서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외우셨습니다.

《해방된 조선의 첫봄을 증산으로 맞이하며 한치의 땅도 묵이지 말자!》

경애하는 김일성장군님께서 토지를 분여받고 기뻐하는 농민들에게 제시하신 구호입니다.

건당, 건군, 건국의 그 바쁘신 속에서도 김일성장군님께서는 토지를 분여받은 농민들이 올해농사를 잘 짓도록 하기 위해 오늘도 아침일찍 시주변농촌마을로 나가시였습니다. 오늘은 시주변의 농촌뿐아니라 룡강군과 온천군의 농촌들까지 현지지도하실 계획이시였습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장군님께서 룡강으로 나가시기 전에 급히 결론받을 문제가 있어 지금 장군님을 찾아가시는 길이였습니다.

씨붙임차비에 분주한 벌을 꿰질러나가던 평지길은 소나무숲이 울창한 령길과 이어졌습니다.옛날에는 룡악산의 호랑이가 대낮에도 내려오군 했다는 무성한 숲길이였습니다.

령마루에 올라서니 멀리 해빛에 번쩍이는 대동강이 바라보입니다. 그 대동강과 마주하고 후미진 산골안에 40여채의 농가가 모여앉은 마을이 있었습니다. 문가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문씨마을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토지개혁준비가 한창이던 지난 2월초에 눈길을 헤치며 장군님을 모시고 이 마을에 오셨댔습니다.

마을에는 좌상으로 존대받는 문택호라는 로인이 있었습니다. 힘이 장사이고 성미가 호랑이처럼 사나와서 해방전에는 왜놈순사도 서뿔리 마주서기를 꺼리군 하게 했다는 할아버지입니다.

비록 초가집이긴 해도 마을 한가운데 네마구리로 제일 크게 지은 그 할아버지네 집에서 장군님께서는 오랜 시간 농민들과 토지문제를 의논하셨습니다. 그날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옆채에서 마을녀인들과 손수 두부망질을 하면서 살림살이형편을 료해하셨댔습니다.

로인네 집을 알아보시는 어머님의 얼굴에는 무척 반가운 표정이 어리였습니다. 장군님께서 오늘도 그 로인의 집에서 마을농민들과 만나고계시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령길을 절반쯤 내리시던 어머님께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시였습니다.

소나무와 떡갈나무가 무성하고 해묵은 속새풀이 키를 넘게 자란 숲속에 산턱을 뭉청 찍어낸듯 한 바위벼랑이 있었는데 그 바위굽에서 얼핏 사람의 형체를 보셨던것입니다. 분명 바위굽에 사람이 쓰러져있었습니다.

《가만, 저기 누가 있어요.》

어머님께서는 서슴없이 바위쪽으로 향하시였습니다. 함께 가던 경위대원이 급히 어머님의 앞을 막아섰습니다.

《여기 계십시오. 제가 가보겠습니다.》

권총부터 꺼내든 경위대원은 날래게 숲속으로 뛰여들었습니다.

어머님께서도 더 빨리 숲속을 헤치셨습니다.

바위굽에 이른 어머님께서는 놀라시였습니다. 경위대원은 더 바싹 긴장해서 주위를 살폈습니다. 바위굽에 열두세살 났음직한 한 소년이 쓰러져있었던것입니다.

그의 까만 학생복은 여러군데 찢겨져있었습니다. 손에는 얼핏 보아서는 진짜권총과 삭갈릴만큼 잘 만든 나무권총이 쥐여져있었습니다. 차림새를 보면 이 마을아이같지 않았습니다. 이 마을에는 이렇게 멋진 학생복까지 입고 학교에 다니던 아이가 없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우선 소년의 손에서 나무권총을 뽑아드시였습니다. 화약을 다져넣고 방아쇠를 당기면 진짜총소리 못지 않는 폭발소리를 낼수 있게 만든 나무권총이였습니다.

《얘야, 정신차려라. 얘야!》

경위대원이 소년을 안아일으키며 불렀습니다.

소년의 얼굴이 몹시 이즈러졌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소년의 왼쪽팔이 심하게 상했다는걸 알아보셨습니다.

《얘야, 넌 누구냐?》

경위대원이 더 급하게 불렀습니다.

어머님께서도 소년의 옆에 가까이 앉아 그의 팔을 만져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많이 상했구나. 얼마나 아프겠니. 한데 넌 어디 사는 애냐?》

소년은 눈도 뜨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입을 더 꼭 다무는게 분명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소년이 일체 말을 안하려고 굳게 마음먹었다는걸 알아차리셨습니다.

《빨리 병원으로 가야겠어요.》

어머님의 말씀에 경위대원은 아연했습니다. 누구인지, 어떤 사연을 안은 소년인지 모르기도 했지만 급하게 장군님을 찾아가시던 어머님께서 당장 어느 병원으로 가시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어머님께서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리선생이 원장으로 일하는 병원으로 데려가야겠어요. 빨리!》

어머님께서 말씀하시는 병원은 평양 대동문가까이에 있는 외과전문병원이였습니다. 해방직후인 지난해에 반동놈들의 모해로 하마트면 목숨까지 잃을번 했던것을 김일성장군님께서 구원해주시고 원장사업까지 그대로 하게 해주신 량심적이고 애국적인 의사였습니다.

마침 언덕길로 시내로 들어가는 목탄차 한대가 올라오고있었습니다.

경위대원이 뛰여내려가 차를 멈춰세우고 소년을 부탁했습니다. 제가 함께 가야겠으나 어쩐지 마을공기가 심상치 않은것 같아 어머님곁을 떠나지 않으려는것이였습니다. 경위대원의 그 심정을 헤아리신 어머님께서는 따뜻이 만류하시였습니다.

《내 걱정은 말아요. 시간이 급해요. 패혈증이라도 오면 어떻게 하겠어요.》

어머님께서는 손수 소년을 운전칸에 올려앉히셨습니다. 그러시고는 차가 흔들려도 일없도록 소년의 상한 팔을 가슴우에 고정시켜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원장선생한테서 부상상태를 구체적으로 알아가지고 와야겠어요. 어서 떠나요.》

분명 어머님의 말씀을 다 들었겠지만 소년은 여전히 죽은듯이 기척을 안했습니다.

 

×

 

석달전 함께 두부망질을 하신적이 있는 녀인의 말을 듣는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저으기 긴장해지셨습니다.

간밤 자정이 넘었을무렵이였다고 합니다. 갑자기 문택호로인의 집뒤에서 요란한 총소리가 울렸습니다. 잠자던 차림 그대로인 문택호로인이 웬놈들이냐고 소리치며 뒤문을 박차고 뛰여나갔습니다. 련이어 네댓방의 총소리가 또 터졌습니다. 달이 없는 캄캄한 봄밤이여서 사람은 상하지 않았습니다. 총알들이 바람벽에 날아와 박힌걸 보면 문택호로인을 겨냥하고 쏜게 분명했습니다.

온 마을이 밤새 잠을 못 잤다고 합니다.

어머님께서는 마을사람들과 농사일을 의논하시는 장군님께 결론받을 일을 보고드리면서 그 사실만은 말씀드리지 않으셨습니다. 마침 문택호로인도 말씀올리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몸에 닥쳤던 불미스러운 일 때문에 장군님께서 걱정하실가봐서였습니다.

말씀은 안하셨지만 어머님께서는 그것이 토지개혁후 첫해농사를 본때있게 지으려고 앙양되는 마을사람들의 기세를 꺾기 위해 좌상로인을 해치려고 한 반동놈들의 음모라는것을 포착하셨습니다. 자신께서 경위대원이 되시여 현지지도의 길을 이어가시는 장군님을 호위하고싶으셨습니다. 하지만 장군님의 결론을 받은 문제들이 시간을 다투는 일이기에 경위대원들에게 장군님호위를 각별히 당부하고 돌아서시였습니다.

소년을 병원에 입원시킨 경위대원은 어머님께서 장군님과 헤여진 후에야 돌아왔습니다.

어머님께서 보내신 환자라는것을 알자 원장선생은 최상의 성의를 다하겠다고 하였다는것입니다. 소년이 부상을 당한것은 10시간전으로 추측된다고 했습니다. 팔뼈가 두군데나 부러졌는데 시간이 너무 흘러 하마트면 큰일이 날번했다고 하면서 즉시 자기가 직접 수술을 하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평양으로 돌아오시는 어머님께서는 생각이 많으셨습니다.

자정이 넘어서 일어난 총성, 10시간전으로 추측된다는 소년의 부상… 하다면 소년이 형체모를 그 무장악당들과 한패당이란 말인가?

어머님의 심중을 눈치챈듯 경위대원이 나직이 한마디 했습니다.

《어머님, 우리가 〈이리새끼〉를 입원시키고 치료해주는건 아닙니까?》

어머님께서 경위대원한테로 고개를 돌리셨습니다. 눈빛이 어찌나 엄하셨던지 경위대원은 목을 쑥 움츠렸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아무 말씀도 안하시고 아지랑이속 멀리 평양시내쪽을 바라보셨습니다. 아지랑이속에 소년의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올차게 여물어보이는 되박이마, 고집스럽게 꼭 다문 입, 신음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이발을 앙다물면서 찡그리군 하던 얼굴, 어머님께서 조용히 물으셨습니다.

《원장선생이 직접 수술을 하겠다고 했어요?》

《예, 어머님께서 보내신 환자인데 다른 의사에게 맡길수 없다고 하면서… 절대 걱정말라고 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더 다른 말씀 안하셨습니다.

평양으로 돌아오신 어머님께서는 여느날보다 더 바쁘셨습니다. 평양시 녀맹일군들을 만나 부모없이 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류랑아들을 돌보며 공부시킬 문제까지 토론하고나시였을 때는 저녁도 늦저녁이 되였습니다.

저택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어머님께서는 병원에 들리시였습니다.

온 하루 소년의 옆에 붙어있다싶이 하던 원장선생이 마당으로 달려나와 어머님을 마중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 걱정하셨던 소년의 수술정형부터 말씀드렸습니다.

《수술은 성과적으로 됐습니다.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면 큰일날번 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한데말입니다. 여전히 통 말을 안합니다. 아직 병력서에 이름과 주소도 써넣지 못해서 그저 〈17호실소년〉이라고 부릅니다.》

원장선생은 소년의 성미가 보통이 아니라면서 어른들도 수술을 한 다음 마취약기운이 빠지면 동통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데 신음소리 한번 안냈다고 하고나서 조심스레 물었습니다.

《저… 이런 말을 물어서 되겠는지…》

《어서 말씀하세요.》

《그 환자가… 그 마을소년이 아니라고 하던데…》

이미 경위대원한테서 안심치 않은 말을 들었던 모양이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나직이 대답하셨습니다.

《그래요, 그 마을소년이 아니예요. 하지만 명백한것은 그 소년도 해방된 우리 나라 아이라는것입니다. 우리 나라 소년!》

원장선생의 얼굴에 탄복의 빛이 어렸습니다.

《예, 말씀의 뜻을 명심하겠습니다. 제가 모든 성의를 다하겠습니다.》

《그래주세요.》

소년이 입원한 17호실은 2층의 조용한 구석쪽에 있었습니다. 침대가 둘뿐인 자그마한 방이였는데 소년이 혼자 있었습니다.

어머님을 모시고 입원실로 들어가는 원장선생은 무엇인가 기적이 일어날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어머님과 만나면 소년이 꼭 무슨 말인가 할것 같은 생각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아니였습니다.

소년은 여전히 눈 한번 뜨지 않은채 입을 꼭 다물고 좀처럼 입을 열 차비가 아니였습니다.

어머님께서도 소년의 얼굴을 찬찬히 여겨보기만 하실뿐 일체 말씀을 안하셨습니다. 아무 말씀없이 소년의 수술한 팔목을 잡고 맥박을 짚어보시였습니다. 이마에 손을 얹고 열도 가늠해보셨습니다.

그렇게 한동안 소년의 옆에 앉으시여 가만히 살펴보기만 하시던 어머님께서는 역시 아무 말씀 않으신채 자리에서 일어나시였습니다.

문밖에 나오신 어머님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소년이 절대로 혼자있게 해서는 안되겠어요.》

원장선생은 군대처럼 차렷자세를 하며 대답올렸습니다.

《알겠습니다.… 이틀전에도 반동놈들이 우리 병원주변에서 어물거렸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저택으로 돌아오시던 어머님께서는 강선쪽으로 나가는 한 일군과 만나셨습니다. 소년이 병원에 입원하게 된 경위를 간단간단히 알려주고나서 부탁하셨습니다.

《수고스러운대로 돌아오는 길에 문택호로인네 마을에 좀 들려주세요. 낮에 그곳 보안서동무들한테 이야기하긴 했지만… 반동놈들이 총소리나 몇방 울리고 그냥 물러설리는 없어요.… 그리구 문택호로인한테 소년이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고있는데 대해서도 알려주세요. 그 마을에 오래 사신 로인이니 무엇인가 알아볼수도 있어요.》

《알겠습니다.》

일군은 곧 승용차로 떠났습니다.

허나 그 일군 역시 별로 신통한 소식은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소년에 대한 말을 들은 문택호로인은 무척 놀라는 기색만 지었을뿐 도리머리를 했다는것이였습니다. 한가지 흥미있는것은 그곳 보안서에서 들려주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곳 보안서동무들의 말에 의하면 그 소년이 로인의 손자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로인한테는 7~8년전에 의절을 하고 갈라진 아들이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평안북도 벽동군 어느 경찰서에서 순사를 하는 아들이였는데 자기한테는 왜놈앞잡이를 하는 아들이 없다고 하면서 일가친척들을 다 모아놓고 족보에서 지워버렸다고 합니다. 그후에는 아들도 로인을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그 대신 추석날이 오면 반드시 식구들을 데리고 고향에 와서 조상들의 묘지를 돌아보고 가군 했다고 합니다.》

《그래요?》

어머님께서는 곧 평안북도에 나가있는 공산당파견원한테 전화를 거시였습니다. 문택호로인의 아들이 순사를 했다는 경찰서와 그 집 주소를 구체적으로 대주시면서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도록 부탁하시였습니다.

 

×

 

소년은 밤새껏 이불을 들쓰고 울었습니다. 정말이지 일이 이렇게 될줄은 몰랐습니다.

소년의 이름은 문창혁입니다. 그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었습니다. 밝은 앞날에 큰일을 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에서였다고 합니다.

창혁이 다섯살잡히는 해까지 할아버지는 얼마나 그를 고와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매해 추석이 되면 꼭꼭 할아버지한테 찾아가군 했습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가 제일 고와한 애는 창혁이였습니다.

문씨일가에는 친척도 많고 조상의 묘지도 많았습니다. 고조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할아버지와 할머니, 또 무슨 할아버지와 할머니… 창혁이 미처 외우지 못할만큼 마을뒤산의 이 등성, 저 등성이들에 묘지들이 많았습니다. 그 묘지들을 다 돌아보려면 옹근 하루품이 걸렸습니다. 마을에는 손자애들이 여럿이였지만 할아버지는 외지에서 자라는 손자라면서 해종일 창혁이만을 등에 업고 그 험한 산길을 돌군 했습니다.

그랬던 할아버지가 아들이 순사시험에 합격하여 순사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달음으로 벽동땅에 달려와 당장 기둥뿌리를 뽑아던질듯이 야단을 했습니다. 넌 내 아들이 아니라고, 조상들앞에 죄가 될터이니 다시는 고향집문턱을 넘어서지 말라고 노발대발하고는 그날 저녁으로 돌아가버렸었습니다.

말이 그렇지 실지 마음이야 그러랴 하고 그해 추석날에는 특별히 별식까지 차려가지고 고향에 찾아갔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진짜 고향마을어구에도 들어서지 못하게 무섭게 창혁이네 식구들을 몰아세웠습니다.

그때부터 추석날이 오면 아버지는 어머니와 창혁이를 데리고 고향마을에 가서는 세식구가 따로 떨어져서 조상의 묘지들을 돌아보군 했었습니다.

창혁이는 할아버지를 리해할수 없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야속스럽기도 했습니다. 차츰 그는 그 일이 아버지때문이라는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해마다 추석이 오면 불안하고 걱정스럽기도 했습니다. 멀리 산밑으로 할아버지네 집을 내려다보며 저의 집 식구들끼리 조상의 묘를 찾아보는 일이 어린 마음에도 서글프고 쓸쓸하군 했습니다. 어느해인가는 할아버지네 마을에 안가겠다고 발버둥질을 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슴을 더 아프게 했었습니다.

해방이 되기 전 지난해 한겨울이였습니다.

하루는 경찰서에서 어머니와 창혁이를 불렀습니다.

하루전에 집을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가뜩이나 걱정이 컸던 어머니와 창혁이는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안고 경찰서에 들어갔습니다.

우직스럽다고 소문난 경찰서장이 별스레 침통한 얼굴을 해가지고 어머니의 손에 돈봉투 하나를 쥐여주었습니다. 아버지가 국내에 들어온 항일유격대지하공작원을 추적하는 전투에 참가했다가 희생됐다는것이였습니다.

어머니는 며칠동안 밥 한술 못 뜨고 쓰러져 앓았습니다.

얼마후 일본이 패망하고 온 나라, 온 강산에 해방의 함성이 터져올랐습니다. 하지만 창혁이네는 떳떳이 문밖에 나서지도 못했습니다.

아니나다를가 《친일파》숙청바람에 달이 뜬 청년들이 달려들어 가장집물을 내동댕이치며 창혁이와 어머니를 마을에서 내쫓았습니다.

백번천번 할아버지를 찾아가고싶었지만 차마 그럴수가 없는 창혁이네였습니다.

다행히 얼마 멀지 않은 린접군의 어느 한 마을에 거처를 정할수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살던 마을에서 쫓겨난 신세이고보면 생소한 고장에서도 편안할리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의 병은 점점 심해져서 이제는 문턱을 넘나들기도 힘들어했습니다.

할아버지가 그리웠습니다.

할아버지가 이 일을 알가? 이 일을 알고 어서 고향으로 오라고 사람을 보내지 않을가?

어느날 남포쪽에서 왔다는 화물자동차운전사 한사람을 알게 되였습니다.

창혁이가 며칠동안 심부름을 착실히 들어줘서인지 운전사는 차비 한푼 안 받고 할아버지네 마을 근처까지 창혁이를 태워다주었습니다.

차에서 내린것은 집집의 굴뚝마다에서 연기들이 피여오르는 저녁무렵이였습니다. 창혁이는 선뜻 마을에 들어설수가 없었습니다. 순사아들이 왔다고 마을아이들부터가 가만있지 않을것 같았던것입니다.

입술을 깨물며 마을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령길우에서 날이 어둡기를 기다렸습니다. 아버지가 순사를 하기 전까지는 매해 할아버지가 제등에 업고 따라나와서 바래주군 하던 령길, 그후에는 아버지, 어머니가 해마다 눈물을 뿌리며 돌아서군 하던 그 령길에서 밤을 기다리려니 또 눈물이 났습니다.

한집 두집 들창가에 비치던 불빛이 꺼질 때마다 창혁이는 제 가슴속에서도 무엇인가 덜컥덜컥 꺼져내리는것만 같았습니다.

마을의 불빛이 거의 다 꺼졌을무렵에야 창혁이는 조심스럽게 산길을 내렸습니다.

할아버지네 집뒤에는 묵은 나무낟가리들과 벼짚, 조짚, 강냉이짚무지들 그리고 아직 허물지 않은 김치움이며 돼지우리들이 널려져있었습니다.

창혁이는 벼짚무지옆에 몸을 숨기고 가슴을 조였습니다. 다른 방들에는 불이 다 꺼지고 본채 웃방인 할아버지방에만 불이 환했습니다.

뭐라고 찾을가? 《할아버지.》하고 찾을가? 아니면 뒤문을 먼저 두드릴가? 그전처럼 달려나와 《창혁이가 왔구나!》하며 품에다 꽉 안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가!

창혁이 이렇게 가슴을 조이고있을 때 돼지우리옆에서 얼씬얼씬하는 사람의 형체가 나타났습니다. 누가 돼지물을 주러 나왔는가 하고 숨을 죽이였던 창혁이는 다음순간 화닥닥 놀라 일어날번 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방 뒤문으로 다가가는 두놈의 손에서 권총을 보았던것입니다.

하마트면 《할아버지!》하고 소리를 칠번 했습니다. 창혁이는 얼른 제손으로 입을 막으며 벼짚속에 더 깊이 몸을 숨기였습니다. 소리부터 치면 위험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창혁이는 날래게 허리춤에서 나무권총을 꺼냈습니다. 먼길 떠나면서 《호신용》으로 화약통에 화약(성냥대가리 털어넣은것)까지 꽁꽁 다져넣은 나무권총이였습니다. 격발기를 뒤로 제낀 그는 주머니에서 형으로 구부린 쇠꼬챙이를 꺼내서 화약통에 넣고 냅다 돌렸습니다. 화약에서 열이 나기 시작하자 그는 지체없이 방아쇠를 당겼습니다.

《땅!》

진짜 총소리 못지 않는 폭발소리가 밤공기를 쨌습니다.

쥐새끼들처럼 할아버지의 방으로 다가가던 두놈은 질겁을 하며 뒤로 벌렁 나자빠졌습니다.

찰나에 문이 벌컥 열리며 할아버지가 뛰쳐나왔습니다.

그다음 창혁이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랐습니다. 와당탕 퉁탕 하며 누구인가 자기한테로 달려오는 바람에 기겁을 하며 내뛰였습니다. 또 총소리가 터졌는데 그것이 자기를 향해 쏘는것인지 할아버지를 향해 쏘는것인지도 몰랐습니다. 그저 무턱대고 어둠속을 냅다 뛰며 산속에까지 들어갔댔는데 그러던 그는 그만에야 발을 헛디디여 네댓길 나마되는 벼랑밑으로 굴러떨어졌던것입니다.

 

×

 

점심때가 되여오면서 봄날의 해볕은 유난히도 더 따뜻해졌습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점심시간이 늦을세라 병원으로 급히 걸으셨습니다. 손수 따끈하게 끓인 숭어탕을 가지고가시는 어머님이십니다. 《17호실소년》의 입맛을 돋구기 위해서도 그렇고 수술자리가 빨리 아무는데는 생선음식이 좋기때문에 친히 대동강의 숭어를 구하셨던것입니다.

병원에 들어서니 기다렸던것처럼 원장과 의사, 간호원들이 달려나와 반겨맞았습니다. 하면서도 어머님을 뵈옵는 얼굴에는 죄송스러움이 어렸습니다. 어머님께서는 그것이 《17호실소년》때문이라는것을 대뜸 짐작하셨지만 아무 내색도 않으셨습니다.

마음씨 곱고 눈치빠른 17호실 담당간호원이 층계를 콩콩 울리며 먼저 2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소년은 오늘도 변함없이 눈을 꼭 감고 잠든체 했습니다.

원장선생과 의사들이 별말을 다 해도 일체 표정변화조차 없었습니다. 간호원은 너무 안타깝고 속상해서 두눈에 눈물까지 가랑가랑 고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누구도 모르게 가는숨을 한번 내쉬시였습니다.

간호원이 눈굽을 씻고나서 얼른 어머님께서 가져오신 숭어탕남비를 식탁우에 올려놓았습니다. 역시 별말을 다 해도 소년은 입을 꼭 다문채 도무지 받아먹을 잡도리를 안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오늘도 이윽토록 소년의 얼굴만을 눈여겨 살피시다가 나직이 말씀하셨습니다.

《됐어요. 식지 않게 건사했다가 천천히 먹이도록 해요.》

그리고는 소년의 옆에 가까이 다가앉으며 물으셨습니다.

《얘야, 너의 고향이 벽동군이지?》

결코 대답을 기대해서는 아니시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놓칠세라 소년의 얼굴만 계속 살피셨습니다.

소년의 얼굴표정은 여전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정말 보통애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드셨습니다. 실망하지 않고 더 확신있게 물으셨습니다.

《너의 어머니가 몹시 앓고계시지?》

소년의 두눈귀가 떨렸습니다. 그 눈귀로 기름방울같은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너무도 기적같은 일에 원장도 간호원도 놀라서 어머님을 우러러보고 소년을 쳐다보고 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 또 무슨 말씀인가 물으실것을 기대하는 마음이기도 하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오늘도 더 이상 다른 말씀은 묻지 않으셨습니다. 눈에 뜨이게 큰 숨을 한번 쉬시였을뿐이셨습니다. 이불귀도 꼭꼭 눌러가며 덮어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셨습니다.

《원장선생님, 우린 조용한 방으로 좀 갑시다.》

어머님께서 먼저 방에서 나가시고 원장도 아직 무엇인가 많은것을 수수께끼로 남긴듯 자꾸만 소년을 뒤돌아보면서 어머님을 따라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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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혁이는 가만가만 손가락을 놀려보았습니다. 이제는 손가락을 놀려도 수술한 부위가 아프지 않았습니다.

하긴 이제는 수술을 한지도 보름이 넘었습니다. 집에 혼자 있을 어머니가 걱정됐습니다. 김정숙어머님(그는 아직 고마운 그 어머님이 김정숙어머님이신줄을 몰랐습니다. 어머님께서 병원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당부하셨던것입니다.)께서 숭어탕까지 끓여가지고 오셨던 날부터 더했습니다. 저의 집 어머니한테 꼭 무슨 일이 생긴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글쎄 그 고마운 어머님이 우리 어머니가 몹시 앓고있다는것까지 어떻게 아셨을가?

빨리 어머니한테로 가고싶었습니다.

몇번이고 병원에서 뛰쳐나가고싶었지만 그럴수도 없었습니다. 항시 간호원과 의사, 간병원이 붙어있기도 했지만 설사 이제 뛰쳐나갈수 있다고 해도 잘못하다가는 영영 팔병신이 될수 있겠기때문입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된바에는 치료만은 착실히 받고싶었습니다. 이제 병원에서 나간다면 어디 가서 이런 치료를 받겠습니까.

그래서 밥도 꽝꽝 먹고 치료도 성실하게 받았습니다. 고마운 어머님이 가져오신 숭어탕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 숭어탕이 효력을 내서인지 수술자리도 하루가 다르게 나아갔습니다.

팔이 나아가니 원장선생과 간호원누나, 병원사람들이 더 기뻐했습니다. 밥을 꽝꽝 잘 먹는다고, 용타고 하면서 저마다 별의별 음식들을 자꾸 가져다주었습니다. 찰떡, 사과, 꿀, 빵… 정말 없는것이 없었습니다.

속상하고 미안한것은 그들에게 아직 고맙다는 인사말도 못한것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하루에 열번도 더 터져나왔지만 혀끝을 깨물며 참았습니다. 한번만 입을 열면 불피코 자기의 비밀을 다 털어놓게 될것 같아서였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의사도 간호원도 단 한번만이라도 입을 열게 하려고 무등 애를 쓰는게 알렸습니다. 순간이나마 잘못하여 자기가 순사의 아들이라는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당장 병원에서 쫓겨날게 뻔했습니다. 아니, 무장악당놈들과 한패당이라고 팔목에 쇠고랑을 채워 잡아갈런지도 모릅니다. 일이 그렇게 된다면 병원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병원사람들도 문제이지만 제일먼저 자기를 발견하고 자동차까지 태워 입원시키도록 해주신 그 고마운 어머님은 또 어찌하겠습니까.

사실 창혁이는 산벼랑밑에 처음으로 나타난 군복입고 권총 든 사람을 보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었습니다. 영낙없이 붙잡혔구나 하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글쎄 누가 저를 보증해주고 증언을 할수 있단 말입니까?

뒤이어 나타난 어머님을 보았을 때에야 어지간히 마음이 놓였습니다. 수수한 치마저고리차림이 우선 그의 마음을 안정시켰습니다. 《몹시 상했구나. 얼마나 아프겠니.》라고 하신 근심어린 말씀 한마디가 얼마나 마음을 놓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 부드럽고 따뜻하고 진정으로 걱정스러워하는 목소리에 정이 끌렸습니다. 좋은분이시구나 하는 믿음이 푹 갔습니다.

창혁이 더우기 인정이 끌린것은 어머님께서 병원에 직접 찾아오시였을 때였습니다.

정말이지 그날 저녁 어머님께서 병원에까지 찾아오시였을 때 창혁이는 딱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 고마운분앞에 고맙다는 인사말 한마디 안하는것은 죄중의 큰 죄라고 생각했던것입니다. 더우기 이제 그 어머님도 이름이 무엇이냐, 어디서 사는 아이냐고 물으실텐데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생각에 땀이 났습니다.

한데 어머님께서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무 말씀도 묻지 않고 맥박도 짚어보고 이마도 짚어주셨습니다. 창혁이는 목이 콱 메이고 눈물이 났습니다. 어머님의 그 손길에서 친어머니이상의 인정을 느꼈던것입니다. 비록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지만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과 눈빛에서 《내 네 마음을 다 안다. 아무 걱정 말고 마음 푹 놓고 치료를 잘 받아라.》하는 뜻을 느꼈던것입니다.

창혁이는 그때에야 원장선생과 의사, 간호원들모두가 그처럼 친절하고 성의를 다하는것은 어머님의 뜻을 따르기때문이라는것을 알았습니다.

그 어머님께서 숭어탕까지 끓여가지고 오셨던 날부터는 더했습니다. 병원사람들도 더 따뜻이 뜨겁게 대해주었습니다. 창혁이는 이제 그 어머님께서 다시 찾아오시면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말만은 꼭 올리고싶었습니다.

수술자리가 나아가고 몸이 점점 더 좋아지자 그는 굳게 결심했습니다. 기어코 병원에서 도망칠 결심이였습니다. 이젠 다 나았다, 퇴원하거라하는 날까지 기다리다가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장은 도망을 치지만 언제든지 꼭 다시 찾아와 열배백배 고마움의 인사를 차리리라 마음먹었습니다.

병원에서 나가면 고마운 어머님만은 찾아뵈오리라 결심했습니다. 평양거리를 다 돌아서라도 어머님을 꼭 찾으리라 마음다졌습니다.

창혁이는 오늘도 그런 생각으로 침대우에서 몸을 뒤척이고있었습니다.

정말 그 어머닌 어떤분이실가? 지금 어디에 계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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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숙어머님께서 해당 지역의 보안서로부터 그날 밤 문택호로인의 집을 습격한 놈들은 토지개혁때 축출된 지주의 아들놈패거리들이라는 통보를 받으신것은 창혁이 수술을 받은지 한주일이 넘어서였습니다. 체포된 놈들의 실토에 의하면 그날 밤 제놈들이 성사를 못한것은 웬 조꼬만 아이때문이였다고 했습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그 조꼬만 애가 틀림없이 병원에 입원시킨 소년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다음날 병원원장한테 전화를 거시였던 어머님께서는 또 뜻밖의 일을 알게 되셨습니다.

사흘전 한낮때 소년의 방으로 난데없이 해빛반사광이 네댓개나 동시에 비쳐들었다는것이였습니다. 소년은 물론 간호원까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병원울타리밖에서 네댓명 아이들이 손바닥만큼씩한 거울을 하나씩 들고 이 방, 저 방 비치고있었다고 했습니다. 철없는 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한 그들은 인차 창문을 닫아버렸습니다.

한데 다음날에는 주소도 성명도 밝히지 않은 두 녀인이 병원접수에 찾아와 정성스럽게 만든 찰떡과 꿀, 잉어탕까지 맡기면서 17호실소년에게 전해달라고 했다는것이였습니다. 녀인들은 돌아갈 때 퍼그나 많은 돈까지 내놓으면서 소년의 병치료에 써달라고 했습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그 녀인들은 문택호로인이 보냈을것이라고 판단하셨습니다. 문택호로인이 직접 왔거나 입원한 소년의 얼굴을 알수 있는 녀인들을 골라 평양에 보내여 우선 소년을 확인하기 위해 병원주변 아이들의 도움을 받았을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 손거울을 하나씩 사주어서 창문으로 반사광을 비치게 하고 자기들은 사람들의 눈에 띄우지 않는 곳에서 창문에 나타나는 사람의 얼굴을 살펴보았을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한 소년이 문택호로인의 손자가 틀림없다는 확신이 들자 어머님께서는 다시 평안북도에 나가있는 파견원에게 전화를 하시였습니다.

한데 어제 저녁 드디여 파견원한테서 기쁜 소식이 왔습니다.…

오늘 어머님께서는 평양시안의 어느 한 소학교 교원들로부터 며칠후 학교운동회를 크게 한번 조직하려고 하는데 그 준비를 보시고 좀 도와달라는 소청을 받으시였습니다.

어머님께서는 바쁘시지만 곧 학교로 나가시여 여러가지 구기종목들과 바줄당기기, 집단달리기… 경기종목선정으로부터 응원에 이르기까지 집단주의정신을 키울수 있도록 방향과 방법을 깨우쳐주시고 의논도 해주시였습니다. 그러시고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실 때 마침 경위대원이 달려와 평북도에서 파견원이 보낸 손님이 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구 문택호로인이 한시간전에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그래요?… 어서 갑시다. 어서!》

어머님께서는 서둘러 저택으로 향하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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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결에 밖을 내다보던 창혁이는 가슴이 후두둑 뛰였습니다. 누가 가져다놓았는지 위생실 창문옆에 긴 사다리가 세워져있었던것입니다. 위생실은 창혁의 방 반대켠 구석쪽에 있었습니다. 사다리는 창문을 열고 조금만 당겨놓으면 얼마든지 타고내려갈수 있었습니다. 거기서 내려가면 낮에도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뒤마당입니다. 벽돌담장에는 자그마한 쪽문이 있었는데 녹이 쓴 쇠빗장이 질러져있었습니다. 마치도 누구인가 창혁의 마음을 알고 사다리를 가만히 가져다놓기라도 한것 같았습니다.

창혁이는 도망칠 기회가 이렇게 빨리 마련될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금시 누가 그 사다리를 들어옮기기라도 할것 같아 조급해났습니다.

당장 창문우에 뛰여오르자니 원장선생과 간호원누나한테 미안해났습니다. 다시 방으로 들어가 편지라도 한장 써놓을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깐깐한 간호원누나가 눈치 챌것 같아 망설이였습니다.

(선생님, 누나, 용서해줘요.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잊지 않고 꼭 다시 찾아오겠어요.)

입술을 깨물며 창문쪽으로 돌아섰습니다.

창문을 열고 급히 문우로 뛰여오르려고 했습니다. 갑자기 복도계단쪽에서 사람들이 술렁거리는 기척이 났습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위생실 바로 옆에 있었던것입니다.

창혁이는 와뜰 놀라 창문을 도로 닫고 동정을 살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계단을 밟으며 2층으로 올라오고있었습니다.

창혁이는 두근두근 뛰는 가슴을 안고 위생실 문을 빠끔히 열었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내다보았습니다. 옳았습니다. 틀림없이 집에서 혼자 눈이 까매 저를 기다리고있었을 어머니였습니다. 분명히 자기 어머니가 원장선생과 담당의사선생의 부축을 받으며 복도에 올라서고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뒤에는 몸집이 거방진 할아버지가 흰 두루마기를 입고 따라섰습니다. 할아버지뿐아니라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도 같이 왔습니다.

창혁이는 꿈을 꾸는것 같았습니다. 글쎄 문지방도 넘기 힘들게 앓던 어머니가 수백리 먼 평양에 어떻게 나타났단 말입니까. 더우기 할아버지와 큰아버지네까지 함께 말입니다.

창혁이는 저도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돌아섰습니다. 아직 붕대를 풀지 못한 팔이 문설주에 부딪쳤지만 아픈줄도 몰랐습니다.

(아니야. 내 정신이 좀 잘못됐나봐!)

다시 문을 열려는데 급하게 뛰여오는 발자국소리가 났습니다. 문이 열렸습니다. 간호원누나가 얼굴부터 들이밀며 흥분해서 말했습니다.

《빨리 나와. 어서!》

창혁이는 바람벽을 등지며 돌아섰습니다. 걷잡을수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눈치빠른 간호원은 창혁이 이미 저의 어머니와 할아버지를 보았다는걸 알아차렸습니다. 저도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돌아섰습니다. 그의 어깨가 오르내렸습니다.

이윽고 간호원누나가 눈물을 씻으며 창혁의 어깨를 쥐여박았습니다.

《에이, 고집쟁이!》

창혁이는 아프지 않았습니다.

간호원누나가 창혁의 볼에서 눈물을 씻어주며 말했습니다.

《어서 가자요. 어머니랑 할아버지랑 기다려요.》

창혁이는 어떻게 자기 방으로 갔는지 몰랐습니다.

어머니가 팔을 벌리며 달려나왔습니다.

《창혁아!》

《어머니!》

창혁이도 어머니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어머니가 붕대감은 창혁의 팔을 어루쓸며 목메여 말했습니다.

《이런 고마울데라구야.… 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겠냐.》

창혁이는 한참후에야 물었습니다.

《어머니, 어떻게 여길 오셨어요?》

어머니는 또 눈물을 씻었습니다. 창혁이를 다시 품에다 꼭 당겨안으며 말했습니다.

《창혁아, 너의 아버진 나쁜 사람이 아니였다는

구나. 아버지가 순사옷을 입은건 혁명조직이

과업때문이였다는거다. 아버진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이였다고 한다.》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이요?》

《그래, 아버지가 항일유격대국내지하공작원을 추적하다가 잘못되였다는건 경찰서장놈이 꾸며낸 말이였다는거다. 조국광복회 특수회원이 자기 경찰서에 있었다는것이 알려지면 제놈이 무사칠 못하겠으니까 상급에다 거짓보고를 하고 우리한테는 조의금까지 주었던거다. 사실 아버진 국내지하공작원을 구원하고 놈들과 싸우다 희생됐다는거란다. 이 모든걸 김정숙녀사께서 바로 다 해명해주셨다. 우린 전혀 생각도 못했던 일을!…》

《김정숙녀사요?》

《그래, 너도 듣지 않았냐. 백두산의 녀장수님 말이다.… 그분께서 너도 이렇게 병원에 입원시키고 극진히 치료까지 받도록 해주신거다.》

창혁이는 너무도 놀라와 원장선생을 쳐다보았습니다. 원장선생도 감격에 겨워 고개를 끄덕이였습니다.

《선생님!》

창혁이는 원장선생한테 콱 안기였습니다.

《선생님, 나 어머님한테 데려다줘요. 예? 선생님, 김정숙어머님한테 꼭!》

원장선생은 그저 창혁이를 품에다 꼭 당겨안기만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창혁이를 불렀습니다.

《창혁아, 이 할아버지를 용서해라. 내가 너희네한테 천벌맞을 죄를 졌구나!》

《할아버지!》

《오냐오냐, 내 손자야… 나라가 해방되구 제 나라를 찾으니 우리 집안에서도 하늘이 낸 위인을 만났구나!》

할아버지가 뜨겁게 흐르는 눈물을 씻으며 말했습니다.

《이젠 모두 우리 집으로 가자. 제 고향에 가서 절세의 위인들의 뜻을 받들어 힘껏 일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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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달이 지나갔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할아버지네 마을로 이사를 간 창혁이는 소년단에도 입단을 했습니다.

7월에 접어들자 논밭의 곡식들은 진짜 혀를 빼물며 자라는것 같았습니다. 길옆의 밀보리밭들에서는 이미 누렇게 익은 이삭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물결처럼 설레였습니다. 분여받은 땅들에 씨앗을 뿌리던 일이 어제같은데 벌써 첫곡식이 날 때가 된것입니다.

온 나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나누어주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며칠전에는 또 농업현물세제를 발표하시여 농민들의 열성을 더 부쩍 끓게 하셨습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오늘도 문택호로인네 마을을 찾아떠나셨습니다. 오늘은 일요일입니다. 일요일이지만 농업현물세제를 받아안고 기뻐하는 농민들을 만나보고 소년단에 입단한 농촌마을 학생들도 만나보고싶으시여 또다시 주변 농촌마을로 나가시는 어머님이시였습니다.

낯익은 령길에 올라서자 경위대원이 물었습니다.

《어머님, 창혁이 있지 않습니까? 처음 여기서 만났을 때 어떻게 대뜸 좋은 아이라고 믿으셨습니까?》

어머님께서는 조용히 웃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나직이 말씀하셨습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그 애도 해방된 우리 나라 소년이 아니나요. 우리가 안고 키워야 할 새 조선의 주인이란 말이예요.》

어머님께서는 잠시 사이를 두셨다가 더욱 뜻깊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확신하게 된것은 그 소년의 아버지가 해마다 빠짐없이 가족들까지 다 데리고 고향마을에 찾아와 조상들의 묘를 돌아보군 했다는 말을 듣고서였어요. 제 고향과 자기 선친들을 배반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제 나라를 배반할수 없지 않아요. 사실 이건 장군님께서 항일무장투쟁의 초시기부터 가르치신 애국의 사상이고 애국의 뜻이예요.》

어머님께서는 어느 사이 령길을 다 내려 마을어구에 들어서시였습니다.

어디선가 씩씩하고 명랑하게 부르는 아이들의 노래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자유의 강산에서 우리 자라고

평화의 락원에서 꽃피려 하는

새 나라 어린 동무 노래부르자

세상에 부러울것 그 무엇이냐

 

멀지 않은 동뚝우에 가지를 활달하게 펼친 무성한 백양나무 한그루가 서있었습니다. 그 백양나무밑에 여라문명의 소년들이 한줄로 늘어서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들앞에는 밭김을 매다 쉬는 마을사람들이 모여앉아있었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한 학생이 넥타이를 날리며 앞에 나섰습니다. 창혁이였습니다. 그의 챙챙한 목소리가 길가에까지 들려왔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여러분!

이번에 발표된 농업현물세제는 김일성장군님께서 아버지, 어머니들에게 베풀어주시는 또 하나의 큰 은덕입니다. 아버지, 어머니들은 이제부터 한해 농사의 25%만 나라에 바치고 75%는 제 집에서 가지게 됩니다. 75%나 말이예요. 그러니 이번에 김일성장군님께서 발표하신 농업현물세제가 얼마나 좋고 고마운것입니까.》

말도 얼마나 류창한지 몰랐습니다.

저렇게 말 잘하는 소년이 벙어리처럼 일체 입을 다물고있으려니 얼마나 속이 탔으랴싶었습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는 기척을 낼세라 조심하시며 허리를 치게 자란 조밭머리를 지나 백양나무가까이로 걸어가시였습니다.

창혁이가 농업현물세제의 내용을 알기 쉽게 한창 해설하고있을 때 수건으로 머리를 질끈 동여맨 한 중늙은이가 손을 쳐들며 불쑥 물었습니다.

《가만, 학생… 이자 나라에 얼마를 바치고 농사군은 얼마를 가진다고 했나?》

옆에 앉았던 몸집이 뚱뚱한 녀인이 핀잔을 했습니다.

《아니, 저 학생이 지금껏 열성스레 해설을 했는데 듣진 않구 뭘 생각했어요?》

머리수건 쓴 농민도 눈을 흘기며 퉁을 주었습니다.

《알지 못하면 가만 있으라구요. 아 소출의 7. 5할을 농민이 가진다고 하니 너무 꿈같아서 그러는거우다. 사실말이지 이게 어디 꿈에나 생각할 일이요?》

와― 웃음이 터졌습니다.

창혁이도 소리없이 웃고나서 더 씩씩하게 계속 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꿈같은 일입니다. 꿈같이도 아버지, 어머니네는 소출의 75%를 진짜 가지게 됩니다. 토지개혁때 땅을 빼앗기운 지주놈들과 반동놈들은 〈공산당이 땅을 거저 줄줄 아느냐, 이제 봐라, 소출을 다 빼앗아갈것이다.〉라고 했고 나중에는 사람들을 죽이려고까지 했지만 아버지, 어머니들, 보세요. 오늘 어떻게 되였습니까.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여기 순돌이 아버지네랑 영옥이 어머니네랑 모든 집들에 땅을 거저주셨고 또 고마운 현물세제도 실시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아버지, 어머니들.

아버지, 어머니들은 올해농사를 꼭 더 잘 지어서 김일성장군님의 이 크나큰 은덕에 힘껏 보답해야 합니다.》

《옳다!》

《우리 창혁이 정말 말 잘한다!》

《잘한다. 정말 잘해!》

박수가 일고 칭찬이 폭포처럼 쏟아졌습니다.

김정숙어머님께서도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치셨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그제서야 조밭머리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아니, 녀사께서?!》

《김정숙녀사께서 오셨소!》

마을사람들이 자리를 차며 일어나 김정숙어머님께로 달려왔습니다.

《어머니!》

창혁이가 어느새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뛰여나왔습니다.

《어머니!》

《오, 창혁아.》

어머님께서도 팔을 벌리며 창혁이를 향해 빠른 걸음을 놓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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