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 회)

4. 훈장집아씨

 

(3)

 

강서명의 제의가 눈물겹게 고맙고 황송스러워졌다.

그러나 쉽게는 고개를 끄덕일수가 없었다.

까치는 까치끼리 살아야 한다는 고담이 피뜩 뇌리를 쳤다.

도대체 훈장님이 지금 무슨 가위에 눌려 짤린 무우밑둥같은 세봉에게 곱게 키운 외동딸을 주려고 하는가?

지체도 그러하지만 따님이야말로 자색이 수려한데다가 도회지에 나가 신식문명도 배워 안팎으로 령묘한 혼수감이 되였는데 어찌하여 이 세리고을의 농군을 부디부디 골라 사위로 맞으려고 하는가?

량반댁 사위, 며느리취재란 우선 문벌부터 보고 고간도 살펴보며 스무번 튀겨보고 스무번 재여보고 스무번 고쳐생각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지엄한 훈장님이 이 일에서는 때이른 망녕이 들어 우리 세봉이를 탐하는것 같다.

량기화는 이자리에서 도무지 강서명의 말이 곧이들리지 않았다.

그래 두손을 황공스럽게 모아잡고 어질고 고지식한 성미그대로 자기의 심정을 솔직하게 토설하였다.

《훈장님, 미거한 자식을 키워준 은혜만도 하늘같은데 귀하게 키운 따님까지 내놓으시겠다고 하시니 무슨 말로 황송스러운 마음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훈장님! 아무리 반상장벽이 허물어져가는 세월이라 하여도 어찌 저희같은 서발막대 휘둘러도 건질게 없는 농사군집안에 량반댁아씨를 모실수 있겠습니까. 그건 당초에 아니될 말씀이올시다.》

《허허, 세봉의 아버님, 그런 념려라면 더 마음쓰지 말아주십시오. 반상차별이나 존비귀천 따지지 말고 인재를 키우고 천거해서 나라를 건지자는것이 저의 주장이올시다. 그런 의미에서 세봉이는 나라가 중시하게 될 인걸이 될겁니다. 난 그걸 믿어마지않습니다. 제 딸 건사해줄 사위보는 아비눈이 어찌 가볍겠습니까.》

강서명은 자기가 여러해 수하에 두고 지켜보면서 드디여 꺼내놓은 혼담이라 기어이 성사를 시키고저 진심으로 량기화의 곧은목을 움직이려고 자기의 깊은 속을 활짝 열어보이였다.

그러나 량기화는 꿈속에서 듣는듯싶은 강서명의 진심을 선뜻 받아들일수 없어 그냥 바재이였다.

《아니올시다. 세봉이도 그렇지만 워낙 우리 집안이 조상이래 농사일로 절어든 가난뱅이집안인데 어찌 도회지에 나가서 신식학문까지 배운 아씨에게 농사일을 시키려고 하십니까? 이제 아씨가 우리 량씨집에 들어설것 같으면 자그만치 네 동생을 거느린 장손며느리가 돼야겠는데 손끝에 기름 발리워 키운 따님께 어찌 그 고역을 지우려고 하십니까?》

《하, 세봉의 아버지, 우리 애가 지금은 연해보여도 내가 검술까지 배워주며 짜지게 키워낸 애입니다. 동자질도 바느질도 여무진 애이니 크게 걱정할게 없습니다. 농사일이란 원체 천하지대본인데 농사일 한다구 흠되겠습니까. 우리 애도 농사짓는 일 배우면 잘할겁니다.》

강서명은 생각밖이였다.

자기가 딸가진 량반댁 가장으로서 혼담을 꺼내면 량기화쪽에서 황감하게 받아줄줄 알았는데 정 반대다. 자기쪽에서 오히려 궁색하게 여러 말을 구구하게 늘어놓게 된것이다.

어찌보면 량기화의 말이 그럴상싶어 그의 고집을 물리치는게 쉽지 않을것 같았다. 강서명은 이제 이 마을을 나서면 생사기약없는 싸움길에 나서려고 굳이 결심을 다져놓았기에 어찌하든 마음에 흠뻑 취해든 사위감을 놓치고싶지 않아 왼심을 썼다.

량기화도 훈장이 꺼내놓은 혼담을 받아들일수 없어 여전히 고집스럽게 말을 받았다.

《아니올시다. 훈장님의 고마운 뜻과 믿음을 제 황천에 간들 잊으오리까. 하지만 따님을 위해서도 그렇고 따님건사때문에 두고두고 속을 썩이게 될 저희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부디 거두어주십시오.》

《허허…》

강서명은 량기화의 마음을 더는 돌려세울수 없다는것을 절감하자 속빈 웃음을 선하게 터뜨려놓고말았다.

그러면서도 량심이 티없는 옥같고 심대가 결곡하기 그지없는 량기화의 손목을 잡고 아쉬운 어조로 매듭을 지었다.

《세봉의 아버님이 정 그러하시다면 나도 물러서겠습니다. 참 아쉽습니다. 우리 애도 은근히 세봉이한테 마음을 두어왔는데…》

이렇게 되여 강서명은 량세봉을 마음에 두고 여러해 북을 돋구어왔던 청혼을 거두기로 했으나 그럴수록 량씨집안에 대한 정이 가서 속이 알알해졌다.

다음날 량기화는 훈장집과 서당 그리고 재산을 처분하는 일을 도맡아해주었다.

강서명은 량세봉을 데리고 뒤산에 올라 검술의 기초동작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자기가 시범동작을 하고는 강연희에게 분동작을 시키고 량세봉이 그걸 따라배우도록 하였다.

량세봉은 이슬머금은 봉선화처럼 청신하고도 여려보이던 강연희가 아버지가 저력있게 웨치는 구령에 따라 검술의 분동작을 맵시있게, 야무지게 하는데 눈이 휘둥그래졌다. 박력을 가해 검을 휘두를 때는 봉선화같은 모습은 흔적없이 사라지고 적수를 노리는 맹금과도 같은 매섭고 살찬 기운이 팔팔 일고있었다.

마지막날에 량세봉은 강연희에게서 배웠다.

강서명이 마을을 뜨기에 앞서 여러가지로 마무리 지을 일이 나섰던것이다.

이날 강연희는 아버님의 분부라며 그에게 손칼찌르기와 발차기의 기본동작도 배워주었다.

량세봉은 강연희의 나긋나긋해보이던 몸 어느 구석에 그렇듯 영악하고 샘솟듯 하는 용맹과 기력이 있었더냐싶어 그저 황홀해졌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처녀의 세심한 눈길을 받으며 동작을 익히니 팔과 다리가 오히려 꿋꿋해지고 어느 동작 하나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때마다 강연희는 량세봉의 앞에서 세번이고 네번이고 반복해서 동작을 하고 따라할것을 요구했으나 량세봉은 도무지 처녀가 펼치는 신비경에서 깨여나지 못하고 주먹과 발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검술기초동작도 전진이 없었다.

마침내 처녀는 가까스로 참아오던 역증을 내고야말았다.

《아이참, 속상해. 우리 아버지앞에서는 쉽게 받아들이던데 어째 오늘은 이 모양이세요. 이만하자요. 그러다가는 아버지가 배워주신 술법도 다 엉망이 되고말겠네.》

처녀는 룡천검을 새파란 비단보자기에 싸서 그에게 주면서 화를 낸게 언제였더냐싶게 싹싹한 어조로 화제를 바꾸었다.

《아버지는 이 검을 호신부처럼 귀하게 여겨왔어요. 그리고 제가 사내가 아니라 계집애로 태여난것을 늘 아쉬워했어요. 아버진 이 검을 왜놈 천놈을 당할 사나이한테 주겠다고 하셨어요. 우리 아버님이 거기를 크게 믿고계신다는걸 잊지 마세요.》

《예. 선생님께서 저를 어떻게 그렇게 믿어주시는지 저는 그저 황송할뿐입니다. 선생님의 은혜를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강연희는 량세봉에게 무엇인가 더 말을 하려고 하다가 입술을 조가비처럼 꼭 물고는 제가 먼저 앞에 서서 타박타박 산길을 내렸다.

이튿날 강서명은 처와 딸을 데리고 마을을 떠났다.

마을사람들모두가 떨쳐나서 그들을 바래워주었다.

마을에는 한성에 있는 큰 학교에서 훈장으로 와달라는 전갈이 수차 와서 세리고을을 떠난다고 소문을 돌렸다.

량세봉과 량기화가 강서명의 집과 가산을 처분하고 바꾼 돈과 옷을 넣은 갈농짝을 들고 그들을 따라나섰다.

량기화는 의주에서 떨어지고 량세봉이 강서명과 그의 가족을 마차에 태워 압록강까지 갔다.

그들은 눈물속에 작별하였다.

량세봉은 강서명과 그의 처앞에 눈물을 뚝뚝 떨구며 무릎을 꿇고 엎드려 인사를 드리였다.

이날 강서명은 길게 작별인사를 하지 않았다.

하고싶은 이야기를 이미 다 해주었으니 헤여지는 석별의 정만이 가슴에 넘쳐날뿐이였다.

《세봉이, 우린 아마도 꼭 다시 만나게 될거네. 농사도 하면서 짬짬이 검술을 익히게. 그게 필요할 때가 반드시 올거네. 그리고 짬짬이 중국말을 익히게. 언젠가는 도움이 될걸세.》

《선생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량세봉은 이렇게 강서명의 당부를 가슴에 받아안았다.

량세봉은 이날 처음으로 강연희의 손목을 잡고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세봉씨.》

강연희는 울먹거리는 어조로 눈가에 물기를 머금고 불렀다.

그의 애잔한 모습에는 어쩐지 다치면 터질듯, 불면 스러질듯싶은 연연한 심경이 비껴있었다.

《세봉이를 그렇게 부르지 말아. 그저 오빠라고 불러라.》

강서명이 두어발자국 앞서다가 딸의 부름말이 귀에 거슬려 이렇게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그들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강연희는 아버지의 일깨움에 두볼이 잘 익은 앵두알같이 발갛게 물들여졌다.

《오빠, 몸성히 계셔요. 언제면 다시 만날수 있을가요?》

강연희는 이렇게 애달픈 어조로 속삭이며 고개를 숙였다.

벌써 이미전부터 은근히 량세봉을 사모하여온 그였다.

늘 제자식 자랑하듯 량세봉의 됨됨을 여러모로 이야기해주는 아버지의 칭찬의 말을 들어온 그였다. 더구나 이성에 눈을 뜬 이즈막에는 드문히 찾아오는 량세봉을 곁눈질해보면서 남몰래 피여오르는 애욕에 가슴설레여왔던것이다.

그의 눈에 비낀 량세봉은 평양성에서도 찾아볼수 없었던 생김새부터 출중하고 기골이 장수답고 언행이 나이를 뛰여넘어 무게가 있으며 안팎으로 진실해보이는 대장부였다.

아버지가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잡는 힘겨운 길에 나설것을 결심하고 량세봉을 사위감으로 선택해주었을 때 두말없이 입술을 깨무는것으로서 선뜻 아버지의 의향을 따랐다.

그날부터 그는 량세봉을 주인으로 섬기면서 옛날 고구려의 평강공주가 바보온달을 가꾸어주듯 량세봉을 도와 농사도 짓고 길쌈도 하고 저녁이면 고콜불밑에서 신식학문을 깨우쳐주고 틈틈이 뒤산에 올라 아버지가 익혀준 검술을 전수시켜 량세봉을 아버지가 믿어마지않는 나라의 동량으로 내세울 남다른 포부와 행복에 가슴이 부풀어있었다.

그런데 모처럼 꺼내놓은 청혼이 량세봉 아버지의 선하고도 고지식한 고집으로 성사되지 못했다는 아버지의 소리에 그는 억장이 무너져내리는 좌절감에 휩싸였다.

강연희는 마음을 지우라는 아버지의 분부를 이번에도 두말없이 받아들이면서도 아직도 뿌리깊은 세속으로 전해져오는 반상의 장벽을 저주하였다.

강연희는 하루밤을 지새며 눈물로 베개를 적시고는 자리를 털고 분연히 일어났다.

암매하고 부패하기 그지없는 세월이 부식해놓은 불합리한 세속을 두고 그 누구를 원망할수도 없고 당장은 까부실수도 없는 일이였다.

지금 량세봉만이 자기와 강연희를 둘러싼 두 집 부모들과 처녀의 심정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있었다.

량세봉에게서 강연희는 어제도 오늘도 어깨를 나란히 할수 없는 딴 세계의 귀동녀였고 존경하여마지않는 은사의 따님으로서 범접할수 없는 달속의 계수나무 열매와 같은 녀인이였다.

이따금 그와 마주서면 무슨 도술에 걸려들었는지 황황히 눈길을 돌리며 피해달아나군 하였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를 다시는 볼수 없으리라는 생각에 요새는 그를 보는 눈길도 바로서고 말을 붙여보는 재미도 생겨났다.

그는 강연희가 오빠라는 살틀한 부름말로 자기를 불러주자 거북해졌으나 분명한 어조로 인사를 하였다.

《언제인가는 또 만나게 되겠지요. 아씨, 선생님을 잘 모셔주십시오. 난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내가 얼마나 훌륭한 선생님을 모시는 큰 복을 안고 지내왔는지 알게 되였습니다.》

량세봉은 자기의 진심을 강연희에게 그대로 털어놓았다. 석별의 정이 두사람사이에 놓여있던 장벽을 허물어버린것이다.

강연희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물기가 그렁한 눈으로 량세봉의 모습을 망막에 새겨넣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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