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몽  주

(1337ㅡ1392)

 

고려말의 관료, 학자. 자는 달가이고 호는 포은이다. 유명한 문인 정습명의 후손이다.

1360년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그후 성균관 박사 등의 벼슬을 지내면서 유교를 깊이 연구하고 강의도 하였다. 그는 당시 리인임일파를 반대하여 원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끊고 명나라와 관계를 맺을것을 주장하였으며 3차에 걸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당시 복잡하던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조정하였고 또 일본규슈의 하까다에 건너가 왜구의 단속을 일본측에 요구하였다. 1380년 왜구를 운봉의 황산에서 격멸하는 전투에 참가한 후 밀직제학으로, 1384년에는 정당문학으로 되였다. 1388년 《위화도회군》을 계기로 리성계가 정치적실권을 쥔 후에도 문하찬성사. 문하시중 등의 높은 벼슬을 하였다. 그는 고려말의 문란해진 정치, 경제형편을 수습하는데는 찬성하였으나 봉건유교적인 《충의》에서 출발하여 리성계의 왕권탈취음모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립장에 서있었다. 1392년 3월 리성계가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부상을 당한것을 기회로 그 일파를 제거하려다가 실패하고 그해 4월 리성계의 아들 리방원일당에게 개성 선죽교에서 살해당하였다.

정몽주의 창작으로는 시조 《단심가》외에 한자시들인 《압록강》, 《의순관에서》, 《강남버들》, 《온천》, 《전주 망경대에서》, 《김해에서 옛날 놀던 일 그리며》, 《병사의 안해가 부른 노래》, 《사신으로 일본에 가서》, 《둔촌에게》 등이 널리 알려졌고 저서로 《포은집》이 전해진다.

 

《 단 심 가 》

 

평시조.

 

이 몸이 죽고죽어 열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이랴

 

※ 진토ㅡ흙

※ 가실줄ㅡ변할줄

※ 있이랴ㅡ있으랴

 

시조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신의를 저버릴수 없는 정몽주자신의 신조와 의지가 집약적으로 표현되여있다. 시조는 짤막하고 함축된 시형상속에서 시인의 사상과 의지를 진실하고 깊이있게 노래하고있으며 어휘의 반복과 뜻빛갈이 강한 시어들을 적극 살려 사상적내용을 부각시키고 정서적색채도 살리고있다. 량심적인 봉건관료의 립장에서 고려왕조에 대한 충정을 노래한데 그친 제한성이 있으나 인간의 의리와 지조에 대한 인상깊은 시형상으로 이 시기 시조문학에서 뚜렷한 자리를 차지한다.

 

《전주 망경대에서》

 

한자시.

 

천길 언덕우에

  자드락길 비껴있어

올라서서 바라보니

  내 마음 열리누나

 

청산은 말하는가

  부여의 력사를

락엽은 흩날리네

  백제성기슭에

 

9월 찬바람에

  나그네는 쓸쓸하나

선비로서 말하노라

  호협한 우리 기상

 

하늘끝에 해지고

  구름떼 모여드니

고개들어 바라보나

  서울은 안보이네

 

시에서는 우선 자랑찬 력사와 《호협(호기롭고 시원시원하며 의협심이 강하다)한》 기상을 가지고 유구한 문화를 발전시켜온 우리 민족의 긍지를 자연풍치와 결합하여 절절하게 노래하고있다. 아아히 높이 솟은 청산도 부여의 자랑찬 력사를 노래하는듯 하늘을 치받으며 솟아있고 민족의 찬란한 문화와 씩씩한 기상이 산천마다에 어려있다. 시에서는 계속하여 이렇듯 자랑찬 문명국이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 비통함을 지나간 력사에 대한 회고를 통하여 노래하고있다.

그리하여 어제날 긍지높던 백제성기슭에는 락엽만 흩날리며 9월의 찬바람에 나그네의 마음 또한 쓸쓸하기만 하다. 검은 구름 떼지어 모여드니 고개들어 바라보나 서울은 보이지 않는다고 하였던것이다. 작품은 현실적인 자연풍치와 력사의 교훈을 돌이켜보는 시인의 내면심리세계를 기묘하게 결합시켜 매개 표현이 깊은 의미를 가지고 안겨오게 하고있다. 시는 량심적인 봉건관료의 울분을 담아 우국충정을 노래한 작품으로서 널리 애독되였다.

 

9살때 지은 《상사곡》

 

정몽주는 어릴 때 벌써 시를 기지있게 잘 지어 그가 살고있던 동네는 물론 린근에까지 소문이 났다.

어느날 아홉살밖에 안된 정몽주가 외가집에 놀러갔을 때였다. 외가집에서 심부름하는 한 젊은 녀인이 그를 찾아왔다. 녀인은 반갑게 인사를 했으나 어인 일인지 쭈밋쭈밋하며 좀처럼 입을 열지 못했다. 정몽주는 인차 그 녀인에게 남다른 사연이 있음을 짐작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어서 앉으시오. 무슨 긴요한 일이 있어 오신것 같은데 어서 말씀하시오.》

다소 마음이 풀린 녀인은 용기를 내여 어린 정몽주에게 청했다.

《사실은 딱한 청이 하나 있사온데 들어줄수 있겠사온지…》

이미 가정을 가진 녀인이지만 상대가 비록 나이 어리다 할지라도 량반가문의 도련님인지라 매우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리 미안해하거나 망설일것없이 어서 말씀하시오.》

녀인은 결심이 선듯 얼굴을 들며 입을 열었다.

《편지 한장 써주시오이다.》

《편지요?》

이때 글공부에 한창 재미를 붙이고있던 정몽주는 자기의 능력을 한번 시험해보고싶어 녀인의 청에 선뜻 응해나섰다.

《그야 그리 어렵겠소. 그런데 어디다 무슨 사연으로 편지를 쓰려는건가요?》

정몽주의 말에 녀인은 대뜸 얼굴이 붉어졌다. 아마도 부끄러움을 몹시 타는 녀인인듯.

《무슨 편지이기에 그렇게 말하기 힘들어하시오?》

약간 웃음기 어린 어조가 녀인의 얼굴을 더욱 빨갛게 달구어놓았다. 한참이나 옷고름을 손가락에 감아끼고 만지작거리면서 수집음을 타던 녀인은 결심한듯 말꼭지를 뗐다.

《멀리 가있는 저의 서방님께 문안편지를 보내고저…》

《그런 좋은 일을 가지고 왜 그다지도 말하기 힘들어하시오?》

《호호호…》 녀인의 소리없는 웃음…

정몽주는 곧 붓과 벼루를 꺼내들고 녀인이 들고온 종이말이를 받아 펼쳐놓았다. 그리고 손에 익은 붓놀림으로 몇자 힘차게 써갈긴 다음 곧 녀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자, 됐소이다.》

순간 녀인은 실망했다. 자기의 애타는 마음을 다 쓰자면 천장, 만장을 써도 모자랄텐데 단 몇글자밖에 안쓰다니…

무척 실망한 기색으로 말없이 서있던 녀인은 내친김에 말은 하고 볼판이라는듯 성큼 앞에 나섰다.

《다문 몇글자라도 더 써주시오이다. 이렇게 짧게야 어떻게…》

녀인의 말뜻을 리해한 정몽주는 다시 한번 하하 웃고나서 글 쓴 종이말이를 다시 받아들었다. 그리고는 아까처럼 익숙된 솜씨로 붓을 달렸다. 그런데 이번에도 꼭 두줄밖에 더 쓴것이 없었다.

(아직 글을 잘 몰라서 그럴가? 아니면 나이어려 사람들의 생각을 잘 몰라서 그럴가?…)

더 청하기도 멋해난 녀인은 제딴에 이렇게 생각하며 할수없이 편지를 받아가지고 남편에게 보내였다.

그런데 몇줄밖에 안되는 그 글의 내용이 기막힌 명문장으로 인정되여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널리 전해질줄이야…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찼다가도 비지만

안해의 마음만은 변함이 없나이다

 

이것은 정몽주가 써준 글의 첫번째 문장이였다. 사실 이 정도면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비할수없이 순박하고 충실한 녀인의 심정을 그리고도 남음이 있을것이였다. 하지만 두번째 더 써준 문장은 더우기 사람들의 찬탄을 자아냈다.

 

봉한것을 다시 뜯고 한마디만 더 쓰오니

세상에 병 많은들 상사병만 하오리까

 

정몽주가 아홉살때 쓴 이 문장은 그후 유명한 시구가 되여 사람들속에서 《상사곡》으로 전해졌다.

 

《벼슬은 한집안의 부귀영화를

위한것이 아니다》

 

정몽주는 21살 되던 해에 국자감(성균관)에서 주최하는 감시(봉건사회에서 생원과 진사를 뽑는 과거)에 합격하였다. 어머니는 그를 축하하여 례복 한벌을 만들어주었다. 옷을 받아든 그는 안감으로 붉은 색갈의 천을 댄것을 보고 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이 옷의 안을 왜 붉은 천으로 대셨소이까?》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너도 장차 벼슬길에 나서게 되면 나라일을 해야 하겠는데 그 길에서는 언제나 일편단심이여야 한다. 붉은 색갈의 천을 댄것은 그러한 뜻으로 한것이니 너는 앞으로 변심을 모르는 충신으로 살거라.》

《알겠습니다. 그 길에서 이 아들은 드팀이 없을줄로 아시오이다.》

과연 정몽주는 어머니앞에서 다진 맹세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23살되던 해인 1360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예문관검열로서 벼슬길에 올랐다.

이때에도 어머니는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였다.

《벼슬은 한 집안의 부귀영화를 위한것이 아니다. 언제나 나라에 충성하고 백성을 잘살게 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

정몽주는 항상 어머님의 이 말씀을 명심하였기에 큰 우여곡절이 없이 례조정랑, 성균관 박사, 사성, 대사성, 정당문학을 거쳐 중년에 와서는 문하시중이라는 고려의 최고관직에까지 올랐다. 고려말기에 이르러 정세가 복잡해지자 정몽주는 어지러워진 국가정사를 바로잡고 나라를 일으켜세워보려고 모든 힘을 다하였다.

외적의 침입으로 국경연선들에서 전쟁으로 인한 란리가 그치지 않았고 또한 공민왕이 살해된 후 우왕이 왕좌에 오르는 등 복잡한 정치적사변이 거듭되는데다가 왕의 방탕한 생활로 궁궐안은 어지럽기 그지없었다.

이 모든것을 바로잡기 위해 정몽주는 적극적으로 일을 벌려나갔다. 이 기간 그의 머리속에 언제나 자리잡고있은것은 《벼슬은 한 집안의 부귀영화를 위한것이 아니다.》고 하던 어머니의 말이였다.

 

《내 기어이 고려의 명예를 떨치고

돌아오리라!》

 

1368년 어느날 공민왕이 정몽주를 불러 이런 분부를 내렸다.

《그대는 사신으로 이제 곧 명나라에 다녀오도록 하라. 조금도 머리를 굽히거나 소심함이 없이 고려국의 사신답게 당당히 처신하여 나라의 권위를 세우기를 바라노라.》

정몽주는 자기의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끼며 신임에 꼭 보답하리라 결의하였다.

(내 기어이 고려의 명예를 떨치고 돌아오리라!)

떠나기에 앞서 그는 잡도리부터 단단히 하였다.

(나라의 명예를 빛내이는것은 그 어떤 말로나 외교전으로만 이루어지는것이 아니다. 우선 고려사신의 높은 인품과 학식, 고결한 성품을 그들에게 보여주어 그들의 넋을 그러잡는것이 선차적인 문제이다. 그러자면… …)

의주에 이르니 이미 통지를 받았는지 명나라의 관리가 압록강 저쪽에 마중나와 있었다. 위엄있게 그를 맞이한 정몽주는 인사를 나눈 후 종이우에 시 한편을 써나갔다.

 

의주는 나라의 대문이요

예로부터 중요한 국경일세

 

그 언제 쌓았는지 긴 성이

구불구불 산을 따라 뻗어있네

 

늠실늠실 흘러내린 큰 강이

서쪽 강토를 에워쌌구나

 

내 이미 천리길 걸어왔으니

강건너 료동벌 하늘도 아득해라

 

그의 시를 본 명나라 관리가 대뜸 눈이 둥그래졌다. 한참이나 정몽주를 눈여겨 살피던 명나라관리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우리측 수원에게 물었다.

《저분은 뭘하는 사람이시오? 혹시 시인이 아니시오?》

《아니요. 그저 조정의 한 관리이시오.》

그날 저녁 날은 이미 어두워 의주의 압록강기슭에 있던 의순관에서 일행은 하루밤 묵게 되였다. 두 나라의 관리들이 서로 만난것을 축하하여 저녁에는 소박한 연회를 차렸다.

술이 서너순배 돌고 취기가 어지간히 올라 모두들 흥성거리고있을 때 정몽주는 조용히 일어나 뒤짐을 지고 천천히 오가면서 시 한수를 읊었다.

 

말을 달려 유유히

압록강에 이르러

내 살펴보노라

아름다운 경치를

 

집을 떠나 어느덧

천리길을 왔구나

술 마시니 세상이

좁은것만 같아라

 

강기슭엔 첩첩히

산들이 늘어서고

강 건너 료양성

길도 멀다네

 

밤 깊어도 나그네

잠 이루지 못하는데

고기잡이 배노래

구성지게 울려오네

 

시를 읊노라니 저도 모르게 떠나온 고향집이 눈앞에 떠오르고 어린 두 자식의 귀여운 모습이 얼른거렸다. 떠나올 때 자기를 바래주던 안해와 어린 자식들, 곧잘 시를 외우며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던 그 모습들이 눈에 삼삼했다. 정몽주의 모습을 이윽히 지켜보던 명나라관리가 엄지손가락을 내흔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고려가 문명국이라는건 일찌기 들어 알고있소만 오늘 직접 저 사신의 모습을 보니 과시 틀린 말이 아니구려!》

밤이 깊어갈수록 연회상의 흥겨운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였다.

그후 명나라 태조를 만나러 가는 전기간 정몽주는 명나라의 이르는 곳마다에서 멋들어진 시들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강남지방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런 시를 지었다.

 

강남버들이여

강남버들이여

봄바람 화창하니

가지마다 황금일세

 

… …

 

인생이 머나먼 길손은

되지 말아야 하리

소년이던 나의 두 귀밑머리

벌써 흰 눈이 내려덮누나

 

일이 이쯤 되자 고려국에서 파견되여오는 사신이 시를 잘 짓는다는 소문이 어느새 명나라 태조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정몽주일행을 맞이한 명나라 태조는 깍듯이 례의를 지키며 정중히 대하였다.

《듣자니 이번 사신일행이 모두 시문에 밝고 인품 또한 높아 칭찬이 자자한데 마땅히 례의를 지켜 대함이 옳을가 하노라.》

태조는 여러모로 왼심을 쓰며 사신일행의 편의를 돌보아주었고 명나라에 류학생들을 보내겠다는 정몽주의 제의도 기꺼이 수락하였다.

일을 무사히 끝내고 일행은 귀국의 길에 올랐다. 그런데 그들이 바다길에 나서자 그만 세찬 파도가 일어 일행은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게 되였다. 생명을 위협하는 아슬아슬한 순간이 련속 들이닥쳤다.

《모두 죽을지언정 나라의 문서를 소중히 간직하라!》

정몽주는 목숨보다도 나라의 외교문서를 더 중하게 여겨 그것이 손상되거나 잃어지지 않도록 하는데 모든 힘을 다하였다.

이렇듯 파도 세찬 날바다에서 표류하기 그 며칠, 다행히 조난당한 소식이 왕궁에 닿아 급히 배를 보내주어 구사일생으로 살아날수 있었다.

후에 이 소식을 알게 된 명나라 태조는 다시 한번 감탄을 금치 못하며 신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고려국의 신하들은 과시 인품도 높고 나라에 충성하는 사람들이다. 그대들도 고려국 충신들의 행위를 거울로 삼아 자기들의 본분을 다하도록 하라.》

 

왜인들을 굴복시킨 통쾌한 외교전

 

1377년 9월 정몽주는 고려정부로부터 왜구의 단속을 일본측에 요구할 임무를 받고 왜땅에 사신으로 간적이 있었다.

왜인들이 간사하고 교활한 족속들이라는것을 잘 알고있는터이라 정몽주는 속으로 단단히 별렀다. 배에서 내려 눈앞에 얼른거리는 왜인들의 꼴을 보느라니 의관이나 풍속같은것이 실로 꼴불견이였다. 몸에 걸친 천쪼박같은것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나 그래도 부끄러운줄 모르고 아주 천연스레 버젓이 나돌아치는것이였다.

《왜인들이 제일 미개한 오랑캐족속들이라더니 과시 그 말이 틀리지 않았군.》

겉보기가 속보기라고 정몽주일행을 맞이한 왜인들은 초보적인 례의도 없이 무지막지하게 그들을 감금하고 어처구니없이 놀았다. 하긴 아직 문명이라고는 초입구에도 들어서지 못한 야만들이니…

여기에는 그 어떤 도덕도 사리도 통할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있을수도 없는 노릇이였다. 어쨌든 왜인들을 꼼짝 못하게 눌러놓아야 하였다.

정몽주는 치솟는 분기를 가까스로 누르고 우선 부드러운 문장으로 그 지방의 우두머리에게 서신을 보냈다.

《예로부터 제집에 찾아오는 사람을 박대하는자는 하늘의 복을 얻기 어렵다고 하였다.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것이 마땅한 리치이거늘 자기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박대하는것을 어찌 도리라 하겠는가. 옛날 어느 한 성인은 설사 도적이라 하더라도 집에 오는 손은 문을 활짝 열고 맞으라 하였거늘 나라의 명을 받고 찾아오는 국빈을 소홀히 대함은 천지인륜에 심히 어긋나는것이라고 본다.

권고하건데 나를 맞이하여 우선 이 나라에 온 뜻이 무엇인지나 알아보는게 좋을듯 하도다.》

글을 받아든 상대측 우두머리는 얼굴을 붉히며 찍소리 한마디 하지 못했다. 잘못하다간 앞으로 더 큰 창피를 당할것이 뻔했다.

《이런 사람을 함부로 대하다가는 무슨 망신을 당할지 모르겠군. 록록치 않은 인물인걸.》

그는 즉시 령을 내렸다.

《고려사신을 당장 이리로 모셔오도록 하라.》

이리하여 정몽주는 자기의 의도대로 상대방과 마주앉게 되였다. 그러나 아직은 모든것이 시작에 불과했다. 정몽주를 본 상대방은 첫눈에 기가 꺾여 머리를 수그리며 례의를 표시했다.

《이거 현인을 미처 알아보지 못해서 안됐습니다. 그래 사신은 고려에서 무슨 일을 맡아보시오?》

《성균관 대사성을 하고있소.》

《역시 학자님이시군요. 우리 사람들에게 강론(어떤 문제에 대하여 학술적으로 해설하는것)을 좀 해줄수 없겠소이까?》

이때라고 생각한 정몽주는 도포자락을 활활 옆으로 밀어붙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강론은 좀 생각해보겠소. 우선 당신에게 한가지 물을게 있소. 당신네 나라에선 도적을 어떻게 처벌하오?》

정몽주의 말에 상대는 눈이 둥그래졌다.

《갑자기 도적소리는 왜 하시오? 우리 나라에선 도적을 엄벌에 처하기때문에 사람들이 외진 산골길도 마음대로 다닐수 있고 아녀자들도 주머니 하나 잃어버리는것이 없소. 만약 남의 물건을 도적질했다가는 눈알을 뽑고 손목을 자르고 죽이기까지 하오.》

《거 비슷하오. 그럼 나라를 도적질한자들은 어떻게 하고있소?》

《거야 온 집안을 멸살시키지요.》

《맞았소. 나라를 도적질한 놈들은 온 집안을 멸살시켜도 시원치 않소. 그런데 생각해보시오.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자꾸 우리 나라에 쳐들어와 사람을 해치고 재물을 로략질하고있으니 이런자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소?》

상대는 말문이 막혀 눈만 디룩거렸다.

《자고로 우리 나라에는 그런자들을 3대멸족시키는 법이 있소. 우리 나라에 기여들었던 당신네 나라 사람들에게도 이 법을 적용할가 하오. 만약 그 법이 적용되면 당신도 무사치 못할거요.》

정몽주의 말에 오금이 저려난 상대는 더 말을 못하고 조심스레 정몽주의 눈치만 살폈다.

정몽주는 여유작작한 태도로 이야기를 이었다.

《내 보기에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소. 다시는 우리 나라를 침노하지 말것이며 당면하게는 붙들어온 사람들과 략탈해온 재물들을 즉시 돌려주어야겠소. 그렇지 않으면 틀림없이 엄한 형벌이 차례질것이요. 이걸 명심하시오!》

이러한 외교전은 그후에도 계속되였다. 정몽주의 능란한 언변과 외교술에 기가 꺾인 상대는 이듬해 6월 왜구들을 단속할 군사를 규슈에 보내왔으며 7월 정몽주가 귀국할 때에는 붙잡혀갔던 수백명의 고려사람들을 함께 돌려보냈다. 10여척의 배에 잡혀갔던 사람들까지 싣고 무사히 돌아온 정몽주를 맞이한 우왕은 너무 기뻐 그의 손을 움켜잡고 놓을줄 몰랐다고 한다.

정몽주가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썼다고 하는 시들중에는 이런것도 있다.

 

낯선 섬나라에 봄은 왔건만

하늘가 아득히 나는 못돌아가네

 

천리나 련달려 풀은 푸른데

저 달은 내 고향도 비쳐주오리

 

적들을 달래기에 돈은 다 썼고

집생각에 백발만 자라는구나

 

사나이 나라 위해 먼곳에 다니노니

이 어찌 공명만을 위함일소냐

 

시는 정몽주의 애국충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의 능란한 외교술도 결국은 이러한 애국충정에 바탕을 두고있다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그후 정몽주는 우리 나라의 북부국경으로 자주 기여드는 녀진족을 무력으로 칠 때에도 외교관으로 나서서 그들을 크게 감화시켜 스스로 물러가게 함으로써 더욱 명성을 떨치였다.

 

정몽주의 소탈성

 

항간에서는 정몽주에 대하여 평생에 뜻과 절개가 높고 사람들을 간격을 두고 대하는 일이 없는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이런 인물은 사람을 대할 때 앞뒤가 다른 법이 없으며 언행이 항상 정직하고 소탈하기마련이다.

정몽주가 소탈한 사람이였다는것은 그가 크게 성공한 이후에 있었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에서도 알수 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조용한 기회에 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정몽주에게 스스럼없는 롱담을 한마디 건넨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대에게 세가지 지나친 약점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알고있습니까?》

정몽주는 소탈하게 허허 웃고나서 악의없이 반문했다.

《그거 참 흥미있는 일이요. 어디 좀 알려주시구려.》

성을 내든가 까박을 붙인다면 분위기가 어성버성해서 이야기하기가 어려워지겠는데 정몽주가 너무도 소탈하게 받아주어서 쉽게 다음말을 내놓았다.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그대가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실 때면 제일 먼저 자리에 앉아서 술을 굉장히 마시기 시작해서 가장 늦게야 자리를 뜨는 밑이 질긴 버릇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요?》

《아하 그것은 사실이요. 나는 애젊은 시절 시골에서 지낸 때가 많았소. 그때 탁배기 한대야가 생겨도 이것을 친척, 친우들과 나누면서 한번 실컷 즐겨보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생각했댔소. 그런데 지금은 어떻소. 내 처지가 그때보다는 벼슬도 높아지고 살림살이도 굶지는 않게 되였다오. 그래서 늘 친구들과 자리를 같이 하지요. 술방구리에도 술이 차있으니 사람들과 자리를 같이하고 오래동안 앉아서 서로 즐기고싶단말이요.》

상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몽주의 술자리가 밑이 질기든 술을 많이 마시든 그가 언제 한번 취해서 비칠거리고 망동을 부리는것을 본 일이 없었던 까닭이다.

정몽주가 술을 마시는것도 사람들과 같이 즐기고 사람들과 사귀기 위해서였지 자기의 향락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상대는 다음 문제를 물어보았다.

《또 이런 말들도 있지요. 그대가 녀색에서 청백하지 못하다고 말이요.》

정몽주는 이 문제를 대번에 말하기는 좀 어색했던지 껄껄 웃고나서 대답했다.

《색을 즐기는것이야 사람의 응당한 심정이라오. 그것을 부정하는것은 거짓말쟁이고 위선자요. 나같은 사람만이 아니라 지금 사람들이 떠받드는 옛성인들도 다 장가를 가서 자손을 보았소. 그러니 그도 색을 싫어한것은 아니지 않소.》

질문자는 정몽주의 솔직한 대답에 오히려 감동이 더 커졌다. (옛 성인에게도 자식이 있고 후손들이 있는것이 그가 색을 싫어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닌가고 한 정몽주의 말은 자기가 색을 싫어하지 않는다는것만 말한것이 아니라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사람답게 처신하는것이 중요하다는것을 강조하고있지 않는가.)

질문자가 마지막 세번째 문제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사람들은 그대가 외국물건을 무역하여 집안에 끌어들이는데 무관심하지 않다고들 합니다.》

이 말을 듣자 정몽주는 얼굴이 시뻘개지면서 이마에 땀까지 약간 돋는것 같았다. 그러자 질문자는 지레짐작으로 (아하, 정몽주가 이 물음에 대해서만은 대답이 딱한 모양이군, 공연히 솔직한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어서 미안한데.)하는 생각을 가지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정몽주의 입에서 솔직한 말이 쏟아져나왔다.

《이 늙은것이 집이 가난한데 아들딸은 점점 커가지 않소. 안사람은 나보구 〈남들이 우리 집을 대가집이라고 쳐다보는데 대가집혼인에 남들이 다 쓰는 외국옷감 하나 없어서야 어찌겠소.〉라고 하는것이요. 나도 가만히 생각해보니 안해의 말을 아예 잘라버릴수는 없었소. 그리고 말이요. 무역을 해서 유무상통하는것은 옛날 성왕성인들이 내놓은 제도거든. 그러니 반대해서야 안되지요. 그런즉 내가 왜 그것을 꺼려야 하겠소.》

(얼마나 솔직한가. 자기 집안의 결함까지도 다 말하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나라의 부흥발전에서 무역이 중요하다는것을 인정하고 옛 성인들처럼 그것을 바로 운영하려는 결심,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가.)

질문자는 이런 생각을 하고나서 물어보기 거북한것을 본인에게 직방 물어본 후련한 심정과 대답하기 딱할수 있는 문제를 숨김없이 말하는 정몽주의 소탈함에 대한 존경으로 마치 무슨 큰 산고개를 넘어선 사람같은 시원한 기분에 사로잡히였다.

그런 심정을 담아서 질문자는 손을 홰홰 내저으면서 말했다.

《에에, 이제까지 물어본건 다 롱담이였소.》

《허허허. 롱담속에 진담이 있다고 하지 않소.

그대의 말을 듣고보니 내가 고쳐야 할 허물과 약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란 생각이 드오. 숨김없이 속생각을 말해주어 정말 고맙소.》

그후부터 정몽주는 생활을 절제있게 하기 위해 더욱 노력하였다.

 

우정은 우정이고 국사는 국사

 

정몽주는 리성계가 왕이 되려고 하기 전에는 그와 자주 만나 가깝게 지냈으며 고려말기에는 함께 정승의 지위에 올랐기때문에 국사도 서로 의논하면서 친근하게 지냈다. 그러나 리성계가 점차 자기의 지반을 꾸리고 정권탈취의 야욕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그와 등을 돌려대고 그를 반대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이미전에 해오던대로 왕의 스승이 되여 정사를 도왔으며 오직 고려조정만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리성계의 세력이 부당하게도 날로 강성하여지고 또한 간신들과 음모가들이 그 주위에서 맴돌며 그를 내세우려 하는것을 보자 그를 제거할 결심을 내렸다. 그리하여 명나라에 갔던 왕태자가 돌아올 때 마중나갔던 리성계가 돌아오던 중 해주에서 사냥을 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큰 상처를 입은 일을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리성계일파를 숙청할 면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때 리성계의 아들인 리방원이 이것을 제꺽 내탐하여 아비에게 급히 알려 리성계가 부랴부랴 돌아오도록 하는 바람에 일은 틀어지고말았다. 일이 이렇게 되자 리성계일파는 정몽주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며 몹시 꺼렸다.

그러나 리성계는 정권욕에 눈이 뒤집혀 최영을 비롯한 반대파세력들을 무참히 살해하면서도 정몽주만은 쉽게 죽이려하지 않았다. 그것은 리성계가 성리학을 통치리념으로 내세우고있었던것만큼 성리학자로 이름이 높았던 정몽주를 써먹는것이 왕조성립에 유리하였기때문이였다.

당시 정몽주는 유학자로서도 이름이 대단했다. 그의 친구였던 리색도 성리학에서는 한다하는 학자였으나 둘이 성리학에 대한 강론을 하면 정몽주편이 오히려 더 큰 절찬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유학을 보급하기 위해 개경에 량반자제들이 공부하는 5부학당과 지방들에 향교를 설치했다. 그리고 이에 모든 힘을 다해왔다. 이러한 정몽주인지라 리성계로서는 쉽게 죽여버리기도 난감했다.

어느날 리성계의 다섯째 아들 리방원이 리성계에게 이렇게 말했다.

《정몽주가 우리를 반대하여 나서는 기미가 있소이다.》

이 말에 리성계는 머리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 사람의 사람됨으로 보아 능히 그럴수 있다. 내가 일찌기 다른 사람의 참소를 당하였을 때 정몽주는 한사코 나를 위해 그것을 해명해주었다. 그러나 국가일에 있어서는 그의 심중을 잘 알수가 없다. 그는 우정은 우정이고 국사는 국사라고 할 사람이야.》

리성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과연 정몽주는 왕위를 노리는 리성계를 마지막까지 역신으로 규탄하여 반대해나섰다.

정몽주의 대쪽같은 성미에 더는 기대를 가질수 없다고 생각한 리성계는 드디여 그를 죽여버릴 무서운 흉계를 꾸몄다.

이때의 정몽주의 마음속 심경은 그가 문인인 둔촌(리양중)에게 보낸 시를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그는 이렇게 썼다.

 

사람이 자유롭기

새만 못한가

우리 어느날에나

숲아래 가서 살랴

 

부처와 잡신들을

섬기는 세상이라

소란한 소리속에

고운 곡조 스러졌네

 

붉은 마음 다 바쳐

나라 운명 지키나

소란한 세월속에

머리칼만 희였구나

 

다만 벽우에 걸린

푸른 칼날이

울분을 못참아서

밤마다 울고있다

 

둔촌은 고려말엽의 절개높은 선비인 리양중의 호이다. 리양중은 고려가 망하자 광주땅에 가서 밭을 갈며 살았는데 리성계가 한성윤이라는 높은 벼슬을 주어도 끝까지 받지 않고 한낱 농민으로 살다가 늙어서 세상을 떠난 사람이였다. 정몽주는 바로 이런 둔촌과 가까운 사이였다.

정몽주는 생활에서 우정을 중히 여기였으나 나라일을 우정우에 올려놓고 국가에 해를 주는것이라면 우정도 단호히 잘라버리는 결곡한 성품의 소유자였다. 이런 정몽주였기에 정권탈취의 야욕을 품은 리성계를 용납할수 없었던것이다.

 

죽음을 예감하다

 

왕조변혁이 눈앞에 닥쳐오고 조만간에 왕이 바뀔것은 뻔했다. 그러나 정몽주는 바람따라 돛을 달지 않고 마지막까지 자기의 신조를 지키였다.

어느날 그와 평소에 가깝게 지내오던 한 중이 그를 찾아와 말했다.

《세상일이 어떻게 되리란건 이젠 불보듯 명백하옵니다. 그런데 공은 왜 혼자 절개를 지키느라고 그러십니까. 죽음이 두렵지 않소이까?》

정몽주는 낯색 하나 변하지 않고 흔연히 웃으며 말했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네. 내가 일단 고려임금으로부터 나라일을 맡은 이상 어떻게 이제 와서 두가지 마음을 가지겠나. 난 이미 결심이 섰다네.》

정몽주의 립장은 드팀이 없었다. 그의 높은 학식과 인품이 아깝게 여겨져 중이 꺼낸 말이였으나 정몽주가 이렇게 나오는 바람에 중은 더 다른 말을 못하고 물러가버렸다.

하루는 친우인 권우라는 사람이 정몽주를 찾아왔다.

마침 정몽주도 어디에 나가던 참이라 둘이 함께 동리밖까지 나갔다.

이때 난데없이 나타난 무사 두어명이 활과 화살을 메고 바로 말머리앞을 가로질러서 건너갔다.

하인이 비켜서라고 소리를 쳤으나 무사들은 들은체도 하지 않았다. 불길한 징조였다. 말우에 앉아가던 정몽주가 불현듯 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넨 어디로 빨리 피하게. 나를 따라와선 안되네. 자칫하면 자네도 죽을수 있네.》

그러나 권우는 죽음의 도살장으로 그를 혼자 보내는것 같아 차마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그냥 따라왔다.

그러자 정몽주는 벌컥 화를 내며 꾸짖었다.

《어찌 내 말을 듣지 않는고.》

할수없이 권우는 정몽주와 갈라져 집으로 돌아갔다.

그로부터 며칠후 과연 정몽주가 피살되였다는 소식이 그의 귀에 전해졌다.

 

최후에 남긴 《단심가》

 

리성계의 형 리원계의 사위인 변중량이 의분에 북받쳐 정몽주를 찾아왔다. 그는 리성계와 그의 아들 방원이 정몽주를 제거하기 위해 꿍꿍이를 하고있다는것을 몰래 알려주었다.

정몽주는 자기 한몸이 잘못되는것은 두렵지 않으나 리성계가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보다 새로운 모략을 꾸미고있다는것을 직감하였다. 시간을 지체할수 없었다. 정몽주는 곧 리성계의 집을 찾아갔다. 자기는 맞아죽을수 있다. 그래도 가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그들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서였다. 정몽주가 방안에 들어서면서 병문안을 하자 리성계는 전과 다름없이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그것이 겉발림이라는것을 정몽주는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 인차 되돌아서려고 하는데 리방원이 그를 자기 방으로 안내하는것이였다. 굳이 물리칠수 없어 따라가보니 그곳에는 푸짐한 음식상이 차려져있었다. 정몽주는 이 주연상이 례사로운것이 아님을 대뜸 알아차렸다.

그의 머리에는 조금전에 집을 나설 때 어머님께서 들려주시던 시조 한구절이 피뜩 떠올랐다.

 

가마귀 싸호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말아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창파에 조히 씻은 몸을 더러일가 하노라

 

※ 가마귀ㅡ까마귀

※ 싸호는ㅡ싸우는

※ 새오나니ㅡ샘하나니

※ 조히ㅡ깨끗이

※ 더러일가ㅡ더럽힐가

 

자리를 잡은 후 정몽주는 리방원이 권하는 술을 받아마셨다. 그리고 흰떡 한가지만을 골라가며 먹었다.

정몽주의 이러한 태도에서 리방원은 그의 속마음을 읽었다. 그러나 리방원은 정몽주의 심중을 다시한번 떠보려는 속심에서 몇순배의 술이 오간후에 시조 한수를 슬그머니 던지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러한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츩이 얽어진들 긔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서 백년가지하리라

 

※ 드렁츩ㅡ드렁의 칡

※ 백년가지하리라ㅡ100년을 함께 지내리라

 

리방원의 이 시조는 사람들이 일명 《하여가》라고 부르는 시조로서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냐라는 내용을 담고있다. 방원은 이 시조를 통하여 정몽주에게 《만수산(개성에 있는 산)의 드렁츩이 서로 얽히듯이》 자기네들과 손을 잡자는것을 암시하였다.

방원의 속심을 알아차린 정몽주는 태연히 술잔을 받은 다음 다시 술을 부어 방원에게 주면서 이에 화답하는 시조 한수를 읊었다.

 

이 몸이 죽고죽어 열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여 넋이라도 있고없고

… …

 

이 시조가 바로 정몽주가 최후에 남긴 《단심가》였으니 여기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충정과 지조가 그대로 비껴있었다.

시조를 마친 그는 군말없이 일어서서 리성계의 집을 나섰다. 이제 더 다른 말이 무슨 필요있으랴…

집으로 돌아오던 정몽주는 하도 가슴이 답답하여 이전부터 알고있던 술집에 들렸다.

주인은 외출하여 없고 화단에 꽃만이 활짝 피여있었다. 정몽주는 술집에 들어가 술을 청하여 마시고나서 마당에 나와 꽃밭속에 들어섰다. 마지막 인생이나마 아름답게 추억하고싶었다. 이때 영문 모를 돌개바람이 휘익 불면서 먼지를 자욱히 일으켰다.

《어허, 오늘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걸… 불길한 징조로군…》

다시 술집에 들어간 그는 큰 잔에 술을 가득 부어 련거퍼 들이마시고 인차 술집을 나섰다.

한편 리방원은 최후수단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처음에 리지란을 불러 이 일을 맡겼는데 그는 말하기를 정몽주는 아까운 인재이므로 리용해야 한다는것이였다. 결심을 고쳐한 리방원은 심복장사 조영규를 불러들여 면밀히 과업을 주었다.

《그대는 군기고의 쇠도리깨를 가지고 급히 선지교근처에 가서 은신하고있다가 조금 뒤에 정몽주가 그곳을 지날터이니 덮어놓고 내달아서 때려죽이고 돌아와 알리도록 하라.》

《예잇!》

조영규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술집을 나선 정몽주가 말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어떤 건장한 무사가 그의 앞을 질러나갔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정몽주는 말을 멈추게 하고 땅에 내려서 자기를 따르고있는 사람에게 조용히 일렀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나는 이미 마음에 정한바 있으니 구태여 피하려 하지 않는다. 너는 공연히 화를 당할 까닭이 없으니 나를 따르지 말고 떨어져라.》

정몽주는 자기때문에 그까지 화를 당할것이 걱정되였다.

정몽주를 따르고있던 김경조는 공민왕시기 시중의 벼슬을 지낸 김구주의 아들이였다. 그는 늘 정몽주를 존경하고 따르던터라 그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상공께서 변을 당하실텐데 소인이 어찌 편안히 살기를 도모하리까? 죽을 땐 죽더라도 마지막까지 모시고 가겠나이다.》

정몽주는 그를 떠밀치고 단호하게 말우에 올라탔다. 그런데 아까와는 달리 잔등이 말머리쪽으로 가게 거꾸로 탔다.

《대감은 무슨 리유로 말을 거꾸로 타시나이까?》

김경조가 묻자 정몽주는 근엄한 안색을 지으며 말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피와 살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음을 당하기 싫어 아까운 술을 많이 마신것이고 이젠 앞에서 달려들어 때리는것을 보기 싫어 말을 돌려 타는것이다.》

정몽주가 말은 이렇게 하였지만 죽는 순간까지 리성계의 반역행위에 등을 돌려댈 결심이 확고하다는 표시인줄 김경조가 어찌 모르겠는가.

《저도 대감님과 운명을 함께 하겠나이다.》

그도 말에 올라 정몽주의 뒤를 따랐다.

일행이 선지교에 이르렀을 때였다. 다리밑에서 기다리고있던 장사가 달려나와 쇠도리깨로 정몽주를 내리쳤다. 순간 김경조가 얼른 몸으로 정몽주를 감싸안았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선지교의 란간을 물들였다.

김경조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 자리에 푹 꼬꾸라졌다. 다급히 말에서 내린 정몽주가 김경조를 싸안고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두번째 철퇴(쇠몽치)가 그의 머리를 때렸다.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한몸이 되여 쓰러졌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다리에 고였다가 흘러내려 그밑의 돌담을 적시며 스며들었고 괴한은 소리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이렇게 정몽주는 마지막숨을 거두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55살이였다.

정몽주가 마지막길을 간 선지교는 개성시 선죽동 로계천에 놓여있는 크지 않은 돌다리이다. 그가 죽은 선지교에는 정몽주의 꺾이지 않는 지조런듯 대나무가 솟아났다고 한다. 때문에 다리이름을 선지교라는 종전의 이름대신 선죽교라고 고치였다 한다. 그리고 정몽주가 흘린 붉은 피의 흔적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돌에 그대로 남아있다고 전해진다. 화강석으로 된 선죽교는 1216년 이전에 놓은것인데 란간은 정몽주의 후손들에 의하여 1780년에 덧붙여 쌓아졌다. 선죽교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정몽주를 잊지 않기 위해 《표충비》가 세워졌다.

후날 그를 살해한 리방원이까지도 왕이 된 후 그의 충절을 높이 찬양하여 그에게 령의정이라는 명예벼슬을 주고 문충이라는 시호까지 내리였다고 한다. 참으로 낯가죽 두껍고 렴치없는 짓이다.

임진조국전쟁시기 중으로서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른 의병장 사명당은 어느해 선죽교를 찾았다가 이런 시를 남기였다.

 

산천은 예 같으나

조정은 갈렸구나

나라 잃은 슬픈 노래

그 얼마나 울렸던고

 

지는 해 옛성터

봄풀 우거진 속에

아직도 정공의

비석만이 서있구나

 

그 봄풀 우거진 속에 호젓이 서있던 《표충비》는 우리 당의 력사유적유물보존정책에 의하여 오늘날 귀중한 민족력사유적의 하나로 훌륭히 보존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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