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 회)

5. 머리에 마른풀 얹은 소녀

 

(3)

 

이날밤 김씨는 량세봉의 례장으로 마련하였던 무명 한필을 꺼내 윤길주의 옷을 지었다.

밤을 새워가며 말구고 바느질을 하느라고 동틀무렵까지 한잠도 자지 못하였다.

아침을 치르고나서 김씨가 새옷을 들고 웃방으로 들어왔다.

《재순이 아버님이 오늘 꼭 떠나가시겠다고 해서 서둘러 지었는데 몸에 맞겠는지 모르겠습니다.》하며 김씨는 윤길주에게 밤새껏 지은 무명옷을 내밀었다.

윤길주는 이 집에서 그냥 퍼주는 인정에 너무 황송스러워 몸둘바를 몰라하였다.

《세상에 이런 고마운분들이라구야. 으흐흑…》

윤길주는 터지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흐느껴울었다. 그러고는 딸의 얼굴을 가슴에 끌어안고 울음을 씹어삼키며 말했다.

《재순아, 넌 아마도 큰 복을 받아안게 될거다. 마음 착한 부모님들을 모시고 비명에 죽은 네 어미몫까지 합쳐 오래오래 살아라.》

량기화가 방으로 들어섰다.

《재순아, 아버지에게 술 한잔 부어올려라.》하며 량기화는 아버지의 품에 안겨 아버지의 마지막축복을 받고있는 재순이에게 술병과 사발을 내밀었다.

윤재순이 량기화가 내미는 사발에 술을 부어 아버지에게 올렸다.

《얘 맏이야, 너도 들어오너라.》

아래방에 있던 량세봉이 얼른 웃방에 들어섰다.

《이보소 사돈, 이애가 우리 맏이올시다. 이름은 량세봉이라 합니다.》

량기화는 윤길주에게 이렇게 자기 아들을 처음으로 선을 보이고는 량세봉에게 말하였다.

《얘 세봉아, 너도 한사발 올려라. 장인 될분을 눈에 새겨두고 잊지 말거라.》

량세봉이 아버지의 다심한 분부대로 윤길주앞에 나서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는 윤재순을 흘끔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빈사발에 아버지가 부어주는 술을 윤길주에게 내밀었다. 윤길주는 륙척키에 몸이 아름되게 실팍하고 영채가 도는 억실억실한 두눈에 입술이 두툼한 량세봉을 보자 더 감동이 커서 그가 내미는 술사발을 받아 쭉 마시고는 량세봉의 두팔을 부여잡았다.

《자네가 이 집의 맏이인가?!… 음… 원, 장수감이로군! 주인어른, 이 끌끌한 대장부에게 어찌 우리 딸이 어울리겠습니까?!》

윤길주가 장차 사위될 량세봉의 기골에 주눅도 들고 너무 뜻밖이여서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터놓자 량기화는 《허허.》하고 사람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다 하늘이 맺어준 연분이거늘 집의 딸은 가꾸어주면 천상의 배필이 될거웨다. 두고보시오. 그러니 가히 념려마소.》

이어 량기화는 자기 자식들을 다 불러들여 윤길주를 윤재순의 아버님이라고 소개를 하며 절을 하게 하였다.

《후생들이 다 끌끌한게 부럽습니다.》

윤길주가 일매지게 끌끌한 량세봉의 동생들의 잔등을 툭툭 쳐주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리고는 량기화와 김씨에게 허리굽혀 인사를 하고 길을 떠나려고 방을 나섰다.

그때 윤재순이 새옷을 갈아입은 아버지의 소매깃을 탈아쥐고 《왕-》하고 울었다.

《아버지, 정말 가나? 가지 말아요. 이 집에서 모두 함께 살자.》

창자를 훑어내는 재순의 눈물겨운 부탁에 윤길주도 량기화도 김씨도 볼에 더운 눈물이랑을 지었다.

《으흐흑- 내 갔다가 너 보러 꼭 오마. 기다려다오. 저기 봉녀동생도 있고 오빠들도 있으니 난 마음놓고 간다. 얘야, 어서 나를 좀 놔주려마.》

윤길주는 자기 옷깃을 꼭 잡고있는 딸애의 손목을 떼내며 마치도 애걸하듯 쉰소리로 부탁하였다. 그다음에는 딸의 모습을 망막에 새겨넣으려는듯 눈물에 젖은 재순의 얼굴을 두손으로 움켜잡고 한참 들여다보다가 토방에서 내려섰다.

윤길주는 삽짝문까지 비칠거리며 걸어가다가 또다시 돌아서서 자기를 눈물속에 바래주는 이 집 식솔들과 김씨의 두팔에 꼭 잡혀 발을 동동 구르며 섧게 우는 딸을 향해 모두걸이로 허리를 굽혀보이고는 돌아서서 총총히 멀어져갔다.

윤재순은 이날 해종일 김씨의 치마폭에 파고들며 그냥 흐느껴울었다.

점심도 저녁도 입에 대지 않고 웃방에 올라가 누데기이불을 뒤집어쓰고 눈물로 베개를 적시였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이제부터는 새 집에 뿌리내리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겨끔내기로 찾아들어와 밥상에 불러내는 이 집안식구들의 후더분한 인정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음속그늘을 가셔내고 점차 안착을 시켰다.

 

윤재순은 김씨를 무척 따랐다.

자기보다 서너달 모자라는 봉녀와도 인차 친숙해졌다. 김씨는 재순이를 언니라고 부르라고 봉녀에게 일렀다.

봉녀와 윤재순은 자매처럼 쉽게 친해져서 쌍둥이처럼 항상 붙어다니였다.

윤재순이 이 집에서 제일 어려워하는 사람은 량세봉이였다.

언제나 집안에서는 말이 없고 수걱수걱 근면하게 일하고 짬만 있으면 책을 보고 어떤 날에는 뒤산에 올라가 칼춤을 추는 량세봉이 너무 어른스러워 함부로 대하기가 서슴어지군 하였다.

서글서글하고 부지런한 셋째오빠벌되는 량시봉이 윤재순이를 스스럼없이 대해주고 그의 부탁이라면 무엇이나 다 들어주었다.

어느날 량기화는 량세봉이 윤재순을 거들떠보지 않고 너무 관심이 없는듯싶어 한마디 나무람하였다.

《맏이야, 재순인 앞으로 너의 색시될 녀자다. 그러니 각별히 네가 거두어주어라.》

아버지의 말이라면 언제나 곰상스럽게 받아주는 량세봉은 생각깊은 어조로 대꾸하였다.

《아버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지금은 저의 동생일뿐이예요.》

량기화는 아들의 서름한 대답을 들으며 저도모르게 한숨을 내쉬였다.

사실 가난한 집살림만 아니였다면 그 말쑥하고 어엿한 훈장님 딸을 어이 마다했으랴.

그때 량기화는 속으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강서명이 사려깊게 꺼내놓은 혼담을 즉석에서 사양하였으나 해와 달을 넘기면서 우줄우줄 성장하는 자식을 볼 때면 늘 속이 알찌근해서 강연희의 안팎절색모습이 눈에 서물서물거리군 한다.

지금도 철이 없고 피지 못한, 망울도 되기 전의 어린 소녀를 량세봉의 배필로 정해놓으니 서글프기도 하고 가슴이 아리기도 해서 견딜수가 없었다.

량기화는 이런 생각이 가슴을 허빌 때마다 속으로 강잉히 눌러버리는 마음의 위로가 있었다.

(까치야 까치끼리 살아야지. 그럼.)

량기화는 자기 주장에 북을 돋구었다.

저 재순이야말로 천륜이 이어준 세봉의 색시감이다. 이제와서 구태여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하늘로 다시 올라간 훈장님 따님을 생각해서 뭘하랴. …

사람이 제팔자에 어울리는걸 받아들여야 되지 않느냐.

한편 량세봉은 방금 코흘리개시절을 보낸 어린 윤재순이 자기 색시감으로 집안에 들어섰다는것이 쑥스럽기 그지없고 도무지 실감이 가지 않았다.

얼마전에도 뒤산에 강서명과 강연희가 배워준 검술동작을 익히려고 올라갔는데 동생들이 다 구경을 오고 마침 눈치를 차린 아래집의 석태무도 왔었다.

석태무가 검을 한번 만져보고나서 주먹으로 량세봉의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한다는 소리가 의뭉스럽기 그지없었다.

《량형, 저 쪼고만 계집애가 내게도 형수님이시겠다?》

그 소리에 량세봉이 짐짓 부아통이 터져 석태무의 허리를 두손아귀에 꽉 틀어잡아 허공에 뎅궁 들어올렸다가 휭하니 메쳐놓았다.

량세봉의 선한 마음씨를 잘 아는 석태무가 잔디밭우에서 뒹굴고나서도 또 한마디 엉너리쳤다.

《하여튼 코흘리개던 꽃봉오리던 난 형수대접을 하겠단 말이야.》

《뭐야?! 난 이제부터 너와는 말 안하겠다.》

량세봉이 결패있게 선언한 다음 정말 석태무와 한달이 지나도록 말 한마디 건늬지 않아 바빠난것은 석태무였다.

끝내 석태무가 술병까지 차고 와서 열번 스무번 잘못했노라고 사죄해서야 소처럼 씩 웃으며 한마디 하였다.

《자식, 두번다시 재순이소릴 내앞에서 할 때에는 1년을 말 안하겠다.》

그리고는 다시 무섭게 눈을 부라렸다.

량기화는 윤재순이 들어오자 봉녀와 윤재순에게 똑같이 왕골에다가 꽃천까지 다문다문 섞어 앙증하게 지은 꽃신을 다달이 삼아주군 하였다.

윤재순은 빨간 천쪼박을 넣고 코다리를 만들고 봉녀에게는 파란 천쪼박을 넣어 코다리를 만들어주었다.

설명절이 다가오자 김씨가 동네에서 부자로 불리우는 집에 가서 리자까지 붙여 빚돈을 내가지고 무명천에 분홍물을 들여 저고리를 꼭같이 해입혔다.

쪼들린 생활은 펴일줄 몰랐으나 집안은 언제나 화목하고 단란하였으며 밝고 명랑하였다.

 

련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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