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 회)

11. 왕청문

 

(2)

 

밤이 깊어 량세봉은 윤재순과 함께 자기 방에 들어섰다.

그는 쌕쌕 잠든 딸을 한참동안 들여다보았다.

《언제 낳았소?》

《지난해에… 깨울가요?》

《놔두오. 내가 이젠 딸가진 아버지가 됐구만. 딸이 생긴줄 알았더라면 나도 무슨 선물을 하나 마련해가지고 오는건데…》

량세봉이 아쉬워했다.

《됐어요. 애아버지가 긁힌 자리 하나없이 돌아오신게 제게는 큰 선물이예요. 싸움판에서 무슨 애선물까지 생각하시겠나요. 중대장까지 하시는분이.》

량세봉은 아직도 애된 꽃순처럼 연연해보이는 윤재순의 그 너글너글한 속이 생각밖이여서 코마루가 쩡- 울렸다.

《허, 딴은 그렇기두 한데 이름은 지었소?》

《예. 벌써 오래전에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아들을 낳으면 의준이라고 하고 딸을 낳으면 귀녀라고 하자구.》

《허, 그랬던가. 그러니 이애는 귀녀겠구만. 의준이였다면 더 좋았을걸…》

《그건 거기 재간에 달린거지요 뭐.》

윤재순이 수집어하면서도 눈을 빨았다.

량세봉은 너털웃음을 터쳤다.

《왜 웃으세요? 남은 안타까와죽겠는데. 어머님이 자꾸 말씀하셔요. 장수를 봐야겠다고.》

량세봉이 다시 껄껄 웃으며 안해의 달라진 모습을 그제야 찾아낸듯 새삼스럽게 윤재순을 살펴보았다.

10여년전에 그와 함께 나란히 결혼상에 앉았던 생각이 났다.

그때 누구인가 말한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큰 곰옆에 토끼 한마리 앉아있는것 같다고 했더라… 그때 량세봉은 그 소리가 정 싫지 않으면서도 한숨이 나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언제면 이 토끼가 제구실을 하는 곰으로 될가. 그런데 이제는 당당히 자기와 나란히 앉아도 짝이 어울리는것 같다. 곰으로 된것 같다. 우선 몸이 퍽 좋아졌다. 키도 몸통도 제또래에서 우람지다는 말을 들을만큼 크고 풍만해지고 목소리도 청청한게 듣기 좋았다. 살결도 맑고 눈도 억실억실해졌는데 거기에 미소가 어리면 참말로 한송이 함박꽃인양 곱다. 금방 결혼했을 때에는 그닥 밉지는 않았지만 곱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만하면 어디 내놔도 짝지지 않을 이목구비가 번듯하고 잘 생긴 녀인이다.

말수더구도 제법이다. 남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하고싶은 말을 척척 둘러대는것이 시원스럽고 미덥다.

《나도 사내나 낳아 어머님께 안겨드리고는 따라갈 생각이예요.》

《나를?! 저런, 당신이 나를 따라선단 말이요?》

《왜요? 못 갈것 같애요? 당신은 뭐 농사군이 분명하였는데 중대장 하시지 않나요. 나도 이젠 농사일에 막히지 않아요. 그러니 나도 군복을 입으면 군사가 되지요 뭐.》

《당신이 군대가 된다?! 허, 그럴듯해. 군복을 입으면 녀장부야. 하하!》

《왜 또 웃어요? 참, 중대는 얼마나 돼요?》

윤재순이 또다시 눈을 빨며 량세봉의 팔을 꼬집어놓았다.

《중대가 몇명이 되는가고 물었지? 그건 비밀이요. 한 이백명이 될가.》

《어마나! 이백명? 그렇게 많아요. 그 사람들 하루세끼 뭘 먹고 살아요.》

《뭘 먹다니? 밥두 먹구 국두 먹구…》

《중대장노릇 쉽지 않겠군요. 우리 마을사람들 다 해야 그만큼 될가?》

《그렇지만 녀자군대는 없소.》

《훈장댁아씨도 있다지 않았나요. 어머님은 그 아씨 곱고 몸이 나긋해서 군사노릇을 어떻게 하겠는가고 걱정하였지만 난 거기처럼 이렇게 든든하니 일없지 않나요.》

《그 아씬 총쏘는 일이 아니고 비서노릇 하오.》

《그래요? 비서라는건 뭐나요? 그럼 난 밥을 지어드리지요. 빨래도 하고 옷도 기워드리고. 이백명 되는 사람들 살이가 쉽지 않겠는데 할 일이 좀 많겠다구요? 어머니도 늘쌍 절 칭찬해주어요. 몸이 나도 엉치가 가볍고 일손이 날래다나.》

《하하… 어머니의 칭찬말씀이 참 듣기가 좋구만.》

윤재순은 자리에 누워서도 그냥 꺼내놓은 말에 아퀴를 지으라고 보채였다.

그래서 량세봉은 이제 의준이를 낳은 다음에 그때 가서 어머니의 승낙을 받으라고 반승낙정도로 해놓았다.

다음날부터 량세봉은 언제나 집에 모처럼 들릴 때면 그러하듯 농사일을 도왔다.

어머니와 식솔모두가 겨우내 모아둔 거름을 지게에 담아지고 논과 밭에 내가군 하였다.

량세봉의 일솜씨를 알고있는 동네사람들은 우리 마을 일등농사군이 장수가 되여 왔다고 반가와하며 저녁마다 독립군이야기를 들으려고 모여왔다.

량세봉은 그들을 받아들여 웃방, 아래방에 앉혀놓고 왜놈들을 족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최시흥대장이 하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온 나라 백성이 떨쳐나서 왜놈들을 몰아내고 그리운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열띤 어조로 호소하였다.

며칠후 동네에 중대가 나타났다.

량세봉은 중대를 이도구숲속에 있는 옛날 화전민들이 살던 여러채의 집에 자리잡게 하였다. 그리고 왕동헌에게 중대가 도착하였으니 와서 좋은 말씀을 해달라고 전하였다.

왕동헌이 어느날 누런 천으로 지은 군복 이백벌을 십여명의 학생들에게 지워가지고 왔다.

보초병의 전달을 받은 량세봉과 중대지휘관들이 병영입구에서 그들을 마중하였다.

중대대원들이 두렬로 서서 박수를 치며 왕동헌일행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량세봉은 왕동헌앞에서 중대의 훈련모습부터 보여주었다.

대원들이 제식동작이며 검술과 격술동작을 씩씩하게 할 때면 왕동헌은 엄지손가락을 내흔들며 조선독립군이 과연 장하다고 칭찬하였다.

왕동헌이 량세봉에게 가져온 군복을 전달하자 량세봉은 그가 직접 매 대원들에게 군복을 수여할것을 요청하였다.

왕동헌은 량세봉의 뜻이 있는 요청에 《뭘, 약소한 지원인데 생색을 내겠습니까.》하고 사양하였다.

그러나 량세봉이 그냥 부탁을 하자 더는 물러서지 못하였다.

중대대원들이 차례로 그에게 나와 절도있게 경례를 하고 고맙다고 할 때마다 왕동헌은 《잘 싸우십시오. 우리는 형제입니다.》하고 화답하군 하였다.

군복전달모임이 끝나자 량세봉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소개하였다.

《여기 오신 왕동헌선생은 일찌기 손중산선생의 전우로서 신해혁명에 참가하였으며 지금은 왕청문의 구장이고 학교 교장이며 흥경현참의회 의장으로 후대교육과 조중 두 나라 인민들의 화목을 위하여 헌신하고있는 진정한 우리의 중국벗입니다. 이제부터 왕동헌선생께서 연설하시겠습니다.》

량세봉의 소개말에 대원들이 박수를 치고 징을 울리며 환호를 올리였다.

조선독립군 대원들의 열정적인 환영에 저으기 감격한 왕동헌은 흥분된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하였다.

《여러분, 저는 우선 일본놈들을 반대하여 결사의 각오를 가지고 싸우고있는 조선독립군에 중국의 량심있는 사람들을 대표하여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조선은 중국과 강을 사이에 두고있는 이웃이요, 형제의 나라로서 예로부터 서로 의지하고 도우며 가깝게 지내왔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이 만주땅에서 고락을 같이하면서 살아가고있습니다.

력사를 거슬러오르면 우리 중국사람들이 조선지경을 넘어서 군사를 몰아간 수치스러운 일도 여러번 있었지만 그건 번번 우리 조상들이 벌린 불미스러운 일이니 옛말로 덮어둡시다.

지금 일본놈들은 이 만주에 야금야금 촉수를 뻗치고있는데 최근년간에 들어와서 중국을 먹어치울 계략을 꾸미고있는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주의 군벌과 지방관리들은 원쑤놈들의 흉계를 알지 못하고 일본놈들의 위협공갈에 넘어가 왜놈을 족치고있는 조선의 애국자들을 돕기는 고사하고 도살하고 체포하며 조선독립운동을 막아나서고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우리 중국의 목을 조이고있는 일본놈들을 도와주는 반역행위입니다. 그리고 손중산선생에 대한 배신행위입니다.

바야흐로 중일전쟁이 박두해오고있는 오늘 우리 중국사람들은 마땅히 조선애국자들의 반일투쟁을 자기의 위업으로 간주하고 물심량면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손중산선생께서는 일찌기 중국이 자유평등을 쟁취하려면 세계 피압박민족들을 원조해야 하며 중국을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들과 단합하여 공동으로 분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여러분, 조선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압박과 테로를 감행하고있는 중국의 군벌들은 중국을 대표할수 없으며 한줌밖에 되지 않습니다. 절대다수의 중국사람들은 조선독립운동가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여러분들과 함께 일본놈들을 반대하여 공동으로 싸워야 한다고 인식하고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에게 진심으로 되는 감사를 드리고있습니다.

우리 중국사람들은 기필코 손중산선생의 뜻을 받들어 조선의 독립운동을 지지할것이며 공동으로 항일운동을 벌려나가게 될것입니다. 저 역시 우리 국민들이 조선애국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도와주며 여러분들과 함께 항일전선에 참가하도록 하게 노력하겠다는것을 맹세합니다.》

왕동헌은 연설을 마치면서 한팔을 번쩍 들고 구호를 웨쳤다.

《전세계 피압박민족들은 힘을 합치자!》

《왜놈들을 타도하자!》

《조선독립운동 만세!》

그의 선창에 따라 독립군대원들도 일제히 팔을 쳐들고 목청을 합쳤다.

그후 왕동헌과 량세봉의 친분은 더욱 두터워지고 왕청문의 중국관원들과 조선독립군과의 관계도 좋아졌다.

이해에 왕동헌은 현참의회 의장과 왕청문 구장으로 재선되였다.

그는 자신의 사회적지위를 리용하여 현청과 현경찰서를 돌아다니며 조선독립군의 목표는 일제타도, 조선독립이므로 그들을 믿고 신뢰하며 절대로 탄압을 하지 말고 적어도 중도적인 립장을 취하라고 력설하였다.

왕동헌은 특히 현장과 경찰서장을 술자리에 여러번 청해놓고 간곡하게 타일렀다.

《우리와 조선은 가까운 이웃으로서 일본을 도와주는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항일운동은 자기 조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운동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중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의 운명에 빠진 오늘의 형편에서 그들의 투쟁을 물심량면으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때문에 당신들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고 징벌하라는 상부의 지시를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손중산선생의 위업에 대한 모반행위이며 중국의 안정을 해치는 반역행위입니다.

조선애국자들의 반일투쟁은 사실상 중국에 대한 지원이기도 합니다. 나는 조선의 애국자들이 우리 중국을 해치지 않으며 중국의 법과 리익을 존중하고있다는것을 량심적으로 보증합니다.》

흥경현 현장이나 경찰서장은 왕동헌이 신해혁명의 원로이며 흥경현은 물론 동변도일대에서 영향력이 큰 유지로서 강하게 주장하고 절절하게 부탁하는것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군 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조선애국자들에 대하여 턱없이 통제하거나 체포하는 소동을 크게 완화시켰다.

이렇게 되여 왕청문에서 조선독립군의 활동은 더욱 활기있게 전개되게 되였다.

인차 왕청문으로 이동하여온 조선혁명당 중앙위원회와 국민부인물들은 눈에 띄게 달라진 왕청문일대의 분위기를 두고 량세봉의 능력과 활동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량세봉의 집에서는 강서명과 그의 딸 강연희를 거의 20년만에 감격적으로 만나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조선혁명당 중앙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여 통화에서 돌아온 최현수도 빼주 한병에 김씨의 고무신 한컬레와 애기옷 한벌을 사들고 와서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조선혁명당이 왕청문에 자리잡자 무장부대를 조선독립군으로부터 조선혁명군이라고 개칭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이 나돌았다. 독립군의 이름을 바꾸는 문제를 놓고 며칠동안 열띤 론쟁이 벌어졌다.

여기에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신진지도인물들의 주장이 크게 작용하였다.

특히 석태무가 남만에서 확고하게 발언권을 가지고있는 우리도 이제는 독립군이라는 고리타분한 이름을 버리고 새로운 시대적추세를 따라 혁명군으로 부르자고 앞장에서 주장하였다.

물론 독립운동의 원로라고 자처하는 고루한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대하여 강하게 반기를 들었다. 혁명군이라는 이름에 독립운동의 본질과 목적이 가리워진다는것이였다.

그리고 혁명이라는 소리에는 공산당냄새가 많이 난다고 머리를 떨었다.

량세봉도 처음에는 독립군이란 오랜 전통을 가진 이름으로서 목적이 뚜렷하고 조선사람들과 중국사람들에게 친숙해진 이름인데 이제와서 왜 바꾸겠느냐고 그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그러나 석태무는 우리는 나라의 독립만 해서는 안된다, 일제를 몰아낸 다음에 부패무능한 봉건왕조를 복구해서도 안된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우리 나라가 강대국의 노예가 된다, 따라서 모든것을 뜯어서 고쳐야 한다, 우리 군대도 혁명군이 되여야 한다, 이것은 오늘 세계의 진보적운동의 동향이다, 손중산도 신해봉기를 신해혁명이라고 불렀고 자기의 무장력에 국민혁명군이라는 이름을 달지 않았는가, 독립군이란 좀 퀴퀴한 냄새가 난다, 우리가 가지고있는 당도 혁명당이 아닌가, 등등으로 끈질기게 주장하였다.

마침내 량세봉도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그쪽으로 고개를 찧었다.

 

련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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