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서 장

우리 사령

 

벌써 오랜 세월이 흘러갔다.

대학에 입학하여 두번째 가을을 맞던 어느 휴식일에 우리는 모란봉솔숲에 올랐다.

모란봉의 풍치는 여러모로 인상적이다.

생김새, 갖춤새도 수려하지만 봉우리에 올라 청류벽을 감도는 대동강과 변화무쌍해지는 수도의 모습을 굽어보는것도 장관이다.

눈밑으로 해빛을 받아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대동강의 물결이 흘러내리고 강반에는 휴식일을 즐기는 시민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붐비고있다.

솔숲의 여기저기 나무가지에 앙증한 발톱을 박은 갖가지 산새들이 고운 목청을 돋구고 가을빛이 이채롭게 서린 숲에서는 돌배가 무르익는 달콤한 향기가 창자를 즐겁게 건드리며 풍겨온다.

이날 우리는 학급에서 함께 공부하는 량철수의 할머니 윤재순과의 상봉모임을 가지였다.

윤재순은 조선독립군의 마지막맥을 이었던 항일애국투사 량세봉의 부인이였다.

진회색치마저고리를 단정히 감쳐입은 윤재순은 그해 일흔살을 갓 넘긴 늙은이였다. 풍만한 몸에 길둥그런 얼굴이며 유정한 눈빛이 아직은 기력이 좋아보이고 말소리가 서글서글한게 무척 활달하고 강직해보이였다.

그는 남만일대에서 혈전의 고개를 넘으며 일본놈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량세봉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달라는 우리의 부탁을 받고 모란봉에까지 오기는 했으나 눈망울들이 초롱초롱한 손자의 동무들을 둘러보면서 쉬이 입을 열지 못하였다.

《할머니, 우리 동무들은 할아버지가 어떻게 왜놈들과의 성전에 나섰고 어떤 공로를 세웠는가, 어떻게 돌아가셨는가 하는걸 알고싶어 해요.》

손자인 량철수가 기워맨듯 두툼한 입술을 꾹 붙이고 앉아있는 할머니의 모습에 눈길을 박고있다가 덤덤한 표정인 할머니에게 일깨워주듯 여쭈었다.

사실 물음은 간단하였지만 그 대답에는 한 인간의 평생, 그것도 곡절도 많고 위훈도 크고 우리 조국사에 자욱을 남긴 범상치 않은 한 인간이 겪어야 했던 풍운을 실어야 하는 쉽지 않은 이야기가 담겨져야 했다.

손자의 일깨움에도 로인은 서두름이 없이 자기를 에워싸고 빙 둘러앉은 우리들을 한명한명 둘러보고나서 북쪽하늘로 시선을 보내는것이였다.

다난다사한 과거를 소급하며 깊은 추억에 갈마드는 로인의 눈이 추연한 빛에 젖어드는듯싶었다. 그 북쪽의 먼 하늘아래에 남편의 피와 고뇌가 새겨진 이국의 산야가 있다.

드디여 윤재순은 북쪽의 하늘에 애바른 눈길을 박은채 다소 갈린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로인은 자기의 남편을 《우리 사령》이라고 경모와 정을 담아불렀다. 로인이 스스럼없이 꺼내놓은 그 호칭이 우리의 마음속에 유별한 감개를 불러일으켰다.

《우리 사령은 원래 농사군이였다우. 시체말루 그분은 실농군이였어. 농사일에 막힘이 없었지. 산에 가서 나무를 지고오면 반달구지가 실히 될만큼 하였어. 우리 사령이 그냥 농사군노릇을 했더라면 어떻게 되였을가. …》

윤재순의 첫 이야기에 우리는 저저마다 어리둥절해서 서로 얼굴을 마주보았다. 남만일경을 쩡쩡 흔들어놓던 명망높은 독립군의 사령이 실농군이였다니?…

커다란 지게에 반달구지가 될만 한 나무짐을 얹어지고오는 옛 무장의 모습이 련상되면서 우리들은 저마다 야릇한 호기심에 끌려들었다.

《할머니두 참…》

손자가 할머니의 이야기가 무엇인가 첫마디부터 거창한것을 예상하던 친구들의 기대에 빗나가는듯싶어 제때에 입침을 놓느라고 했다.

손자가 눈을 흘기며 하는 핀잔에 윤재순은 제가 오히려 민망스럽다는듯 목청을 돋구었다.

《어째, 못할 말이냐? 하긴 내사 우리 사령이 말타고 칼을 휘두르고 총쏴서 왜놈들을 꺼꾸러뜨리는거야 어떻게 제눈으로 볼수 있었겠니. 그런건 그저 이 사람, 저 사람들에게서 귀동냥으로 들어둔 소리구. 그러니 난 지금도 눈감고 우리 사령생각을 할 때면 소를 몰아 밭을 갈구 씨뿌리구 김매구 물곬을 째서 논풀이를 하던 모양이 선하구나. 벼단을 지고오는걸 봐도 큰 낟가리가 옮겨오는것 같았어.

싸움하다가 한해치고 사나흘 틈을 타서 집에 들리기도 했지. 그러면 내가 제발 쉬다가 가라고 매달리며 막아나서도 기어이 낫들고 호미들고 밭이랑에 나서군 했어. 땀으로 군복을 함뿍 적셔야 직성이 풀리군 했지.

그러니 그 시절 사람들이 우리 사령더러 그 무슨 장수요 사령님이요 했지만 이 할미눈에야 그 어른이 무슨 장수겠니. 여불없이 그저 실농군이였지. 그래서 난 이따금 생각했지. 우리 사령이 큰 장수가 된것은 땅속에 혼을 묻고 땅기운을 평생토록 안고 살았기때문이라고…》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지자 우리는 그 무엇인가 가슴에 무겁게 자리잡는 큰 의미를 느끼며 할머니의 이야기에 심취되여가기 시작하였다.

윤재순은 그제야 북쪽하늘에서 눈길을 거두고 손자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너부죽한 얼굴에 떠도는 그 웃음이 여간만 선하지 않았다.

량세봉이라는 어마어마하게 생각되여온 조선독립군의 사령이 신화속의 거인이 아니라 땅에다가 아낌없이 땀을 뿌리며 묵묵히 살아온 나의 아버지, 할아버지처럼 그지없이 친근하고 가깝게 다가드는듯싶었다.

땅속에 혼을 묻고 이 땅의 기운을 평생토록 안고 살아온 인간.

그것이 바로 량세봉을 남만의 항일전장터에 우뚝 솟아오르게 한 비결이였다고 하는 할머니의 소박하면서도 의미심장한 주장.

땅이란 무엇인가. 또 땅속에 혼을 묻는다는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땅의 기운을 평생 안고 살았다는것은 무엇인가.

바로 그때문에 평범하던 실농군이 큰 장수로 되였다는것은 또 어떤 의미인가. …

윤재순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우리의 눈앞으로 한 인간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서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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