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6. 꽃샘잎샘계절

 

(2)

 

노래춤에 이어서 윷놀이가 시작되였다.

아버지편과 어머니편으로 두패로 편을 무어 《슝이야, 모야.》하고 왁작 떠들며 웃는데 문득 밖에서 종소리가 울렸다.

삽짝문에 매달린 매방울이 흔들리는 소리였다.

《기화 있나?… 량기화-》

부름이 아니라 고함이였다.

분명 세리면을 쥐고 흔들고있는 박지주의 목소리였다.

그놈이 아니고서는 이 세리면에서 마음 어질고 대바르고 근실하기로 소문나 누구나 함부로 하대를 하지 못하는 량기화를 저렇게 막되게 불러댈 사람이 없었다.

즐거운 설날에 때아니게 울린 악청에 명절의 흥분과 즐거움이 무르녹던 집안이 졸지에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무엇인가 례사스럽지 않은 긴장감이 서리친듯 온 집안에 꽉 차들었다.

《기화 있는가고 묻지 않나. 흥떡거리던 집안이 갑자기 숨이 꺼졌나? 앙?》

량기화가 노전을 무겁게 짚고 일어서려고 하였다.

《아버지, 가만 계십시오. 제가 나가보겠습니다.》

량세봉이 앞질러 성큼 일어났다.

그는 정주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오셨습니까?》

량세봉은 그에게 고개를 건성 숙여보였다.

비단솜옷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개화장을 짚은 박지주가 눈덕을 올리밀고 량세봉의 얼굴을 쏘아보며 서있었다. 그뒤로 누런 일본군 헌병장교옷을 입은 젊은 사내와 마름이 량세봉을 쏘아보고있었다.

량세봉이 장교옷차림을 한 몸집이 좋은 젊은 사내가 눈에 익어 한마디 하였다.

《아, 이거 박창해가 아닌가?》

젊은 사내는 량세봉과 동갑나이인 박지주의 아들 박창해였다.

몸집이 크고 볼이 이들이들하고 목덜미가 살진 집돼지 목대처럼 실한데 오른 볼편에 옆으로 쭉 째진 칼자리가 유표해서 우악스럽고 흉물스러운데도 있었다.

일본륙군사관학교시절에 왜기생 하나를 놓고 벌어진 사내들의 싸움판에서 얻은 흉터였다.

제입으로는 도꾜의 좌익운동자들을 제압하다가 받은 기념품이라고 호기있게 떠들어온다.

매섭게 번뜩이는 두눈은 사실은 제 어미가 작지도 크지도 않게 제대로 만들어놓은게 분명한데 줴다가 붙여놓은듯 우둥퉁한 비게살에 아래우, 좌우로 압착되여 쥐눈처럼 작아보였다.

박창해는 원래 서울에 올라가 배재고등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대세에 그다지 둔감하지 않은 박지주가 몇해전에 일본륙군사관학교에 가서 군사조련을 받도록 하였다.

그는 어린시절과 젊은 시절에 량세봉과 맞다든적이 있었다. 대체로 씨름판에서였다.

그런데 언제한번도 량세봉을 이겨본적이 없었다.

박창해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와서 일본《총독부》 경무국에서 헌병으로 있다가 《동양척식회사》가 조선의 토지를 전반적으로 조사등록한다는 법령이 채택되자 며칠전에 제 애비의 땅을 지키기 위하여 부랴부랴 세리면 읍거리에 있는 제집으로 내려왔던것이다.

《오, 량세봉.》

박창해는 량세봉의 인사말에 마지못해 이렇게 주밋거리다가 짤막히 받아주고는 입을 다물어버렸다.

량세봉도 일본헌병장교복까지 입고 거드름을 피우는 박창해와 더 얘기할 흥심이 없어 그들의 대화는 인차 끊어졌다.

박지주가 량세봉의 얼굴을 그냥 쏘아보다가 《네 애비를 찾아라.》하며 그들사이에 오가던 서름한 인사말조차 막아버렸다.

박지주의 호령질에 방안에서 바깥동정을 살피던 량기화가 방문을 열고 맨발바람으로 토방을 황황히 내려섰다.

박지주에게 허리를 굽히고 깍듯이 설인사를 하였다.

《지주어르신, 올해에도 복을 많이 받으시오다.》

그러나 박지주는 량기화의 설인사는 듣는둥마는둥 첫마디부터 고성을 내질렀다.

《괘씸한 놈.》

그리고는 토방에 올라서서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문턱에 걸터앉았다.

방안을 휘휘 둘러보던 그놈의 고리눈이 대뜸 떼꾼해졌다.

《흥! 밤낮으로 굶어죽는다고 우는소리를 하더니 상다리 부러지게 차려놓고 거문고도 뚱땅거리며 풍청거리는구만. 그래 네놈들은 엊그저께 내 산에서 공짜로 잡아온 내 꿩고기가 목구멍으로 슬슬 넘어가더냐? 이 괘씸한 놈들!》

박지주놈은 량기화를 당장 때려죽일듯 노려보면서 개화장으로 상다리를 툭툭 쳤다.

량세봉이 분기가 치밀어 박지주의 말을 받아넘겼다.

《꿩은 내가 옹노를 놓아 잡아온것이예요. 그리고 상다리는 다치지 마시오. 그러다 상이 넘어지면 지주어른의 비단옷이 덟어지겠수다. 헌데 내 산, 내 꿩이라는건 무슨 말이나요?》

《뭣이?!이녀석 말버릇 좀봐. 이마빡에 피도 마르지 않은 녀석이 상다리서껀 무엇이 어찌구어째?! 그래 이놈아, 네가 말해봐라. 네녀석이 잡아왔다는 그 꿩은 어디서 잡아왔지?》

《어랑산에서 잡아왔습니다.》

《어랑산은 뉘산이지?》

《뉘산이라니요?!》

《그건 내 산이야, 내 산!》

《어르신의 산이라구요?》

《그러니 어랑산의 꿩은 뉘 꿩이지?》

《글쎄요. 이산저산 날아다니는 미물이니 그놈들의 주소를 제가 어떻게 알며 그놈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 저 꿩 주인도 어르신이라는겁니까?》

량세봉이 심사가 마뜩지 않아 곱지 않게 반응하였다.

그러자 박지주가 문턱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놈은 퇴마루를 오른발로 탕탕 구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이놈! 야료가 보통이 아니구나. 네가 무슨 보짱을 믿고 이렇게도 방자하냐. 내앞에서 황소같은 네 몸통자랑이냐. 그래 네놈이 옹노를 놓았다는것이 어랑산초엽인 구지봉 등판이겠다? 그 등판이 지난 섣달 초사흘에 내것으로 넘어왔단 말이다. 거기서 나무가지 뚝뚝 찍어 읍거리에 내다팔았다면서? 그런 무법한짓을 하고 엎드려 빌어도 씨원치 않겠는데 무슨 말버릇이냐!》

박지주는 그냥 《괘씸한 놈들!》을 련발하다가 개화장으로 또다시 상다리를 툭툭 쳤다.

《그래, 거기가 지주어른의 산이라 한들 거기에 말라서 썩어가는 강대나무 몇대를 찍고 이산저산 날아다니던 꿩 몇마리 잡아온게 무슨 큰 변이 난 일이라고 설날아침에 이렇게도 야단이시우? 아, 그 애매한 상다리는 자꾸 치지 마세요.》

그러자 뒤에 서있던 박창해가 한마디 꺼들었다.

《량군, 당신이 나무 몇대 찍은게 문제 아니야. 당신이 지금 하는 말본새가 문제란 말이야. 그게 어디 어른께 하는 수작이야? 도리는 고사하고 불한당의 처신이 아닌가 말이야.》

박창해의 쥐눈에서 카바이드불빛같이 새파란 불똥이 탁탁 튀는것만 같았다.

《뭐 불한당?! 박군! 당신은 지금 이 판에서 례의와 도리를 따지는거야? 당신은 서울과 도꾜에 가서 신식학문도 배우고 사람사는 법도도 배운 사람인데 그래 명절날아침에 설인사도 받지 않고 소란을 피워대니 이래 놓고도 군자인사를 받자는거야?》

량세봉이 준절한 어조로 꾸짖자 박창해가 흉터가 있는 볼을 실룩거리며 《아, 량군.》하고 일본헌병옷까지 걸치고 소작인에게서 훈계를 받는것이 수치스러워 또 한마디 하려고 하였다. 박지주가 또 악청으로 두사람의 사이를 쩍 벌어지게 하였다.

《얘 이놈아, 네놈과는 말하기도 싫으니 물러서라. 량기화, 애비가 말해봐라.》

그러자 량기화가 머리를 수그리고 박지주의 말을 받았다.

《지주어른, 죄송합니다. 우린 정말 그곳이 어르신네 산이라는걸 모르고있었습니다.》

《음… 길게 시야부야 할게 없다. 여기 내가 장부도 만들어왔으니 벌금을 물든지 류치장신세를 지던지 임자가 알아서 결심하게.》

박지주는 거드름스럽게 조끼주머니에서 문서장을 꺼내던져주고는 토방마루를 내려섰다.

《이보시오 지주어르신, 밑도끝도 없이 벌금을 물고 류치장신세소리를 하니 어르신의 주장대로 사는게 백성이요? 모르고 그랬다지 않소.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겠으니 이번에는 한번 눈감아주시우.》

량기화가 박지주를 따라서며 이렇게 애걸했다.

그러자 박지주는 더구나 앙앙불락해가지고 홱 돌아서더니 개화장을 쳐들었다.

개화장이 량기화의 어깨에 떨어질판이다.

순간 량세봉이 벼락같이 내달려 개화장을 지주놈의 손에서 빼앗아 무릎에 대고 툭 꺾어 마당에 휭하니 던져버렸다.

《너무하시외다. 해마다 꼬바기 농사해서 어르신네한테 한해도 건느지 않고 바쳐왔는데 마른 나무 몇대, 꿩 몇마리가 뭐이 돼서 이렇게 설아침에 달려들어 소란을 부립니까?》

량세봉이 이렇게 불이 철철 이는 눈으로 박지주를 쏘아보며 부르쥔 주먹을 후들거렸다.

그때 박지주의 뒤에 서있던 박창해가 제애비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빠가야로! 이 무지렁이촌놈 제주먹 하나 믿고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격이군. 덤벼봐라. 내 지금껏 네놈과 씨름장에서는 져왔지만 인생승부는 이미 판가름이 났어.》

박창해는 옆구리에 차고있던 일본군도를 쭉 뽑아 머리우에 쳐들었다.

량세봉이 《그래 한번 찍어봐라.》하며 선자리에서 총알같이 몸을 날려 군도를 잡은 박창해놈의 오른주먹을 덥석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뒤로 비켜서며 틀어잡힌 주먹을 뽑아내려고 《얏!》하며 배집에 기운을 주는 박창해를 옆으로 쳐던졌다.

그 서슬에 일본군도가 땅바닥에 떨어졌다.

량세봉이 군도를 잡아 한번 머리우에 휘둘러 휘파람소리를 내게 하고는 삽짝문 멀리에로 힘껏 내던져버렸다.

번쩍거리는 장검이 허공에서 살기를 풍기며 떨어져내렸다.

그때 량기화가 아들을 막아서며 큰소리로 고함을 쳤다.

《세봉아, 설날아침에 어쩌자고 이러느냐!》

《아버지, 비켜요. 이렇게 업심을 당해야 사람구실이 됩니까!》

《얘야, 입다물고 참아야 한다. 참아야 한다!》

량기화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는 울부짖음이다.

량세봉이 땅에 풀썩 주저앉으며 《어휴-》하고 언땅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부자간에 오가는 분노와 설음에 젖은 처절한 절규를 들으며 다소 주접이 들어있던 박지주가 다시 악청으로 고아댔다.

《륙실할 놈들!》

마름이 주어온 군도를 받아 칼집에 박아넣던 박창해가 한마디 뇌까리였다.

《량세봉, 두고보자! 아버지, 저런 놈과는 말로 시비캘게 없습니다. 갑시다.》

박지주와 아들놈은 삽짝문을 열고 활개질을 하며 기고만장해서 떠나갔다.

새해를 맞이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흥성거리던 집안에 갑자기 서리낀 랭기가 쓸어들었다.

《얘야, 추운데 어서 들어가자.》

량기화가 박지주일행의 뒤모습을 처연한 눈길로 지켜보다가 놈팽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아직도 언땅에 주저앉아 일어서지 못하는 량세봉의 겨드랑이에 팔을 넣으며 말하였다.

《아버지, 지난달에도 석태무랑 현수랑 거기서 나무를 해오고 토끼사냥도 했는데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저럽니까?!》

《글쎄말이다. 저놈들이 왜놈쪽발이들의 사타구니에 기여들어갈수록 포악하구나. 언제는 우리가 죄가 있어 갖은 수모를 다 당했더냐.》

온 가족이 량기화와 그의 팔에 이끌려 무겁게 들어오는 량세봉을 불안한 눈길로 맞이하였다.

기쁨에 불안이 겹쳐진 설날이였다.

아니, 액운을 불러온 불운의 설명절이였다.

 

련 재
[장편전기소설] 량세봉 제1부 (제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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