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근

(1352ㅡ1409)

 

고려말ㅡ리조초의 학자, 시인. 자는 가원(후에 사숙), 호는 양촌이다. 대대로 고위관료인가정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즐겨하고 부지런히 공부하였다. 17살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1374년에 성균관 직강, 예문관응교가 된 후 벼슬이 조금씩 올라갔다. 이 기간에 공민왕피살사건, 우왕축출사건 등과 관련하여 일련의 풍파를 겪었다. 1389년에 고려외교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리성계일파는 권근이 저들에게 붙지 않고 왕의 장인인 리림과 접촉하는것을 미워하여 트집을 잡아 그를 경상도 녕해로 귀양보냈다. 이런 일이 있을 때 조정에서는 리성계에 의해 창왕이 제거되고 공양왕이 들어앉는 파동이 일어났다. 권근은 청주감옥에 끌려가있다가 풀려난 후 벼슬살이를 하지 않고 한성, 충주 등지에서 학문연구와 집필사업에 전심하였다.

리성계가 고려왕조를 뒤집어엎고 저들의 왕권을 세운 후 고려의 관료, 문인들에게 회유정책을 쓸 때 권근은 중추원의 원사라는 고위관직을 받았다. 리성계정권과 타협한것으로 하여 력사에 오점을 남겼다. 권근은 1396년에 외교사절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마지막벼슬로 대제학이라는 학문연구부문의 최고위급직책의 하나를 맡았다.

권근은 성품이 차근차근하고 정밀하며 온순하고 단정하면서도 대범하고 서글서글한데가 있었다. 그리하여 아무리 위급한 순간이라도 헤덤비는 일이 없이 침착하게 처리할줄 알았다. 그는 문장에 재능있고 학문에서 다방면적인 식견의 소유자였으며 특히 성리학에 밝았다. 작품집으로 《양촌집》(40권), 저서로 《동국사략》(2권), 《입학도설》(1권) 등이 있다.

그의 문학작품에서 많은 시, 산문들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국어가요인 《상대별곡》은 경기하여체시가형식으로 씌여졌으므로 고려시기에 발생한 이 시가형식의 계승변화과정을 연구하는데 력사적문헌자료로 리용되고있다. 한자시로 《최무선장수를 찬양하여》, 《부벽루에서》 등이 있다.

 

《최무선장수를 찬양하여》(2수)

 

한자시. 시의 본제목은 《최무선원수가 진도에서 왜적을 격파할 때 처음으로 화포를 만든것을 축하하여》이다.

 

1

그대의 뛰여난 재능

어려운 때에 빛났도다

30년동안 괴롭히던 왜구를

하루아침에 물리쳤으니…

 

순풍에 돛달고

쏜살같이 달려오는 배들을

우뢰소리 천지를 흔들며

포화로 짓부셔버렸구나

 

주유가 갈대 태우던 일

아이들 장난같애 우습구나

한신이 독을 엮어 떼무은 이야기

오늘엔 자랑이 못되네

 

장하다 그대 공로

만세에 길이 전하리

그대 초상 높이 걸어

모든 고을에 널리 알리리

 

시의 첫수에서는 최무선(14세기에 화약을 발견하고 그것을 무기제조에 리용하여 조국방위에 쓴 애국적인 과학자, 무관)이 화약을 리용하여 화포라는 위력한 무기를 만들어 침략행위를 감행하는 악독한 왜적을 통쾌하게 족친데 대하여 찬양하고있다.

 

2

하늘도 화포를 만드는

그대의 충성심 도왔는가

전함을 이끌고 가서

첫싸움에 흉한 적 무찔렀네

 

공중에 서렸던 도적의 기세는

연기와 더불어 흩어져버리고

세상에 떨친 그대의 이름

해빛과 함께 널리 퍼지리

 

그대의 맹세 어찌

높은 공로만을 위하여서랴

줄기찬 싸움에서

나라의 신임 받았도다

 

종묘가 경사롭고

온 나라안이 편안해졌으니

만백성의 목숨이

다시 살아났도다

 

시의 둘째수에서는 최무선이 왜적을 무찌른 공로와 그 애국적내용이 찬양되고있다.

이 시에는 최무선이 화약무기제조에 성공한 무렵 왜적들이 전선(전투할 때 쓰는 배) 500척을 타고 전라도 진포에 침입하여 야만적인 략탈행위를 감행하자 최무선이 100척의 배를 끌고 출전하여 화포불벼락으로 놈들을 섬멸한 력사적사실이 반영되여있다.

권근은 최무선이 화포를 써서 간악한 왜적의 침입을 짓부셔버린 력사적사실을 반영하면서 화포를 사용한것이 과거의 력사에서 크게 떠들었던 다른 나라 군사책략가들의 전법들과는 대비도 안되게 우월하고 위력하다는것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최무선의 공적이 가지는 시대적의의와 결부하여 그를 높이 찬양하는 동시에 시인자신의 민족적긍지감을 뜨겁게 토로하여 작품의 애국주의적내용을 더욱더 선명하고 격조높게 밝히였다.

시묶음은 예술적으로 두개의 시속에 최무선의 공적과 그 의의를 각각 나누어 순차적으로 형상함으로써 설득력이 더욱 힘있게 나타날수 있게 하였다.

 

※ 주유… 중국의 옛날 오나라 장수. 적벽강싸움에서 갈대를 불태워 상대국 군사를 물리쳤다.

※ 한신… 중국의 한나라 장수. 안읍을 공격할 때 독으로 떼배를 만들어서 강을 건너간 일이 있었다.

 

우왕을 지극히 충고하였건만…

 

30대의 권근이 좌사의대부(왕의 잘못을 충고하는 기관의 중간급)관직에 있을 때였다.

우왕(통치년간 1375ㅡ1388)이 왕노릇을 한지 몇해가 되자 점점 타락하였다. 우왕이 이렇게 된데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었다. 리성계일파가 이때 정권야심을 품고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이라고 뒤말질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우왕의 어머니를 사기적방법으로 왕궁의 어느 후궁이라고 공식발표하였다. 우왕의 친어머니인 반야는 하도 억울하여 우왕이 자기가 낳은 아들이라는것을 시어머니가 되는 공민왕의 어머니 태후에게 호소하였다가 반대파들에게 붙잡혀 수장당하였다. 조정은 리성계일파가 세력을 야금야금 확대하여 언제 우왕을 내쫓을지 모를 위태위태한 형편에 놓여있었다.

권근이 생각하기에는 이럴수록 왕이 정신을 바싹 차리고 반대파를 누르며 충신들과 협력하여 정국을 바로잡게 해야 하겠으나 우왕은 일이 될대로 되라는 태도로 밤낮 술과 녀자와 놀이에 빠져 해가 뜨는지 지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으니 정말 안타까운 노릇이였다.

그는 마침내 붓을 들고 왕의 그릇된 태도를 호되게 충고하는 상소문을 썼다. 권근은 비장한 결심을 하였다. 자기가 쓴 상소문이 왕의 비위를 거슬리는 경우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워질것은 불보듯 뻔하였다. 왕이 똑똑한 경우에도 충고하는 신하의 말이 귀에 거슬리면 그 신하를 내쫓거나 죽여버리는 일이 허다한데 하물며 우왕과 같이 술에 정신이 흐려지고 녀자에게 빠진 어리석은 왕이야 더 말할것이 못되였다.

이모저모로 생각이 깊었지만 권근은 기울어져가는 고려를 건지려는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문을 썼다.

우왕이 상소문을 받아보니 어조가 여간 강경하지 않고 자기의 비행에 대한 렬거 또한 날카로웠다. 왕은 속이 뒤틀렸으나 엄연한 사실앞에서 어쩔수 없었다. 왕은 노여움을 가까스로 참고 상소문을 거듭 읽었다. 그러는 사이에 권근이 말은 날카롭게 하였으나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 곧고 뜨거운데 대하여 차츰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드디여 우왕은 얇은 흰비단을 내려보내면서 권근의 상소문을 그대로 그 비단에 베껴오게 하였다. 우왕은 그것을 병풍에 붙여놓고 늘 상소문을 보면서 자신을 다잡으려 하였다.

우왕의 이 의도야말로 얼마나 그럴듯 하였겠는가. 하지만 사태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점점 뒤틀려나갔다. 이미 고려왕조의 운명은 서산락일에 처하여 만회할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는것이 누구의 눈에도 확연해졌다. 그러니 우왕은 아무리 권근의 충고대로 정신을 차리고 살자하다가도 그것은 한순간이고 제힘으로는 어쩔수없이 기울어져가는 고려왕조의 운명을 눈앞에 보고는 또다시 도루메기가 되였으며 나중에는 리성계일파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목숨까지 잃고말았다.

 

외국사절이 표시한 경의

 

리성계의 다섯째아들 리방원이 왕이 되여 정권을 잡고있을 때였다. 명나라 성조가 즉위한 다음 한번은 유사길, 온불화 등을 우리 나라에 외교사절로 보낸 일이 있었다.

명나라 성조는 그 나라 태조 주원장의 넷째아들인데 태조가 죽자 건문제를 내쫓고 왕의 자리를 빼앗은 사람이였다. 형인 정종을 밀어내고 왕자리에 타고앉은 리방원과 성조는 이런 점에서 한바리에 실으면 어느쪽도 기울지 않을 사람들이였다. 거기에다 명나라와 손잡는 정책을 넘겨받은 리방원인지라 명나라 성조가 보낸 사절을 각별히 잘 대해주었다.

외교사절을 환영하는 연회가 성대히 차려졌다. 태종자신이 직접 연회에 참가하였다. 이 연회에 권근도 초대받았다. 살색이 가무잡잡하다고 하여 별명이 까마귀이고 그자신도 자기 호의 하나를 희롱삼아 소오자(새끼까마귀)라고 한 권근인지라 으리으리하게 차려입은 멀쑥한 고관대작들속에 끼여앉은 그의 모습은 빛이 나지 않을뿐아니라 초라하게 보일 지경이였다.

사신들도 처음에는 무심히 스쳐보다가 초라해보이는 사람이 고관대작들사이에 떡 버티고 앉아있는것이 까닭없는 일이 아닌줄 알았던지 영접담당관원에게 《저분이 뉘시오?》하고 물어보았다. 《양촌 권근이라는 큰 어른이시오.》라는 대답을 듣는 순간 유사길도 온불화도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어인일인지 권근에게서 감동어린 눈길을 떼지 못했다. 연회가 한창 진행되면서 서로가 잔을 권할 때 권근은 례식에 따라 잔에 술을 부어 외교사절들에게 돌리였다. 술심부름을 하는 사람을 시켜 술잔을 전하면서 그들이 체류기간 즐겁게 지낼것을 축원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외교사절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잔을 받고 권근의 축원에 정중한 자세로 사의를 표하는것이였다. 외교의례에 보기드문 일인지라 연회참가자들은 어리둥절하였다. 다른 관원들이 잔을 돌릴 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권근에게서만은 일어서서 잔을 받고 각별히 정중한 태도를 취하였으니 그럴만도 한 일이였다.

태종도 그들이 취하는 태도에 호기심이 동했다. 그는 명나라 사신들에게

《어째서 일어나는거요?》하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유사길이 먼저 대답하였다.

《내가 어찌 앉아서 잔을 받아 로숙하고 완성된 군자를 감히 욕되게 할수 있겠습니까.》

이번에는 온불화가 주를 붙이였다.

《우리 나라 고황제(명태조)께서도 존경하여마지 않는분이신데 우리가 어찌 감히 소홀히 대할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태종은 의미깊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은 공연히 하는 외교적인 빈말이 아니였다. 명나라 태조 주원장이 권근에게 존경심을 가지고 대한 사실이 있은것을 태종자신도 잘 알고있었다.

그것은 태조 5년에 있은 일이였다. 그때는 주원장이 원나라 순제를 밀어내고 명나라를 세운 초시기였다. 이러한 때 리성계정권과 주원장정권사이에 하나의 외교문서에 대한 의견차이로 감정이 어성버성해졌다. 그 외교문서의 초안은 정도전이 만든것이였다. 사태는 정도전이 명나라에 가서 수습해야 할 형편이였다. 그런데 정도전은 아프다는 핑게를 대고 명나라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 나라에 가보았댔자 자칫하면 서로 조용한 말이 오가지 못할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겠지만 그에 비할바 아닐만큼 큰 관심사는 왕자들사이의 왕위쟁탈암투가 날로 심각해지는데 있었다. 그때 정도전자신이 가담하고있던 리성계의 두번째 왕후 강씨소생의 왕자 방석의 세력이 첫번째 왕후 한씨의 아들 방원의 세력보다 점점 약해지고있었다. 이 싸움에서 방석이 지는 날에는 정도전도 목숨을 잃게 될 판이였다. 아닌게아니라 이때부터 2년 후인 태조 7년에 정도전은 방원과의 마지막대결에서 패하고 맞아죽었던것이다.

이러한 때였으니 정도전은 남의 나라에 가서 외교문서상 오해를 푸는 문제같은것은 안중에 있을수도 없는 처지였다.

리성계와 그의 여러 신하들은 정도전이 가지 못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머리를 앓게 되였다. 이런 때 권근이 스스로 나서서 자기도 그 외교문서작성에 관여하였으니 자기가 가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였다. 마침내 그의 의사가 승인되여 권근이 명나라에 가서 주원장을 만났다. 주원장은 권근의 사리정연하고 당당하며 걸고들만한 건덕지를 주지 않는 언변에 감동되였고 그의 문장과 박식에 탄복하였다.

주원장은 술과 음식, 음악으로 권근을 푸짐히 대접하고 이름있는 문인, 학자들과 함께 시를 지으며 여러날 즐기게 하였다. 주원장은 권근에게 매혹되여 《로실수재》(로숙하고 실력있는 수재)라는 찬사를 아낌없이 하였고 떠나올 때에는 금덩이와 물품들을 주었다.

권근은 이런 환대를 받은것때문에 귀국후 반대파들의 시비에 걸려 애를 먹었다. 그러나 그후로 우리 나라를 찾아오는 명나라 문인, 외교사절들은 국경을 넘어서기 바쁘게 우리측 영접관의 손을 붙들고 권근의 안부를 물었고 체류기간에 꼭 권근을 찾아가 그의 시와 글을 얻어가지고 돌아가군 하였다. 이런 일로 하여 권근의 명성은 명나라 조정과 문인들속에서 대단히 높았다. 유사길, 온불화가 사신으로 우리 나라에 왔을 때도 권근이 주는 술잔을 일어서서 정중한 자세로 받아 연회참가자들을 경탄케 하였던것이다.

권근은 고려때 벼슬길에 나선 사람으로서 리성계에게 억지로 끌려들어 벼슬을 한것때문에 고려왕조의 지지자들로부터 성이 다른 두 왕을 섬긴 변절자라는 규탄을 받았으며 강직한 성격을 가진 원천석에게서도 신랄한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박식과 언변, 외교적수완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까지 커다란 환심을 불러일으켰다.

 

아  량

 

권근이 한번은 먼곳에 있는 어느 한 지방에 일을 보러 내려갔다가 당시의 서울로 급히 올라오고있었다. 말을 채찍질하며 겨우 다음 역참에 들어섰을 때였다. 옛날에는 지방으로 다니는 벼슬아치들의 통행의 편리를 보장해주고 변방들에 있는 관가의 급한 통신을 전달하기 위해 요소요소에 지금의 철도역처럼 역참을 설치해놓았었다. 이 역참에서는 말을 먹여두었다가 벼슬아치가 요구하면 말을 갈아타고 가도록 내주기도 하고 려행관원들을 재우기 위해 숙소도 제공하였다. 이 역참에서 일보는 종6품의 하급관원을 찰방이라고 하였다.

권근이 역참에 들어섰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멎기를 기다리는데 비가 좀처럼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자 권근은 갈길이 급한지라 역참의 찰방에게서 우장과 모자를 빌려쓰고 길을 떠났다. 퍽 사치하게 만든 물건이였다. 오는 도중에 비가 멎은지라 다음역에서 빌린 물건을 돌려보내고 자신은 서울에 들어왔다.

권근은 찰방이 자기에게 빌려준 우장과 모자를 받았겠거니 생각하고 그에 대해서는 감감 잊어버리고있었는데 얼마후 뜻밖의 통지를 받았다. 사연인즉 권근이 빌려간 우장과 모자를 돌려주지 않았는데 물건을 보내주던가 아니면 물건값을 속히 보내달라는 통지였다.

권근은 생각할수록 억울하기도 하고 괘씸하기도 하였으나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그 찰방이 요구하는 약차한 물건값을 보내주었다.

이 소문이 각지의 역참들에 쫙 퍼지게 되였다. 그래도 권근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일이 그것으로 끝나는가 하였는데 얼마동안 지나간 후에 또 그런 일이 번져져서 권근에게 불티가 튕겨왔다. 한번도 본 일이 없는 한 사나이가 권근을 찾아왔다. 사연인즉 전번에 권근이 자기네 역참에 들렸을 때 고급모자와 웃옷을 빌려간 일이 있는데 그것을 찾으러 왔다는것이였다. 이 사나이도 찰방인데 그가 있는 역참은 지난번 찰방이 있는 역참과는 다른 곳이였다. 권근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보아야 그런 역참에서 모자와 웃옷을 빌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는 사나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자기도 기억력에서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사람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얼굴이였다. 그러나 그는 사리를 따지려고도 하지 않고 호령을 칠 잡도리는 더욱 아니였다. 묵묵히 앉아있던 권근은 아래사람을 부르더니 찾아온 사나이가 요구하는 돈을 가져오게 하였다.

마침 권근을 찾아온 관원 한명이 있었는데 권근을 잘 아는 그는 찰방의 하는 짓이 어딘가 의심스러웠다. 관원은 권근에게 말했다.

《제 보기에는 공이 까닭없이 루명을 쓰고 말없이 또 돈을 물려는것 같은데 저런 무례한 짓을 하는자는 버릇을 떼놓아야 합니다.》

권근은 그 관원을 말리고서 돈을 받으러온 찰방에게 주어서 내보내는것이였다.

결기있는 그 관원은 참을수 없어 곧 자리를 차고 일어나 찰방을 뒤따라나갔다. 관원은 그 찰방을 잡아다가 심문을 해보았다. 처음에는 한두마디 뻗대던 찰방이 더는 속이지 못하고 고백하였다.

《제가 거짓말을 하였소이다. 권대감께서 저의 역참에서 옷이나 모자를 빌려가신 일이 없소이다.》

《그런데 네 어찌 감히 그런 루명을 그 어른에게 씌운단 말이냐. 이 죽일놈 같으니.》

《사실은 지난번에 한 찰방이 모자와 우장을 받지 못하였다고 값을 물어달라고 하였을 때 대감께서 시비곡직(옳고 그르고 굽고 곧음)을 따지시지 않고 물어주셨다는 소문이 역참들에 쫙 퍼졌기에 저도 돈욕심으로 거짓말을 하였소이다.》

관원은 찰방을 당장 엄중히 처벌하고싶었으나 권근이 어째서 이번에도 딴말없이 물건값을 요구대로 내주었겠는가 하고 생각하게 되였다.

《오죽하면 그자가 그런 짓을 했겠나. 너무 과도히 다루지 말게.》라고 하던 권근의 말을 생각하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알고도 묵과하여 조장시키는 결과를 빚어낸 우유부단성에는 의견이 있었으나 사람의 죄를 관대히 용서하는 권근의 아량을 고려하여 그 관원은 거짓말을 한 찰방을 단단히 정신들게 한 다음 놓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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