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회)

3. 다시 이어진 시일야방성대곡

 

(2)

 

《선생님! 어찌된 일입니까? 선생님께서는 우리모두에게 글을 배워 뜻을 키우라고 가르치시지 않았습니까!

저희들에게 아무리 집사정이 각박하고 고달픔이 크더라도 배움을 중도에서 그쳐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배우는것이 애국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량세봉이 들이대듯 부르짖는 씨박힌 물음이 비수가 되여 날아오는듯싶어 강서명은 그에게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사나이답게 름름하게 틀이 잡혀가는 체구와 부리부리한 눈에서는 벌써부터 범상치 않은 위엄과 서리찬 기상이 느껴졌다.

이 시각 강서명은 량세봉의 힐난조의 물음앞에서 시대가 울려놓은 엄숙한 타종을 듣고있는듯싶었다.

그는 천천히 자기의 얼굴에 와서 박히는 학생들의 별같은 눈들을 마주보았다.

(그래, 저들의 저 눈빛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저건 선배들에게 보내는 후대들의 희망이고 기대이다. 그리고 질책이다.

그걸 저버린다면 나는 훈장도 아니요, 애국선배는 더욱 아니다.

터놓자. 그리고 저 사랑스러운 모습들앞에서 나도 맹약을 다지자.)

강서명은 교탁의 모서리를 힘을 주어 잡고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

《학생들! 세봉이가 옳게 말했소. 서당문을 열 때 나의 초지는 그랬고 여러분들이 서당문에 들어설 때의 목적도 그랬을겁니다.

그러나 나의 초지와 여러분들의 목적을 그냥 거기에 한정시켜 밀고나갈수 없게 되였습니다.

분명히 이제 일본놈들은 우리에게 제놈들의 글과 말을 강요하게 될겁니다. 치욕의 시대가 시작되였습니다.

시대는 우리모두에게 새로운 과제를 내놓고있습니다.

나라가 망하고 왜놈들이 살판치게 될 지금 우리의 글을 어떻게 배우며 또 어떻게 배움으로써만 망국의 치욕을 씻을수 있겠습니까?

나는 어제 하루 내 나라를 위하여 내가 가야 할 길을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그 길을 향해 나는 내 결심이 흔들리기 전에 서둘러 떠나가렵니다. 그러니 학생들, 훈장이 모진 고민속에 쉽지 않게 선택한 그길에서 발길을 다시 돌려세우지 않도록 해주시오.

떠나면서 여러분들에게 당부하고저 하는것은 적어도 이 고을에 남아있는 한은 배움을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는겁니다. 서당은 비록 문을 닫지만 여러분들은 서로서로 도와주면서 앞선 학생은 뒤떨어진 학생을 틔워주고 서당방에 다니지 못한 아이들을 찾아내서 글을 배워주며 애국의 마음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리치를 깨달은 다음에는 각자가 망해가는 내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자기의 몸과 마음을 바쳐갈 뜻을 가져야 하며 펼쳐가야 합니다.

나는 어디 가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세리고을의 학도여러분을 잊지 않을것이며 여러분들의 걸음걸음을 지켜보렵니다.

그리고 내가 가는 길에서 학도여러분을 다시 만나 애국의 꿈을 함께 펼쳐나갈 그날을 기다리겠습니다.》

말을 그치고나서 강서명은 수십명의 학도들을 사랑과 믿음에 찬 눈으로 한명한명 일별하였다.

량세봉은 강서명의 이야기에서 새롭고도 비장한 그리고 이때까지는 그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심원한 리상과 지향을 감촉하였으며 그로 해서 가슴은 후더운 감정으로 부풀어올랐다.

강서명은 맨 뒤줄에 있는 학생까지 일일이 다 더듬고나서 학생들에게 학습장 한권과 연필 한자루, 고무지우개 하나씩 안겨주었다.

어제 자기 딸 강연희를 철산읍거리에 내보내여 마련하여왔던것이다.

학습장 한권과 연필 한자루가 이 외진 동네에서는 보기 드문 귀물이였다. 그걸 내주는 강서명도 받아드는 학생들도 또다시 모두 울어 눈등이 부었다.

학생들은 한명한명 강서명에게 두무릎을 꿇고 큰절을 정하게 하고는 더운 눈물을 뚝뚝 떨구며 조심스럽게 서당방을 나섰다.

량세봉만은 서당지기로서 얼마 안되지만 서당비품을 맡아가지고 지내왔으므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서당에 떨어졌다.

해종일 글을 배우는 학생들의 목소리로 떠들썩거리던 서당방이였다.

그는 속이 텅 빈듯 허우룩하고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량세봉은 무엇부터 할것인가 생각하다가 울적한 속을 달랠길없어 흑판에 다가가 분필로 《8월 29일은 망국일이며 페교일이다. 분하구나, 섬오랑캐놈들아! 언제인가 네놈들과 싸워서 꼭 이기고야말리라!》하고 우리 말로 갈겨썼다.

그는 교탁에 두팔굽을 박고 제가 써놓은 의분에 넘치는 글을 한동안 지켜보았다.

그때 서당의 자기 방에서 책들과 문서장들을 챙기던 강서명이 학습실로 나왔다.

강서명은 량세봉이 써놓은 글을 한자한자 천천히 소리내여 읽고나서 고개를 두세번 끄덕이였다. 그리고는 흑판지우개로 지우며 나직이 일깨워주었다.

《세봉아, 서당은 놔두고 집에 돌아가거라. 나도 들어가겠다.

명심해라. 이제부터는 이런 글을 함부로 써서는 안된다. 아직은 힘도 아끼고 속마음도 가슴속깊이에 묻어두어라.

때가 오고 기회가 오면 아끼지 말고 량껏 뿌려던져라. 대장부의 속은 바다가 되여야 한다.》

량세봉은 훈장의 의미심장한 훈시를 받고나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였다.

강서명은 말을 마치고나서 제 먼저 몇권의 책들을 옆구리에 끼고 방을 나서다가 다시 돌아섰다.

《세봉아, 저녁전에 아버지를 모시고 우리 집에 건너오너라.》

강서명의 집은 서당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예.》

강서명은 서당문을 열고 토방을 내려섰다.

그는 휘적휘적 무거운 걸음으로 마당을 꿰질러 길가로 나섰다.

량세봉은 서당을 떠나는 훈장을 삽짝문까지 바래워주고 다시 돌아서서 서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정오가 지나도록 서당안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서당안팎을 말끔히 거둔 다음 서당문을 꼭 닫아걸고 밖으로 나섰다.

서당마당 한구석에 소담하고 모양새가 곱게 자란 무궁화나무에서 시들은 꽃송이들이 떨어져있었다.

량세봉은 삽짝문을 열다말고 눈에 걸리는것을 그대로 둘수가 없어 비자루를 들고 떨어진 꽃잎들을 쓸어서 두엄장에 버리고나서 나섰다.

그러나 무거운 정적에 휩싸인듯싶은 서당이 그냥 가슴을 아프게 하여 두세걸음 하고서는 돌아서고 다시 걸음을 떼다가는 돌아서서 서당을 눈물이 글썽해서 바라보군 하였다.

눈확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기분이 처진 아들이 집에 들어서자 터밭에서 일보던 김씨가 불안한 눈으로 그를 맞았다.

벌써 동네에 서당훈장이 훈장노릇 그만두기로 하여 서당이 문을 닫았다는 소문이 한바퀴 돌아 김씨의 귀에도 전해졌던것이다.

《서당문이 닫겼다는 말 정말이구나.》

《…》

《그럼 훈장님은 이제부터 뭘 하신다더냐? 대서방노릇이라도 하시려나.》

김씨는 누렇게 익은 늦은 오이를 따면서 물었다.

《글쎄요.》

량세봉은 서당얘기를 하는게 그닥 흥심이 없어 시들하게 대꾸하였다.

《어찌겠니. 너도 서당방 다닌지 여러해가 지나갔는데 그만하면 됐다.

네가 그새 까막눈도 틔우고 그 덕에 우리 집도 대서방신세를 지지 않게 되였으니 다행이다. 훈장님신세 정말루 크다. 이제부터는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착실히 지어라. 이제는 장가들 생각두 하구.》

《됐어요, 어머니.》

량세봉은 장가라는 소리에 공연히 화증이 올라 이렇게 퉁명스럽게 대꾸하고는 토방에 올라섰다.

그때 웃방에서 《어험, 어험.》하고 목밭은 기침소리가 났다.

《세봉이 왔느냐? 들어오너라.》

량기화의 목소리였다.

식전에 개울가에 나가 거름낼 풀을 한짐 베가지고 들어와 늦은아침을 대충 치르고 이어 터밭을 손질한 뒤다. 금방 방에 들어서서 대통에 담배를 꽁꽁 다져놓고있던중이였다.

량세봉은 얼른 부엌에 나가 류황을 묻힌 갈가치에 불을 달아가지고와서 대통에다가 불을 붙여주었다.

《다들 아침바람으로 돌아들 가던데 늦었구나.》

《서당방을 치우고 오느라고 늦어졌습니다.》

《서당문을 그예 닫는다면서?》

《예. 그러시는가봐요.》

《훈장님께서 무슨 말씀하시더냐?》

《선생님께서는 우리모두에게 서당은 문을 닫아도 글공부를 게을리하지 말라고 당부하셨어요. 세상리치를 깨달은 다음에는 각자가 망해가는 내 나라를 위해 무엇인가 자기의 몸과 마음을 바쳐갈 뜻을 가져야 하며 펼쳐가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

《그래?… 선생님말씀 천만번 지당하다. 머리에 새겨넣고 명심하거라. 그럼 훈장님은 길떠날 심산이시더냐?》

《글쎄요.… 아마 그러신가봐요.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발길을 다시 돌려세우지 않도록 해달라고 하셨어요.》

《음,… 훈장님 심상히 볼분이 아니다. 분명 훈장님은 산과 바다같은 웅지를 안고계시는분이 적실하다.

훈장님이 이 촌구석에 오시여 여러해동안 참말로 장한 일을 하시였지. 이제는 동네에 까막눈인 집이 없게 되였으니 서북관내 이런 개명동네가 없을거다. 훈장님 오시지 않았던들 어림두 없는 일이지. 그분이 널 슬하에 받아주신것은 참말로 다행이다.

그런데 길떠날 차비라면 우리네가 가만 있어서 사람인사가 되겠느냐?》

속이 곧고 성정이 후한 량기화는 훈장이 떠나갈 차비라는 소리에 속이 알찌근해서 연해연방 훈장의 공덕을 칭송하였다.

아버지의 말에 량세봉도 금시 울상이 되였다.

사실 강서명을 알게 되고 그의 총애를 받으며 서당지기로 가까이에서 살아온것은 자신의 일생에서 다시 없을 큰 복이고 행운이였다.

그는 강서명에게서 우리 나라 글과 한문을 배워 어떤 책도 거침없이 읽고 쉽게 리해하게 되였으며 다문박식한 그로부터 여러 학문을 배워 일생을 살아갈수 있는 지혜의 밑천을 다지였다.

뿐더러 강서명으로부터 보석같이 귀한 애국의 넋을 넘겨받았다.

강서명이 량세봉에게 심어준 지식과 애국의 씨앗은 량세봉의 한생을 빛나게 해준 소중한 자양분이고 뿌리였으며 빛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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