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 회)

제 2 편

 

《임금은 병에 걸릴 때마다 반드시 설경성에게서 치료를
받았으므로 이로부터 더욱 유명하게 되였다.》

(《고려사》권 제122렬전 제35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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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언 17년이란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 임오년(1282)의 새봄이 찾아들었다.

다도해를 끼고있는 전라도 무안고을의 대굴포에서 닻을 올린 배에는 설경성이 타고있었다.

배에 오르고보니 이번 바다길이 무사할수 있겠다는 신심이 들었다.

소문에 탐라로 가는 바다길이 하도 사나와 십중팔구는 풍랑에 배가 잘못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탐라에 가는 사람들은 모두 라주 금성산이나 광주의 무등산에서 바다길에 무사하길 비는 제사를 지낸다는것이다.

그게 다 허황한 미신임을 잘 아는 설경성은 거기에 가지 않았다.

있지도 않는 귀신에게 빈다고 해서 풍랑이 일지 않겠는가. 풍랑은 귀신이 불러들이는것이 아니라 천기조화의탓인데…

배에 오르니 배군들이 집비둘기를 기르고있었다.

길손들의 말이 배군들이 집비둘기를 기르는것은 배가 물귀신이 되였을 때 그 불상사를 집에 전하기 위해서라는데 도사공에게 알아보니 헛소문이였다.

배군들은 수시로 선주들에게 배의 형편을 알려야 하기때문에 비둘기를 기르고있었다.

이번 행차로는 세척의 큰 배로 무어졌는데 모두가 수군에서 쓰이는 대형병선과 꼭같은것들이였다.

아름드리 통나무를 통채로 구부려서 배밑창에 허리를 이루도록 룡골을 댄 이런 배는 오로지 고려의 배들에서만 볼수 있었다.

이런 배라야 풍랑에 견딜수 있었다.

폭이 열보를 넘는 배에는 다락까지 있어 배군들이 살아가는데 편리했다.

흥그러운 기분속에 설경성은 멀어지는 대굴포를 바라보았다.

인차 찾아가려 했던 탐라행이 강산이 변할 때까지 늦잡게 될줄은 정녕 몰랐다.

탐라행이 늦어지게 된것은 문둥병을 고치는 비법을 쉽게 터득할수가 없었기때문이였다.

문둥병의 신통한 치료비방은 의서들에서도 찾아낼수 없었고 의원들에게서도 배울수 없었다.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며 문둥병에 걸렸던 사람들을 만나보는 과정에 그 병을 다스리는 비방을 깨달을수 있었고 그 비방을 써보며 효험을 밝혀내고보니 어느새 여러해가 흘러가버렸다.

그리고 별의별 병에 걸린 사람들이 날마다 옷자락을 부여잡으니 문둥병만을 생각할수 없었던것이다.

그외에도 겹겹이 늘어진 거미줄마냥 앞을 막아나서는 일들이 너무도 많았다.

설경성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그었다.

덕손이 그놈을 살려내기가 왜 그리도 힘들었는지…

겪어보니 위적은 아무리 시초라고 해도 병자를 살려내기가 대단히 힘겨웠다.

약비방도 우월했고 여기에 음식료법에 안마료법까지 솜씨있게 배합했건만 병자는 낫기는커녕 병이 심해져갔다.

도성의 많은 사람들이 위적을 고치겠다고 접어든 설경성을 지켜보았다.

병자가 바깥출입을 못하게 되니 설경성을 헐뜯는 비난이 비발치듯 하였다.

민방을 비롯한 적지 않은 의원들이 하늘도 어쩌지 못하는 적을 고치겠다는것은 죽은 사람을 살린다는것처럼 어리석다고 비웃어댔다.

그런가 하면 민심을 모으고있는 그때문에 설경성을 싫어하는 강윤소는 병자한테서까지 돈을 빨아먹는 악독한자가 설가라고 욕질했다.

이에 분격한 홍자번은 그따위 의술을 싹 집어치우고 벼슬길에 나서는것이 어떤가고 종주먹을 들이댔다.

세찬 바람질에 구부러들지 않는 나무 없다고 그런 뒤소리와 홍자번의 충동에 의술을 그만두자고 생각했던것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때마다 식솔들과 리승휴의 절절한 충고가 설경성을 버티여준것이였다.

강심을 먹은 설경성은 인삼을 몇곱으로 늘이는 한편 엄나무나 담장덩굴처럼 항간에서 쓰는 약재들까지 약처방에 넣어주었고 그 집에 가서 살다싶이 하면서 병구완을 하였다.

지극한 정성을 기울여서인지 한해만에 기적이 일어나 병자가 병을 털고 일어섰다.

그로써 명의라는 명성을 얻은 설경성의 집으로 문턱이 닳도록 병자들이 찾아왔다.

그들에게 발목을 묶이우고보니 탐라행이 늦어질수밖에 없었다.

탐라행이 늦어진 대신 끝없는 치료속에 의술을 련마한 설경성의 재주는 이전에는 생각할수 없었던 신비한 경지에 올라설수 있었다.

그런데도 배움의 갈망이 불같은 설경성은 자신을 의술의 문턱에나 들어선 초학도에 비기였다.

설경성은 결코 저 하나의 의술을 높이는데 머무르지 않았다.

그동안 그가 키운 제자들이 벌써 은을 내고있었다.

운두골에서 다진 언약대로 3년간 서북면을 돌아다니며 항간의 약비방들을 가득 모아들인 력동이가 색시까지 척 달고 도성에 찾아왔을 때의 심정이란 오랜 세월 헤여져있던 친동생을 만난 심정이였다.

설경성은 그때까지 정히 간직해두었던 곰열과 록용을 팔아 력동이에게 집도 사주고 의과에도 급제시킨 다음에는 혜민국의 의원으로 넣어주었다.

혜민국은 병든 백성들을 의술로 구제하는 일을 맡은 관청이였다.

그다음으로 받아들인 제자로는 서경에서 집에 돌아온 그해 의술을 배워달라고 찾아온 조석견이였다.

그때는 겨우 관례를 한 애젊은이 조석견이 오늘은 력동이처럼 여러자식을 거느린 아버지가 되였다.

처남인 김석이도 곁에 데려다 의원으로 키웠다.

설경성은 제자들에게 의술을 배워주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들도 제자들을 받아 키우게 하였고 병치료에서 나서는 어려운 문제들을 맡겨주고 제힘으로 풀어내도록 떠밀어주고있었다.

그러니 어찌 제자들의 수준이 날로 높아지지 않겠는가.

그 바쁜 속에서 개경환도라는 사변이 일어났다.

경오년(1270)에 강도에 살던 백성들도 개경으로 옮겨가라는 나라의 조치에 따라 새 도읍에 자리를 잡자고 하니 여간 베차지 않았다.

무려 수만호나 되는 사람들이 단꺼번에 개경으로 터전을 옮기는 바람에 집값이 천정부지로 뛰여올랐다.

그 복새통에서 제자들의 집까지 마련해주느라 고생이 말이 아니였다.

그사이에 태여난 아들 문우도 벌써 열살을 넘겼다.

그 기간에 참으로 많은것이 변했다.

고려에서는 옛 서울로 도읍을 옮기게 한 임금이 몇해후 55살로 생을 마치였다.

강포한 몽골과 맞서 싸우던 가장 어렵던 동란의 시기에 태여나 조정을 이끌어온 임금이였다.

그래서 조정에서도 몽골을 견제하고 나라를 보존하는데서 으뜸가는 업적을 남긴 임금이라는 뜻에서 원종이라는 시호를 올렸을것이라고 설경성은 생각했다.

원종을 이어 태자가 25대임금으로 등극하였으니 후날에 그의 시호는 경효대왕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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