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4. 훈장집아씨

 

(1)

 

강서명은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그는 웃방에 부처님처럼 웅건하게 틀고앉아 망국의 울분을 짓씹으면서 이제 걸어가야 할 자기의 험준한 여생길을 두고 생각을 굴려가고있었다. 그러다 량기화가 왔다는 전갈에 토방으로 나와 반갑게 맞아들이였다.

강서명은 그들을 저녁상이 차려져있는 아래방으로 곧장 안내하였다.

《세봉이도 함께 앉자구. 연희야, 더운 국을 들여오너라.》

강서명이 정주방을 향하여 소리치자 기다린듯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들어갑니다.》

이어 사이문이 소리없이 열리고 앞치마를 두른 강연희가 나무다반에 김이 몰몰 오르는 고기국사발을 올려놓고 문턱을 넘어선다.

강서명은 딸이 두리반우에 국사발을 조심스럽게 놓아주자 인사를 시켰다.

《인사를 해라. 이분이 세봉의 아버님이시다.》

그러자 처녀가 얼른 쟁반을 갈삿자리우에 놓고 한무릎을 방바닥에 붙이며 나붓이 앉은절을 하였다.

《소녀 문안드리옵니다.》

《원, 절은 무슨 절… 이 아씨가 대처에 나가 공부한다는 따님입니까? 꼭 하늘선녀를 보는듯싶습니다.》

량기화가 함함한 머리칼을 떠이고 금방 망울터친 나리꽃처럼 싱싱한 처녀의 반듯한 얼굴과 깍듯한 인사범절에 취한듯 이렇게 인사를 받았다.

《뭐, 아직 철이 없습니다. 방학이라 왔는데 내가 두루 생각이 있어 지체시켰습니다. 세봉이하고도 인사를 나누어라. 오고가며 보기는 했겠지만 인사가 없이 지냈겠지.》

강서명이 이렇게 말하자 강연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귀밑이 발그레해져가지고 량세봉을 향하여 사뿐 허리를 숙였다.

《강연희라 합니다. 많이 드세요.》

량세봉은 정감이 찰랑이는 처녀의 인사를 받자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길고 실한 허리를 쭉 폈다가 굽석 꺾었다.

《량세봉이라 합니다. 고맙습니다.》

량세봉은 생전 처음으로 정식으로 통성을 해보는 처녀의 정깊은 인사에 뼈가 사르르 녹는듯싶어 처녀의 눈길을 얼른 피하였다.

몇해동안 서당지기로 있으면서 강서명이네 집일도 거들어주느라고 량세봉은 이 훈장집아씨와 드물지 않게 마주서군 하였다.

그러나 여적 한번 길게 말을 건늰적이 없었고 더구나 처녀의 얼굴을 똑바로 봐둔적도 없었다.

훈장님의 외동딸인데다가 평양까지 가서 녀자중학교를 다니는 흔치 않은 문명개화된 녀자라는것으로 해서 그에게는 아버지가 신통한 말을 했듯이 처녀가 아득한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선녀처럼 두렵고 신비스럽게만 생각되였던것이다.

그런데 처음으로 직접 인사를 받고 가까이 마주서서 얼굴을 여겨보니 엷은 미소가 어려있는 맑은 눈빛이며 선이 고운 입술이며 좀 고집스럽게 오똑 솟아오른 코마루가 여간 싹싹하지 않아 친동생이나 마을의 녀동무처럼 가까이 느껴졌다.

《뭘 둘 다 어리어리해서 굳어져있느냐. 나가봐라. 어머니보고도 들어와 인사를 올리라 해라.》

강서명은 량세봉과 강연희가 눈길을 서로 피해가며 고개를 다소곳이 하고 서있자 싱그레 웃으며 딸을 내보냈다.

인차 40대 초반의 강서명의 안해가 무명치마를 끌며 들어와 인사하였다.

량기화는 훈장집의 너무도 깍듯한 인사대접에 황송스러워 《사모님, 제가 불민해서 인사가 늦었습니다. 훈장님 은혜를 죽어도 잊지 못해하는 저와 세봉의 어미의 절을 받아주십시오. 세봉아, 너도 함께 올리자.》하고는 얼른 땅바닥에 무릎을 붙이고 큰절을 하고 량세봉이보고도 일렀다.

그러자 강서명의 안해가 《세봉이 아버님, 어서 일어나십시오. 저희 집에서 지난 여러해 저 세봉의 도움을 이만저만 받았다구요. 절은 우리가 드려야 합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하고 어쩔줄 몰라하였다.

《자, 어서들 자리에 앉으십시오. 당신은 나가보오.》

이윽고 강서명의 처가 방에서 나가고 량기화도 량세봉도 두리반에 가까이 나앉았다.

《뭐 차린것은 바이 없지만 작별의 정을 나누고싶어 세봉의 아버님과 세봉이를 찾았소이다. 세봉이, 잔을 채우게.》

강서명의 소리에 량세봉이 얼른 한무릎을 세우고 따끈하게 덥혀온 놋주전자의 술을 강서명과 아버지의 잔에 따랐다.

《술주전자를 이리 주게. 세봉이도 오늘은 잔을 들게.》

강서명은 량세봉이 여적 술을 먹지 않는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이자리에서는 꼭 량세봉에게도 술을 권하고싶어 그에게서 굳이 주전자를 넘겨받아가지고 량세봉의 잔에 술을 부었다.

《선생님, 전…》

량세봉이 이렇게 말하며 손을 저었으나 강서명은 잔을 들어 그에게 내밀었다.

《자, 함께 잔을 냅시다.》

강서명이 이렇게 잔을 들고있으니 량기화는 훈장과 대작하는것이 송구스러워 돌아앉아 술잔을 입에 가져가고 량세봉은 잔을 들념이 없이 두사람이 잔을 내는것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만 하였다.

《원참, 세봉이 아버님도. 반상이 다 깨져버린 세월에 뭘 그러십니까. 허허… 술자리가 이러하면 술맛도 없고 이야기도 이어지지 않는답니다. 허허…》

강서명이 소탈하게 웃음을 터뜨려놓자 그제야 량기화도 굳어진 속이 너누룩해져서 어줍게 웃었다.

강서명은 닭다리를 량기화와 세봉의 손에 하나씩 들려주고 자기도 저가락에 접철에 구운 잉어를 꿰서 입에 가져가며 말을 이었다.

《세봉이 아버님, 세봉이를 잘 키우십시오. 세봉이는 앞으로 반드시 대성을 이루게 될것이니 힘이 들더라도 맏이가 공부를 놓치 않도록 해주십시오. 이제 세봉이도 구만리 평생길을 헤쳐가야겠는데 길량식이 딴게 아닙니다. 지식입니다. 세월이 달라져갑니다. 지금은 배워야 할 시절입니다.》

《예. 고맙습니다. 헌데 훈장님께서 서당문을 닫고 마을을 뜨시려고 하신다는데 그 말이 바른소리입니까?》

《예. 하지만 제가 떠난다고 실망하실게 없습니다. 나는 서당에서 머리에 들어있는 지식을 이애들에게 다 넘겨주었습니다. 이제는 그걸 기초로 해가지고 여러 부문의 책들을 많이 읽으면 됩니다. 이 세봉이는 싹수가 크게 보입니다.

사실을 말한다면 난 이 철산땅에 와서 저 세봉이를 찾아내고 내 열과 정을 고인것만 가지고도 이 막바지고을에 여러해 박혀있은 보람을 느낍니다.》

《황송합니다. 미거한 자식을 훈장님께서 거들어주시여 이렇게 키워주셨으니 이 하늘같은 은공을 저승에 간들 잊으오리까!》

《원, 괜한 말씀입니다. 오늘은 제가 과거지사를 고백하렵니다. 저는 일찌기 남도의 의병장 리강년의병대 중군장으로 산발을 타던 무인이였습니다.》

《예?! 그러하니…》

강서명의 자기 소개에 량기화도 량세봉도 깜짝 놀랐다.

그러고보니 강서명은 한갖 선비로 보기에는 성정이 강직하고 호협하기 그지없다. 량세봉은 은근히 항일의 싸움에로 글방학도들을 마음의 준비를 시켜오던 강서명의 어제날의 사연들이 일시에 떠올라 큰 의미를 가지고 가슴이 쿵 울렸다.

《저 간악한 왜놈들과 그와 야합한 역적무리들때문에 끝내는 의병대가 기치를 내리우고 저도 칼을 일찌기 접게 되였지요. 그동안 제가 흠모하여마지않던 리강년어르신은 왜놈들에게 잡혀 령어의 몸이 되고 끝내 신의주감옥에서 옥사했다는 소식을 얼마전에야 듣게 되였습니다. 그분의 신령이 저를 부르는것만 같습니다.

나라가 망해버렸는데 도대체 그대는 뭘하고있느냐고 준절하게 초달을 내리는듯싶습니다. 그래서 더는 이 고을에 숨어있지 못하겠습니다.》

《예. 그러하니전라도 김해에서 유학을 연구했다는건…》

《예. 그건 왜놈들과 관헌의 눈을 피하느라고 돌린 헛소문이였습니다. 제 원체는 3일천하로 끝난 김옥균의 갑신정변에도 관여했던 사람이올시다.

그후로 리강년부대에 참군했다가 의병대가 흩어진 후 태백산에 올라가 새로운 의병대에 들어갔지요. 한데 태백산의병대의 군기가 너무도 고루하여 이 사람들은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디다. 인차 물러나 왜놈들의 눈을 피하여 북쪽으로 들어왔습니다.

왜놈들이 날 찾는다는 파발이 와서 세리마을에 뿌리내리고 유학자로 흉내내며 서당에도 공자와 맹자의 초상을 크게 걸어놓았던겁니다.

평생지계는 인재를 키워내는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후진을 든든하게 세워놓아야 망해버린 국운도 되찾고 조정역신들도 몰아낼수 있습니다. 그래 이곳에 기틀을 세워 후대교육을 크게 벌려 제 여생을 바치고저 했던겁니다.

나는 내 손때를 묻힌 제자들이 나라일을 한몫 맡아할 때가 꼭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나도 이 일로 여생을 즐길수 없게 되였습니다. 나라를 빼앗겼으니 이제는 만백성이 들고일어나 나라찾는 싸움을 본격적으로 준비하여야 할 때입니다.

이 고을사람들이 제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알게 되였으니 여기 더 머물러있을 형편도 못됩니다.

불원해서 여기에도 왜놈들이 쓸어들고 그렇게 되면 거기에 붙어사는 역적무리가 오지오지에 생겨날건 뻔한 리치입니다.

자, 어서 술을 내십시오. 고기도 들구요.》

강서명은 량기화부자를 대상하여 일장 기염을 토하다가 수저까지 두리반에 놓고 자기 이야기에 열중하고있는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 무춤 말을 끊고 놋주전자를 또 들었다.

자기가 키운 제자들에 대한 강서명의 애정과 기대는 헛된것이 아니였다.

뒤날 그가 가르친 서당학도들속에서 십여명의 청년들이 천마산무장대에서 핵심으로 되여 싸웠고 그뒤로 동북의 반일무장대들에서 총을 들고 왜놈들과 결사항전을 벌렸다.

불요불굴의 혁명투사이신 김형직선생님께서 조직령도하신 조선국민회 참가자들도 여러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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