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동신문


(제 51 회)

 

16. 송악에서 사라지다

2

(1)

 

《그대가 거란간자들의 목을 친 일을 놓고 못마땅해한다는게 사실이뇨?》

왕건이 피로한 눈길로 묻는 소리에 왕유는 머밋거리다가 대답했다.

《그들은 거란의 간자가 아니오라…》

《그대의 간자라는것이오?》

《그런 표적을 찾아보았소이다. 필경 화친을 청하러…》

《괜한 수고를 하고있소. 거란은 발해를 무너뜨린 적국이라 내 죽기전에 그 앙갚음을 하지 못해 한일진대 화친이라니… 짐이 등을 돌리는 나라를 한사코 끄당기려 하니 잘하는 일같지 않소.》

《끄당기는건 아니옵고… 거란과 차이는 두더라도 상대를 해보아야 그네들 속을 알기도 수월하고 또 우리 고려국의 권위에도 부합된다고 소신은 생각하나이다.》

《원쑤는 원쑤로 대할뿐이요. 여기에 무슨 가식이 필요하오?》

《강국의 체모가 있지 않소이까. 무서울게 없는 나라인데야 좀 너그럽게 대해줄수도 있는것 아니오이까?》

《여유를 보여줄수도 있겠지. 허나 이왕에 강국인 우리 고려가 그따위 오랑캐국에 대고 례의를 차려야만 할 일은 아니지 않소. 무서운게 없는데야 부디 속에 없는 호의를 베풀 까닭이 무엇인가 말이요. 그대는 일욕심은 좋은데 짐이 필요로 하지 않는 일을 고집스레 하고있는데는 정말이지 여간 불편하지 않소.》

《페하를 노엽히여 죄송하오이다.》

왕유는 왕건의 심신이 극도로 피로해있다는데 생각이 미치였다.

《짐이 그대 마음을 몰라서 그러는게 아니요. 그대는 언제봐야 내가 좋아하든 말든 나를 돕겠다고 생각한 일은 하고야 직성이 풀려 하는 고집불통이니까.》

《그렇게 너그러이 리해해주시니 더 할말이 없소이다. 어찌하였든 페하의 강경립장은 우리 고려의 자존심을 더욱 부각시키는것으로 될것이오이라 그를 따름에 다른 이의가 없소이다.》

왕유는 거란에 대한 왕건의 강경자세가 고려사람전체의 민심을 반영한것으로서 고려의 리익에 저촉되지 않는 한 따라야 하는것이 신하의 도리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페하, 저를 그만 탓하시고 심신을 고정하소서. 그러지 않아도 요사이 페하의 안색이 말이 아니오이다.》

《아, 사람이 한번 나서 죽는건 피할수 없는 례상사일진대 그렇더라도 가까운 사람들이 내앞에서 먼저 가는건 정말이지 괴롭기 그지없구려. 우리 리화부인은 정말이지 당대에 보기 드문 녀걸이였소.》

《실로 그러하오이다.》

《그대가 그간에 리화부인을 도와 일을 많이 하였소. 내 감사의 말을 미처 고르지 못하겠구려. 그대도 이젠 너무 마음쓰지 말고 쉬염쉬염 일하시오. 몸을 돌보라는 말이요.》

《황공하오이다. 페하, 왕후마마가 없고보니 마음이 허전한게 영 안착이 안되오이다. 이제는 우리 고려국이 드팀이 없이 나아갈것이라 소인은 장담하오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온데 소신도 인츰 자리를 일겠소이다. 페하의 슬하에 들 때 한 약조대로 때가 된지라 저는 페하곁을 뜨겠소이다.》

왕유의 이 말에 왕건은 미간을 찌프렸다.

《가라는 소리가 죽으라는 소리보다 더 싫게 들린다는 말도 있거니와 내 어찌 그대를 뜨라 할수 있겠소? 그간에 들인 정으로 보아도 우리야 떨어질수 없는 사이가 아니요. 다시는 그런 말 마오. 죽을 때까지 말벗삼아 살아갑시다. 좀 티각태각하면 뭐라오? 사람은 다투면서 더 정든다지 않소.》

《황공하나이다. 하오나 페하, 페하의 신변을 위협한 그 후백제간자의 음독미수건은 정말이지 용납할수 없는 신의 대죄이옵나이다. 페하께서 아무리 너그러이 용서하여주시여도 페하의 안전을 맹약하고서 그를 어겼으니 그 죄 시퍼런 하늘아래서 피할수 없나이다. 죽어 마땅한 죄를 따지지 않으시는 페하의 너그러움앞에 하루에도 골백번을 머리숙여 조아리는 신이오이다. 주변의 눈도 있고 페하신상에 티끌만 한 위험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조정의 기강을 보여주는 의미에서도 그러하오니 저는 물러가겠소이다. 신이 페하의 안전을 도모하는 명분으로 슬하에 든것을 이제는 조정이 다 아는 사실인데 누구는 벌하고 누구는 용서한다는 이중기준을 만드는 전례를 남기는 허물을 저는 바라지 않소이다. 조용히 사라지는것만도 신에게는 지나친 특혜이라 여한이 없소이다.》

《그런 말은 그만합시다. 이제 우리가 얼마나 더 살겠는지 모르겠소만… 그런 생각일랑 싹 거두고 일을 합시다, 일을.…》

왕건은 눈을 쪼프리며 손을 내젓다가 왕유의 무릎을 건드리며 화제를 돌렸다.

《참, 그대만 알고계시오. 삼년전에 후진에 가는 사신단에 최언위어른의 맏이를 끼워보냈소. 그를 후진에 류학명분으로 머물러있게 한것을 그대는 모를것이요. 그는 후진에 남아 그곳의 동태를 알려주는 일을 할것이요. 그만하면 나도 잠만 자는 사람이 아니지 않소?》

왕건은 오랜만에 껄껄껄 웃음을 흘렸다.

《최언위어른의 말을 들으니 그대도 후진과 거란에 어지간히 줄을 늘여놓고있다던데… 그건 좋은 일이고… 하지만 그까짓 거란이 부디 고려에 무릎걸음하라 부추길것까진 없소. 돌궐이 요즈음 조금 기운을 쓰는가본데… 그통에 거란은 더우기 바빠나서 우리에게 접어드는것이요. 내 보기엔 돌궐도 인츰 주저앉을것 같고 그러면 거란이 다시 기승을 부리겠지만 그대신 후진이 맥을 잃지 않고 용을 쓰면 거란은 거기에 말려 우리를 넘볼 생각을 못할거란 말이요. 문제는 후진을 지원하는것이요. 후진이 우리 대신 거란을 치게 해야 한단 말이요. 후진이 거란에 밀리게 되면 다음차례는 우리 고려요. 우리가 거란과 싸워야 하는거지. 우리가 거란과 싸우지 않으려면 후진이 거란을 눌러놓게 도와주어야 하오.》

《실로 지당한 말씀이시오이다.》

《그런데 속세로 들어가겠다는거요? 할일이 없어서 그런 생각을 하시오?》

《페하, 인걸은 어느 시대나 나는것이오이다. 다음대에도 고려를 받드는 충신들은 계속 나질것이니 우린 안심하여도 되오이다.》

《딴은 그렇소. 후대들을 믿어야지, 믿어야 하고말고. 참, 내 언제부터 묻고자 하던건데… 후대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요, 도사의 부탁도 있고 해서 내가 도사의 가정사에는 참녜를 안해왔소만 그대에겐 아들도 있다 들었는데 이름이 지은이라 했던가? 그가 유금필대광을 도와 말갈녀진인들을 군사로 일으켜오는데 한몫 단단히 한 인재라 하더군. 지금은 골암진이북땅을 정리하느라 수고가 많다고 들었소만… 이제는 그를 조정에 들여옵시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말도 있거니와 그를 데려다 조정일을 시켜봄이 좋을듯 한데… 어떠시오?》

《아니, 황공하오나 그건 아니되오이다.》

그 순간에 왕유의 마음속에는 그래볼가 하는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단호히 그어버렸다.

《페하, 조정의 인물은 도의나 인정으로 천거하는 페단이 없어야 하리라 신은 생각하나이다. 자식은 겉을 낳지 속을 낳는것이 아니옵고 임금을 보좌하는 지극히 중대한 일을 충심과 함께 실력을 기본으로 하지 않고 중신들의 자손은 조정의 벼슬까지 세습하게 할수 있다는 여지를 주면서 인사기준을 흐트리게 하는 그런 불충불의한짓을 소신은 바라지 않나이다.》

《조정의 인물이 되겠는지 가려보기 위해서도 데려오는게 좋을듯 하오만… 그대는 중신의 자손은 관직까지 세습의 특혜를 받을수 있다는 여지를 주지 말자는 뜻이오니… 그 마음을 알겠소. 왕유공의 대쪽같은 그 마음을 누가 꺾으리오.》

《페하, 소신이 또 제 말만 말이라고 우긴것 같소이다.》

《아니… 아니요. 그대의 가문이라고 달리 될리야 없지. 오늘은 내 물러서오만 언제든 그대의 자손들은 고려조정의 기틀역할을 할것이요.》

(왕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버지의 뒤배경으로 조정에 들어왔다는 뒤소리를 우려하는 왕유가 왕건의 제의를 뿌리쳐 왕유의 아들은 조정에 들어오지 못하였지만 그의 손자 왕자지는 조정에 들어와 14대(숙종), 15대(예종)를 거치며 공부, 리부상서에 추밀원사, 평장사로 고려의 부흥에 이바지하여 충신의 반렬에 기록되였다.)

《자 도사, 그런 의미에서 우리 고려조정의 부흥을 바라며 한잔 합시다.》

《황공하옵니다, 페하!》

왕유는 왕건과 오랜만에 술자리를 같이했다.

하지만 이것은 왕건과의 마지막술자리였다.

얼마후에 왕유는 왕건에게 왕규를 신칙해야 하리라는 조언을 올렸다가 또다시 그의 노여움을 샀다.

말동무나 하자고 왕유를 불러놓고 처음엔 오손도손 이야기를 뗀것이 추궁으로 넘어가고 왕유를 다불리는것으로 끝난 그 일로 말하면 달포전에 왕규가 왕건의 령을 받고 천안과 보은일대를 누비며 그곳 고을두령들을 다불러대여 도기가마터와 자기가마터를 확장하게 하고 닥나무림지를 확장하게 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였다.

왕규는 천안에 가서 그 주변의 가마터들을 확장하게 하고 고을두령들이 끼고있는 도기와 자기를 굽는 장인들을 모조리 끌어내여 조정의 주관하에 일하게 만들어놓았다. 그곳 가마터들과 장인들을 조정의 물장성에서 직접 관할하도록 해놓은것이였다. 보은에 가서는 그곳 고을에서 농가들에 가둑누에를 치라고 나누어준 림지들을 모조리 닥나무를 심도록 해놓고 올라왔다.

도자기를 만드는 일과 종이를 만드는 일을 조정에서 직접 주관하여 기술을 높이자는 목적에서 여러 대신들이 지역을 할당받고 내려가 한일이였다.

그 일을 왕규가 특별히 잘하였으므로 술을 내려 치하를 좀 한것인데 무슨 뒤소리가 그리 랑자한가 하는 노여움에서였다.

《왕규대광이 하는 일마다 씨원한게 대견해서 내 좀 불러들여 술자리를 본것인데 그대는 그게 무엇이 잘못되였다 하는것이요?》

왕유는 임금의 일상사에 흠이 있다 생각되면 숨기지 말고 고해올리기로 되여있는 왕건과의 약조를 지켜 왕규의 일처리에 반발하는 현지고을두령들의 항소문에 기초하여 조언을 올린것이 추궁의 대상이 되고있는데 대해 여간 불쾌하지 않았으나 잠자코 듣기만 하였다. 하지만 왕유는 왕건이 왕규를 덮어놓고 두둔하는데는 참을수가 없었다.

《조정에서 도자기와 종이 만드는 일을 직접 걷어쥐고 끌어올리자는 의도로 조처한 일을 제가 왜 그르다 하겠소이까? 그렇지만 백주나 우봉 그리고 부여와 아산, 경주와 가야에 내려갔던 대신들도 일처리는 잘하고 올라왔는데 유독 왕규대광만 술을 내려 치하하셨으니 페하께서 편애하신다 생각할수 있지 않겠소이까?》

《왕규대광이 내려갔던 곳은 이전의 후백제땅이 아닌가. 고분고분 응해나오지 않는 곳을 다스리고 왔으니 그 수고를 생각한것이요. 어명을 실행하였으면 응당히 할일을 한것인데 그렇게 모조리 빼놓지 않고 술을 내리지 않았다 하여 상받은 사람을 몰아준단 말이요?》

《페하, 요는 왕규대광 본인의 처신에 있소이다. 가마터장인들을 준비할 여유도 주지 않고 마구다지로 끌어다놓았으니 난사가 아니오이까. 일가족들이 한지에 풀막을 치고 떨고있는 판이 되였으니 그들의 원성을 어찌 사지 않을수 있겠소이까. 그곳 관가를 발동해서라도 구들장을 깐 초가마가리쯤은 지어놓게 하고 이주를 시켜야 할것이오만 왕규대광은 페하의 어명이라 내흔들면서 무작정 집없는 거지로 만들어놓아 결국은 페하께 원한을 사게 하였소이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오만 왕규대광은 그 전해에도 차령산너머 목천일대의 가죽쟁이들을 무지막지하게 내몰아 모자라는 우마피대신으로 집돼지가죽은 물론 산에서 메돼지와 노루까지 잡아 가죽을 바치게 하여 그들이 반란을 일으키게까지 하지 않았소이까. 페하께서 그곳 관리들을 노루 장자, 돼지 돈자, 소 우자 성을 주는 벌을 내리시여 위압을 해서야 그들을 눌러놓을수 있었은즉 이게 다 페하의 권위를 흐리는 일이 아니고 무어란 말이오니까. 코코에 페하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이 일을 그냥 지나칠수가 있겠소이까, 페하!》

《되였소. 가급적으로 빠른 시일안에 일이 되도록 하려니까 더러 완력을 쓴것인데 그다지 몰아붙일거야 있소? 그 사람이 심보가 얄팍하지 않아 그러지 웬간한 사람같으면 그 입심에 주눅이 들어 얼굴도 들지 못하겠소.》

《소신은 왕규대광이 페하의 가시아버지라는 턱을 내걸고 몸가짐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것이 바르게 뵈지 않아 그러는것이오이다. 페하와 인척관계이면 매사에 남보다 더 왼심을 쓰는게 바른 처사가 아니겠소이까. 그 사람은 주눅이 좀 들게 해야 하오이다.》

《그대의 소고집엔 정말이지 내 손들었소. 나이가 들면 잔소리가 많아진다 해서 무슨 불경소린가 하고 흘려들어왔더니만 오늘 보니 옛말 그른데 없다고 그대가 꼭 그 짝이요.》

왕건은 등을 돌리며 목을 외로 꼬았다.

《소신이 또 페하를 노엽혔나보오이다. 죄송하오이다.》

《그러지 않으면 왕유요? 그쯤하였으면 그만 돌아가보오.》

왕건은 피곤한 기색을 보이며 두눈을 감아버렸다.

(이쯤 하여두자. 페하의 눈이 멀지 않았으되 생각되시는바가 있겠지.)

왕유는 조심조심 뒤걸음으로 내전을 나왔다.

 

련 재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1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2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3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4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5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6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7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8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9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10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11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12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13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14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15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16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17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18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19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20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21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22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23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24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25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26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27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28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29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30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31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32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33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34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35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36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37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38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39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40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41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42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43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44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45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46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47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48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49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50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52회)
[장편사화] 사라진 도사 (제53회)
되돌이
감 상 글 쓰 기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를 하려면 여기를 눌러주십시오
Copyright © 2003 - 2020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