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3. 다시 이어진 시일야방성대곡

 

(3)

 

《그래 이젠 넌 뭘 하겠느냐?》

량기화는 아들의 표정에서 커다란 상심을 읽고 넌지시 물었다.

《아버님을 도와 농사를 짓겠습니다.》

량세봉이 방금전에 어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있어 다른 대안이 있을수 없다는듯 선뜻 대답하였다.

《너도 농사를 짓겠다구?… 후

량기화는 너무도 쉽게 흘러나오는 아들의 대답을 듣자 나무재털이에 대통을 탁탁 소리나게 쳐서 털어버렸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방 한구석에 훌쩍 던졌다.

저으기 화가 치밀어올랐던것이다.

량세봉이 이전세월같으면 장원급제하여 큰 인물로 떠오를 장수감이라는 강서명의 말을 들은 후부터 날을 따라 름름한 사내대장부로 자라나는 아들에게 산같은 기대를 걸고 희망에 부풀어있던 량기화였다.

확실히 맏이는 그렇게 생각하고 지켜보느라니 말 한마디, 걸어가는 걸음 한발자국한발자국이 여느 애들과는 판판 달라 대견스럽기만 하였다.

생각하는 품도 그렇고 거동 하나하나가 남달라 제가 난 자식이라고 막 다룰수 없게 되고 짐승무리속의 호랑이같이 돋보이기만 하였다. 그런데 이 철산아근에 짝이 없을 사내대장부로 꼽히는 아들을 이 촌구석에서 농사일에 묻어놓는것이 너무도 원통하기만 하였다.

나라가 망했다고 반백을 떠인 훈장도 뜻을 안고 떠나가는데 아들이 고작해서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겠다니 이게 당할 일인가.

애비 잘못 만나고 세월을 잘못 만난탓에 장원급제는 고사하고 일찌기 죽지가 부러져 대공을 날아보지 못하는 수리개가 되는게 아닌가.

이 시각에도 량기화의 귀전에는 량세봉은 장수가 될 싹수가 보인다고, 이제 나라에서 중하게 써줄 동량감이라고 진정을 고여 앞날을 축복해주던 강서명의 덕담이 쟁쟁했다.

량기화가 꿈틀거리는 울화를 묵새기느라고 다시 구석에 던져버린 대통을 드는데 둘째가 방문을 빗서열고 점심상을 받으라고 전하였다.

량세봉부자는 그 소리에 무거운 생각에서 벗어나 상에 나앉았다.

쇠버린 껍질을 발근 오이와 파를 숭숭 썰어 소금물에 둥둥 띄운 랭국 옹배기가 먼저 상에 올랐다.

그다음에는 보리쌀과 감자를 넣고 지은 범벅그릇이 들어왔다.

량기화는 상에 나앉기는 했으나 늦아침을 했다면서 오이랭국만 후르륵 소리나게 몇모금 들이키고는 상앞에서 비켜앉았다.

식구들은 전에없이 말 한마디 건늬지 않고 침울한 기분으로 대충 점심을 치르었다.

아버지가 빈 대통만 물고 앉아 뚝해있는데다가 량세봉의 기분도 퍼그나 울적한 상태이니 그럴수밖에 없었다.

나라잃은 비운이 한성에서 멀리 떨어진 이 외진 산골동네 초가이영밑에도 가득 서려든것이다.

이즈막에는 량세봉이 집안의 대소사에 슬며시 발을 넓혀가고있었다.

한돌기 또 한돌기 인생의 년륜이 덧감겨오르면서 맏이로서 집안에 뚜렷한 자리를 차지하고있는데다가 언행이 진중하고 틀림이 없어 부모는 물론 동생들은 점점 무슨 일이 생기면 량세봉의 얼굴부터 쳐다본다.

량세봉은 숟가락을 놓자 아버지가 방에서 나가기 바쁘게 웃방에 올라가 벌렁 누워버렸다.

나라의 치욕과 함께 자기의 인생도 수백길 낭떠러지에 던져진듯싶어 아무 일도 하기 싫고 누구와 말건늬고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때 량기화의 기침소리가 마당에서 나고 삽짝문이 열리는듯 방울소리가 딸랑딸랑 들려왔다.

《아차!》

량세봉이 피끗 뇌리를 치는 생각에 얼른 자리를 차고 일어났다.

그리고 급히 짚신을 끌고 퇴마루를 내려서며 물었다.

《아버지, 늦게 돌아오시겠나요?》

《글쎄. 웃덕의 밭갈이를 끝내고 가을무우를 인차 심어야 한다. 웨 그러느냐?》

《선생님께서 저녁전에 아버님을 모시겠다며 댁에 오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음, 그러자꾸나. 난 래일이나 모레쯤에 선생님을 우리 집에 모시자고 생각했는데. 그럼 뭐 준비해야 되겠지?》

량기화는 난색을 짓기는 했으나 훈장의 초청을 흔연히 받아들이고는 량세봉에게 의논조로 물었다.

《예. 조금 있다가 현수네 국수집에 가서 탁배기 몇되박 가져올렵니다.》

《탁배기?… 선생님께 그 시큼털털한 탁배기야 어떻게 올리겠니. 외상을 내서라도 좋은 술 몇병 가져오려무나. 엄마한테도 뭐 좀 준비해달라고 일러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버지를 눈으로 바래운 량세봉은 김씨에게 아버지의 말을 전하려고 정주간으로 향하다가 아래동생 량원봉을 큰소리로 불러냈다.

《얘, 얼른 석태무의 집에 가서 고기반두를 빌려오너라.》

《고기반두?… 그건 왜? 고기 잡으러 가자?》

《글쎄 가져와.》

잠시후 량원봉이 들어서고 고기반두를 어깨에 둘러멘 석태무가 벙글거리며 뜰안에 들어섰다.

《에, 오래간만이다. 갈숲에 갈가?》

석태무는 제사 기분이 나서 떠들었다.

바다가 갈숲에 나가면 드문드문 물웅뎅이가 있는데 논에서 살던 붕어, 잉어, 가물치같은 민물고기들이 논의 물이 찌면 거기에 모여들어 산다.

년중 지금 계절이면 봄철에 까난 물고기들이 자라고 살지여 물고기잡이에 제일 적합하다.

량세봉을 따라 여러번 갈숲에 나가 반두질을 해본 석태무는 량세봉의 고기반두그물을 쓰자는 소리를 전해듣자 그때까지 웃방에서 목침을 베고 갑갑해나는 속을 달래지 못해 이리뒤척 저리뒤척거리다가 벌떡 일어나 원봉이를 따라왔다.

그 역시 나라잃은 통곡에 서당방까지 문을 닫자 치밀어오르는 울화를 비벼댈 곳이 없어 속이 이글거렸는데 바다가에 나가 단 가슴을 식히고싶어 무작정 나섰던것이다.

그들은 해질녘까지 이 웅뎅이, 저 웅뎅이 찾아다니면서 물고기를 한다래끼나 잡았다.

돌아오는 길에 최현수네 국수집으로 가서 잡아온 물고기와 술 몇병, 닭 한마리를 바꿨다.

량세봉이 술 한모금 마셔보고는 얼굴이 새빨개서 캑캑거렸다.

《어떻게 된 일이야, 량형?》

석태무는 지금까지 술이라면 십리를 내빼던 량세봉이 술에다가 닭까지 곁들어 구해가지고 기분이 흠썩해진것을 보자 울대를 움씰거리며 물었다.

《저… 거시기…》

량세봉은 하는수없이 선생님의 집에서 아버지와 함께 와달라는 초청을 받았다고 실토하였다.

그리고는 함께 가는게 어떠냐고 말을 붙였다.

《뭐라고?! 선생님댁에?》

석태무가 한길 뛰였다.

《그래 함께 가자. 선생님은 석태무 너에 대해서도 관심이 크다.》

그러자 석태무가 엄살을 떨었다.

《내가 어떻게 선생님댁에 감히 갈수가 있어. 그리고 말이야. 난… 우선 그 집 아씨보면 속이 떨려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구 들고빼고싶단 말이야.》

석태무가 이렇게 엉너리를 치며 손을 내저었다.

《자식, 네가 대관절 훈장댁아씨를 넘보는게 아니야?》

《뭐야?! … 그게 무슨 도깨비같은 소리야. 그 아씨 도회지물마시며 사는데 괜히 눈총받으면 이마빼기에 혹 난다.》

석태무가 눈이 둥글해가지고 진저리치듯 머리를 떨었다.

《자식, 그렇다고 선생님댁에 가지 못할건 뭐냐. 선생님도 말씀하셨지. 사람들은 다 평등하다고, 빈부의 차이, 반상의 차별을 버려야 문명국이 된다고.》

《아이구, 난 하여튼 훈장님집에는 못 가겠다. 한번은 그 아씨 내앞으로 치마자락을 한들거리며 사뿐사뿐 지나가는데 무슨 알싸한 냄새에 난 홀딱 취해서 눈앞이 다 어질어질해지더라.》

석태무는 이렇게 그냥 엄살스럽게 수선을 피우며 손을 흔들다가 량세봉의 집 뜨락앞에 닿게 되자 뒤걸음쳐 삽짝문을 빠져나가 달아나고말았다.

량세봉은 그가 사라진쪽을 향해 《허허》하고 김빠진 웃음을 터쳐놓다가 자기도 이제 훈장집에 가서 선생님 따님과 마주설 생각이 들자 지레 주눅이 들었다.

다른 학우들보다 훈장집에 이래저래 자주 다니게 되는 량세봉은 버들가지처럼 나긋나긋해보이면서도 매츨한 처녀로부터 한창시절의 고와지는 맵시를 뽐내기라도 하듯 희맑은 살결의 얼굴을 반쯤 숙여보이는 인사를 드문히 받군 했다.

인사말 한마디에도 살에 쏙쏙 에여드는듯 한 부드럽고 청아한 음향을 담는 그 녀자의 인사를 받고나면 괜스레 온몸이 마른 나무처럼 꿋꿋해지고 그렇게도 잘 돌아가던 혀마저 굳어져서 얼뜨기가 되고마는것을 어찌할수 없다.

량세봉은 지금도 처녀의 맑은 살결과 상냥한 표정이 떠올라 은근히 기가 질렸다.

《엥이, 내가 왜 이 모양이야. 석태무자식 맹랑하지 않아. 한들한들, 사뿐사뿐… 헝.》

량세봉은 동닿지 않는 소리를 내지르며 씨익 웃고는 집안에 들어섰다.

그러자 이 집의 외동딸 봉녀와 막내동생 정봉이가 그를 반기며 일어섰다가 커다란 중태기에서 빈 다래끼와 술병, 닭 한마리가 나오자 시무룩해서 주저앉았다. 그애들은 량세봉이 국수집에 들려온다는것을 알고있었던것이다.

《아차, 내가 참!》

량세봉은 그제야 엿 몇가락 최현수한테서 가지고와야 하는건데 하고 랑패스러워하였다.

그는 어린 동생들앞에서 미안쩍은 소리로 사죄하는수밖에 없었다.

《이걸 어쩐담. 그저 선생님 찾아뵈올 생각에 너희들 생각을 깜빡 잊었구나. 내 래일 점심참에 엿가락을 곱으로 사다주마.》

량세봉은 어린 동생들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어 약속을 하였다.

그제서야 동생들은 해시시 웃으며 그에게서 물러섰다.

 

련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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