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  제  현

(1287ㅡ1367)

 

고려후반기의 관료, 학자, 시인. 자는 중사이고 호는 익재이다. 개경에서 태여났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책읽고 글짓기를 좋아하였다. 어려서부터 사색적이고 탐구심이 강하였으며 14살 어린 나이에 성균관에서 치는 시험에 합격하고 병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그는 이에 조금도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이는 작은 재주일따름이다. 나의 덕을 쌓는데는 크게 부족하다. 고금의 책들에 정통하기 위해서는 더욱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하겠다.》고 하면서 계속 학문연구에 힘쓰다가 1304년에 비로소 벼슬길에 나섰다. 그는 국내외도서들을 폭넓고 깊이있게 연구하여 문학과 철학, 력사, 경제, 군사 등 여러 분야의 다방면적인 지식을 가지게 되였다. 학문에 대한 그의 진지한 태도는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으며 좀처럼 제집안자랑을 하지 않는 리제현의 아버지까지도 《아마 우리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할 운수가 틔였나보다.》라고 기뻐서 말하게 만들었다.

리제현은 일찍부터 벼슬길에 나섰으며 우정승의 높은 벼슬까지 하였다. 한때 원나라에 들어가 살면서 고려ㅡ원나라와의 대외관계를 조절하는 일을 하였다. 그가 활동한 시기는 고려봉건통치가 극도로 어지러워진 시기이다. 심각해진 당시의 각종 사회적모순과 인민들의 세찬 반봉건반침략투쟁은 그로 하여금 첨예한 현실적문제에 주의를 돌리고 진보적경향이 뚜렷한 작품을 쓸수 있게 한 중요한 요인으로 되였다. 그의 문학적재능은 일찍부터 국내에는 물론 다른 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그는 작품에서 뜻을 명료하게 하는데 선차적인 관심을 돌리면서 언어표현들을 참신하게 할것을 주장하였으며 문장만을 아름답게 꾸미는데 급급하거나 남의 글을 모방하는데만 몰두하는 현상을 반대하였다. 그는 애국적인 감정을 가지고 외래침략자들의 전횡을 폭로하는 글을 썼으며 자기 나라에 대한 사랑과 침략자들에 대한 증오를 담은 시 《장안려관에서》, 《백구에서》 등 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또한 인민들의 비참한 생활처지를 동정하여 《전라도 안림사로 부임하는 전록생을 보내며》, 《김해부사로 부임하는 정국경을 보내며》와 같은 시들을 썼다. 그는 인민들에 의하여 창조된 구전문학작품들에도 관심을 돌려 설화를 수집하기도 하고 민요를 한자시로 기록해놓기도 하였다. 그가 집권파량반들의 시기와 배척을 당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창작에 힘쓰던 때에 쓴 패설집 《력옹패설》에는 시이야기, 력사이야기와 함께 구전설화도 들어있으며 《익재란고》(4권)에는 《사리화》, 《그리운 님》을 비롯하여 민요를 한자시로 옮겨놓은 악부시들이 여러편 들어있다. 그는 력사에 대한 관심도 높아 《기년전지》와 실록편찬에도 참가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익재집》이 전해진다. 그는 자신의 계급적립장으로부터 력사를 써도 왕조중심으로 쓰고 당대의 불합리한 현실을 비판한 작품을 써도 인민에 대한 지나친 억압과 착취가 봉건적왕도정치에 어긋난다는 립장에서 썼다. 그러나 그의 진보적인 미학견해가 반영된 작품들은 이 시기 문학발전에 긍정적으로 이바지하였다. 그의 대표작으로 《북쪽으로 가며》, 《귀뚜라미》, 《고향에 돌아가고파》 등을 들수 있다.

 

《북쪽으로 가며》

 

한자시.

 

고국을 떠나는 심정 그지없으니

남의 나라 구경이야 흥미있으랴

 

형제 함께 덮던 이불 잊혀지지 않거니

도포자락 해여진들 추운걸 근심하랴

 

술을 대할 때마다 검을 튕기고

등불 끄고선 안장을 베고 잤노라

 

그 땅우에 뜬 구름 멀어만 가니

어찌해야 내 소식 알릴것이냐

 

시에서는 고국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조국을 떠나가는 사람의 애달픈 심정과 결부하여 절절하게 노래하고있다.

서정적주인공ㅡ시인은 고국을 떠나는 걸음마다 남의 나라 구경할 호기심이 아니라 형제가 함께 덮던 이불생각이 간절하며 어쩌다가 술이 생겨도 검을 튕기며 들고 등불 끄고 자리에 누워도 말안장 베고 자는 나라 위한 우국심을 간직한다. 이런 마음으로 하여 서정적주인공은 나그네 려행길에 도포자락 해여졌어도 춥다고 근심할 정신적여유가 없고 뜬 구름이 멀어만 가는것을 서글프게 바라보면서 고향에 소식조차 전하지 못해 애타한다.

시는 시인의 체험에 기초한 세부들을 립체감이 나게 련결하면서 시의 주제사상적내용을 생동하게 부각하고있다. 물론 이 시는 관료의 립장에서 나라를 근심하는 사상감정을 노래한데 그치고있으나 진보적인 내용을 소박하면서도 진실하게 형상한것으로 하여 문학사적의의가 있다.

 

《귀뚜라미》

 

한자시.

 

귀뚤귀뚤 또 귀뚤

너 왜 그리도 슬피 우느냐

밤새도록 짜도짜도

비단 한치 못짰구나

 

마을아낙네들 네 소리 들으면

  눈물이 마냥 샘솟듯하고

수자리 살러간 남편들

  네소리에 젊은 얼굴 여위여간다

 

봄바람이 화창할제

  꽃들은 씨가 앉고

여름날에 제비들도

  집을 짓건만

 

너는 왜 네 살 궁리

  하지 못하여

찬서리가 내려서야

  가을인줄 아느냐

 

귀뚜라미 너는 어찌

  세월을 모르느냐

세월이 너를 위해

  잠시인들 머물더냐

 

이 시는 리제현이 고려가 점점 쇠퇴몰락하는것을 안타까워하여 당시의 통치배들을 시절도 느낄줄 모르는 귀뚜라미에 비겨 노래한것이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민간이야기에 의하면 귀뚜라미는 일명 《촉직》이라고 하는데 《촉직》은 베짜기를 재촉한다는 뜻이다. 귀뚜라미는 가을밤에 잘 우는 벌레이다. 그래서 귀뚜라미가 울면 아낙네들은 겨울나이 옷감짜기에 근심하면서 귀뚜라미소리를 베짜기를 독촉하는 소리라고 하였다. 시인은 이런 이야기를 형상의 기초에 깔면서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가난한 집 아낙네들은 수자리 살러 간 남편과 아들의 겨울옷 걱정으로 눈물이 샘솟고 수자리를 사는 남편과 자식은 집근심에 젊은 얼굴 시든다고 한탄한다. 시는 이러한 사상감정을 봉건통치배들의 무지한 정사에 대해 원망하는데로 끌고나간다. 여기에 귀뚜라미에 대해서 쓴 다른 여러 시들과 구별되는 이 시의 독특한 양상이 있다. 시에서는 또한 봄이 오면 꽃들이 피고 씨가 생기며 여름이면 제비도 둥지를 틀줄 아는데 귀뚜라미 너는 어찌 가을이 와서야 때늦게 베를 짜라고 독촉하느냐고 원망하면서 시절도 모르는 봉건통치배들을 비난하였다.

 

《고향에 돌아가고파》

 

한자시.

 

표박하는 쪽배에 정이 붙은듯

누구라 온 세상이 다 형제라 하는가

기러기 한 소리에 고향소식 그립구나

가는 제비 바라보면 내 삶이 보람없네

 

늦가을 궂은비는 청산속에 흩뿌리고

저문날 구름깃은 백제성에 걸렸도다

고국의 순채국이 양고기보다 낫거니

돌아갈가 말가를 점칠 까닭 있으랴

 

시는 리제현이 원나라에 외교사절로 가있을 때 고향을 그리는 절절한 마음을 담아 지은것이다. 시에서는 자기가 나서 자란 정든 고향, 조상의 뼈가 묻히고 대대손손 살아온 고국을 그리워하며 기어이 고향에로 돌아가리라는 서정적주인공의 뜨거운 심정을 기러기, 제비 등 철새에 비유하여 노래하였다. 고국의 순채국이 양고기보다 낫다는 서정적주인공의 웨침은 우리 나라의 풍속, 생활적취미 등을 포함하여 자기의것을 소중히 여기고 즐기는 조국애의 구체적표현이다. 서정적주인공은 자기의 생활체험에 기초하여 민족의 넋을 깊이 간직하고 조국애의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있었기에 그 북받치는 심정을 담아 고국으로 《돌아갈가 말가를 점칠 까닭 있으랴》고 격조높이 노래불렀던것이다.

 

《력옹패설》

 

1342년에 쓴 패설집. 전집 2권, 후집 2권으로 구성되여있으며 이 패설집의 편찬체제와 저작동기, 내용 등을 리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간단한 해설들도 붙어있다. 패설집의 전집에는 주로 력사이야기들이 실려있고 전집의 뒤부분과 후집에는 시이야기들이 실려있다. 력사이야기에서 저자는 력사자료들을 적지 않게 소개하기도 하고 자기의 력사관을 밝히기도 하였다. 그는 이런 글들에서 우리 나라의 력사를 정당하게 밝힐데 대하여 강조하였으나 봉건유교사상의 제한성으로 말미암아 력대의 봉건국왕들에 대한 찬사를 표시하고 력사의 정확한 서술은 왕조의 계보를 옳게 밝히는데 있는듯이 그릇되게 인정하였다. 시이야기들에는 당시까지의 문학작품들과 그것들의 창작경위 또는 내용들이 소개되고있다. 이러한 이야기들가운데서 특별히 가치있는것은 《흑책》, 《주먹바람》 등의 참요와 그와 관련한 설화, 《은혜갚은 사슴》, 《박세통과 거북선》을 비롯한 전설, 민담류의 이야기들이다. 패설집에는 또한 정지상, 오세재, 진화, 김극기 등 고려때의 많은 문인들의 작품들이 소개되고있는데 그 가운데는 이 작품집을 통하여 처음으로 알려지게 된것도 적지 않다. 시이야기들에 반영된 저자의 미학견해는 봉건시기 진보적미학사상발전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다. 《력옹패설》은 패설이 점차 자체의 리론적토대를 가지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료로서 그 이후의 패설발전에 긍정적으로 이바지하였다.

 

장원으로 뽑힌 소년

 

1301년 여름 어느날, 먼동이 푸름푸름 밝아오기 시작하는 이른새벽부터 과거시험장인 성균관의 행랑으로는 수많은 수험자들이 떼를 지어 밀려들었다.

행랑의 북쪽과 서쪽에는 시험관으로 뽑힌 중서부와 추밀원의 관리들이 주런히 나앉아 시험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뜰아래에는 각 군영의 장교들이 기를 들고 량편에 갈라서서 위엄을 돋구며 쓸어들어오는 수험자들의 질서를 잡느라 벅적댔다.

수험자들의 모양 또한 가관이였다. 수염이 덥수룩한 40대의 년장자들이 보이는가 하면 아직 솜털이 가시지 않은 애된 소년들도 보였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눈에 뜨이는 애어린 소년이 하나 있어 사람들의 주위를 끌었다.

《아니 저렇게 조꼬만 아이도 시험을 치러 왔는가?!》

《그럼 이 마당에 장난하러 왔겠나.》

《허허, 거참, 당돌하다. 나이로 보면 우리 집 아들녀석 비슷하겠군.》

《이거 망신스러운걸… 아들벌 되는 애와 한자리에서 시험을 치다니, 원…》

그러나 소년은 아는지 모르는지 한곳에 태연히 자리잡고 앉아 눈섭 한번 찡그리지 않았다. 그가 바로 14살의 소년 리제현이였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는 자기딴의 자신심이 있었다. 일찌기 아버지의 닥달을 받으며 시문을 공부한 덕에 그는 웬간한 글에는 막히는것이 없었고 누가 운을 떼면 그 자리에서 시를 척척 지어내군 하였다. 열살 남짓한 나이에 벌써 한다하는 고관대작들의 청에 따라 묘지명(죽은 사람의 성명, 신분, 경력 등을 쓴 글)까지 써준 그였다.

이윽고 동켠 하늘에 해가 떠오르자 왕의 명을 받은 감찰이 나타났다. 곧 대문이 잠기고 응시자들에 대한 점명이 시작되였다.

… …

《…리제현!》

《예잇.》

애된 목청이 시험장에 울렸다. 시험장이 갑자기 술렁거렸다.

응시자들의 이름을 불러 내려가던 장시관 권부가 리제현을 이윽히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그대도 과거에 응시하러 왔는가?》

《예잇, 그렇나이다.》

대답 또한 당돌하기 그지없었다.

응시자들이 자리를 정돈하고 질서있게 앉자 장시관이 동쪽, 서쪽에 긴 나무막대기를 세우고 시험제목을 그우에 걸어놓았다. 모두들 열심히 글을 짓기 시작하였다.

리제현도 잠시 생각을 더듬더니 이어 붓을 달리기 시작했다. 꽤 까다롭기는 했으나 문제될것이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쓰기를 끝낸 리제현은 답안지를 바치고 시험장에서 물러나왔다. 그만하면 앞선 축이였다.

밖에 나오니 그를 따라왔던 심부름군이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고 물었다.

《도련님, 잘 쓰셨사와요? 어찌될것 같나이까?》

《글쎄, 쓰느라고 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

한낮이 되자 승선(왕의 명령 전달관)이 쇠로 만든 도장을 들고 들어왔다. 승선이 시험관들과 인사를 마치자 관원이 거두어들였던 과거응시자들의 답안지를 바쳤다. 승선이 이를 받아 도장을 다 찍으니 내시가 왕이 직접 보낸 술을 들여왔다. 한참동안 모여앉아 례를 차려 술을 마신 후 승선이 돌아가고 시험관들이 주런이 따라서서 그를 바래웠다.

반나절쯤 지나서 승선이 다시 나타났다. 시험관들이 보는 앞에서 시험답안지의 봉함을 터뜨려 합격자들의 명단을 쓴 방(공시문)을 내걸었다.

그런데 합격자들의 제일 첫머리에 리제현의 이름이 붙어있는것이 아닌가. 리제현은 자기 눈을 의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자기 이름이였다.

《장원 리제현.》

온 성균관이 법석 들끓었다.

《장원급제한 사람이 누구요?》

《이제 겨우 열네살난 애숭이라누만.》

《원 저런…》

한쪽에서 이런 감탄의 목소리가 울려오는데 다른 쪽에서는 시험에서 떨어진자들이 울며불며 야단하였다. 잠시후 장시관으로부터 과거에 합격하였다는 흰 종이증서인 백패를 받아든 리제현은 기쁜 마음으로 성균관을 나섰다.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오니 이미 소식을 받은 부모들과 온 집안식구들이 그를 반가이 맞아들이며 기뻐서 어쩔줄 몰라했다.

《아버님. 부모님덕분에 오늘 장원급제하였나이다.》

《장하다. 장해!》

리제현의 부모들은 아들의 손을 잡아 대청에 끌어올리며 얼싸안고 돌아갔다.

이날 리제현의 아버지는 아들의 장원급제를 축하하여 큰 잔치를 베풀었다. 시험관들도 청해들이고 가고오는 모든 사람들을 잔치상에 청했다. 그속에는 과거시험때 장시관으로 뽑혀 응시과정을 주관하던 권부도 있었다.

《동암, 내 지금껏 적지 않게 장시관으로 뽑혀 이 놀음을 해오네만 이 댁 아들같은 출중한 인재는 처음 보오. 정말 아들을 잘 두었소! 허허.》

그러면서 권부는 술잔을 들고 리제현을 다시금 눈여겨보았다. 훤칠한 이마에 먹으로 찍은듯한 검은 눈섭이 또렷이 퍼졌는데 척 보기에도 만만치 않은 인상을 주었다.

좌석에 앉았던 사람들이 모두 권부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며 한마디씩 칭찬의 말을 하였다.

《허, 열네살에 진사라… 앞으로 크게 운이 트일거요.》

《암, 여부가 있을라구!》

 

능란한 림기응변

 

어느 해인가 충선왕이 원나라에 가있을 때 있은 일이였다. 책과 학문을 몹시 좋아한 충선왕은 원나라 학자들과 문인들과 자주 왕래하면서 옛글이며 고금의 력사에 대한 견해를 교환하군 하였다.

어느날 문인들이 시를 지어 충선왕에게 주었는데 왕도 그들에게 답례로 시 한수를 지어주었다.

그런데 왕이 쓴 시에 《닭소리는 흡사 문앞의 버들이로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사실 의미가 제대로 통하지 않는 어설픈 시구였다.

아니나 다를가 시를 읽어본 그 나라 문인들은 그 문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 글은 옛 글의 어느 구절에서 가져다 쓰신것이온지 가르쳐주셨으면 하옵니다.》

왕은 대답이 궁했다. 그 시행은 어느 옛 글이나 유명한 이야기에서 따온것이 아니고 그저 생각나는대로 써갈긴 글귀였던것이였다. 그나마 의미가 잘 통하지 않으니 그 어떤 고사나 경구인줄 알고 묻는 모양이였다.

이때 이 장소에 함께 있던 리제현이 왕의 딱한 처지를 인차 눈치챘다. 시급히 사태를 수습해야 했고 그러자면 눈깜짝할사이에 모든 지혜를 다 발동하여 림기응변할수 있는 명답변을 찾아내야 하였다. 그렇다고 리치에 닿지 않는 생뚱같은 거짓말을 꾸며낼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비상한 사색의 한순간에 리제현은 드디여 그 명답을 찾아냈다.

문인들을 한번 쭉 둘러보고난 리제현은 겸손하면서도 의젓하게 말꼭지를 뗐다.

《우리 나라에는 이런 시구절이 있습니다.

 

지붕우에 해가 뜨니

누런 닭이 울음 운다

꼬끼요 길게 뽑는 소리

늘어진 버들가지처럼 길구나

 

이 시에서는 닭의 울음소리를 버들가지의 가늘고 긴 모습에 비기고있습니다. 우리 임금님께서 지으신 시의 구절이 바로 여기서 따온것입니다.》

이 말이면 문인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리제현은 다음 통장을 불렀다.

《옛날 당나라 시인 한유도 거문고를 노래하면서 〈뜬 구름 버들꽃은 뿌리도 꼭지도 없네〉라고 하였으니 이는 거문고소리를 버들꽃에 비긴게 아니겠소.》

리제현의 이 말에 문인들은 머리를 끄덕이며 그의 해박한 지식과 사리정연한 론리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리제현의 덕분에 결국 충선왕은 창피를 면하고 《시 잘하는 임금》으로 떠받들리우게 되였다.

이 일화를 기록하고있는 《청비록》의 필자는 이런 시가 실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임금의 궁색함을 풀어주고 가히 나라를 빛내였다고 할만하다.》고 평하였다.

 

충신의 거짓말

 

세상에 충신이 거짓말을 하는 일이 어디 있는가? 그런데 리제현은 거짓말을 하고 충신으로 찬양받았다. 이것이 과연 일화거리가 될만하지 않는가!

어느해인가 원나라에 갔던 충선왕은 그곳에서 한 녀인을 알게 되였다. 그 녀인은 고려왕에게 마음이 끌려 어느덧 정이 깊어지게 되였다.

충선왕이 귀국하는 날 그 녀인은 멀리까지 따라나와 왕을 바래드리면서 리별의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녀인이 너무 그러니 왕도 그와 무심히 헤여지기 아쉬워서 련꽃 한송이를 꺾어 그에게 안겨주고 왔다.

돌아온 후 충선왕은 이따금 그 녀인을 생각하군 하였다. 이것은 자기를 못내 따르던 녀인에 대해 잊지 못하는 애틋한 심정에서였다.

세월이 퍽 지난 후 어느날, 왕은 리제현에게 통지하여 녀인을 만나보고 올것을 분부했다.

리제현이 그 녀인을 찾아가니 녀인 역시 충선왕을 못내 그리워하다가 그만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워 심하게 앓고있었다.

충선왕의 소식을 들은 녀인은 눈물을 흘리면서 몹시 기뻐하였으나 기력이 진하여 말은 못하고 겨우 붓을 들어 시 한수를 지어주었다.

 

주고 가신 련꽃송이

붉고붉어 싱싱터니

꺾은지 몇날인가

시들기 나와 같네

 

리제현도 그 녀자의 갸륵한 소행이 매우 기특하였다. 그래서 녀인이 병치료를 잘하도록 극진히 도와주고 귀국하였다.

리제현은 충선왕을 만나 그 사이 진행된 일들에 대해 보고를 하였다. 이때 왕은 말을 다 듣고나서 어줍은 태도로 그 녀인에 대해 리제현에게 물어보았다.

《그가 잘 있더냐?》

《네 잘 있습니다.》

《그래 어떻게 지내더냐? 아직 나를 잊지 않고 그리워하고있던가?》

리제현은 머뭇거리다가 대답하였다.

《그랬으면 신의 마음도 기뻤을것이오이다.…》

《그게 무슨 소린고?》

《말씀올리기 거북하옵니다만 제가 그 녀인을 찾아갔을 때 그는 술집에서 딴 사내들과 술을 마시며 즐기고있었소이다.》

《뭐라구?!》

《그래 조용한 틈을 타서 겨우 만나 여기 소식을 전하고 다음날 만나자고 약속하였더니 다시 나타나지 않았을뿐아니라 그뒤 종적을 찾지 못해 여러날 헤매다 돌아왔나이다.》

《에익, 더러운 년!》

충선왕은 분기가 살아올라 침을 탁 뱉았다.

《내가 이웃나라의 그런것을 가련히 여긴것부터가 잘못이지.》

이때 리제현의 등곬으로는 식은 땀이 흘렀다.

충선왕은 그후부터 녀인에 대한 생각을 싹 잊어버렸다.

몇해가 지난 어느해 왕의 생일날이였다.

왕에게 술잔을 드리는 차례가 되자 갑자기 리제현이 왕의 앞에 한발 나서며 무릎을 꿇고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신이 전일에 큰 죄를 저질렀으니 처벌해주소이다.》

《죄라니, 그게 대관절 무슨 소린고?》

리제현은 이때에야 그 녀인이 써주었던 시를 품안에서 꺼내여 왕에게 바쳤다. 그리고 전후사연을 아뢰이며 죄를 스스로 청해나섰다.

녀인의 시를 한동안 들여다보며 말없이 서있던 왕은 이윽고 천천히 리제현을 잡아일으키며 말했다.

《그대가 그때 이 시를 나에게 주었더라면 난 만사를 제쳐놓고 그리로 달려갔을것이요. 허지만 경이 나를 걱정하여 말을 꾸미였으니 내 대업을 이룩하는데 허물이 없었도다. 그러니 이는 재앙을 막아준것이요. 경의 충심에 감동할뿐이노라.》

그리고는 부드럽게 웃으며 축배를 청하였다.

 

이국살이탓

 

1315년 원나라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은 리제현이 어느날 그 나라 강남지방의 보타굴에 간적이 있었다.

이날 화가 오수산이 리제현의 초상을 그려주었다. 북촌 탕선생이 그우에 글까지 썼다.

기쁜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연경에 돌아온 리제현은 누구에겐지 주었다가 그만 잃어버리고말았다. 그로부터 32년만에 다시 연경에 갔을 때 그는 뜻밖에도 그 그림을 찾게 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그림과 자기의 얼굴을 대비해보던 리제현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홍안의 모습은 씻은듯 사라지고 이제는 깊이 패인 주름살만이 얼굴을 가득 덮고있는것이 아닌가.

(세월은 속일수 없구만…)

귀국하여 집에 그 그림을 가지고 들어오니 손자들이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할아버지, 이게 누구나요?》

《허허 누구냐구? 그게 바로 나란다.》

《아니예요. 이건 할아버지가 아니예요.》

손자들이 리해가 되지 않는듯 서로 마주 보며 머리를 기우뚱거렸다.

《이건 할아버지가 옳다. 그림에서 보는것처럼 젊었던 내가 이국살이 30년에 오늘의 나처럼 이렇게 늙어버리게 되였구나. 양고기니 뭐니 아무리 잘 먹어도 이역에서 먹는건 보람이 없구나. 고국의 순채국이 이국의 양고기보다 훨씬 낫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늙은건 바로 이국살이 탓이다.》

그러면서 리제현은 시 한수를 지어 손자애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옛날 그려둔 화상을 보니

귀밑머리 푸르른 청춘이구나

 

얼마나 긴 세월을 지나왔느냐

그때의 성한 모습 다시 만났네

 

이 화상 다른 이의것이 아니라

오늘날 나의 몸의 전신이라네

 

손주아이놈들 도무지 몰라보고

이게 누구냐고 서로 바라보네

 

《나이가 많은것이 무슨 상관이요?》

 

근 30여년간 외국에서 외교활동을 하던 리제현은 1341년 54살 되는 해에야 조국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이국살이기간 언제나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애를 태우던 그는 조국에 돌아오자 그 모든것을 봉창하려는듯 이름난 절승경개들을 빠짐없이 찾아다니였다.

어느해엔가 그가 금강산유람의 길에 나섰을 때였다.

그의 나이가 많은것을 걱정하여 같이 길떠나던 젊은 사람들이 말했다.

《이젠 나이도 많으신데 집에서 편히 쉬시는것이 좋지 않겠나이까?》

《나이? 금강산구경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요? 공들도 죽어 후회하지 않겠거든 어서 따라서오.》

리제현은 이렇게 말하며 앞장에서 지팽이를 훨훨 내짚고 걸었다. 며칠을 고생하여 드디여 금강산에 이른 그는 내금강, 외금강 등을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그 신묘한 경치를 감상하고 시도 많이 남기였다. 보덕굴에 이른 리제현은 일일이 그 경치를 감상하고 이런 시를 썼다.

 

바위굽이에 찬바람 일고

시내물 깊고 푸르다

 

지팽이 메고 절벽우를 바라보니

외기둥에 실린 집 구름에 떴네

 

마하연 암자에 가서도 시 한수를 남기였다.

 

산속에선 한나절이 지났는데도

풀숲이슬이 신발을 적시누나

 

오랜 절에 중은 살지 않는듯

흰구름만 뜰안에 가득차있네

 

금강산의 아름다운 경치에 취해 날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유람에 열중하던 그는 그로부터 한달후에야 집에 돌아올수 있었다.

리제현의 시가운데는 박연폭포에 대하여 노래한 시도 있다. 언제 어느해에 쓴 시인지는 명백히 알수 없으나 시의 내용으로 보아 따뜻한 봄철에 박연폭포에 찾아가 거기에서 직접 느낀 체험을 노래한것으로 짐작된다.

 

때는 봄철이라 산기운 아름답고

골짜기 꾀꼴새는 사람을 부르는듯

 

탐승함은 오래인 숙망이였기에

이 좋은 경개 구경 참으로 즐겁구나

 

침침한 옛 소엔

다가서려해도 마음부터 조여지는데

 

신령스런 그 무엇이 깊은 물을 엄습했나

날으는 폭포수 천길을 내리찧네

 

깊은 물살은 하늘을 내려쏟는듯

쿵쿵 꿈틀거려 숲과 바위를 움직일듯

 

옳은 책망이라면 종아리라도 맞으리

죽을 때에 피리소리 듣기 위하여

 

사귀는 감정이야 마음속에 달렸거니

어찌 이승과 저승이 막혔다 하랴

 

란만히 피여 붉은 바위틈의

꽃을 뜯어다가 백성들과 함께 술마시세

 

우리 백성 섬기는데 모든 힘을 다 바치여

지성어린 그들의 농사일에 보답하리

 

시에서 노래된것처럼 그는 자연의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면서도 백성들의 순결한 마음을 읽을줄 알았고 또 뜨겁게 사랑할줄 알았다.

조국의 절승경개를 노래한 리제현의 시중에는 《송도팔경》과 《소상팔경》과 같은 작품들도 있다. 이는 시인의 가슴속에 차넘치는 열렬한 애국주의사상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산 증거물들이다.

 

《선비의 일생은 배타기와 같소》

 

어느날 신원외가 정우곡과 함께 리제현을 찾아왔다. 사연인즉 나라의 명을 받고 원나라에 가게 되였는데 다년간 원나라에 가있은 리제현에게서 조언을 받자는것이였다.

원나라의 조정으로부터 민간생활 그리고 지방별 풍습에 이르기까지 세세히 가르쳐준 리제현은 이렇게 말했다.

《뭐니뭐니 해도 고려국의 신하로서의 자부와 기개를 잃지 않는것이 중요하오. 재상 홍약이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추모하여 온 평양성이 눈물을 흘렸는데 마치 대동강물이 넘치는듯 했소. 그건 다름아닌 그의 애국의 높은 뜻때문이였소.

그런데 평양에서 태여났노라고 하는 한 놈팽이는 원나라에 가서 고려조정을 비난하여 입부리를 놀렸소. 그야말로 민족의 얼이 없는 놈이지. 그대도 원나라에 가거든 이것을 잊지 마오. 그리고 항상 고려국의 선비로서의 기개를 떨치오.》

《명심하겠소이다.》

이미 신원외의 학식과 인품을 익히 알고있던 리제현은 믿음어린 눈길로 그를 다시한번 쳐다보고 술잔을 권했다.

《자, 어서 드오.》

《고맙소이다.》

신원외로 말하면 어릴 때부터 글을 읽어 영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능히 시문을 다룰줄 알았으며 쌓인 문서들을 민첩하게 처리할줄 알았다. 그리하여 벼슬을 시작한지 몇해 안되여 제학, 대언을 거쳐 밀직 첨의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랑관이 되였다. 그리고 선배와 여러 동료들과 더불어 원로들에게 물어가면서 정치를 잘하고 낯빛을 바로 하여 왕을 도왔으며 지성으로 외국손님들을 잘 대접하여 인망도 높았다.

이러한 그가 이제 고려국의 선비로 원나라의 연경으로 가게 된것이다.

신원외와 함께 왔던 정우곡이 문득 일어서며 좌중을 둘러보고 말했다.

《내가 먼저 시구를 뗄테니 그 운에 따라 모두 신공을 축하하여 시 한수씩 짓는게 어떻겠소?》

그러자 모두들 기꺼이 응하며 운에 따라 시를 지었다.

리제현은 자기차례가 오자 잠시 생각을 더듬더니 이렇게 말했다.

《난 시보다 이야기를 한마디 하려 하오. 선비의 일생은 배타기와 같소. 그의 재주는 노가 되고 그의 명운(운명)은 순풍이 되여 유유히 먼바다를 건느는것이요. 재주와 명운을 타고나서도 그 먹은 뜻이 낮으면 마치 노가 성하고 풍세가 리로와도 배를 젓는자가 서투른것과 같아 능히 만섬의 무게를 맡겨 머나먼 바다를 건너게 할수 없는것이요.…

지금 신원외의 배는 강과 호수에서 바다로 나가는것이요. 진실로 능히 그 의를 돛대로 하고 그 신을 돛으로 하고 그 례를 닻줄로 하고 그 지를 닻으로 하고 삼가 공경하며 부지런함을 배바닥의 틈을 막는 솜으로 삼을것이니 어떤 무거운것이라도 맡지 못할것이 없고 아무리 먼데라도 이르지 못할 곳이 없오. 또 아무리 험난한 곳이라도 건너가지 못할수 없을것이요.》

리제현이 말을 마치자 모두들 존경어린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신원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듯 하더니 진중한 어조로 말했다.

《좋은 말씀 해주어 정말 고맙소이다. 앞으로도 반드시 명심하겠소이다.》

신원외는 그후 원나라에 가서 고려국의 선비로서의 기개를 크게 떨쳤다.

 

인생은 마감까지 빛나야 한다

 

생의 말년에 리제현은 오로지 저술사업에 전심전력하였다.

그가 저술활동에 전심하고있던 어느날 한 친구가 그에게 찾아와 넌지시 물었다.

《공은 이미 이룩한 일도 많고 그만하면 한생을 남부럽지 않게 보냈는데 어찌하여 마감까지 이 일을 사서 하시오?》

그러자 리제현은 그를 쳐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허허, 나이가 고목이라고 정신도 고목이겠소? 사람은 마감까지 한생을 빛나게 살아야 하오. 그래야 진짜로 빛이 나는 법이지. 지금 일부 사람들은 늙어서 산수에만 묻혀 여생을 보내거나 한가히 자식들의 대접만 받으며 값없이 생을 보내고있는데 그런 사람들은 마가을의 락엽과 한가지요. 사람이란 나무잎과 달라 처음부터 마감까지 푸르러야 하는거요.》

친구는 리제현의 말에 감동되여 머리를 끄덕였다.

1367년 어느 여름날 리제현은 자기의 한생을 돌이켜보며 《익재자신을 두고》라는 제목으로 된 한편의 시를 지었다.

 

홀로 배워 아는것이 고루하고

늦게야 생의 길을 배웠도다

이렇게 불행함은 나자신의 탓이거니

어찌 스스로 반성하지 않을소냐

무슨 덕을 백성에게 베풀었기에

네번이나 나라의 정승이 되였던고

다행히 벼슬에서 물러났도다

여러 사람들의 흉봄을 입으며

뛰여도 못난 이 모습을

또한 어찌 그림으로 그려

나의 자손에게 보일것이냐

한번 돌아보고 세번 생각하여

잘못이 없는가 지극히 조심하며

아침이고 저녁이고 힘쓰고 힘써

요행을 바라는 일 하지 않으면

그릇됨을 거의 면할가 하노라

 

이 시를 남기고 며칠 지난 어느날 리제현은 80살을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참을수 없는 일

 

어느날 리제현은 원나라의 규장각 학사 우집이 쓴 《경세대전》을 보게 되였다.

거기에는 이렇게 씌여있었다.

《원나라의 시조 태조황제 12년에 원나라군대가 거란의 반항을 토벌하는데 고려 경계까지 이르렀을 때 고려사람 홍대선이 이에 항복하고 길안내를 하면서 원나라군과 함께 자기 나라를 공격하여 그 왕을 항복시켰다.》

이 대목을 읽어본 리제현은 분기를 참을수 없었다.

우집이 말한 이른바 거란의 반항자라는것은 금산왕자였다. 그는 황하의 북쪽지방에 근거지를 잡고 스스로 《천성》이라는 황제의 년호까지 붙인 다음 군사를 내몰아 닥치는대로 정복하면서 우리 나라의 북쪽국경까지 쳐들어왔다.

이때에 원나라 태조가 장수 합진과 찰라를 보내여 그를 토벌케 하였다.

때는 1218년 고려 고종왕 5년 겨울 12월이였는데 눈보라가 몰아치는 엄동설한이여서 어느쪽 군대나 할것없이 군량을 계속 이어댈수가 없었다. 적들도 피로하여 견고하게 지키기만 하고있었는데 고려왕이 군대와 량식을 내여서 원나라군대와 함께 거란군을 공격하여 금산왕자의 목을 베고 그의 군대를 무찔러버렸다. 그리고 이때부터 두 나라가 동맹을 맺었었다.

리제현은 즉시 이러한 사실을 밝히고 우집의 그릇된 론조를 반박해나섰다.

그는 이렇게 썼다.

《우집의 붓대는 원나라군대가 우리 나라에 들어왔기때문에 우리가 부득이 항복이나 한것처럼 묘사하면서 우리 군대가 원나라 군대보다 오히려 우수하게 싸운 공훈과 두 나라의 평등적이며 우의적인 동맹관계는 기록하지 않았다. 또 홍대선으로 말하면 국경 고을에서 사는 한명의 하찮은 관리인데 어떻게 도망하여 항복했다고 한들 무슨 군대가 있어서 원나라 군대와 협력하여 자기 나라를 공격하였겠는가.》

《경세대전》에는 또한 이렇게 씌여있었다.

《원나라 태종 3년에 찰라의 무리를 보내여 고려를 공격하였는데 그 왕이 또 항복하므로 서울을 비롯하여 모든 부와 현에 72명의 다로하치를 임명하여두고 원나라군대를 철수시켰던바 그 이듬해에 고려가 다로하치를 모조리 죽여 원나라를 반대하고 강화도를 지키고있었다.》

리제현은 여기에도 반박의 붓을 들었다.

《그렇다면 그 소위 다로하치라는것은 원나라 조정에서 직접 임명한것인가, 아니면 고려에 들어왔던 장수가 규례에만 의거하여 제 마음대로 임명한것인가, 부와 현은 적은것이니 말할 나위가 없다 하더라도 개성과 평양의 다로하치는 하찮은 인물이 아닐것인데 그들의 이름을 내보이지 않은것은 무슨 까닭인가. 또한 이렇게 많은 수의 다로하치를 임명하였는데 그들을 전부 죽인다는것은 적은 일이 아니어늘 우리의 력사에 기록된바 없고 늙은이들에게 물어도 알수 없으니 더욱 의문스러운 일이다.

그때의 실정을 미루어본다면 원나라 왕은 몽골지방에 있었는데 우리 나라와 10 000여리나 떨어져있었으므로 그는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사건의 진상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찰라가 고려와 거란의 구경지방에서 홍대선과 함께 략탈을 일삼으며 우리의 공훈을 말살하고 우리의 없는 죄를 거짓보고하여 원나라 황제를 분노케 함으로써 우리 나라를 침략하게 한것이다. 그런데 우집이 자세히 조사를 아니하고 함부로 기록한것이다.

아, 한심하구나. 자고로 군대를 거느리는자가 임금을 속이고 병사들을 괴롭혀 부귀를 도적질하지만 멀리에 떨어져있는 사람이 그 진상을 자세히 밝히지 못하는것이다. 그러므로 함부로 목숨을 잃는자가 이루 헤아릴수 없는것이니라.》

리제현은 이 글을 곧 원나라 조정에 내여 우리 나라에 대한 그릇된 력사기록을 바로잡도록 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원나라의 학자들과 문인들은 저저마다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역시 고려국의 신하다운 기개가 있소!》

《잘못했다간 큰 코를 떼우겠군. 조심히 알아서 처리하는게 좋을듯 하오!》

 

 

《사나이 편하게 뜻을 이룰수 없다.》

《집이 가난하다 비웃지 말라. 가난은 흠이 아니다.》

《서리가 내려서야 가을인줄 안다.》

《은혜를 다 갚지 못했거든 애를 써서 편안함을 찾지 말라.》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는것이 진짜 용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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