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102(2013)년 3월 26일 《우리 민족끼리》

력사상식

안중근 (1879. 9. 21-1910. 3. 26)

 

안중근은 일제의 조선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한 반일애국렬사이다.

그는 일찍부터 선조들의 애국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조국의 력사와 군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자기 집 재산을 팔아서 무기도 구입하고 지방소년들로 《향군회》를 조직하여 군사훈련도 은밀히 하였다.

1905년에 중국 상해에 가서 동료들과 애국활동을 벌리다가 아버지의 부고를 받고 일시 귀국하였다. 1906년 삼화부(평안남도 룡강군)로 이사하여 삼흥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07년부터 애국문화운동단체인 《서우학회》 회원이 된 다음 삼화지회를 내왔으며 국채보상운동이 벌어지자 이 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이해에 일제가 《정미7조약》을 날조하고 조선군대까지 강제해산시킨데 격분한 그는 룡강일대에서 의병을 조직하려다가 탄로되여 1907년 말 로씨야의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안중근은 《단지동맹》을 뭇고 망명자들로 반일의병대를 조직하여 참모총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부대와 함께 1909년 6월 은덕에 진격하여 일제침략군에게 타격을 주었다.

의병대의 회령전투실패후 그는 조선침략에 앞장선 일본의 고위급반동정치가들을 처단할것을 결심하고 그 첫번째로 조선침략의 원흉인 이또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하였다. 그해 10월 이또가 로씨야재무대신 꼬꼬흐체브와 만주침략문제를 둘러싸고 회담하기 위하여 할빈으로 온다는것을 알게 된 안중근은 이 절호의 기회에 이또를 처단할 결심밑에 뜻을 같이하는 우덕순, 조도선 등과 면밀한 계획을 짰다. 조도선, 우덕순이 책임진 조가 채가구역에서 이또를 처단할 계획이 실패하자 혼자서 할빈을 담당한 안중근은 1909년 10월 26일 일제와 로씨야군경들의 삼엄한 감시망을 뚫고 《환영》군중속에 끼여 홈으로 나갔다.

아침 9시 이또가 예정대로 할빈역에 도착하자 안중근은 권총으로 그자에게 조선민족의 원한이 서린 복수의 총탄을 안기여 사살하였고 그자를 구원하려고 모여온 일제의 가와시마령사, 모리서기관, 다나까만철리사장을 차례로 쏘았다. 그리고 쓰러진 원쑤들앞에서 통쾌하게 《조선 만세!》를 소리높이 웨치였다.

애국렬사 안중근의 거사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국내외의 의로운 모든 사람들은 그의 의거에 대하여 찬탄해마지 않았다.

일제군경에게 체포된 안중근은 려순감옥에서 생명의 마지막순간까지 애국의 민족적지조를 지켰으며 옥중에서 조국산천이 귀중하다는 뜻을 담아 《제일강산》이란 글을 썼고 일제침략자들을 동양평화의 교란자로 규탄하는 《동양평화론》이라는 글을 지었다.

일제침략자들은 1910년 2월 14일 형식적인 재판놀음을 벌려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으며 3월에는 그를 교수형에 처하여 학살하였다.

안중근의 희생적인 투쟁은 조선인민은 결코 남의 노예로 살기를 원치 않으며 외래침략자들과는 사생결단으로 싸우는 용감한 인민이라는것을 보여준 애국적장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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