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  영

(1316ㅡ1388)

 

고려후기의 애국명장.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최영은 료동원정을 조직하고 왜구, 홍두군을 비롯한 외적을 반대하는 싸움에서 용맹을 떨친 애국명장이였습니다.》

최영은 벼슬이 높지 않은 량반가정에서 태여났으며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였다. 어려서부터 체격이 우람하고 힘이 셌다. 그는 기울어지는 나라를 구원하는데 한몸 바칠 굳은 마음으로 무예를 열심히 익혀 18살경에는 칼쓰기, 말타기, 창찌르기, 활쏘기 등에서 막히는것이 없는 청년무사가 되였다. 이때부터 최영은 자기의 뜻대로 나라를 위한 애국의 길에 한생을 바쳤다. 《고려사》에서는 그가 성질이 강직하고 청렴하며 적앞에서도 태연하고 화살이 비발치는 전장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하였으며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서 언제나 규률을 엄격히 하여 크고작은 수많은 전투들에서 승리하였다고 썼다. 최영의 생존당시에 그만큼 많은 전쟁을 겪고 그만큼 많은 전투를 지휘하여 매번 승리를 쟁취한 무관은 없었다.

최영은 처음에 양광도를 지키는 한 무관으로서 왜구의 침입을 반대하는 싸움에서 공을 세웠으며 그후 여러 벼슬을 거쳐 문하시중까지 지냈다. 그는 자기의 생애에서 100여차례나 외적들과 싸워 한번도 패한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오래동안 나라의 군사지휘권을 잡고있으면서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세웠다. 왜구의 략탈만행을 막기 위하여 큰 함선 백수십척을 무어 해안경비를 강화하게 하였으며 군대의 부족을 메꾸기 위하여 승군(중들로 무은 군대)를 광범히 조직하는 등으로 나라의 방위력강화에 힘썼다. 1359년 40 000여명의 홍두군(홍두적)이 침공해왔을 때 서북면병마사로서 그를 격퇴하는데서 큰 공을 세웠으며 1362년에는 개경에 침입한 홍두군을 격멸하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363년에는 원나라의 앞잡이인 김용일당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참가하였고 1374년에는 양광, 전라, 경상도 도통사로 임명되여 314척의 함선에 2만 5 6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탐라(제주도)에 둥지를 틀고있던 원침략자들의 잔여세력을 무찌르고 제주도를 다시 찾았다. 그는 대신으로서 대토지소유자들을 고려왕정에서 몰아내는데서 중심적인물로 활동하였다. 그는 1376년에 홍산(충청남도 부여)전투와 승천부(개풍군)전투를 비롯한 수많은 전투들에서 왜구를 무찔렀다. 당시 왜적들은 《백발 최만호》(최영)란 말만 들어도 달아났다고 한다. 1388년 그는 8도도통사로 임명되여 약 50 000명의 료동원정군을 편성하고 이를 총지휘하면서 평양에 머물러있었다. 그러나 원정군의 부사령관격인 우군도통사 리성계는 배신적으로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세워가지고 개성에 쳐들어와 정권을 잡고 최영을 귀양보냈다가 곧 살해하였다. 최영은 10대에 군대생활을 시작한후 72살에 피살될 때까지 한생을 화살이 비발처럼 날고 칼빛이 번개인양 번쩍이는 전쟁마당에서 살았으나 《전시의 분망한 가운데서도 이따금 시를 읊는것으로 락을 삼았다.》(고려사) 이와 같이 최영은 애국명장인 동시에 애국적문인, 애국적시인이였으나 그가 리성계에 의해서 피살되고 집안이 풍지박산되였던 사정과 관련하여 그가 《이따금 읊은 시》들이 거의 다 흩어져 없어지고말았다. 남아있는 작품가운데서 시조 《록이상제 살지게 먹여…》가 널리 알려져있다.

 

《록이상제 살지게 먹여…》

 

평시조.

원문:

록이상제 살지게 먹여 시내물에 씻겨 타고

룡천설악을 들게 갈아 둘러메고

장부의 위국충절을 세워볼가 하노라.

해석문:

날랜 명마를 살지게 잘 먹여 맑은 시내물에 깨끗이 씻어서 타고

유명한 좋은 검을 잘 들게 갈아서 둘러메고

사나이의 나라 위한 충정을 다해볼가 하노라

 

※ 록이, 상제는 옛날의 명마 이름들이고

   룡천, 설악은 옛날의 유명한 검의 이름이다.

 

이 시조는 북방에서 홍두적의 침입이 계속되고 남쪽에서 왜구의 침범이 빈번한 때 이를 물리치기 위한 고려인민들의 반침략애국투쟁이 줄기차게 벌어지던 14세기의 고려말기를 시대적배경으로 하고있다.

시조에는 나라를 지키려는 군인의 애국적기개가 구현되여있다.

작품에서는 나라를 지키는 싸움에 한몸 바치려는 시인의 뜨거운 애국열의가 웅장하고도 힘있는 시적화폭을 통해 기백있게 노래되고있다.

작품은 기백있고 진실한 시어구사를 통해 장쾌한 시적정서를 살리고있으며 형상의 박력을 보장하고 사상적내용도 한층 두드러지게 하고있다. 세련되고 특색있는 형상속에 애국주의사상감정을 기운차고 깊이있게 반영한것으로 하여 이 시기 문학에서 의의를 가진다.

 

적장과 싸워이긴 소년군사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싸움때에 있은 일이다.

어느날 왜군장수가 거드름을 피우며 장수들끼리 붙어 판을 가르는것이 어떻겠는가고 하였다.

분기가 치민 고려군의 장수가 말에 올라 싸움판에 뛰여들려고 할 때 나어린 군사 하나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그놈의 목을 베겠소이다.》

얼굴은 애되여 보였으나 다 자란 름름한 체구는 믿음직스러웠다.

《네가 적장의 목을 벨수 있단 말이냐?》

《믿어준다면 죽기를 각오하고 성공할것입니다.》

《좋다. 내 말에 올라 네가 나가보아라.》

대장인 도순문사는 너무 기특하여 제 말을 내주며 어깨를 다독여주었다. 그 군사가 바로 얼마전에 입대한 최영이였다. 최영은 장대한 체구에 긴칼을 뽑아들고 위엄있게 달려나갔다.

《왜적의 괴수는 어서 나와 내 칼을 받아라.》

적대장놈이 보니 상대가 애어린 군사였다. 그놈은 곁에 선 장수에게 일렀다.

《네가 나가 해치우고 오너라.》

기세충천하여 달려나오던 왜군장수는 순식간에 목이 달아났다.

고려군진지에서는 함성이 터져나왔다.

적진에서는 또 다른 장수를 내보냈지만 똑같은 신세가 되고말았다.

이렇게 되자 적대장놈이 하는수없이 나섰다.

적장은 만만치 않았다. 승부없는 수십차례의 접전, 드디여 백수십여차례의 접전끝에 최영은 끝내 왜놈대장의 목을 치고야 말았다.

고려군진지에서는 장수들과 군사들이 막 쓸어나와 적진을 향해 달려갔다.

왜적들은 떼죽음을 남긴채 간신히 도망쳤다. 대장이 없는 대오는 오합지졸이였다. 이것이 최영의 첫 싸움이였으니 이것으로 하여 최영은 그 이름이 조정에까지 오르게 되였다.

싸움이 끝나자 도순문사는 최영을 불렀다.

《그대는 뉘집 자손인고?》

《소인은 평장사 최유청의 5대손으로서 사헌규정(관리의 잘못을 다스리는 벼슬) 최원직의 아들이옵니다.》

《음, 과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로다.》

최영은 그후 싸움의 공로로 왕을 호위하는 군사로 승진되였다.

 

《역시 용병술이야》

 

100여차의 크고작은 싸움에서 단 한번도 패한적이 없는 최영.

그는 벼슬이 높아도 언제나 생활을 검박하게 하였다.

최영이 16살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갔는데 그때 아버지 최원직은 이런 유언을 남겼다.

《너는 언제나 금을 돌과 같이 보아야 하느니라.》

이 말은 항상 자신을 수양하여 물욕이 없이 검박하고 소박하게 살라는 의미깊은 유언이였다.

최영은 한평생 아버지의 유언을 지키였다. 비록 그 세력이 중앙과 지방에 뻗치였으나 남의것을 넘겨다보지 않았으며 국록만으로 먹고 살기에 만족해했다.

당시 재상들의 집에서는 서로 청해다가 바둑을 놀면서 심심풀이를 하였는데 그 뒤끝에는 요란한 음식상을 차려 자기들의 위세를 돋구는 습관이 있었다. 어느날 최영도 재상 몇을 청해다가 잠시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주인인 최영의 집에서는 한낮이 지나도록 음식상을 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남의 집에 온 재상들이 량반의 체면에 배고프다고 말할수도 없었다. 저녁녘이 거의 다 될 무렵에야 기다리던 음식상이 올라왔는데 상우에 놓인것은 겨우 기장밥에 나물국이였다. 그외에 찬 몇가지뿐…

손님들은 배가 고팠던지라 밥을 맛있게 들며 말했다.

《이댁 음식은 언제봐야 수수한데 맛이 있거든!》

《별것도 아닌데 특별하단 말이외다.》

최영 역시 처음 듣는 말은 아니였다. 그는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역시 이것도 용병술(군대를 지휘하는 묘술)이야 하하하…》

이것은 최영의 집안 생활자체가 늘쌍 수수했던것을 말해준다. 다만 적절한 시각에 요긴하게 처리하는 솜씨로 하여 소박한 음식도 진수성찬보다 더 큰 효과를 냈던것이다.

 

《김용은 그따위것때문에 량심을 잃었다》

 

최영은 집안생활에서 검박하였을뿐아니라 밖에 나와서도 탐욕을 독이 들어있는 약처럼 싫어하였다.

1363년에 김용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였다.

김용이 반란을 일으키고 저들무리를 보내여 흥왕사의 행궁(왕이 왕궁밖에 나가있을 때의 림시거처지)을 습격하였다. 최영은 사변이 일어났다는 련락을 받은 즉시 우제, 안우경, 김장수 등 여러 장수들과 함께 군사들을 이끌고 달려가서 반란의 무리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위기를 수습하였다.

김용이 일보던 곳과 집안팎을 샅샅이 수색하는 과정에 어떤 사람이 희귀한 구슬알을 찾아내여 도당에 바쳤다. 도당이란 나라의 모든 정사를 통제하고 벼슬아치들의 사업을 통제하는 최고관청이였다. 하도 희귀한 보물이여서 도당에 있던 적지 않은 벼슬아치들은 그것의 이름이 무엇인지조차 몰랐다. 누군가가 그것을 자세히 살펴보더니 《응, 알만하오. 이건 〈묘아안정주〉라고 하는거요. 무엇으로 만든것인지는 모르겠소만 글자뜻은 〈고양이의 눈알구슬〉이라는거요.》라고 하였다.

그 말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나도 보자》, 《나도 좀 구경하자.》하고 저마끔 구슬알을 보려고 손을 내밀고 목을 길게 늘였다. 도당안이 떠들썩해졌다. 사람들이 자기네만 구경하는것이 게면쩍었던 모양으로 최영에게도 한번 보라고 권고했다.

이때 최영은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람들에게 준절히 말했다.

《김용은 그따위것때문에 량심을 잃었다. 여러분은 무엇을 구경하고있는가?》

그 말에 모두들 길게 뽑았던 목을 자라목처럼 움츠리고 입을 더는 벌리지 못하였다.

 

신돈의 무리들을 조소하여

 

최영이 전장에서 세운 공이 크고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자 중 신돈을 비롯한 시비군들이 거짓죄를 만들어 그를 없애기 위해 피눈이 되여 날뛰였다.

어느날 최영이 사냥을 나갔는데 그사이 왜구가 강화도에 들어와 무고한 백성들을 죽이고 재물을 로략질하였다.

련락을 받은 최영은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에 가서 왜적들을 내쫓고 놈들에게 빼앗겼던 재물들을 백성들에게 모두 돌려주고 돌아왔다. 신돈은 최영이 사냥놀이에 갔기때문에 왜적이 덤벼드는것을 막지 못했다고 트집을 걸면서 죄목을 만들어 왕에게 고발하였다.

당시 공민왕은 신돈의 음모에 넘어가 마침내 최영을 강직시켰다.

《상감마마, 소신은 벼슬을 바라지 않소이다. 그러나 간사한 무리들을 주의하시고 옥체보존하옵소서.》

최영은 떠나갔지만 신돈은 최영을 마지막까지 죽이려들었다. 이때 합포만호인 정사도가 이 사실을 알고 상소하였다.

《전하, 최영은 아무런 죄가 없소이다. 그는 오로지 전하와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무사이옵니다. 그에게 내린 벌은 천만번 부당하오이다.》

왕이 아무리 생각해보아야 최영은 충신이였다. 공민왕 원년에 일어난 조일신무리의 역적사건을 진압한것도 최영이였다.

왕은 신돈이 처형된 후 최영을 다시 등용하였다. 이때 최영은 자신을 눈맞아 흰 소나무에 비유하면서 자기를 잡지 못해 안달아하던 신돈의 무리들을 조소하여 《봄바람에 핀 꽃이 곱기만 하겠느냐 바람 불고 눈오면 날 부러워하리라》는 뜻깊은 시구절을 읊었다 한다.

 

백성이 선생이다

 

1374년 8월. 최영이 25 600여명의 군사와 314척의 함선으로 편성된 원정군의 앞장에 서서 기세드높이 제주도로 향했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원침략자들의 잔존세력이 둥지를 틀고앉아 좋은 말과 특산물들을 제마음대로 날라가고있었다. 게다가 명나라에서 또한 제주도말을 탐내여 계속 요구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정부에서는 제주도에서 원침략자들을 내몰고 징벌하는 일을 도통사 최영에게 맡기였다. 원정군이 제주도에 이르렀을 때 원나라 침략자들은 3 000명의 기병을 끌고 명월포에서 대항해나섰으나 최영은 그들에게 무자비한 참패를 안기였다. 그후 여러 전투들에서 심대한 타격을 받은 적의 두목중 일부가 피할길 없는 파멸을 눈앞에 두고 자살하거나 항복하였다.

고려군은 적 패잔병의 마지막 지탱점인 제주성을 포위하고 맹렬한 공격을 들이댔다. 그러나 적들도 성문을 굳게 닫고 필사적으로 저항하고있어서 여러가지 전법을 써보았으나 군사만 잃을뿐 성과가 나지 않았다. 성을 빼앗을 묘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아 최영이 산등성이에 올라 하늘만 쳐다보고있는데 아래쪽에서 보습으로 밭을 갈고있는 한 늙은이가 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놈의 소가 왜 이리 꾸물거려. 미련하기란 최영이를 닮았다, 쯔쯔…》

최영은 급히 언덕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치미는 분기를 애써 누르며 로인에게 말했다.

《로인에겐 저 험한 성벽에다가 그것을 둘러싼 가시덤불이 보이지 않는고?》

최영의 말에 로인은 태연히 마주보며 응답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나라와 백성을 진심으로 위하는 사람은 그것을 오히려 적을 잡는 함정으로 만들수 있을것이옵니다.》

최영은 로인의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뜨이였다. 이날 저녁 최영은 로인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는 로인과 무릎을 마주하고 제주성에 틀어박힌 적을 어떻게 하면 칠수 있겠는가를 진지하게 의논하였다. 최영이 성을 칠 군사계책을 내놓으면 로인은 제주도의 지형과 풍토, 풍습에 맞추어 묘한 의견을 보태주었다. 그 의견은 비록 소박했으나 최영에게는 더없이 소중하였다. 의논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최영은 밝은 얼굴로 로인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날더러 익지 않은 감을 억지로 먹겠다고 조급하게 서두르다가 목이 메지 말고 다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먹으라 이말이겠소? 고맙소, 로인.》

로인과 헤여진 최영은 즉시에 군사들을 풀어서 성을 먼발치로 물샐틈없이 에워싸고 로인의 집과 마을에 파수를 세워 적들이 얼씬도 못하게 하였다. 그동안 마을에서 남정네들은 농사를 짓고 아낙네들은 바다에서 해삼이며 전복 등을 부지런히 따들였다. 그런데 로인만은 집안에 앉아서 풀씨를 넣은 봉투를 연에 매달고 마을쪼무래기들을 모아다 연싸움을 시켰다.

어느덧 날과 달이 흘러 산지사방에 뿌려진 풀씨들에서 잡초가 무성하게 자랐다. 음력 10월이 되였다. 드디여 제주도에 유명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제주성주변의 무성한 잡초와 가시덤불을 바싹 말리워버렸다. 바로 이런 때 마을로인이 희색이 만면하여 최영을 찾아왔다.

《장수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로인장도 편안하셨소?》

한 사람은 나라의 큰 장수이고 또 한 사람은 이름없는 섬마을 늙은이였으나 두 사람은 소꿉시절 친구처럼 반갑게 만났다.

《장수님, 우리 마을 백성들은 싸움준비가 다 되였소이다.》

《우리 군사들도 그동안 성을 쳐들어갈 조련을 다 끝내고 기재들도 준비했소.》

《그럼 이젠 군령을 내리셔도 되겠소이다.》

《알겠소. 곧 령을 내리겠소.》

《그럼 저희들도 그 령을 받을 태세를 취하겠소이다.》

《어떻게?》

《먼저 군사들이 성을 칠 길부터 열지요.》

로인은 그길로 마을 젊은이들을 시켜 성주변의 풀밭에 불을 놓았다. 바싹 마른 풀밭에 지른 불은 세찬 바다바람을 받아 해일처럼 욱욱 제주성쪽으로 밀려갔다. 땅과 함께 하늘도 불타고 성도 불타는것 같았다. 최영은 로인이 성의 풀이 바싹 마르고 바다바람이 세게 불 때를 기다렸다는것을 알고 다시 한번 감탄했다. 최영은 총공격명령을 내렸다. 불타서 번번해진 산비탈에 바위돌들이 한벌 쭉 깔린것이 다 드러났다. 기세충천한 고려군사들은 적이 쏘는 화살을 이 바위돌들에 의지하여 요리조리 피하면서 성밑으로 다가붙었다.

최영은 로인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사람은 무성한 가시밭도 적을 치는 함정으로 만들수 있다고 하던 말이 생각났다. 풀이 무성했을 때는 적들이 거기 숨어서 아군에게 활을 쏘았으나 풀이 다 마른 지금은 그 풀이 적에게 불공격을 하는 유리한 조건을 지어주는것이 아닌가! 공격하는 군사들이 긴 사다리를 가져다가 성벽에 촘촘히 세워놓고 그것을 타고 올라가는것이 보였다. 활 잘쏘는 궁수들이 돌바위뒤에 숨어서 성벽을 타고오르는 아군을 엄호해서 쏘는 화살이 비발처럼 날아갔다. 풀이 불타는 자욱한 연기에 취해버린 적군은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한채 성벽을 넘어온 아군에 의해 무우밑둥 잘리듯 쓰러졌다. 그처럼 공격에서 애를 먹던 성이 그야말로 순식간에 함락되였다.

백성의 힘과 지혜에 군사가의 전법을 합친 최영의 벼락같은 공격에 궁지에 빠진 적장은 절벽에서 떨어져 자살하고 말았다.

전장을 다 수습한 최영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가게 되였다.

승리한 군사들이 부두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마을사람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있었다.

최영이 군막에서 나와 로인의 손을 뜨겁게 잡고 말했다.

《로인장, 어떻게 그런 묘한 수를 생각했소?》

《별게 아닙니다. 우리 고장에서는 예로부터 말을 많이 길러왔지요. 그 말먹이를 보장하기 위해 해마다 연에다 풀씨봉투를 매달아 산지사방에 뿌리고 무성한 풀밭에서 말을 먹인 후 풀이 다 마르면 다음해의 풀판준비를 위해 불을 놓군 합니다. 게다가 우리 고장엔 바람과 돌이 유명하지 않습니까. 이 고장 풍속과 지형을 리용했을뿐입니다.》

그의 말에 최영은 다시 한번 감탄했다.

그는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아무리 용맹한 장수라 한들 평범한 백성들의 지혜를 빌리지 않았더라면 제주성의 점령이 힘들었을것이다. 과연 백성이야말로 훌륭한 선생이다.》

 

나라의 법을 지켜

 

최영은 법과 도덕의리를 지키는데서 털끝만치도 용서가 없었다. 전투에서 비겁하게 물러서는자는 그가 누구이든 군법으로 다스렸고 왕이든 고관이든 도덕의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면 즉석에서 맞대놓고 강하게 충고하였다. 이러한 최영이였기에 집안사람이라고 해서 위법행위를 한것을 절대로 융화묵과하지 않았다.

최영이 1374년 10월 제주도의 원나라 강점군을 소탕하고 돌아온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순위부의 판사(도적을 잡고 위법행위를 단속하는 관청의 우두머리 관직)로 있을 때 있은 일이다.

하루는 아래사람이 최영에게 죄인을 압송해왔다고 보고를 하였다.

《어떤 죄인이냐?》

《살인죄인이올시다.》

《어디서 보냈느냐?》

《도당에서 보냈소이다.》

웃기관인 도당에서 보낸 죄인이니 그냥 아래사람에게 처리하라고 맡길수 없었다.

《그 죄인의 이름은 무엇이라고 하는고?》

아래사람은 《저…》 《저…》하고 고추먹은 외마디소리만 내뱉을뿐 선뜻 대답을 못했다.

《어째서 그러느냐?》

최영의 목소리가 이쯤 정색해지면 그 다음은 벼락이 떨어진다는것을 알고있는 아래사람들은 마지못해서 대답하였다.

《판사 안덕린이올시다.》

《엉?》

최영은 범의 울부짖음같은 놀란 소리를 질렀다. 안덕린은 자기가 사랑하는 조카사위였다. 그는 나이도 한창일뿐아니라 판사라는 한개 기관의 우두머리벼슬에 있어 앞날이 크게 기대된 사람이였다. 이런 사람이 살인을 범한것이 최영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아무리 무쇠같은 최영인들 그도 인간인 이상 감정이 있으니 한순간 당황하였다.

그러나 곧 자기의 흔들리는 마음을 수습하였다.

《그런 살인죄라면 도당에서 응당 헌사(법기관)에 압송할것이지 어째서 이곳으로 보냈느냐?》

사실 도당에서는 안덕린을 심문하면서 그가 최영과 관계가 있는것을 고려하고 그의 죄를 경하게 하기 위해 최영이 책임지고있는 순위부로 압송하여준것이였다. 죄인을 인수하고 최영에게 보고하는 아래관원은 도당이 이런 조치를 취한 의도를 뻔히 알고있었지만 이에 대하여 최영에게 그대로 말할수 없었다. 그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을 봉하고있었다.

최영은 성이 나서 《왜 벙어리처럼 말을 안하느냐.》하고 호령을 하려다가 마른침과 함께 꿀꺽 삼켜버렸다. (하긴 이 아래사람에게야 무슨 죄가 있는가. 내가 평소에 조카사위를 곱다고만 어루만지고 잘 타이르지 못한 책임이 크지.)

최영은 아무리 조카사위가 귀하고 인정으로는 볼기나 몇대 쳐서 어느 시골로 귀양이나 보내는것으로 그를 빼돌려주고싶었지만 나라의 법을 어길수 없어 무겁게 입을 열어 지시했다.

《안덕린이 죄없는 사람을 함부로 죽였은즉 헌사에서 판결할것이다. 하물며 내가 순위부에 있으면서 어찌 그에 대한 문초를 추진할수 있겠는가.》

그는 여기서 말을 끊고 한동안 멍하니 앞산을 바라보고있다가 《헌사로 돌려보내라.》고  하였다. 그의 이 마지막 말은 약간 떨리였다.

이리하여 안덕린은 법대로 처리되고 최영은 법을 털끝만치도 흥정할줄 모르는 자신의 신조를 지켜냈다.

 

모든것을 군사를 위하여

 

최영이 1380년에 해도 도통사라는 국경수비부문의 중책을 겸임하고있을 때였다. 그가 동강, 서강쪽에 나가 왜적의 침입을 방비할 때 병이 위중하였다. 다른 장수들이 그것을 우에 보고하려 했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에 나와서 어찌 병을 념려하겠는가.》라고만 할뿐이였다. 그래도 의원을 시켜 약을 권하게 하자 최영은 그 약을 물리치면서 《내 이미 늙었고 또 죽고사는것은 천명인데 구태여 약을 먹고 살기를 바라겠는가.》고 하였다. 싸움터에서 장수가 앓아누우면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진다고 해서 하는 말인줄 알고 다들 격동되였다.

최영이 안덕린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홍산전투(1376년)에서 왜구를 치고 돌아왔을 때였다. 우왕이 그를 시중(정승)으로 임명하려고 하였다. 그때로 말하면 저마끔 벼슬이 오르기를 바라서 다른 사람이 공훈을 세우는것을 시기하고 남의 공로를 가로채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최영의 립장은 정반대였다. 그는 왕에게 자기의 심정을 말하였다.

《나라님의 은덕에 감격합니다. 그러나 시중으로 되면 제때에 전선으로 나갈수도 없사옵니다. 그러니 왜적을 평정한 후에 시중으로 되여도 좋을것입니다.》

우왕은 벼슬이 크게 올라가는 문제까지 나라의 군사력강화에 복종시키는 최영의 애국의 마음에 감동되여 더는 권고하지 않았다. 이때 일을 회고하자 최영이 더는 병을 앓으면서 아래사람들에게 근심을 끼치고있을수 없었다. 그는 강의한 의지로 왜구를 물리치는 싸움을 지휘하면서 병을 이겨냈다.

후날 최영은 시중으로 되였는데 그때도 그저 허무하게 세월을 보낸것이 아니라 군함 30여척을 무어 요새들에 배치하고 군사훈련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왜적의 침입이 적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안착되여 농사에 힘을 넣을수 있었다.

1380년에 국왕이 최영을 표창하여 토지를 주려고 했지만 그는 그것도 굳이 사양하였다.

《지금 국가창고가 비여있는데 그러시면 안되나이다. 저에게 얼마 되지 않은 쌀이나마 있사오니 그것을 군량미로 보탤가 하나이다.》

최영은 그전에 량곡 200석을 내여 군량미로 보탠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다시 80석을 군사들에게 보내였다.

 

늙은 장수

 

1376년 7월 왜구를 징벌하는 홍산싸움이 벌어졌다. 그러나 고려군은 그 첫 싸움에서 패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즉시 자기를 진으로 보내줄것을 우왕에게 제기하였다.

《상감마마, 신이 비록 나이 들고 재주는 별로 없사오나 적을 무찌르는 싸움에 나갈가 하오니 허락해주시오이다.》

우왕은 머리를 저었다. 그로 말하면 그때 나이가 60이였고 조정 내부가 어수선하여 자리를 뜨게 하기 어려웠던 까닭이였다.

《경의 나이가 얼마요. 내 곁에서 나라일이나 살펴주오. 그간 세운 공만 해도 내 잊지 못하겠소.》

그러나 최영은 단호하였다.

《상감마마, 왜구의 기세를 보아 경험있는 장수가 있어야 할것 같소이다. 적을 제때에 제압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곤난을 당할 때가 있을것입니다. 제 비록 몸은 늙었으나 마음은 늙지 않아 나라를 지키려는 생각은 변함없으니 능히 적을 물리치겠소이다.》

최영은 끝내 허락을 받고 그 길로 남으로 향했다. 홍산에서는 적의 기세가 등등하고 고려군은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최영은 이러한 형세를 료해하고 자신이 직접 선봉에 나섰다. 적은 최영을 보고 비웃었다.

《고려군은 장수가 이젠 다 죽었나 보구나. 저런 늙은이가 나타난걸 보니.》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였다. 그가 한번 칼을 쳐들면 뒤따라 왜놈목 한두개가 영낙없이 땅에 떨어졌다. 이때 적의 화살 하나가 날아와 최영의 입술에 박혔다. 최영은 재빨리 자기를 쏜 놈에게 화살을 날렸다. 놈은 순간에 땅바닥에 거꾸러졌다. 그제야 최영은 입술의 화살을 천천히 뽑아버렸다.

《한놈도 살려보내서는 안된다. 모조리 쳐라.》

전군에 최영의 령이 떨어졌다.

백전로장이 선봉에 선 고려군은 적의 공무니를 쫓아 해안까지 가서 수많은 원쑤들을 쓸어버렸다.

그리하여 고려군은 홍산싸움에서 최영의 지휘밑에 왜구를 완전히 쳐물리치고 대승리를 이룩하였다.

 

애국명장의 시재주

 

언제 있은 일인지는 알수 없으나 이야기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최영이 조정에서 높은 급의 관직을 맡고있을 때의 사실로 인정된다.

한번은 조용한 저녁시간이 되여 마침 여러 재상들이 한자리에 모여있었다.

어느한 재상이 불쑥 한마디 하였다.

《달이 거울처럼 맑고 환한데 우리가 한사람씩 돌아가면서 시 한구씩을 지어서 맞추는것이 어떠시오?》

한사람이 시 한구를 읊으면 또 한사람이 다음 시구를 대는 식으로 돌아가면서 시를 붙이는것을 《련구》라고 하였다. 이런 시구짓기방법은 서로의 시재간을 겨루는 선비들, 벼슬아치들의 흥미있는 오락의 하나였다. 그러니 이런데서 물러나는것은 체면이 깎이는 노릇이였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경복흥이라는 고관이 먼저 한 시구를 척 지어 내놓았다.

 

하늘은 옛 하늘이로되

사람은 옛 사람이 아니로다

 

다른 재상들이 들어보니 함부로 뒤를 잇대기가 조심스러웠다. 하늘은 옛날 그 하늘과 다름없는데 사람은 변했다는것이니 이 말은 한창 날뛰고있는 리성계를 빗대놓고 욕하는것인지 아니면 조정의 대신들이 부패하다는 소리인지 아리숭하였다. 이런 말에 잘못 말려들면 목이 위태할수도 있었다. 모두들 이런 때 묘하게 빠져나갈수 있는 시구를 찾느라고 속으로 낑낑거렸다.

그런데 경복흥이 부르는 시구소리가 그치자마자 목소리가 걸걸한 최영이 읊조리는 시소리가 울려나왔다.

 

달은 명월이로되

재상들은 밝지 못하구나

 

이 시구에 재상들은 가슴이 후두둑 떨렸다. 묘한 대구였다. 하늘과 달, 사람과 재상, 밝은 달과 밝지 못한 재상, 어느 시어나 다 짝이 딱딱 맞았다. 최영의 시짓는 솜씨가 여간 묘하지 않을뿐더러 시의 내용이 매우 예리하였다. 그자리에 앉아있는 재상들을 맞대놓고 암둔한 사람으로 비판하였으니 모두가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최영을 탓하지 않았다. 최영은 일상생활에서도 결백하게 사는 사람이고 옳지 않은것을 보면 그 자리에서 꾸짖는 성미였기때문이였다.

 

최영의 야유

 

최영은 리인임과 오래동안 같이 일해왔다. 그런데 그 리인임이 림견미와 손잡고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권세를 부리자 맞대놓고 닦아세운 일이 있었다.

《나라가 매우 곤난한데 당신은 어찌 이것을 우려하지 않고 다만 가정살림에만 관심하는가?》

이런 추궁을 받았지만 한다하는 리인임도 입을 벌리지 못하였다.

이무렵에 어떤 사람이 리인임이나 림견미도 먹기 좋아하는 판인데 최영인들 안그렇겠는가고 타산했댔는지 최영을 찾아가서 슬그머니 벼슬청탁을 하였다. 그때는 어찌된 셈인지 최영의 입에서 호령소리가 아니라 《허허》하는 한탄인지 야유인지 종잡을수 없는 웃음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러더니 최영은 이런 말을 하였다.

《네가 장인바치나 장사군이 되였으면 벼슬이 저절로 얻어질것을 그랬다.》

이 말에는 권력을 잡은자와 뢰물을 쓰는 무리를 비난하는 야유의 뜻이 담겨있었다. 이 야유는 호령에 못지 않는 최영의 엄한 질책이였다.

 

애국명장의 통분한 인생말년

 

1388년 2월 명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여왔다.

《철령 이북땅은 예로부터 우리 땅이였으니 명나라가 원나라를 굴복시킨 지금은 마땅히 우리에게 돌려주어야 할것으로 보아지니 조처해주오.》

터무니없는 요구였다.

조정에서는 곧 회의를 열었다.

《한치도 줄수 없소. 이번 기회에 그놈들을 징벌해야 하오. 고구려의 옛땅도 되찾고 또 그놈들의 코대도 단방에 꺾어놓아야 하오.》

명나라를 칠것을 주장하는 최영의 호소에 명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는 리성계가 반대의견을 표시하였다.

《적이란 달래여 어루만져야 하나이다. 날로 세력이 커가는 명나라와 맞선다는것은 좋은 일이 못되나이다.》

하지만 최영의 요구가 강경하여 우왕도 최영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수 없었다.

리성계는 더욱 야단을 부렸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친다는것은 어려운 일이거니와 농사철에 군사를 일으키는것은 바람직한 일이 못되오이다. 왜구가 남쪽에서 노리고있는데야 또 어찌 이를 승인하리오.》

《기회란 한번 놓치면 다시 얻기가 조련치 않은것이요. 명나라가 대국이라고는 하지만 료동에서 힘을 쓸 형편이 못되오. 료동은 지금 무방비상태나 다름이 없소.》

최영의 말에 리성계는 말문이 막혔다.

우왕은 최영에게 모든것을 맡기면서 제옆에서 떠나지 말것을 당부하였다. 《최공이 내옆에 있지 않고서는 허전해서 마음이 좀처럼 놓이지 않는구려.》

최영은 우왕과 함께 평양에서 총지휘를 하면서 리성계에게 군사를 주어 출동시켰다.

1388년 5월 7일 리성계의 원정군은 의주앞 압록강가 위화도에 이르렀다. 때마침 비가 내려 압록강이 불어 건늘수가 없게 된것을 구실로 료동이 눈앞에 보이지만 리성계는 회군을 결심하고 군대를 돌려세워 수도를 향해 공격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리성계일당에 대처하여 최영은 즉시 개경에 돌아와서 성문을 모조리 닫고 1 000여명의 군사로 급히 방어군을 조직하였다.

최영의 철통같은 봉쇄전으로 도저히 성을 돌파할수 없게 되자 리성계는 꾀를 생각해내여 군사 한명을 시켜 동문밖에 가서 소라를 불게 하였다. 이 소리에 동요한 성안의 백성 몇이 그만 문을 열고 나왔다. 때를 노리고있던 리성계일당이 벌떼같이 달려들어 와하고 최영부터 찾기 시작하였다. 얼마 못가서 후원 화초밭에 있던 최영은 잡힌 몸이 되였다.

우왕은 강화도로 류배되였다가 죽음을 당하고 최영은 리성계의 모략에 의해 고봉현으로 귀양을 갔다가 개경으로 끌려와 참형을 당하고말았다.

최영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기였다.

《내가 나라를 위하여 큰 일을 도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실로 원통하기 그지없다. 내 만일 일신의 영달을 꾀했다면 모르거니와 추호도 그런 마음은 없었고 오직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했을뿐이니 이는 내가 죽은 후에 력력히 알게 될것이다. 평생에 조금이라도 내 욕심을 차렸거나 남을 죄없이 해쳤다면 내 무덤에 풀이 날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내 무덤에는 결코 풀이 돋지 않을것이다.》

그가 죽은 후 과연 그의 무덤에는 풀이 돋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처형당하는 순간까지 태연자약하였다.

최영이 참형을 당하던 날 개경의 백성들은 그의 공로를 생각하여 눈물을 흘리고 참형된 그의 시체가 길가에 내버려져있을 때 길가던 사람들이 모두 말에서 내려 정중한 자세로 경의를 표시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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